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잇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1-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자연, 우주라고 하는 것의 논리적인 구조. 유일한 실체로 되어있고 그 유일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 정리16부터 시작되는 후반부에서는, 그러면 이 유일한 실체로서의 자연이 만물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자연의 인과구조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1부 후반부에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 정리16에서부터 바로 생산(=“따라 나와야 한다”)에 대한 이야기.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

- 증명: 어떤 사물 어떤 실재가 실재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실재가 포함하고 있는 특성은 더욱 많다. 그리고 신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 각각은 또 무한하니까 ->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2 신은 자신에 의한 원인이지 우연에 의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3 신은 절대적으로 제일원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 작용인 causa efficiens 카우자 에피키엔스 (efficient cause) : 동사로 하면 에피케네. 이 말은 말 그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이라는 뜻이다. , 작용인은 어떤 결과를 산출해내는 원인이라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 신이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해낸 원인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정의 16에서 벌써 원인에 관한 몇 가지 표현들이 나오고 있다. 강의록을 보면.

-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쓰기 전, 초기에 썼던 <소론>에 보면,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에서 상당히 널리 쓰이던 원인개념의 분류법들을 스피노자가 차용을 해서 8개의 원인을 구분하고 있다. 특히 이 작용인이라는 것을 8개의 원인으로 구분해서 제시하고 있다.

- 네덜란드어로 원인개념들이 적혀있는데, <소론>은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것이지만 그 라틴어 원본은 사라지고 1861년에 네덜란드 번역본판이 발견된다. 이것도 스피노자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쯤 지난 후이다. 라틴어 원본은 아직 못 찾았다. 이거 발견하면 큰 돈이 될 텐데 유럽에 가시면 헌책방 이런 데에 이 책이 있나 한 번 찾아보자ㅋㅋㅋ

 

2. 그는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실행하지 자기 바깥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신은 자유원인 free cause이지 자연적 원인이 아니다

자유원인: 이성 or 원리에 합당하기는 하되, 자신에게 외재적인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원인

필연적인 혹은 자연적 원인: 자신 바깥에 있는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는 원인

-> 신은 자유원인이다. 이성에 맞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신이 그 법칙을 만든 것이니까. 신이 그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사물들은 신이 만들어놓은 그 법칙에 종속되니까.

5.

8. 신은 무한하고 부동적인, 그리고 우리가 그가 직접 창조했다고 말하는 실재들의 가까운 원인이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이다.(“떨어져있는 원인” “가까운 원인은 스콜라철학의 용법. 나중에 2부 정리 후반부에 다시 언급된다)

 

- 가까운 원인:

*** 매개 없이 직접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 불과 열의 관계(, 유출적 원인이랑 비슷한 개념)

*** 정리15에서 모든 것은 신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이게 바로 신이 만물의 가까운 원인이라는 뜻이다. 신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 아무 것도 신 없이는 인식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 -> 신이 만물의 원인이다: 어떤 매개도 없이 신이 바로 원인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 저렇게만 이야기하면 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특수한 사건, 작용에 일일이 다 관여한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여기에 조건을 붙인 것이다. 신이 가까운 원인이기는 하되 그런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건에 일일이 다 간섭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에는 매개를 통해서 (매개라는 것은 자연법칙이 되겠다. 물리적인 법칙, 화학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 생리학적 법칙, 심리적 법칙 같은 일반적 법칙, 그보다 조금 더 특수한 법칙을 통해) 신이 원인으로서 작용을 한다. 그러니까 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특수한 실체로부터 떨어져있는 법칙이다.

 

이것들이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썼던 원인에 대한, “작용인에 관한 용어법들의 의미다.

- 이중에서 <에티카>에 살아남은 원인들은 내재적 원인-타동적 원인/ 가까운 원인-떨어져있는 원인/ 자유원인-자연적인 원인 이런 것들. 대신에 유출적 원인 능동적 원인 작용적 원인 부차적 원인 주요원인 등의 번거로운 용어법들은 다 사라진다.

 

*** 정리16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 :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cadere 카데레 : 원래 떨어지다”(fall)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포함되는” “들어오는을 의미.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 모순을 지니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식될 수 있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산된다는 것

인간지성과 무한지성은 다른 것이다. , 저것은 인간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범위가 크다

신은 만물의 작용인이다. 모든 것이 신을 제1로 해서 생산된다.

 

* 정리17 “신은 자신의 본성의 법칙으로부터만 행위하지, 결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강제되지(coactus) 않는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1) 신의 완전한 본성 이외에, 신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신으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 어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름정리2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왜냐하면 신은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정리11 및 정리14의 따름정리에 의해),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위하고(정리17에 의해)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7에 의해)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제약된다 coactus”

이 단어는 1) 제약된다 2) 강제된다 구속된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 신 바깥에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신과 무관한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서 신은 무언가에 제약/강제되지 않는다.

 

