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체와 속성
- 실체에 대한 정의: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속성은? 속성은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실체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속성이라는 것은 성질이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이기는 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항상 어떤 실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속성(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삼각형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삼각형의 변’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직선’인 것과도 같은. 삼각형도 그 세 직선이 ‘동시에’ ‘집합적’으로 구성되면서 삼각형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고)이다.
- 가령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노란색은 성질인데 노란색이라는 것은 노란색을 띄는 물건을 통해 존재한다. 성질이 깃들어있는 실체, 다른 말로 하면 subject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사실상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면 연장속성의 경우 물리적 우주 전체, 사유속성의 경우 심리적인 우주 전체를 아우른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랑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림. 어떤 사람은 실체-속성의 관계를, 하나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든가 피리로 부는 것,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 실체-속성의 관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속성이라는 것을 마치 하찭은 ‘표현방식’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
- 삼각형 비유가 더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실체가 속성보다 상위개념이 아니라 속성 없이 실체는 있을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있을 수 없다. 속성들이 동시에 있어야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이 하나하나 따로 있으면 안 되듯이. 그게 동시에 세 개가 있어야 삼각형이라는 실체가 되듯이.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속성들이 독립적이니까 분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럴 수 없다.
- 증명방식의 차이: 정리12는 정리6에 의거하고, 정리13의 경우는 정리5에 의거하는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정리12에서는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채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공통된 의견:
- 데카르트 철학의 굉장히 고유한 주장 중 하나가 ”물체는 분할될 수 있다“이다. 더 나아가 ”그냥 분할되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다“고.
- 스피노자도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물체는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원자’에 대한 부정이다. 세상에 원자 같은 것은 없다. 물체의 가장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자라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최소단위에서 분할이 끝날 테니까.
- 만약 원자가 존재한다면 세상에는 ‘진공’이 존재한다. 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간다.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원자들 사이의 간극이 있다는 말인데(원자와 원자 사이에 간극이 없다면, 그건 원자라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간극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 있다는 것이다(정리15 주석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 즉, 스피노자와 데카르트 모두 공통된 의견:
모든 물체는 무한히 분할/ 원자가 없다/ 자연 안에는 진공이 없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중요한 차이점
- 데카르트는 ”신은 물질적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만약에 신(실체)이 물질적이라고 한다면, 신/실체가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다. 유한한 부분들로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 이것은 무한한 신,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어떤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고 주장
- 이 ”물체적 실체“는 연장실체를 의미한다.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말은, 실체가 아니면, 그러니까 실체가 아닌 물체면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불가.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즉,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신’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왜?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간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즉,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 2부 4항
“물체의 본성은 무게나 딱딱함이나 색 등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연장에 있을 뿐이다. :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나 물체 일반의 본성이 딱딱하다거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거나 색을 띠고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이, 넓이, 깊이로 연장되어 있다는 데 있는 것임을 지각하게 된다”
-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과 단절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 연장이 물질에 대한 본성이다. = “물체들은 모두 연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이 당시의 새로운 물리학자들 또는 자연철학자들이 도입한 도록에 1차 성질, 2차 성질 구분이 있는데 “색이나 딱딱함 무게 같은 것은 물체가 갖고 있는 2차 성질이고, 물질이 갖고 있는 1차 성질은 연장이다“라고 이야기. 2차 성질은 물체가 갖고 있는 본연의 무엇이 아니고 우리의 지각에 따라 규정되는 주관적 성질이다.
*** 2부 34항
”이로부터 물질은, 비록 우리가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한정하게 많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스피노자는 분명히 물체는 무한히 분할 가능/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 불가라고 선 그음.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 그래, 이 어구 정말 어마어마한 어구구나.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진다)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어떤 속성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될 수 없으며(정의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정리11에 의해), 만약 신 이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의 어떤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한 속성의 두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리5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실체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증명의 첫 번째 부분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아주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은 유일하다 곧(정의6에 의해) 자연 안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미 정리10의 주석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절대적으로 무한한“ 이라는 말과 ”유 안에서 무한한“의 말을 구분.
