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리13의 따름정리를 처음 읽었을 때, 여기에 나오는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이라는 어구가 이렇게까지 커다란, 그리고 전복적인 세계를 포함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7-8 글자에 담겨있는 세계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홉스가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살짝 울컥하기도.

 

역동적이고 내재적 역량을 갖고 있는 자연에게서, 자기 철학의 내적 이유 때문에,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그 다이나믹한 힘을 다 박탈해버리고 평평하고 생기 없고 기계적인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에게서 여러 얼굴들이 겹쳐졌다. 내가 기업에서 MBTI라거나 애니어그램으로 누군가를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 정신분석책이나 심리학책들로 어떤 사람의 몇 가지 점을 건져내서 정신병리학적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과도 연결되고.

 

한때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싶은 누군가’ ‘하찮게 만들고 싶은 누군가’ ‘이해가 안 되는 누군가를 인생에서 마주치면 그 미움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로 찾고 싶어서, 하찮음의 근거를 찾고 싶어서, 이해불가의 불안한 상태를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 이해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싶어서, 이성적으로 보일법한 을 가져다가 누군가를 규정한다. 얘는 잔다르크형이라서 이래’ ‘얘는 경계성인격장애인 것 같아’ ‘얘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에 몇 개나 해당해’ ‘얘는 물고기자리라서 집착이 심해처럼, 인간 자체가 갖고 있을, 한 인간이 한 인간에 대해 다 알 수 없음에도, 원하는 틀대로 맞춰놓고 삐져나오는 부분들을 다 잘라내고 무지의 벽지로 발라버린다.

 

그러고 나면 마음은 편하다. 나는 누군가를 규정함으로서 내가 계산가능하고 컨트롤 가능하고 짐작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리니까 앞으로 거기에 맞춰 상대방의 모든 행동과 말을 소급해서 파악하면 되고, 이렇게 뭔가가 확실한 상태가 애매모호한 상태보다 덜 불안하고 더 당당해질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저렇게 틀 하나를 딱 만들어놓으면 더 이상 머리 쓰지 않아도 되고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감정이 생겨도 깊이 고민해볼 필요없이 저기에 딱 갖다맞춰보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속시원한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이 스피노자 철학보다 훨씬 단순하고 파악하기 쉬운,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진부하고 전근대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일 듯.

 

사실 항상 예외를 생각하고 기회와 여지를 주다가 뒤통수 맞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그런 분석틀에 맞춰 인간을, 자연을 평평하고 기계적이고 1차원적으로 눌러놓으면 안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이렇게 믿고 넘어가기로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틀로 분석해낸 납작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맞는 것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게 바로 아집이고 꼰대니까. ‘예외를 주느라 뒤통수 맞지 않게 조심은 하되(사실 조금 맞더라도) 누군가를 재단한 결과를 진리로 절대 놓지 말 것. 언제든 수정가능한 불확실한 전제라는 걸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데카르트가 자연에게서 힘을 다 빼앗아버리고 난 후 만물의 원인을 설명해야하는 순간이 오니 결국 이라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끌고 와서 신에게 엄청난 힘을 잔뜩 부여해야만 했듯이, 함부로 타자(인간과 사물을 다 포함해서)의 힘을 관념적으로 빼앗아버리면 결국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리한 어떤 것에 잔뜩 힘을 주는 우를 범하기도 쉽다. 데카르트처럼 진짜 일 수도 있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일 수도 있고, 야매 정신병리학적 지식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무서운 일이다. 데카르트가 물체들을 전부 연장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인간이란- 이렇다로 환원시킬 소스들이 세상에 널려있다는 것은 다행이자 불행인지도.