* 증명: 신 바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내재적일 수밖에 없다

* 따름정리1과 정리17의 차이: 정리17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강제되지 않는다인데, 따름정리1신 안에서까지 포함한다.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개념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자유원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정리17의 주석, 정리33의 주석에서 나오는 논의를 이해할 때 특히)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이 있다. 일단 자유는 우연이 전제되어야 생길 수 있는가? 이것부터 모르겠음.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에서 자유의 여지가 없다는 비판의 흐름에 동의가 안 된다. 사실 이건 현대인들이 자유에 대해 착각하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법칙은 다 제약이고, 법칙 바깥의 예외, 그러니까 이걸 우연의 여지라고 한다면, 이러한 예외는 자유의 전제처럼 오해하는 방식. 그래서 뒤이어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 재미있는 것은, 정의7에서도 봤고 정리17의 따름정리에서도 봤지만 윤리학 3,4,5부에 가서도 스피노자는 자유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신을 자유원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윤리학 3부에 가면 능동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윤리학 4부에 가면 자유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유로운 인간 자유로운 사랑 이성적인 인간. 5부에 가면 제목 자체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이다. 스피노자가 자연 안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라고 강하게 이야기하니까,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부터 5부까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에는,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자유개념하고 스피노자 철학의 자유개념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그런데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특히 정의7에 나오는 자유는 전혀 그런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어 있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것은 간섭과 장애물이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개념과 나중에 스피노자가 3,4,5부에 가서 인간학적인 의미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차이가 있는데, 그 자유 개념 또한 간섭의 부재로서의 자유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 위험하냐면,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바로 전체주의로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러니까 적극적 자유라는 게 개인의고귀한 윤리적 태도, 윤리적인 어떤 규범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윤리적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가령, 국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목표, 국가가 이것을 달성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할 고귀한 목표다, 이것이야말로 프로레탈리아가 부르주아 독재를 분쇄하고 노동자 농민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고귀한 이상이다라고 해버리면, 이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민중이고 이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거나 이상을 저버린 사람이 된다. , 이렇게 되어버리면 적극적 자유는 사람들을 집단이 설정한 목표로 얽매이게 하는, 강제의 원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 그래서 벌린이 볼 때 스피노자나 루소 같은 사람하고 스탈린하고 그렇게 거리가 먼 게 아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스탈린이 된다는 이야기. 나치즘.

- 그런 이유도 포함해서, 사실 20세기 후반에 특히 영미정치철학에서 PL은 논의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NL, Negative Freedom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 이것을 어떤 식으로 분류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것이 이사야 벌린이나 존 로스를 거치면서 자유주의의 철학적인 원리로 체계화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 반면에 유럽철학 쪽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좀 더 철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들이 꽤 있다

 

- 어쨌든 이런 흐름과 별개로 스피노자가 퍼지티브 리버티의 사상가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특히 벌린이 규정한 의미에서 퍼지티브 사상가인지에 대해서.

- 일단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이 자유개념하고 소극적 자유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스피노자의 자유개념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이것에 주의해야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간섭의 부재로 이해한다면 <에티카>를 읽는 데에 있어 이해 안가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 이렇게 복합적인 자유개념이기에, 따름정리2에서 신만이 자유원인이다라는 이야기를 해놓고 스피노자는 아마 찜찜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까? 그래서 긴 주석을 붙였다. 주석은 자유원인의 뜻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부연할 목적으로 붙였고 상당히 중요한 주석이다.

 

1)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의 적수들이 이해하는 자유원인의 개념: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유개념의 핵심으로 삼는다.

-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신학자 철학자들은,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야하는 것도 중단시킬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이런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고 진정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반박하면서 스피노자는 이런 표현을 쓴다.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고 말한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일어나지 않도록 또는 그에 의해 생산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자유원인이다라고 이해한다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신의 권한에 존재하는 것, 신의 역량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걸 자유원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능력을 갖고 있는 일인데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바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바로 반박한다. 이는 마치 그들이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거나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인데“ -

-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게 삼각형의 본질이고,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사실인데(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들이 쓰는 신은 자유로운 원인이다라는 말은 마치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 이 상태를 자유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 주석에서는 스피노자가 논리적인 범주 안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신학적인 용어법, 성경에 대한 구절들을 가지고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주석에서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기적인 것이고, 중세신학에서 기적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핵심은 자연법칙을 중지시키는 것, 자연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 <신학정치론>에서도 말하지만, 성경을 보면 여호수아가 적과 싸울 때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해를 정지시켜놓았다든가(밤이 되지 않고 낮이 되게 해놓았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다든가, 이런 것들이 바로 기적의 사례다. 이런 기적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적인 인과질서를 중지시키거나 위배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전의 법칙에 따르면 해가 져야하는데 신이 일으키는 기적이 그걸 중지시키는 것이다.

- 신학자들은 신의 전능함의 징표를 바로 저기에서 찾는다. “신은 전능하다라는 말을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등등에서만 그치지 않고, 신의 진짜 전능함을 자연 법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면모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것. 초자연적이고, 신비하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

-스피노자는, 신이 자유원인이라는 걸 잘못 이해하면 바로 저들같은 주장이 나올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연법칙을 건너뛰거나 중지시키거나 위배한다고 해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 자유원인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생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바로 그의 권능 안에 있는 것이라는 구절.

-여기서 선생님이 권능이라고 옮긴 것이 바로 포테스타스의 개념. 포텐시아와 쌍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서 포테스타스는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아니고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이다. 반면에 포텐시아는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작동하는 힘.

- 스피노자가 볼 때 신이 갖고 있는 힘을 포테스타스로 이해한다는 말은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이 선택이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포테스타스가 힘을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신학적인 방식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견해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신의 힘이라는 것은 결코 집행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포테스타스의 힘이 아니라 본성의 필연적인 힘에 따라 실행되는 활동이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다른 것의 제약없이 필연적으로 집행되는 실행되는 활동. ,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은 포텐시아에 입각한 자유개념이다. 포테스타스처럼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런건 인간의 자유고 왕의 자유일 뿐이다. 2부 정리3의 주석을 잠깐 보자

 

*** 요약/정리:

2부 정리3을 같이 읽어보면-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신학권력을 강화하고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고 대중의 의심을 조장한다. 나중에 3부에 가면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아주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자유로 이해하는 것은 가상이고 착각이다. 3부에 가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 포테스타스를 번역하는 문제

