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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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20년 씩 나눠서 본다면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겠다.  태어나 성년이 되는 20년까지는 내 마음이 아닌, 타인의 지도와 의지에 맡긴채로, 나머지 20년 장년 기간은 성숙과 안정의 단계로, 마흔에서 예순 까지는 인생의 결실을 맺는 시기로 말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논하지만 20년이란 시간은 인생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다.  그 시간을 온전히 감옥살이로 보낸 사람이 작년 1월 15일 타계한 故 신영복 선생이다.  요즘엔 살인범도 정상이 참작되면 집행유예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만 20년 20일을 꼬박 징역살이로 보낸 그는 어떤 죄명 때문이었나?  박정희 독재권력이 만용을 부린 1968년, 통일혁명당 용공사건에서 반국가 단체를 조직하고, 참여한 혐의였다.  그것으로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결국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육사교관으로 군인신분이었던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사형이 확정된다면, 총살형이 집행될 예정이었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수감동료가 총살형에 처해진 것을 소문으로 듣기도 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그에게 무기형으로의 감형은 새롭게 삶을 선물받은 것과 같았다.  선물이란 말이 모순되긴 하지만, 출소 후 20년 고통스런 징역살이를 `나의 대학시절'로 부르는 것을 주저치 않았을 만큼, 이 시간은 인간 신영복이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긴 여정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학자였고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잡범들과 의식주를 함께 나눈 20년은 책과 사색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깨달음과 가르침을 선물로 되돌려줬다.


지천명의 나이에 감옥을 빠져나온 그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다시 20년이 넘는 시간 자신이 겪고 배우고 깨달은 것을 가르친 후,  굴곡진 인생을 마감했다.  언제나 정갈한 언어와 다감한 표정으로 강단에 섰고, 책을 엮어냈던 그는 여느 지식인과 다를 바 없는 겉모습을 보여줬지만, 그 내면세계와 가르침은 사뭇 다른 면이 있었다.   앎은 두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경험과 지식이다.  경험은 지식이 체화된 형태며,  지식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래서 그것은 정확하다.  지식은 피상적이다.  책과 언어를 거쳐 흡수된 지식은 반듯하고 정연할 수 있지만, 지식이 지식을 배반하고 본질이 사라지고 껍질만 남을 수 있다.  세상 모든 지식이 대개 이같은 형태를 갖고 있으며, 지식인이 때로 안과 겉의 차이로 비난받는 이유다.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야 서서히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때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죽의 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발견이었다. 사회 속 다양한 죄명을 걷어낸 이후, 그 죄명과는 한 점 상관도 없는 속사람에 대한 깨달음이다.  신영복의 언설을 통해, 우리 사회 지식인을 되돌아보고 지식의 의미를 반성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잡범들을 통해 인간을 알고 배울 수밖에 없었던 그의 20년 감옥생활의 다채로운 경험과 사색 때문이었다.  신영복의 말과 언어에선 지식인의 나이브함이 아닌 고통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양심'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한 인간이 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해, 새벽녘에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아야 했던 한 재소자는 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물을 먹는다.  그는 물 탄 피를 팔았던 것을 회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순진한 생각으로 물을 더 먹는다고 해서 피가 묽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양심'을 말하고 가르쳐야 할 때면 어김없이 그 재소자의 진지한 표정에서 양심을 읽는다고 썼다.  `지식'과 `독서'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한 노인이 있다.  감옥 안 어느 지루한 일요일, 온종일 수필 한 편을 읽고 난 노인이 내뱉듯 소회를 말한다. " 자기 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다는 뭐 그런 걸 썼어"  신영복은 화려한 단어, 유려한 문장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그의 통찰은 무식에서 온 것이지만, 무식이 날카로운 지성의 변증법이 되어 자신의 지식을 질타하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대전의 창녀촌 중동의 한 창녀는 별명이 `노랑머리'였다. 어떤 기둥서방(조폭)도 이 여자의 기를 잡지 못했다.  머리채를 잡혀 골목을 끌려 다녀도, 약을 먹고 유리창을 깨트려 배를 긋고 필 칠갑으로 덤볐다. 그곳 창녀촌에서 유일하게 `자주국방' 체제를 확립한 그런 여자였단다. 신영복은 묻는다.  만약 그 노랑머리에게 중산층 여성의 정숙성을 요구하거나 순결성의 소중함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선의인가 폭력인가. 한 사람이 발 딛고 있는 처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 사람 개인에 대해,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관여하려고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경험은 관계를 통해서, 속사람을 겪어내며 깨달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설익고 자만심 가득한 엘리트 지식인은 관념성을 탈피하며, 인간과 지식에 대한 겸양과 지혜를 배운다.  신영복의 대학시절은 책과 스승이 아닌, 인간과 관계를 통한 커리큘럼이었다.