* 신은 정의6에 의해 무한한, 세상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고 있음-> 만약 신 외에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 중에 하나로 표현해야함 -> 그런데 정리5에서 하나의 실체는 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 외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정리5에 위배됨 ->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
* 경험적 유일성과 필연적 유일성
경험적 유일성: 원래 여러 개였는데 하나만 남았다(두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어쩌다보니 하나만 남은)
필연적 유일성: 이 유일성은 신이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다. 실체가 갖고 있는 프로프리에타스(특성) - 유일성 무한성 영원성 분할불가능성 자기원인성 (cf: 전지하다 전능하다 자비롭다 지혜롭다 <- 이런 것들은 프로프리에타스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은 인간이 갖는 성질을 신에게 투사한 것으로 ‘상상적 성질’이라고 말함)
* 따름정리2에서도 연장개념,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정리13의 따름정리2와 함께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아주아주 중요한.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안에“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 의미) ,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증명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곧 (정의3에 의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고(정리14에 의해), 그런데 (정의5에 의해) 실체 없이는 양태들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양태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공리1에 의해). 따라서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 범신론(pantheism),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이 아니다
pan: 모든 것. 그리스어 + theos. 범신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신이다“ 라는 말.
-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단 스피노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고, 범신론이란 표현자체가 스피노자 사후 30년이 지나서 나온 말이다.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물이 모두 신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신론이랑은 다른 것이다.
*** 범재내신론(penentheism)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인 만물은 다 신 안에 있다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 또는 ‘범내재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범신론에 비해 이게 정리15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기는 하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말이기는 하지만, 이 학설 자체는 매우 오래된 학설이다. 고대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 신학에 다 나오는 말이고, 사도바울의 표현 중에 “그가 신 안에 있고 신으로 있고 신으로 의해 존재하고(신에 의지하고 있고 신에 근거를 두고 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건 스피노자 정리15와는 다르다. 범내재신론에는 신은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초월적인 관계에 있음.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고, 신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 유물론: 19세기 유명한 맑스주의자 중에 플레하노프(레닌의 철학 스승)가 스피노자를 상당히 좋아했다. 스피노자야말로 막스주의 선구자이자 유물론자였다고 주장함.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이랑도 또 다르다. 막스주의에서는 파생관계이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우열 종속관계가 아니고 동등하고 자율적이다. 스피노자가 연장하는 실체, 즉 연장속성을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유물론자들이 저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스피노자는 사유속성도 똑같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 즉, 정리15는 신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인식하는, 또는 모든 실재가 지니고 있는 실존과 행위 역량, 사유 역량의 근거임을 의미한다. 곧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실존하거나 행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 바깥에,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신이 모든 것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라 신 자체가 그 자연 안에 속해있는 것이다)
*** 스피노자의 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 이 지금, 저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지금의 지금이 있고 과거의 지금이 있고 미래의 지금이 있고 먼 미래의 지금이 있고, 이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세상에 진공과 원자라는 것이 있지 않은 것처럼, 1초 2초, 1분 2분, 하루 이틀,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할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인위적으로 상상적으로 쪼개어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위로 분할이 되고 이런 단위로 합쳐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조금 더 실재적인 것으로 스피노자는 “지속”을 이야기한다. duration. 이것에는 유한한 점도 있지만 무한정할 수도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시간은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어놓은 아주 상상적인 ‘사고상의 구별’ ‘사고상의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 rational being: 이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고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고상 만들어낸 범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고상으로 만들어낸 것. 시간을 포함해서, 유, 종 이런 것들도 rational being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리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 real being: 실재적인 어떤 것.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속”을 여기에 넣는다. 물론 실재적인 것이는 한데, 사물의 본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물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영원성”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칸트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범위나 종류가 다르다. 오히려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피노자 철학을 연결시킨다면, 지속이나 영원성이랑 연결을 시키면 된다.
* 정리15의 긴 주석은
- 연장 속성이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것, 곧 신이 물체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자신의 논증을 진행한다.
- 들뢰즈가 “윤리학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되어있다. 정의 공리 정리 증명으로 이어지는 엄밀한 논증이 있고, 서문 주석 부록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윤리학이 있다. 자기의 적수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는. 때문에 윤리학을 하나로 읽어서는 안 되고 두 개로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런 면모가 너무나 잘 드러나 있는 주석이다. 적수들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 표현도 아주 신랄하고 논쟁적이다.