- 포텐시아는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대충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는 반면에, 포테스타스는 경우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하는 단어다. 정치철학에서는 주권이나 권력, 권한이 될 때도 있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권능이 좋기도 할 것이고 인간학에서는 능력이라고 번역해야 더 적절한 경우도 있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정립된 것도 최근 30년의 일이다. 들뢰즈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할 필요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더욱 이 구별을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 네그리. 물론 네그리의 구별법은 너무 단순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항상 그런 성향이 좀 있다. 아주 독창적인 발견, 독창적인 개념을 잘 제시하는게 그것들을 너무 단순하게 막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걸 지성의 낙관이라고, 지성의 난관, 의지의 비관, 실제로는 안 되더라도 한 번 된다고 생각해보자ㅋㅋㅋㅋㅋ 자기가 직접 그런다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기고 좋네 지성의 낙관 의지의 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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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먹고 걷고 마시고 먹고 걷고 마시고 시답지않은 걸로 엄청 진지하게 분석하고 토론하고 역시 시답지않은 걸로 더 시답지않은 농담을 하며 배가 끊어져라 웃고 이러면서 놀고 있다. 후쿠오카 첫 날 먹은 것들. 면이 바삭바삭 과자 같은 나가사키 볶음짬뽕풍 라멘과(이거 되게 마음에 들었다ㅋㅋ) 모두가 거침없이 담배를 피워대서 옛날 생각이 물씬 났던 이자카야에서는 후쿠오카 전통주와 하이볼에 말린 홍어 지느러미, 꼬치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어서 거듭 주문해서 먹은 튀긴 두부와 너무나 나 입이야!라고 뭉크적 정체성을 뽐내고 있는 오징어 입을 먹었고 점심에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초밥을 먹었다. 역시 일본에서 먹는 성게알은 너무 맛있어서 계속 우니! 우니! 연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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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지나간 길을 걷는 게 참 좋다. 오늘은 병원에서 긴 검사를 하는 날이어서 여기저기 찔리고 눌리고 핵의학실에서 조영제 맞느라 좀 지쳤는데도. 병원이 회사쪽에 가까운 지하철역A와 한 정거장 먼 B 사이, A에 5분 정도 가까운 어디쯤에 있는데 좀 더 걷고 싶어서, 지하철 안에서 오며가며 읽으려고 갖고 나온 책이 무척 흥미진진한 덕에 좀 더 읽고 싶어서, 당연한 듯 B로 걸어왔다. 이번 검사도 통과했으면 좋겠네. 근데 검사는 싫지만 “오늘 나 핵의학 검사해”라는 말은 장르적으로 좀 마음에 들어서 핵의학 검사 받는 날은 어딘가에 전화하고 싶어진다ㅋㅋ (내 안의 김진명인가....-_-) 그리고 십 몇 분 후에는 목요미스테리북클럽이 있어 두 시간 동안 신나게 추리소설 이야기만 잔뜩 할 예정이고 끝나면 베프와 만나 아마도 맥주를 한 잔 하며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인 그녀를 요 며칠 매일 같이 술 마시게 만들었다는 ‘대박사건’에 대해 들을 것 같다. 진짜 장르적인 하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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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리13의 따름정리를 처음 읽었을 때, 여기에 나오는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이라는 어구가 이렇게까지 커다란, 그리고 전복적인 세계를 포함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7-8 글자에 담겨있는 세계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홉스가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살짝 울컥하기도.

 

역동적이고 내재적 역량을 갖고 있는 자연에게서, 자기 철학의 내적 이유 때문에,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그 다이나믹한 힘을 다 박탈해버리고 평평하고 생기 없고 기계적인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에게서 여러 얼굴들이 겹쳐졌다. 내가 기업에서 MBTI라거나 애니어그램으로 누군가를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 정신분석책이나 심리학책들로 어떤 사람의 몇 가지 점을 건져내서 정신병리학적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과도 연결되고.

 

한때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싶은 누군가’ ‘하찮게 만들고 싶은 누군가’ ‘이해가 안 되는 누군가를 인생에서 마주치면 그 미움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로 찾고 싶어서, 하찮음의 근거를 찾고 싶어서, 이해불가의 불안한 상태를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 이해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싶어서, 이성적으로 보일법한 을 가져다가 누군가를 규정한다. 얘는 잔다르크형이라서 이래’ ‘얘는 경계성인격장애인 것 같아’ ‘얘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에 몇 개나 해당해’ ‘얘는 물고기자리라서 집착이 심해처럼, 인간 자체가 갖고 있을, 한 인간이 한 인간에 대해 다 알 수 없음에도, 원하는 틀대로 맞춰놓고 삐져나오는 부분들을 다 잘라내고 무지의 벽지로 발라버린다.

 

그러고 나면 마음은 편하다. 나는 누군가를 규정함으로서 내가 계산가능하고 컨트롤 가능하고 짐작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리니까 앞으로 거기에 맞춰 상대방의 모든 행동과 말을 소급해서 파악하면 되고, 이렇게 뭔가가 확실한 상태가 애매모호한 상태보다 덜 불안하고 더 당당해질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저렇게 틀 하나를 딱 만들어놓으면 더 이상 머리 쓰지 않아도 되고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감정이 생겨도 깊이 고민해볼 필요없이 저기에 딱 갖다맞춰보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속시원한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이 스피노자 철학보다 훨씬 단순하고 파악하기 쉬운,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진부하고 전근대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일 듯.

 

사실 항상 예외를 생각하고 기회와 여지를 주다가 뒤통수 맞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그런 분석틀에 맞춰 인간을, 자연을 평평하고 기계적이고 1차원적으로 눌러놓으면 안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이렇게 믿고 넘어가기로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틀로 분석해낸 납작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맞는 것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게 바로 아집이고 꼰대니까. ‘예외를 주느라 뒤통수 맞지 않게 조심은 하되(사실 조금 맞더라도) 누군가를 재단한 결과를 진리로 절대 놓지 말 것. 언제든 수정가능한 불확실한 전제라는 걸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데카르트가 자연에게서 힘을 다 빼앗아버리고 난 후 만물의 원인을 설명해야하는 순간이 오니 결국 이라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끌고 와서 신에게 엄청난 힘을 잔뜩 부여해야만 했듯이, 함부로 타자(인간과 사물을 다 포함해서)의 힘을 관념적으로 빼앗아버리면 결국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리한 어떤 것에 잔뜩 힘을 주는 우를 범하기도 쉽다. 데카르트처럼 진짜 일 수도 있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일 수도 있고, 야매 정신병리학적 지식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무서운 일이다. 데카르트가 물체들을 전부 연장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인간이란- 이렇다로 환원시킬 소스들이 세상에 널려있다는 것은 다행이자 불행인지도.

