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잇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1-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자연, 우주라고 하는 것의 논리적인 구조. 유일한 실체로 되어있고 그 유일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 정리16부터 시작되는 후반부에서는, 그러면 이 유일한 실체로서의 자연이 만물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자연의 인과구조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1부 후반부에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 정리16에서부터 바로 생산(=“따라 나와야 한다”)에 대한 이야기.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

- 증명: 어떤 사물 어떤 실재가 실재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실재가 포함하고 있는 특성은 더욱 많다. 그리고 신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 각각은 또 무한하니까 ->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2 신은 자신에 의한 원인이지 우연에 의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3 신은 절대적으로 제일원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 작용인 causa efficiens 카우자 에피키엔스 (efficient cause) : 동사로 하면 에피케네. 이 말은 말 그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이라는 뜻이다. , 작용인은 어떤 결과를 산출해내는 원인이라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 신이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해낸 원인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정의 16에서 벌써 원인에 관한 몇 가지 표현들이 나오고 있다. 강의록을 보면.

-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쓰기 전, 초기에 썼던 <소론>에 보면,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에서 상당히 널리 쓰이던 원인개념의 분류법들을 스피노자가 차용을 해서 8개의 원인을 구분하고 있다. 특히 이 작용인이라는 것을 8개의 원인으로 구분해서 제시하고 있다.

- 네덜란드어로 원인개념들이 적혀있는데, <소론>은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것이지만 그 라틴어 원본은 사라지고 1861년에 네덜란드 번역본판이 발견된다. 이것도 스피노자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쯤 지난 후이다. 라틴어 원본은 아직 못 찾았다. 이거 발견하면 큰 돈이 될 텐데 유럽에 가시면 헌책방 이런 데에 이 책이 있나 한 번 찾아보자ㅋㅋㅋ

 

2. 그는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실행하지 자기 바깥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신은 자유원인 free cause이지 자연적 원인이 아니다

자유원인: 이성 or 원리에 합당하기는 하되, 자신에게 외재적인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원인

필연적인 혹은 자연적 원인: 자신 바깥에 있는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는 원인

-> 신은 자유원인이다. 이성에 맞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신이 그 법칙을 만든 것이니까. 신이 그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사물들은 신이 만들어놓은 그 법칙에 종속되니까.

5.

8. 신은 무한하고 부동적인, 그리고 우리가 그가 직접 창조했다고 말하는 실재들의 가까운 원인이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이다.(“떨어져있는 원인” “가까운 원인은 스콜라철학의 용법. 나중에 2부 정리 후반부에 다시 언급된다)

 

- 가까운 원인:

*** 매개 없이 직접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 불과 열의 관계(, 유출적 원인이랑 비슷한 개념)

*** 정리15에서 모든 것은 신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이게 바로 신이 만물의 가까운 원인이라는 뜻이다. 신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 아무 것도 신 없이는 인식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 -> 신이 만물의 원인이다: 어떤 매개도 없이 신이 바로 원인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 저렇게만 이야기하면 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특수한 사건, 작용에 일일이 다 관여한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여기에 조건을 붙인 것이다. 신이 가까운 원인이기는 하되 그런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건에 일일이 다 간섭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에는 매개를 통해서 (매개라는 것은 자연법칙이 되겠다. 물리적인 법칙, 화학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 생리학적 법칙, 심리적 법칙 같은 일반적 법칙, 그보다 조금 더 특수한 법칙을 통해) 신이 원인으로서 작용을 한다. 그러니까 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특수한 실체로부터 떨어져있는 법칙이다.

 

이것들이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썼던 원인에 대한, “작용인에 관한 용어법들의 의미다.

- 이중에서 <에티카>에 살아남은 원인들은 내재적 원인-타동적 원인/ 가까운 원인-떨어져있는 원인/ 자유원인-자연적인 원인 이런 것들. 대신에 유출적 원인 능동적 원인 작용적 원인 부차적 원인 주요원인 등의 번거로운 용어법들은 다 사라진다.