 

본인의 철학적 필요에 의해 무려 자연의 다이나믹한 힘을 다 박탈해버리고 생기 없고 기계적인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를 넘어서 자연에게 다시 내재적 역량과 힘을 돌려준 스피노자에게, 게다가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논리 그대로를 가져다가 바로 그 의 이름으로 신이 갖고 있는 초월적 역량을 박탈해버리는 스피노자에게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게다가 바로 데카르트가 좋아했던 기하학적 방식으로 우아하게. 홉스가 놀랄 만큼, 당대의 그 어느 철학자들도 감히 주장하지 못했던 것을 대담하고 용기 있게.

 

정리13어떤 물체적 실체도는 스피노자의 이런 뜻이 다 담겨있는 말이다. “물체적 실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한다고 선언하듯이. 신은 물체적/물질적 실체라고, 물질적/물체적인 것이 신이 가진 하나의 속성이라고. 그리고 이 말이 철학적으로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고 거울처럼 뒤집히며 기존의 역학관계를 뒤집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기하학적이면서 가장 다이나믹했다.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 너희들이 늘 생각해왔던 그 신적인 것들이 바로 물질적인 자연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다이나믹하고 내재적인 역량을 갖고 있다.”

 

그런 와중에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라고 덧붙이신 것이 좋았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 24

물체의 본성은 무게나 딱딱함이나 색 등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연장에 있을 뿐이다. :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나 물체 일반의 본성이 딱딱하다거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거나 색을 띠고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이, 넓이, 깊이로 연장되어 있다는 데 있는 것임을 지각하게 된다

-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과 단절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 연장이 물질에 대한 본성이다. = “물체들은 모두 연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234

이로부터 물질은, 비록 우리가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한정하게 많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스피노자는 분명히 물체는 무한히 분할 가능/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 불가라고 선 그음. (정리15의 주석이 바로 그 내용이다)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그래, 이 어구 정말 어마어마한 어구구나.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진다)

 

 

2. 드디어 나왔다. 정리14. 지금까지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들을 조심스레 죽 가지고 왔었는데, 드디어 여기서 실체는 하나이고, 그것은 신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 거대한 정리14에 비해 그 증명은 너무 깔끔해서 더 압도적.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어떤 속성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될 수 없으며(정의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정리11에 의해), 만약 신 이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의 어떤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한 속성의 두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리5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실체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증명의 첫 번째 부분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Q.E.D.

* 신은 정의6에 의해 무한한, 세상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고 있음-> 만약 신 외에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 중에 하나로 표현해야함 -> 그런데 정리5에서 하나의 실체는 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 외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정리5에 위배됨 ->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

 

 

3. 정리10 이후에 가장 시간을 많이 쓴 게 정리15. 이해하고 나니 정리10보다 훨씬 간단한데 주석에 데카르트주의자들 논리까지 섞여있으니 잠시 헷갈려서 잠시 헤맸다. 그렇게 잠시 헤매느라 생각보다 그 장에 오래 머물러 있던 차에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이 문장을 보고는 모든 게 다 하나의 폴더에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1)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체적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라는 명징한 비판에서 시작해서-> 2)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 그럼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어쩐지 SF적인 표현을 거쳐서(존재가 소멸하고 남는 자리가 진공이라는 것, 어쩐지 서늘하게 낭만적이지 않나) -> 그러니까 물체를 물체인 한에서 보면(물체를 양태적으로 보면)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물체를 실체인 한에서 보면(물체를 실체적으로 보면),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실체로서 소멸된다는 것은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고, 이건 불가능하다에 가닿는.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어떤 철학적 위안. 그건 이를테면 나의 소멸, 나의 죽음이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위안이 아니다. 양태로서의 나는 사라지지만, 실체로서의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실체로서의 나는 이 세상에 진공하나 틈새하나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 세상에서의 나의 소멸은 그저 목숨이 다른 상태로 변용되고마는 정도라는 것이 주는 위안이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스피노자가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확고하고(다소 못되게ㅋㅋ) 못을 땅땅 박아버리니까 앞에서 받았던 철학적, 혹은 존재론적 위안에 고기 백 근 정도의 무게가 확 실히면서 더 좋아졌어ㅋㅋ

 

