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자연학 소론 : 자연학에 대한 보론. 스피노자가 당대의 과학혁명 및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던 철학자들(데카르트, 홉스 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추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전거를 제공해준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별 된다.

1. 단순물체들 : 공리1 ~ 공리

2. 복합물체들 : 개체에 대한 정의 ~ 보조정리 7의 주석

3. 인간 신체에 관한 요청들 : 요청1 ~ 요청6

 

단순물체들에 대하여

 

공리1 모든 물체는 운동하든가 정지해 있다

공리2 각각의 물체는 때로는 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한다.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증명 나는 첫 번째 부분은 자명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물체들이 실체의 관계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1부 정리5 및 정리8로부터 명백하다. 하지만 이는 1부 정리15의 주석에서 논의된 것으로부터 훨씬 더 명백하다.

 

보조정리2 모든 물체는 어떤 점들에서 합치한다. -> 속성(연장), 직접적 무한양태(운동과 정지) -> 공통 통념의 대상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하나의 동일한 속성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2부 정의1에 의해). 그 다음 때로는 더 느리게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때로는 운동하고 때로는 정지한다는 점에서 합치한다.

 

보조정리3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어야 하며, 이 다른 물체 역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고, 이 후자 역시 또 다른 것에 의해 [그랬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 관성원리의 수용

- “무한하게 나아간다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즉 과학혁명 이전의 우주는 닫혀있는 우주라서 무한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안의 운동은 원운동이다. 출발하면 돌아서 다시 출발점으로 온다. 그러니까 관성 원리무한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원리가 매우 단순해보여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무한의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무한우주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기독교 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창조론과도 어긋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집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이 나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관련한 책을 보면 갈릴레이가 무한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사고실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1) 이 무한개념이 기독교에 반하는 개념이니까 돌려서 말하기 위해 2) 무한하니까. 무한을 검증할 수는 없으니까.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20)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237자연의 제1 법칙 : 각각의 실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항상 같은 상태에서 존속한다. 따라서 일단 운동하게 된 것은 계속 운동하게 된다.”

- 운동하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과 정지를 바꿀만한 내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운동하거나 정지하는 것은 타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 데카르트의 주장: 관성원리가 제1법칙-> 물체는 피동적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박탈해버림 -> 그럼 이 물체를 움직이는 최초의 힘은 무엇인가? ->

-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36항에서 운동의 두 가지 원인을 구별한다.

“36. 신은 운동의 제1원인이며 우주에 항상 동일한 운동량을 보존한다.

운동의 본성을 고찰한 다음 우리는 이제 운동의 원인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운동의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원인, 곧 세계에 있는 모든 운동의 일반원인이 있고, 둘째로 특수한 원인, 곧 전에 운동하고 있지 않던 물질의 부분들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일반 운동 원인이 신 이외에 어떤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신은 애초부터 물질을 운동과 정지를 동반시켜서 창조했고 자신의 일상적인 협력만으로도 창조했을 때와 같은 양의 운동과 정지를 물질 속에 보존시킨다.”

자연적 사물들이 운동하는 궁극적 원인은 신에게 있다 : “연속 창조이론

- , 데카르트에게서 신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다. 자연에 신이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신이 자연 바깥에, 초월적인 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있어 물질적 자연은 신의 속성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연장이 신의 속성이라고 봤는데(그리고 이게 그 당시 굉장히 레디컬하고 놀라운 주장이었다는 것은 이전에 이야기했다) 데카르트는 다르다. 자연은 신과 동등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신이 원하면 소멸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연장은 신의 속성이라고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1부에서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었다.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나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 1부 정리15의 주석 같은 데에서.