 

*** 정리16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 :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cadere 카데레 : 원래 떨어지다”(fall)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포함되는” “들어오는을 의미.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 모순을 지니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식될 수 있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산된다는 것

인간지성과 무한지성은 다른 것이다. , 저것은 인간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범위가 크다

신은 만물의 작용인이다. 모든 것이 신을 제1로 해서 생산된다.

 

* 정리17 “신은 자신의 본성의 법칙으로부터만 행위하지, 결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강제되지(coactus) 않는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1) 신의 완전한 본성 이외에, 신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신으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 어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름정리2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왜냐하면 신은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정리11 및 정리14의 따름정리에 의해),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위하고(정리17에 의해)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7에 의해)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제약된다 coactus”

이 단어는 1) 제약된다 2) 강제된다 구속된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 신 바깥에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신과 무관한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서 신은 무언가에 제약/강제되지 않는다.

 

* 증명: 신 바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내재적일 수밖에 없다

* 따름정리1과 정리17의 차이: 정리17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강제되지 않는다인데, 따름정리1신 안에서까지 포함한다.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개념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자유원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정리17의 주석, 정리33의 주석에서 나오는 논의를 이해할 때 특히)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이 있다. 일단 자유는 우연이 전제되어야 생길 수 있는가? 이것부터 모르겠음.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에서 자유의 여지가 없다는 비판의 흐름에 동의가 안 된다. 사실 이건 현대인들이 자유에 대해 착각하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법칙은 다 제약이고, 법칙 바깥의 예외, 그러니까 이걸 우연의 여지라고 한다면, 이러한 예외는 자유의 전제처럼 오해하는 방식. 그래서 뒤이어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 재미있는 것은, 정의7에서도 봤고 정리17의 따름정리에서도 봤지만 윤리학 3,4,5부에 가서도 스피노자는 자유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신을 자유원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윤리학 3부에 가면 능동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윤리학 4부에 가면 자유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유로운 인간 자유로운 사랑 이성적인 인간. 5부에 가면 제목 자체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이다. 스피노자가 자연 안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라고 강하게 이야기하니까,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부터 5부까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에는,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자유개념하고 스피노자 철학의 자유개념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그런데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특히 정의7에 나오는 자유는 전혀 그런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어 있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것은 간섭과 장애물이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개념과 나중에 스피노자가 3,4,5부에 가서 인간학적인 의미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차이가 있는데, 그 자유 개념 또한 간섭의 부재로서의 자유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 위험하냐면,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바로 전체주의로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러니까 적극적 자유라는 게 개인의고귀한 윤리적 태도, 윤리적인 어떤 규범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윤리적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가령, 국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목표, 국가가 이것을 달성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할 고귀한 목표다, 이것이야말로 프로레탈리아가 부르주아 독재를 분쇄하고 노동자 농민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고귀한 이상이다라고 해버리면, 이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민중이고 이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거나 이상을 저버린 사람이 된다. , 이렇게 되어버리면 적극적 자유는 사람들을 집단이 설정한 목표로 얽매이게 하는, 강제의 원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 그래서 벌린이 볼 때 스피노자나 루소 같은 사람하고 스탈린하고 그렇게 거리가 먼 게 아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스탈린이 된다는 이야기. 나치즘.

- 그런 이유도 포함해서, 사실 20세기 후반에 특히 영미정치철학에서 PL은 논의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NL, Negative Freedom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 이것을 어떤 식으로 분류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것이 이사야 벌린이나 존 로스를 거치면서 자유주의의 철학적인 원리로 체계화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 반면에 유럽철학 쪽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좀 더 철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들이 꽤 있다

 

- 어쨌든 이런 흐름과 별개로 스피노자가 퍼지티브 리버티의 사상가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특히 벌린이 규정한 의미에서 퍼지티브 사상가인지에 대해서.

- 일단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이 자유개념하고 소극적 자유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스피노자의 자유개념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이것에 주의해야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간섭의 부재로 이해한다면 <에티카>를 읽는 데에 있어 이해 안가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 이렇게 복합적인 자유개념이기에, 따름정리2에서 신만이 자유원인이다라는 이야기를 해놓고 스피노자는 아마 찜찜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까? 그래서 긴 주석을 붙였다. 주석은 자유원인의 뜻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부연할 목적으로 붙였고 상당히 중요한 주석이다.