*** 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신이 인간처럼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념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참된 인식과 아주 먼 주장이라는 점을 긍정-> 신은 물체적이지 않다, 곧 신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여기까지는 스피노자가 보기에도 타당하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의거하여 그들은 연장 실체 자체를 신과 분리시켜, 신이 연장 실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연장실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를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
1. 물체의 분할 가능성에 의거한 논변:
무한하다고 가정된 물체적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눠보자. 이 두 부분이 1) 유한한 경우 2) 무한한 경우로 나뉠 것이다. 1) 하나의 무한자가 두 개의 유한한 부분으로 구성되는 셈인데 이것은 부조리 2) 하나의 무한자가 다른 것보다 두 배가 더 큰 셈인데, 이 무한한 양을 피트 단위로 분할할 때와 인치 단위로 분할할 때에 ‘숫자’가 12배가 차이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AB 직선과 AC 두 개의 직선이 처음에는 규정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직선은 무한하게 연장되니까) 나중에는 그 거리가 규정 불가능하게 벌어지며 규정 가능한 것이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변하는데, 이 세 가지 모두 부조리하다 -> 따라서 물체가 무한하다고 가정할 경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물체는 유한하거나 아니면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2. 신의 지고한 완전성에 의겨한 논변:
신은 지고하게 완전한 존재이기에 아무런 수동성을 가질 수 없는데, 물체가 분할 가능하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어떤 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체가 신의 속성이라면 이 두가지는 부딪힌다. 따라서 물체적 실체는 신에게 속할 수 없다.
*** 스피노자의 반박
”그들이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 모든 부조리한 논거들은 결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눈 화살은 사실은 그들 자신을 향해 날아간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인 이 부조리한 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마치, 원은 사각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상하면서 원은 그것으로부터 원주까지 그어진 모든 직선이 같은 길이를 지니는, 그러한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꼭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물체적 실체(정리8, 정리5, 정리12를 보라)에 대하여, 그것은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이 유한하고 다수이며 분할 가능한 부분들로 합성되어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 물체적 실체로 실체인 한에서는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불가능한데, 그들은 물체적 실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물체”만 생각한다. 유한한 것으로서의 물체. 물체를 실체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양태로만 생각한다.
- 그들의 논리는 “무한한 물체를 규정했을 때 이렇게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온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거들은 “물체적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이 가정자체가 이미 틀렸다. 물체적 실체는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정리12와 정리13의 따름정리에서 보여주었다.
- 그들이 “연장실체는 유한하다”거나 “연장실체는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부조리한 논거들은, 그러니까 무한한 양에 대한 이들의 반박은 모두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로 측정 가능하며, 또한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 자체가 이미 틀렸다.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고 유한한 부분들로 나뉠 수도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1)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될 수 있다 2) 무한한 물체, 무한한 양이라는 것도 부부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유한한 부분들을 합치다보면 무한한 양이 될 수 있다, 같은 것들을 부당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실체인 한에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증명까지 다 했다.
- 그들은 실체적 물체와 양태적 물체를 완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물체가 분할된다, 분할된 물체가 서로 부분으로 구별된다”라고 하면, 이것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물체가 분할된다”고 말하면, 양태적으로 분할되는 것.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도, 구별도 안 된다. 정리11부터 정리13 따름정리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양태인 한에서 분할될 수 있지만 실체인 한에서 분할될 수는 없다. (결국 이것도 ‘유한실체’를 상정했던 데카르트주의자들과 ‘유한실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스피노자의 논박의 연장선상 혹은 불가피한 전제같다. 스피노자 주석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결국 그거잖아. ‘니들이 지금 실체와 양태를 계속 혼동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ㅋㅋㅋ 그러니까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계속 스피노자의 ”실체인 한에서의 물체적 실체“를 계속 컵이나 책상 같은 양태적 물체와 혼동한 상태에서, 저런 두 가지 논거를 들어 물체는 ’유한‘하거나 신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 다시 보는 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답: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선이 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공상한 다음, 선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여러 논거들을 고안해낼 줄 안다. 그리고 정말이지, 물체적 실체가 물체들이나 부분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체가 면들로 합성되고 면들은 선들로 합성되며 마지막으로 선들은 점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리고 이 점은, 명석한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모든 사람, 특히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인정해야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도록 분할될 수 있다면, 다른 부분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쇄를 이루고 있는 동안, 이 부분들 중 하나가 소멸되어사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들이 진공으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들어맞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가 시간을 상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은 마치 점과 같은데 점과 같은 것에서 선으로서의 지속이 어떻게 가능하냐.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들은 진공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물체적 실체도 인정을 해야지.