 

본인의 철학적 필요에 의해 무려 자연의 다이나믹한 힘을 다 박탈해버리고 생기 없고 기계적인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를 넘어서 자연에게 다시 내재적 역량과 힘을 돌려준 스피노자에게, 게다가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논리 그대로를 가져다가 바로 그 의 이름으로 신이 갖고 있는 초월적 역량을 박탈해버리는 스피노자에게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게다가 바로 데카르트가 좋아했던 기하학적 방식으로 우아하게. 홉스가 놀랄 만큼, 당대의 그 어느 철학자들도 감히 주장하지 못했던 것을 대담하고 용기 있게.

 

정리13어떤 물체적 실체도는 스피노자의 이런 뜻이 다 담겨있는 말이다. “물체적 실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한다고 선언하듯이. 신은 물체적/물질적 실체라고, 물질적/물체적인 것이 신이 가진 하나의 속성이라고. 그리고 이 말이 철학적으로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고 거울처럼 뒤집히며 기존의 역학관계를 뒤집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기하학적이면서 가장 다이나믹했다.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 너희들이 늘 생각해왔던 그 신적인 것들이 바로 물질적인 자연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다이나믹하고 내재적인 역량을 갖고 있다.”

 

그런 와중에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라고 덧붙이신 것이 좋았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 24

물체의 본성은 무게나 딱딱함이나 색 등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연장에 있을 뿐이다. :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나 물체 일반의 본성이 딱딱하다거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거나 색을 띠고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이, 넓이, 깊이로 연장되어 있다는 데 있는 것임을 지각하게 된다

-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과 단절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 연장이 물질에 대한 본성이다. = “물체들은 모두 연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234

이로부터 물질은, 비록 우리가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한정하게 많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스피노자는 분명히 물체는 무한히 분할 가능/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 불가라고 선 그음. (정리15의 주석이 바로 그 내용이다)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그래, 이 어구 정말 어마어마한 어구구나.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진다)

 

 

2. 드디어 나왔다. 정리14. 지금까지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들을 조심스레 죽 가지고 왔었는데, 드디어 여기서 실체는 하나이고, 그것은 신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 거대한 정리14에 비해 그 증명은 너무 깔끔해서 더 압도적.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어떤 속성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될 수 없으며(정의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정리11에 의해), 만약 신 이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의 어떤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한 속성의 두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리5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실체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증명의 첫 번째 부분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Q.E.D.

* 신은 정의6에 의해 무한한, 세상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고 있음-> 만약 신 외에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 중에 하나로 표현해야함 -> 그런데 정리5에서 하나의 실체는 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 외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정리5에 위배됨 ->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

 

 

3. 정리10 이후에 가장 시간을 많이 쓴 게 정리15. 이해하고 나니 정리10보다 훨씬 간단한데 주석에 데카르트주의자들 논리까지 섞여있으니 잠시 헷갈려서 잠시 헤맸다. 그렇게 잠시 헤매느라 생각보다 그 장에 오래 머물러 있던 차에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이 문장을 보고는 모든 게 다 하나의 폴더에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1)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체적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라는 명징한 비판에서 시작해서-> 2)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 그럼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어쩐지 SF적인 표현을 거쳐서(존재가 소멸하고 남는 자리가 진공이라는 것, 어쩐지 서늘하게 낭만적이지 않나) -> 그러니까 물체를 물체인 한에서 보면(물체를 양태적으로 보면)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물체를 실체인 한에서 보면(물체를 실체적으로 보면),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실체로서 소멸된다는 것은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고, 이건 불가능하다에 가닿는.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어떤 철학적 위안. 그건 이를테면 나의 소멸, 나의 죽음이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위안이 아니다. 양태로서의 나는 사라지지만, 실체로서의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실체로서의 나는 이 세상에 진공하나 틈새하나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 세상에서의 나의 소멸은 그저 목숨이 다른 상태로 변용되고마는 정도라는 것이 주는 위안이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스피노자가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확고하고(다소 못되게ㅋㅋ) 못을 땅땅 박아버리니까 앞에서 받았던 철학적, 혹은 존재론적 위안에 고기 백 근 정도의 무게가 확 실히면서 더 좋아졌어ㅋㅋ

 

4. 그동안 스피노자 이야기가 나오면 범신론을 바로 꺼내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서 오랫동안 해왔던 그에 대한 오해를 명쾌하게 풀었다. 범재내신론과도 분명하게 노선이 다르다는 걸 알겠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만물을 피조물로 생각하는 것과, 만물에 내재되어 있고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은 정말 커다란 차이. 왜 오해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인데 철학 연구자들 중에도 왜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안에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 의미) ,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증명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정의3에 의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고(정리14에 의해), 그런데 (정의5에 의해) 실체 없이는 양태들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양태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공리1에 의해). 따라서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 범신론(pantheism),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이 아니다

pan: 모든 것. 그리스어 + theos. 범신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말.

-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단 스피노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고, 범신론이란 표현자체가 스피노자 사후 30년이 지나서 나온 말이다.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물이 모두 신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신론이랑은 다른 것이다.