 

1)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의 적수들이 이해하는 자유원인의 개념: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유개념의 핵심으로 삼는다.

-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신학자 철학자들은,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야하는 것도 중단시킬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이런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고 진정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반박하면서 스피노자는 이런 표현을 쓴다.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고 말한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일어나지 않도록 또는 그에 의해 생산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자유원인이다라고 이해한다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신의 권한에 존재하는 것, 신의 역량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걸 자유원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능력을 갖고 있는 일인데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바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바로 반박한다. 이는 마치 그들이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거나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인데“ -

-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게 삼각형의 본질이고,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사실인데(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들이 쓰는 신은 자유로운 원인이다라는 말은 마치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 이 상태를 자유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 주석에서는 스피노자가 논리적인 범주 안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신학적인 용어법, 성경에 대한 구절들을 가지고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주석에서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기적인 것이고, 중세신학에서 기적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핵심은 자연법칙을 중지시키는 것, 자연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 <신학정치론>에서도 말하지만, 성경을 보면 여호수아가 적과 싸울 때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해를 정지시켜놓았다든가(밤이 되지 않고 낮이 되게 해놓았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다든가, 이런 것들이 바로 기적의 사례다. 이런 기적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적인 인과질서를 중지시키거나 위배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전의 법칙에 따르면 해가 져야하는데 신이 일으키는 기적이 그걸 중지시키는 것이다.

- 신학자들은 신의 전능함의 징표를 바로 저기에서 찾는다. “신은 전능하다라는 말을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등등에서만 그치지 않고, 신의 진짜 전능함을 자연 법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면모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것. 초자연적이고, 신비하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

-스피노자는, 신이 자유원인이라는 걸 잘못 이해하면 바로 저들같은 주장이 나올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연법칙을 건너뛰거나 중지시키거나 위배한다고 해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 자유원인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생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바로 그의 권능 안에 있는 것이라는 구절.

-여기서 선생님이 권능이라고 옮긴 것이 바로 포테스타스의 개념. 포텐시아와 쌍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서 포테스타스는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아니고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이다. 반면에 포텐시아는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작동하는 힘.

- 스피노자가 볼 때 신이 갖고 있는 힘을 포테스타스로 이해한다는 말은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이 선택이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포테스타스가 힘을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신학적인 방식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견해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신의 힘이라는 것은 결코 집행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포테스타스의 힘이 아니라 본성의 필연적인 힘에 따라 실행되는 활동이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다른 것의 제약없이 필연적으로 집행되는 실행되는 활동. ,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은 포텐시아에 입각한 자유개념이다. 포테스타스처럼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런건 인간의 자유고 왕의 자유일 뿐이다. 2부 정리3의 주석을 잠깐 보자

 

*** 요약/정리:

2부 정리3을 같이 읽어보면-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신학권력을 강화하고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고 대중의 의심을 조장한다. 나중에 3부에 가면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아주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자유로 이해하는 것은 가상이고 착각이다. 3부에 가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 포테스타스를 번역하는 문제

- 포텐시아는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대충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는 반면에, 포테스타스는 경우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하는 단어다. 정치철학에서는 주권이나 권력, 권한이 될 때도 있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권능이 좋기도 할 것이고 인간학에서는 능력이라고 번역해야 더 적절한 경우도 있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정립된 것도 최근 30년의 일이다. 들뢰즈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할 필요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더욱 이 구별을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 네그리. 물론 네그리의 구별법은 너무 단순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항상 그런 성향이 좀 있다. 아주 독창적인 발견, 독창적인 개념을 잘 제시하는게 그것들을 너무 단순하게 막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걸 지성의 낙관이라고, 지성의 난관, 의지의 비관, 실제로는 안 되더라도 한 번 된다고 생각해보자ㅋㅋㅋㅋㅋ 자기가 직접 그런다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기고 좋네 지성의 낙관 의지의 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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