- 스피노자의 실재적 구별은 속성과 속성 사이의 구별이다. 속성은 자율적이고 다른 것의 간섭이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서로 인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분할될 수 있다면”- real distinction으로 구별되는 것 중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하나에 전혀 영향이 없어야 한다. 즉, 하나가 사라져도 독립적으로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럼 진공이 생기는 것. 그런데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물체적 실체가 분할이 된다면(너희의 가정대로), 그 중 하나가 소멸되면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길 텐데, 그런점에서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리고 그들은 진공을 부정했다) 너희들은 물체적 실체가 분할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야하지 않겠느냐)
***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 스피노자가 이후에 ‘자연철학’에 관해 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염두해 둔 “다른 곳”. 그러나 그는 그것을 쓰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진공에 대해 쓴 ‘다른 곳’들이 있긴 있다. 스피노자 초기저작 <데카르트 철학원리>에서 진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데 그건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을 썼다기보다 데카르트의 관점이 어떻다는 것을 쓴 부분.
- 또 하나는 출판되지 않은, 생전의 편지에서 나온다. 매우 유명한 12번째 편지. 스피노자와 매우 친한 네이으르와의 편지. <무한에 관한 편지>라고 주석가들이 부르는 편지. 이 편지에서 그는 “무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네이으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무한의 문제에 대해 제일 체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시간에 대한 문제, 수에 대한 문제도 나오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편지다.
- 물체와 물체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 정리8의 주석2에서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된다는 것을 상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적 실체가 분할된다, 이것을 바로 부분들이 real distinction하고 있다, 부분들 하나가 완전히 소멸해도 다른 물체가 물체로서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한다, 이럴 때 완전히 소멸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왜 실재로서의 물체가 분할되지 않는데(실제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자꾸 물체를 부분으로 쪼개는가. 이것을 여러 가지 작은 양들로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서 생각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 요약: 스피노자의 논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물체를 실체로 부르면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될 수 없다. 실체가 분할된다고 하면 실체가 다른 실체로 나뉘어진다는 이야기이거나, 그 실체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쪼개진다는 이야기인데 둘 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내가 이미 증명했다. 그러니 실체로서의 물질이 분할된다는 것, 스피노자가 ‘진공’과 관련해서 이야기한 것은, 실체 중에 하나가 사라져도 나머지 실체는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진공’이 생긴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진공이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물체가 분할가능하다. 물론 물체는 분할가능한데, 실체로서 분할가능한게 아니라 양태로서 분할가능하다. 이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성과 변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양태로서이지 실체로서 생성/변용/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체로서 생성되면 그건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건 부조리한 주장이다.
***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보면 그는 실체와 속성 사이에 정확하게 구별을 제시했다. “형상적 구별”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 사이에 “사고상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구별이 안 되는데 분석에 필요상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게 바로 사고상의 구별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속성은 사실 구별이 안 되는 문제다.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점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약간 왜곡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프러프리에타스는 real being이다. rational being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적인 성질이다.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질. 다른 실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물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성질. 본질은 아니고,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이다. 중세철학자들은 사람의 특성을 ‘웃을 수 있는 동물’ ‘털 없는 두 발 동물’ 이렇게도 말했는데, 아무튼 이런 특성은 실제적이다. 신 또는 실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
*** 속성의 주관적개념론/객관적개념론 다시 한 번
- “지성이 지각하는”의 지성을 유한지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속성이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없으니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 즉 신의 본질은 인간의 지성이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불가지론을 전제하게 된다. 즉 신을 초월적 위치에 놓는 것. 그럼 우리가 말하는 신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특성을 전가해버리는 것이 된다.
- 울프슨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 그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중세유대사상과의 속성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 중세유대사상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린다. 연장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사유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속성들이 다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그럼 신의 본질은 심플한 게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유대사상가들은 신의본질을 심플하다고 했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신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투사한 게 맞다, 그게 속성이다라고 이야기함.
- 이런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한 것.
-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