*** 범재내신론(penentheism)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인 만물은 다 신 안에 있다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또는 범내재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범신론에 비해 이게 정리15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기는 하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말이기는 하지만, 이 학설 자체는 매우 오래된 학설이다. 고대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 신학에 다 나오는 말이고, 사도바울의 표현 중에 그가 신 안에 있고 신으로 있고 신으로 의해 존재하고(신에 의지하고 있고 신에 근거를 두고 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건 스피노자 정리15와는 다르다. 범내재신론에는 신은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초월적인 관계에 있음.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고, 신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 , 정리15는 신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인식하는, 또는 모든 실재가 지니고 있는 실존과 행위 역량, 사유 역량의 근거임을 의미한다. 곧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실존하거나 행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 바깥에,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신이 모든 것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라 신 자체가 그 자연 안에 속해있는 것이다)

 

그들이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 모든 부조리한 논거들은 결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눈 화살은 사실은 그들 자신을 향해 날아간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인 이 부조리한 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마치, 원은 사각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상하면서 원은 그것으로부터 원주까지 그어진 모든 직선이 같은 길이를 지니는, 그러한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꼭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물체적 실체(정리8, 정리5, 정리12를 보라)에 대하여, 그것은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이 유한하고 다수이며 분할 가능한 부분들로 합성되어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 물체적 실체로 실체인 한에서는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불가능한데, 그들은 물체적 실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물체만 생각한다. 유한한 것으로서의 물체. 물체를 실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양태로만 생각한다.

 

- (스피노자식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럼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기는 것.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 물론 물체는 분할가능한데, 실체로서 분할가능한게 아니라 양태로서 분할가능하다. 이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성과 변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양태로서이지 실체로서 생성/변용/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체로서 생성되면 그건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되면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건 부조리한 주장이다.

- 물체와 물체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5. 강의 중간쯤에 스피노자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대상인지에 대해 듣다가 rational being, real being의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고, 평소에 이러이러한 상태를 구분해주는 뚜렷한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알게 된 셈이어서 반가운 개념이기도 했는데, 한 시간쯤 후 강의 막바지에 던져진,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에 대해 스피노자가 뭐라고 말했을까요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의 답으로 이 개념이 다시 등장해서 약간 신기할 정도로 반가웠다. 실체와 속성 사이에는 사고상의 구별이 있구나. 이 개념 하나만으로도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의 관계에 대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업 시작 때 들었던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 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와 같이 묶어서.

 

*** 스피노자의 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 이 지금, 저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지금의 지금이 있고 과거의 지금이 있고 미래의 지금이 있고 먼 미래의 지금이 있고, 이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세상에 진공과 원자라는 것이 있지 않은 것처럼, 12, 12, 하루 이틀,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할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인위적으로 상상적으로 쪼개어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위로 분할이 되고 이런 단위로 합쳐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조금 더 실재적인 것으로 스피노자는 지속을 이야기한다. duration. 이것에는 유한한 점도 있지만 무한정할 수도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시간은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어놓은 아주 상상적인 사고상의 구별’ ‘사고상의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 rational being: 이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고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고상 만들어낸 범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고상으로 만들어낸 것. 시간을 포함해서, , 종 이런 것들도 rational being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리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 real being: 실재적인 어떤 것.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속을 여기에 넣는다. 물론 실재적인 것이는 한데, 사물의 본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물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영원성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칸트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범위나 종류가 다르다. 오히려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피노자 철학을 연결시킨다면, 지속이나 영원성이랑 연결을 시키면 된다.

 

***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보면 그는 실체와 속성 사이에 정확하게 구별을 제시했다. “형상적 구별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 사이에 사고상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구별이 안 되는데 분석에 필요상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게 바로 사고상의 구별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속성은 사실 구별이 안 되는 문제다.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점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약간 왜곡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실체와 속성

 

- 실체에 대한 정의: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속성은? 속성은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실체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속성이라는 것은 성질이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이기는 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항상 어떤 실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속성(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삼각형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삼각형의 변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직선인 것과도 같은. 삼각형도 그 세 직선이 동시에’ ‘집합적으로 구성되면서 삼각형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고)이다.

- 가령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노란색은 성질인데 노란색이라는 것은 노란색을 띄는 물건을 통해 존재한다. 성질이 깃들어있는 실체, 다른 말로 하면 subject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사실상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면 연장속성의 경우 물리적 우주 전체, 사유속성의 경우 심리적인 우주 전체를 아우른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랑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림. 어떤 사람은 실체-속성의 관계를, 하나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든가 피리로 부는 것,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 실체-속성의 관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속성이라는 것을 마치 하찮은 표현방식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

- 삼각형 비유가 더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실체가 속성보다 상위개념이 아니라 속성 없이 실체는 있을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있을 수 없다. 속성들이 동시에 있어야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이 하나하나 따로 있으면 안 되듯이. 그게 동시에 세 개가 있어야 삼각형이라는 실체가 되듯이.

 

6. 이날 강의에서도 울프슨이 또 등장했다ㅋㅋ 그만큼 주관적개념론의 대표적인 사람인데다가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라 수업시간에도 계속 지성이 지각하는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일 것이다. 오늘은 울프슨에 대한 이야기 중 새로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중세유대사상에 따르면 신은 초월적이고“(...까지는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듣고 있었는데)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는 말을 듣고 가방 챙기다가 잠시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서 심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특히 신이 입은 옷도 아니고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단어로 심플이 등장하다니, 재미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어떤 의미로 하는 이야기인지 알겠는데(그 뒤에 이어지는 귀추과정까지 들으면 더욱 알겠는데) 어쩐지 맥락 싹 빼고 저 문장 하나만 딱 건져 올려 여기저기 드립성 비유로 써먹고 싶은 짓궂은 마음도 들고ㅋㅋ 저 심플한 본성“ ”심플한 본질이 결과적으로 객관적해석론을 가로막고 주관적해석론에 무게를 실어준다는 것도 재밌다.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신은 더 이상 단순한 게 아닌게 되어버리잖아? 이걸 (약간 왜곡해서 짓궂게 해석하면) 무려 저 심플함을 보존하기 위해 객관적 해석론을 포기해버림! 어쩐지 너무나 한남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객관인 척 하기 위해 지 마음대로 타자를 심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가 더 영악해ㅋㅋ) 아무튼 울프슨의 오늘 이야기 재미있었다. 하지만 재미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작은 울림이 있었는데, 이러한 울프슨적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거쳐 이어진 다음 말이 마음을 건드렸다.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스피노자가 지성에 관해 우리에게 던져주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 중에 하나. 내가 앞으로 스피노자를, 혹은 다른 많은 것들을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 살아가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는.