4. 그동안 스피노자 이야기가 나오면 범신론을 바로 꺼내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서 오랫동안 해왔던 그에 대한 오해를 명쾌하게 풀었다. 범재내신론과도 분명하게 노선이 다르다는 걸 알겠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만물을 피조물로 생각하는 것과, 만물에 내재되어 있고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은 정말 커다란 차이. 왜 오해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인데 철학 연구자들 중에도 왜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안에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 의미) ,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증명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정의3에 의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고(정리14에 의해), 그런데 (정의5에 의해) 실체 없이는 양태들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양태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공리1에 의해). 따라서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 범신론(pantheism),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이 아니다

pan: 모든 것. 그리스어 + theos. 범신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말.

-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단 스피노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고, 범신론이란 표현자체가 스피노자 사후 30년이 지나서 나온 말이다.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물이 모두 신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신론이랑은 다른 것이다.

*** 범재내신론(penentheism)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인 만물은 다 신 안에 있다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또는 범내재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범신론에 비해 이게 정리15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기는 하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말이기는 하지만, 이 학설 자체는 매우 오래된 학설이다. 고대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 신학에 다 나오는 말이고, 사도바울의 표현 중에 그가 신 안에 있고 신으로 있고 신으로 의해 존재하고(신에 의지하고 있고 신에 근거를 두고 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건 스피노자 정리15와는 다르다. 범내재신론에는 신은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초월적인 관계에 있음.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고, 신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 , 정리15는 신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인식하는, 또는 모든 실재가 지니고 있는 실존과 행위 역량, 사유 역량의 근거임을 의미한다. 곧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실존하거나 행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 바깥에,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신이 모든 것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라 신 자체가 그 자연 안에 속해있는 것이다)

 

그들이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 모든 부조리한 논거들은 결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눈 화살은 사실은 그들 자신을 향해 날아간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인 이 부조리한 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마치, 원은 사각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상하면서 원은 그것으로부터 원주까지 그어진 모든 직선이 같은 길이를 지니는, 그러한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꼭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물체적 실체(정리8, 정리5, 정리12를 보라)에 대하여, 그것은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이 유한하고 다수이며 분할 가능한 부분들로 합성되어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 물체적 실체로 실체인 한에서는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불가능한데, 그들은 물체적 실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물체만 생각한다. 유한한 것으로서의 물체. 물체를 실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양태로만 생각한다.

 

- (스피노자식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럼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기는 것.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 물론 물체는 분할가능한데, 실체로서 분할가능한게 아니라 양태로서 분할가능하다. 이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성과 변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양태로서이지 실체로서 생성/변용/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체로서 생성되면 그건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되면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건 부조리한 주장이다.

- 물체와 물체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5. 강의 중간쯤에 스피노자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대상인지에 대해 듣다가 rational being, real being의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고, 평소에 이러이러한 상태를 구분해주는 뚜렷한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알게 된 셈이어서 반가운 개념이기도 했는데, 한 시간쯤 후 강의 막바지에 던져진,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에 대해 스피노자가 뭐라고 말했을까요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의 답으로 이 개념이 다시 등장해서 약간 신기할 정도로 반가웠다. 실체와 속성 사이에는 사고상의 구별이 있구나. 이 개념 하나만으로도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의 관계에 대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업 시작 때 들었던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 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와 같이 묶어서.

 

*** 스피노자의 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 이 지금, 저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지금의 지금이 있고 과거의 지금이 있고 미래의 지금이 있고 먼 미래의 지금이 있고, 이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세상에 진공과 원자라는 것이 있지 않은 것처럼, 12, 12, 하루 이틀,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할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인위적으로 상상적으로 쪼개어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위로 분할이 되고 이런 단위로 합쳐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조금 더 실재적인 것으로 스피노자는 지속을 이야기한다. duration. 이것에는 유한한 점도 있지만 무한정할 수도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시간은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어놓은 아주 상상적인 사고상의 구별’ ‘사고상의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 rational being: 이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고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고상 만들어낸 범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고상으로 만들어낸 것. 시간을 포함해서, , 종 이런 것들도 rational being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리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 real being: 실재적인 어떤 것.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속을 여기에 넣는다. 물론 실재적인 것이는 한데, 사물의 본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물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영원성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칸트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범위나 종류가 다르다. 오히려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피노자 철학을 연결시킨다면, 지속이나 영원성이랑 연결을 시키면 된다.