"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느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가 처한 처지와 그 개인을 함께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관념성을 경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방식에 있어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지요. 학교와 교실 공간에 충만한 관념적 논리가 `나의 대학 시절' 초년에 선명하게 드러나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식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37쪽, 신영복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최고의 인문학은 `소설'이라고 본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철학이나 역사보다 오히려 `소설'이 가진 그 다채로운 이야기와 인간 관계속에서 나는 인문학의 본질인 `사람'을 주시할 수 있었다.  신영복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의 이야기는 한정되면서도,  되풀이 된다.  2년 간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에 몰입 하듯이,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월 20년을 감옥에서 잡범들과 살 부대끼며 살아온 시간들에 관해,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이야기 출처가 감옥이란 것이 다를 뿐, 그것은 인간 사회의 이야기다.  인문학에 능통한 사람, 혹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가 살아온 시절을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감옥 인문학'은 바로 이 지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는 독방의 면벽 명상과 수많은 사연깊은 재소자들과 몸을 섞으며, 신영복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관계론'을 정립시켰다.  우리가 그간 배운 철학은 개인과 존재론에 큰 비중을 뒀다.  자아가 발견된 것이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영복은 감옥속에서 오히려 자아보다 타인을 통해 인간을 알고, 세계와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아의 아픔과 기쁨의 근원이 언제나 관계였으며, 나 자신의 존재성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어느날 위대한 깨우침이 찾아온다. "가장 강한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290쪽)  자기를 이긴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양심론과 나의 고통과 기쁨의 원천이 나의 내면에서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온다,는 통찰은 평이하지만 탁월하다.  신영복은 이 개인의 철학을 국가와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평화와 공존과 소통이라고 썼다.  그것이 남북의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통일을 `統一'이라고 쓰지 않고 `通一'이라고 쓰기도 한다.  평화와 소통은 그것만으로도 통일 과업의 대부분을 담아낼 수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378쪽) 보수 정권 10년만에 남북이 다시 빙하기로 접어든 지금 이 시점에, 평화와 소통과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한 것은 2013년 신문지상에서였다.  타계하기 불과 3년 남짓으로, 신영복의 철학이 응집돼 있다고 풀어도 좋다.  2000년 6월을 기억할 것이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삼페인 잔을 놓고 앉아 남북 평화와 협력방안를 구상 했고, 개성공단에서는 남북의 근로자들이 함께 질좋은 상품을 생산했다. 휴전선에서는 반세기 이상 이어진 상호비방 방송의 전원이 그날 밤 바로 꺼졌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잘못된 길로 들어선걸까.  북핵을 안전하게 막아준다는 사드가 당당하게 배치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진정 평화와 안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가. 


"나는 내가 읽고 생각한 것, 심지어 내가 온 몸으로 겪은 것에서마저도 껍데기만 얻고 있을 뿐이었고 껍데기로 누각을 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메마르고 비정한 연상 세계에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 나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관념적인 연상 세계를 풍부한 구체성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181쪽 


지식인의 관념에 치우친 나약함을 질타하고 관계와 양심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지점에 이르도록 채찍질 했던 그의 가르침은 유고, 속에서도 생동하고 있었다.  부도덕한 권력의 횡포에 젊음을 포획당하고, 만 20년 20일을 국가폭력과 감금의 희생양이 돼 살아온 시간들은 고스란히, 한 지식인을 삶과 앎이 일치하는 경지로 끌어올렸다.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호칭한 징역살이가 결코 낭만적이지는 못했을테지만, 그는 감옥안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책이 아닌 인간과 관계를 통한 배움이었다.  신영복의 유고, 그것은 관념이 배제된 살아 있는 가르침으로 여전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신영복은 자아가 아닌 양심이요, 존재가 아닌 관계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는, 그 반대로 생각해 왔다.  무지를 벗어나는 것, 기만적인 정치세력의 농단을 알아채는 것, 똑똑한 유권자가 되는 것, 우민이 되길 원하는 그들에게 저항하는 시민이 되는 것, 전쟁과 공포로 내모는 일에 맞서 평화와 소통의 가치를 깨닫는 것, 그리고 주장하는 것, 세계의 지도자들이 가끔은 미치광이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받아쓰기 불러주듯 가르치려하는 멍청한 정치인들의 정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우리가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서 국가의 주권자로서 반듯하게 일어 서는 것, 그런 독자로 살겠다고 오늘 신영복의 글을 읽으며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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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3-1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신영복 선생님, 사람과 양심. 읽다가 울컥하고 읽고 반성합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개츠비 2017-03-23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저도 무한 감동을 느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