 

- 울프슨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 그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중세유대사상과의 속성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 중세유대사상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린다. 연장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사유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속성들이 다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그럼 신의 본질은 심플한 게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유대사상가들은 신의본질을 심플하다고 했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신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투사한 게 맞다, 그게 속성이다라고 이야기함.

- 이런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한 것.

-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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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와 속성

 

- 실체에 대한 정의: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속성은? 속성은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실체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속성이라는 것은 성질이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이기는 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항상 어떤 실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속성(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삼각형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삼각형의 변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직선인 것과도 같은. 삼각형도 그 세 직선이 동시에’ ‘집합적으로 구성되면서 삼각형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고)이다.

- 가령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노란색은 성질인데 노란색이라는 것은 노란색을 띄는 물건을 통해 존재한다. 성질이 깃들어있는 실체, 다른 말로 하면 subject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사실상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면 연장속성의 경우 물리적 우주 전체, 사유속성의 경우 심리적인 우주 전체를 아우른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랑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림. 어떤 사람은 실체-속성의 관계를, 하나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든가 피리로 부는 것,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 실체-속성의 관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속성이라는 것을 마치 하찭은 표현방식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

- 삼각형 비유가 더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실체가 속성보다 상위개념이 아니라 속성 없이 실체는 있을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있을 수 없다. 속성들이 동시에 있어야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이 하나하나 따로 있으면 안 되듯이. 그게 동시에 세 개가 있어야 삼각형이라는 실체가 되듯이.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속성들이 독립적이니까 분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럴 수 없다.

- 증명방식의 차이: 정리12는 정리6에 의거하고, 정리13의 경우는 정리5에 의거하는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정리12에서는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채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공통된 의견:

- 데카르트 철학의 굉장히 고유한 주장 중 하나가 물체는 분할될 수 있다이다. 더 나아가 그냥 분할되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다.

- 스피노자도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물체는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원자에 대한 부정이다. 세상에 원자 같은 것은 없다. 물체의 가장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자라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최소단위에서 분할이 끝날 테니까.

- 만약 원자가 존재한다면 세상에는 진공이 존재한다. 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간다.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원자들 사이의 간극이 있다는 말인데(원자와 원자 사이에 간극이 없다면, 그건 원자라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간극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 있다는 것이다(정리15 주석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 , 스피노자와 데카르트 모두 공통된 의견:

모든 물체는 무한히 분할/ 원자가 없다/ 자연 안에는 진공이 없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중요한 차이점

- 데카르트는 신은 물질적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만약에 신(실체)이 물질적이라고 한다면, /실체가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다. 유한한 부분들로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 이것은 무한한 신,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어떤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고 주장

- 물체적 실체는 연장실체를 의미한다.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말은, 실체가 아니면, 그러니까 실체가 아닌 물체면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불가.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간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 24

물체의 본성은 무게나 딱딱함이나 색 등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연장에 있을 뿐이다. :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나 물체 일반의 본성이 딱딱하다거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거나 색을 띠고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이, 넓이, 깊이로 연장되어 있다는 데 있는 것임을 지각하게 된다

-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과 단절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 연장이 물질에 대한 본성이다. = “물체들은 모두 연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이 당시의 새로운 물리학자들 또는 자연철학자들이 도입한 도록에 1차 성질, 2차 성질 구분이 있는데 색이나 딱딱함 무게 같은 것은 물체가 갖고 있는 2차 성질이고, 물질이 갖고 있는 1차 성질은 연장이다라고 이야기. 2차 성질은 물체가 갖고 있는 본연의 무엇이 아니고 우리의 지각에 따라 규정되는 주관적 성질이다.

 

*** 234

이로부터 물질은, 비록 우리가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한정하게 많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스피노자는 분명히 물체는 무한히 분할 가능/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 불가라고 선 그음.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그래, 이 어구 정말 어마어마한 어구구나.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진다)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어떤 속성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될 수 없으며(정의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정리11에 의해), 만약 신 이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의 어떤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한 속성의 두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리5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실체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증명의 첫 번째 부분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아주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은 유일하다 곧(정의6에 의해) 자연 안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미 정리10의 주석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절대적으로 무한한이라는 말과 유 안에서 무한한의 말을 구분.

* 신은 정의6에 의해 무한한, 세상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고 있음-> 만약 신 외에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 중에 하나로 표현해야함 -> 그런데 정리5에서 하나의 실체는 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 외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정리5에 위배됨 ->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

 

* 경험적 유일성과 필연적 유일성

경험적 유일성: 원래 여러 개였는데 하나만 남았다(두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어쩌다보니 하나만 남은)

필연적 유일성: 이 유일성은 신이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다. 실체가 갖고 있는 프로프리에타스(특성) - 유일성 무한성 영원성 분할불가능성 자기원인성 (cf: 전지하다 전능하다 자비롭다 지혜롭다 <- 이런 것들은 프로프리에타스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은 인간이 갖는 성질을 신에게 투사한 것으로 상상적 성질이라고 말함)

 

* 따름정리2에서도 연장개념,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정리13의 따름정리2와 함께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아주아주 중요한.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안에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 의미) ,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증명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정의3에 의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고(정리14에 의해), 그런데 (정의5에 의해) 실체 없이는 양태들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양태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공리1에 의해). 따라서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 범신론(pantheism),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이 아니다

pan: 모든 것. 그리스어 + theos. 범신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말.