 

***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보면 그는 실체와 속성 사이에 정확하게 구별을 제시했다. “형상적 구별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 사이에 사고상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구별이 안 되는데 분석에 필요상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게 바로 사고상의 구별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속성은 사실 구별이 안 되는 문제다.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점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약간 왜곡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실체와 속성

 

- 실체에 대한 정의: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속성은? 속성은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실체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속성이라는 것은 성질이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이기는 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항상 어떤 실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속성(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삼각형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삼각형의 변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직선인 것과도 같은. 삼각형도 그 세 직선이 동시에’ ‘집합적으로 구성되면서 삼각형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고)이다.

- 가령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노란색은 성질인데 노란색이라는 것은 노란색을 띄는 물건을 통해 존재한다. 성질이 깃들어있는 실체, 다른 말로 하면 subject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사실상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면 연장속성의 경우 물리적 우주 전체, 사유속성의 경우 심리적인 우주 전체를 아우른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랑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림. 어떤 사람은 실체-속성의 관계를, 하나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든가 피리로 부는 것,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 실체-속성의 관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속성이라는 것을 마치 하찮은 표현방식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

- 삼각형 비유가 더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실체가 속성보다 상위개념이 아니라 속성 없이 실체는 있을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있을 수 없다. 속성들이 동시에 있어야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이 하나하나 따로 있으면 안 되듯이. 그게 동시에 세 개가 있어야 삼각형이라는 실체가 되듯이.

 

6. 이날 강의에서도 울프슨이 또 등장했다ㅋㅋ 그만큼 주관적개념론의 대표적인 사람인데다가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라 수업시간에도 계속 지성이 지각하는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일 것이다. 오늘은 울프슨에 대한 이야기 중 새로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중세유대사상에 따르면 신은 초월적이고“(...까지는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듣고 있었는데)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는 말을 듣고 가방 챙기다가 잠시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서 심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특히 신이 입은 옷도 아니고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단어로 심플이 등장하다니, 재미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어떤 의미로 하는 이야기인지 알겠는데(그 뒤에 이어지는 귀추과정까지 들으면 더욱 알겠는데) 어쩐지 맥락 싹 빼고 저 문장 하나만 딱 건져 올려 여기저기 드립성 비유로 써먹고 싶은 짓궂은 마음도 들고ㅋㅋ 저 심플한 본성“ ”심플한 본질이 결과적으로 객관적해석론을 가로막고 주관적해석론에 무게를 실어준다는 것도 재밌다.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신은 더 이상 단순한 게 아닌게 되어버리잖아? 이걸 (약간 왜곡해서 짓궂게 해석하면) 무려 저 심플함을 보존하기 위해 객관적 해석론을 포기해버림! 어쩐지 너무나 한남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객관인 척 하기 위해 지 마음대로 타자를 심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데카르트가 더 영악해ㅋㅋ) 아무튼 울프슨의 오늘 이야기 재미있었다. 하지만 재미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작은 울림이 있었는데, 이러한 울프슨적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거쳐 이어진 다음 말이 마음을 건드렸다.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스피노자가 지성에 관해 우리에게 던져주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 중에 하나. 내가 앞으로 스피노자를, 혹은 다른 많은 것들을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 살아가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는.

 

- 울프슨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 그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중세유대사상과의 속성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 중세유대사상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린다. 연장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사유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속성들이 다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그럼 신의 본질은 심플한 게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유대사상가들은 신의본질을 심플하다고 했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신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투사한 게 맞다, 그게 속성이다라고 이야기함.

- 이런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한 것.

-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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