-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단 스피노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고, 범신론이란 표현자체가 스피노자 사후 30년이 지나서 나온 말이다.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물이 모두 신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신론이랑은 다른 것이다.

*** 범재내신론(penentheism)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인 만물은 다 신 안에 있다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또는 범내재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범신론에 비해 이게 정리15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기는 하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말이기는 하지만, 이 학설 자체는 매우 오래된 학설이다. 고대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 신학에 다 나오는 말이고, 사도바울의 표현 중에 그가 신 안에 있고 신으로 있고 신으로 의해 존재하고(신에 의지하고 있고 신에 근거를 두고 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건 스피노자 정리15와는 다르다. 범내재신론에는 신은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초월적인 관계에 있음.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고, 신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 유물론: 19세기 유명한 맑스주의자 중에 플레하노프(레닌의 철학 스승)가 스피노자를 상당히 좋아했다. 스피노자야말로 막스주의 선구자이자 유물론자였다고 주장함.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이랑도 또 다르다. 막스주의에서는 파생관계이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우열 종속관계가 아니고 동등하고 자율적이다. 스피노자가 연장하는 실체, 즉 연장속성을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유물론자들이 저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스피노자는 사유속성도 똑같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 , 정리15는 신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인식하는, 또는 모든 실재가 지니고 있는 실존과 행위 역량, 사유 역량의 근거임을 의미한다. 곧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실존하거나 행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 바깥에,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신이 모든 것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라 신 자체가 그 자연 안에 속해있는 것이다)

 

*** 스피노자의 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 이 지금, 저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지금의 지금이 있고 과거의 지금이 있고 미래의 지금이 있고 먼 미래의 지금이 있고, 이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세상에 진공과 원자라는 것이 있지 않은 것처럼, 12, 12, 하루 이틀,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할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인위적으로 상상적으로 쪼개어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위로 분할이 되고 이런 단위로 합쳐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조금 더 실재적인 것으로 스피노자는 지속을 이야기한다. duration. 이것에는 유한한 점도 있지만 무한정할 수도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시간은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어놓은 아주 상상적인 사고상의 구별’ ‘사고상의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 rational being: 이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고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고상 만들어낸 범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고상으로 만들어낸 것. 시간을 포함해서, , 종 이런 것들도 rational being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리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 real being: 실재적인 어떤 것.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속을 여기에 넣는다. 물론 실재적인 것이는 한데, 사물의 본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물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영원성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칸트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범위나 종류가 다르다. 오히려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피노자 철학을 연결시킨다면, 지속이나 영원성이랑 연결을 시키면 된다.

 

* 정리15의 긴 주석은

- 연장 속성이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것, 곧 신이 물체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자신의 논증을 진행한다.

- 들뢰즈가 윤리학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되어있다. 정의 공리 정리 증명으로 이어지는 엄밀한 논증이 있고, 서문 주석 부록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윤리학이 있다. 자기의 적수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는. 때문에 윤리학을 하나로 읽어서는 안 되고 두 개로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런 면모가 너무나 잘 드러나 있는 주석이다. 적수들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 표현도 아주 신랄하고 논쟁적이다.

  

*** 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신이 인간처럼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념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참된 인식과 아주 먼 주장이라는 점을 긍정-> 신은 물체적이지 않다, 곧 신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여기까지는 스피노자가 보기에도 타당하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의거하여 그들은 연장 실체 자체를 신과 분리시켜, 신이 연장 실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연장실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를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

1. 물체의 분할 가능성에 의거한 논변:

무한하다고 가정된 물체적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눠보자. 이 두 부분이 1) 유한한 경우 2) 무한한 경우로 나뉠 것이다. 1) 하나의 무한자가 두 개의 유한한 부분으로 구성되는 셈인데 이것은 부조리 2) 하나의 무한자가 다른 것보다 두 배가 더 큰 셈인데, 이 무한한 양을 피트 단위로 분할할 때와 인치 단위로 분할할 때에 숫자12배가 차이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AB 직선과 AC 두 개의 직선이 처음에는 규정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직선은 무한하게 연장되니까) 나중에는 그 거리가 규정 불가능하게 벌어지며 규정 가능한 것이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변하는데, 이 세 가지 모두 부조리하다 -> 따라서 물체가 무한하다고 가정할 경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물체는 유한하거나 아니면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2. 신의 지고한 완전성에 의겨한 논변:

신은 지고하게 완전한 존재이기에 아무런 수동성을 가질 수 없는데, 물체가 분할 가능하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어떤 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체가 신의 속성이라면 이 두가지는 부딪힌다. 따라서 물체적 실체는 신에게 속할 수 없다.

 

*** 스피노자의 반박

그들이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 모든 부조리한 논거들은 결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눈 화살은 사실은 그들 자신을 향해 날아간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인 이 부조리한 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마치, 원은 사각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상하면서 원은 그것으로부터 원주까지 그어진 모든 직선이 같은 길이를 지니는, 그러한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꼭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물체적 실체(정리8, 정리5, 정리12를 보라)에 대하여, 그것은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이 유한하고 다수이며 분할 가능한 부분들로 합성되어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 물체적 실체로 실체인 한에서는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불가능한데, 그들은 물체적 실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물체만 생각한다. 유한한 것으로서의 물체. 물체를 실체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양태로만 생각한다.

 

- 그들의 논리는 무한한 물체를 규정했을 때 이렇게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온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거들은 물체적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이 가정자체가 이미 틀렸다. 물체적 실체는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정리12와 정리13의 따름정리에서 보여주었다.

- 그들이 연장실체는 유한하다거나 연장실체는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부조리한 논거들은, 그러니까 무한한 양에 대한 이들의 반박은 모두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로 측정 가능하며, 또한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 자체가 이미 틀렸다.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고 유한한 부분들로 나뉠 수도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1)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될 수 있다 2) 무한한 물체, 무한한 양이라는 것도 부부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유한한 부분들을 합치다보면 무한한 양이 될 수 있다, 같은 것들을 부당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실체인 한에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증명까지 다 했다.

 

- 그들은 실체적 물체와 양태적 물체를 완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물체가 분할된다, 분할된 물체가 서로 부분으로 구별된다라고 하면, 이것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물체가 분할된다고 말하면, 양태적으로 분할되는 것.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도, 구별도 안 된다. 정리11부터 정리13 따름정리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양태인 한에서 분할될 수 있지만 실체인 한에서 분할될 수는 없다. (결국 이것도 유한실체를 상정했던 데카르트주의자들과 유한실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스피노자의 논박의 연장선상 혹은 불가피한 전제같다. 스피노자 주석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결국 그거잖아. ‘니들이 지금 실체와 양태를 계속 혼동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ㅋㅋㅋ 그러니까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계속 스피노자의 실체인 한에서의 물체적 실체를 계속 컵이나 책상 같은 양태적 물체와 혼동한 상태에서, 저런 두 가지 논거를 들어 물체는 유한하거나 신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 다시 보는 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선이 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공상한 다음, 선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여러 논거들을 고안해낼 줄 안다. 그리고 정말이지, 물체적 실체가 물체들이나 부분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체가 면들로 합성되고 면들은 선들로 합성되며 마지막으로 선들은 점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리고 이 점은, 명석한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모든 사람, 특히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인정해야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도록 분할될 수 있다면, 다른 부분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쇄를 이루고 있는 동안, 이 부분들 중 하나가 소멸되어사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들이 진공으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들어맞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가 시간을 상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은 마치 점과 같은데 점과 같은 것에서 선으로서의 지속이 어떻게 가능하냐.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들은 진공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물체적 실체도 인정을 해야지.

 

- 스피노자의 실재적 구별은 속성과 속성 사이의 구별이다. 속성은 자율적이고 다른 것의 간섭이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서로 인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분할될 수 있다면”- real distinction으로 구별되는 것 중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하나에 전혀 영향이 없어야 한다. , 하나가 사라져도 독립적으로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럼 진공이 생기는 것. 그런데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물체적 실체가 분할이 된다면(너희의 가정대로), 그 중 하나가 소멸되면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길 텐데, 그런점에서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리고 그들은 진공을 부정했다) 너희들은 물체적 실체가 분할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야하지 않겠느냐)

 

***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 스피노자가 이후에 자연철학에 관해 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염두해 둔 다른 곳”. 그러나 그는 그것을 쓰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진공에 대해 쓴 다른 곳들이 있긴 있다. 스피노자 초기저작 <데카르트 철학원리>에서 진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데 그건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을 썼다기보다 데카르트의 관점이 어떻다는 것을 쓴 부분.

- 또 하나는 출판되지 않은, 생전의 편지에서 나온다. 매우 유명한 12번째 편지. 스피노자와 매우 친한 네이으르와의 편지. <무한에 관한 편지>라고 주석가들이 부르는 편지. 이 편지에서 그는 무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네이으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무한의 문제에 대해 제일 체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시간에 대한 문제, 수에 대한 문제도 나오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편지다.

 

- 물체와 물체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 정리8의 주석2에서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된다는 것을 상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적 실체가 분할된다, 이것을 바로 부분들이 real distinction하고 있다, 부분들 하나가 완전히 소멸해도 다른 물체가 물체로서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한다, 이럴 때 완전히 소멸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왜 실재로서의 물체가 분할되지 않는데(실제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자꾸 물체를 부분으로 쪼개는가. 이것을 여러 가지 작은 양들로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서 생각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 요약: 스피노자의 논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물체를 실체로 부르면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될 수 없다. 실체가 분할된다고 하면 실체가 다른 실체로 나뉘어진다는 이야기이거나, 그 실체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쪼개진다는 이야기인데 둘 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내가 이미 증명했다. 그러니 실체로서의 물질이 분할된다는 것, 스피노자가 진공과 관련해서 이야기한 것은, 실체 중에 하나가 사라져도 나머지 실체는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진공이 생긴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진공이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물체가 분할가능하다. 물론 물체는 분할가능한데, 실체로서 분할가능한게 아니라 양태로서 분할가능하다. 이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성과 변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양태로서이지 실체로서 생성/변용/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체로서 생성되면 그건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건 부조리한 주장이다.

 

***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보면 그는 실체와 속성 사이에 정확하게 구별을 제시했다. “형상적 구별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 사이에 사고상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구별이 안 되는데 분석에 필요상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게 바로 사고상의 구별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속성은 사실 구별이 안 되는 문제다.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점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약간 왜곡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프러프리에타스는 real being이다. rational being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적인 성질이다.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질. 다른 실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물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성질. 본질은 아니고,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이다. 중세철학자들은 사람의 특성을 웃을 수 있는 동물’ ‘털 없는 두 발 동물이렇게도 말했는데, 아무튼 이런 특성은 실제적이다. 신 또는 실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

 

*** 속성의 주관적개념론/객관적개념론 다시 한 번

- “지성이 지각하는의 지성을 유한지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속성이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없으니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 즉 신의 본질은 인간의 지성이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불가지론을 전제하게 된다. 즉 신을 초월적 위치에 놓는 것. 그럼 우리가 말하는 신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특성을 전가해버리는 것이 된다.

- 울프슨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 그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중세유대사상과의 속성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 중세유대사상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린다. 연장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사유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속성들이 다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그럼 신의 본질은 심플한 게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유대사상가들은 신의본질을 심플하다고 했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신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투사한 게 맞다, 그게 속성이다라고 이야기함.

- 이런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한 것.

-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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