-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물체적 실체.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실체가 물체일 수 있다, 연장도 실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렇게 표명한 것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다.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1부 정리14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연장, 즉 물질적 자연은 신이 갖고 있는 자기원인적인 무한한 역량을 갖고 있다. 즉 자연자체는 누가 외부에서 운동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 정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기원인적인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 그러나 난점과 한계도 있다.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당대의 자연철학자가 자연을 수학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내재적 힘, 인과적 힘을 배제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해서였다. 먼저 1) 관성의 법칙에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체 자체가 내재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운동한다는 논리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2) 새로운 관성원리에 입각해서 자연에 내재하는 각각의 사물의 운동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설명할지 몰랐다. 그걸 수학적으로 해낸 사람이 바로 뉴턴, 라이프니츠. 미분 적분 개념을 가지고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돌아가지 않고도 수학적인 방식으로 어떤 물체의 내재적인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 스피노자는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과학의 원리, 관성원리를 받아들인다. 보조정리3에서 자명하다고말할 정도로 확실하게. 그런데 이 관성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연장을 신의 속성으로 귀속시켜, 연장이라는 것이 내적인 인과적인 힘을 갖고 있게 한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처럼 아주 피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이것을 수학적으로, 새로운 물리학 논리에 입각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사망 1년 전에 쓴 편지를 보면 자연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책은 나오지 못했다. 만약 썼다면, 이 관성원리가 함축하는 피동성과 형이상학적인 힘,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과학원리를 증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 아무튼 스피노자의 목표/지향은 분명했다. 데카르트나 갈릴레이, 새로운 자연철학의 선구자들을 따라 새로운 과학원리가 맞다, 그것에 입각해서 자연을 설명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들이 자연을 새로운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건 좋은데 왜 자연으로부터 인과적인 힘을 다 박탈해야하는가, 그래서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못마땅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으로 연장이라는 것을 신의 속성으로 만든 것.

- 물론 그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체계적인 과학이론으로 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학 소론을 포함해서 항상 어떤 운동, 인과성, 개체성 이런 문제에 있어 이 괴리가 문제가 되곤 한다. 그러니까 그의 의도는 매우 분명한데, 그걸 뒷밤침할 수 있는 이론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개념을 2중적이라고 비판한다.

 

* 따름정리

- “자명한 것이다” : 그러나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사람이 본다면 절대 자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관성의 법칙을 공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 “물체A가 정지해있다가 운동을 한다” -> A가 정지해있었다는 사실에서는 A가 운동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올 수 없다 -> 외부물체가 작용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 A는 자기 스스로 운동할 수 없다는 게 따라 나온다. : , A가 정지한다면 외부원인, A가 운동한다면 역시 외부원인.

- 관성원리에서 물체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힘” “원인으로서의 힘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체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게 되는 것이다.

-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에 수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테면 자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수학적 원리를 도입했고, 이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는 자연 안의 물체가 내재적 힘으로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박탈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운동의 원인이 신의 힘이라고 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새로운 과학+ 자신의 형이상학적 고민을 접목시켜 둘 다 설명하고자 만든 것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25)

 

보조정리3의 따름정리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문제

1) 물체들은 순전히 수동적 또는 피동적인가 하는 문제

2) 운동의 연쇄는 무한소급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 : 운동의 최초 원인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더욱이 운동의 연쇄가 아주 정교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쇄가 보조정리3에서 말하듯 운동들 간의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타동적 인과연쇄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운동의 연쇄를 설계하고 구성한 이성적인 설계자가 존재한다. 또는 이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조언과 통제(the counsel and dominion of an intelligent and powerful being)를 통해 우주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체계가 존재하는 것.

 

- 1)의 문제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고, 좀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에게만 관성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정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법칙이 때로는 신체를 통해 때로는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 , 코나투스도 때로는 신체를 통해 정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처럼 새로운 과학원리를 물체에게적용하고 정신은 다르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과학원리를 양쪽에 다 적용한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다 박탈했고, 관성원리 자체, 물체들의 운동법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데카르트를 비판했다. 이게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상당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여기 등장하는 물체는 추상되긴 했지만 하나의 개체, 곧 복합물체다. 두 가지 이유

1) 스피노자는 여기서 본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본성은 개체에 대한 정의 이후에 나오는 논의에 따르면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또는 형태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체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내부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논의 목적상 다른 물체와의 외재적 관계에 따라서만 고찰될 수 있다.

2) 스피노자가 변용되다affici“변용하다afficare“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더욱이 상이한 본성을 지닌 다른 물체들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변용하거나 변용될 수 있다는 점

 

공리운동하는 물체가 정지해 있는 다른 물체와 부딪치지만 이 다른 물체를 밀쳐내지 못하는 경우 앞의 물체는 반사되며, 이 물체는 계속 운동하고 반사된 운동이 정지해 있는 물체(앞의 물체가 부딪쳤던)의 표면과 이루는 선의 각도는 동일한 표면과 이루는 입사 운동의 각도와 똑같을 것이다.

-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논의를 가져왔다. 테니스채를 들고 테니스공이 나아가는 각도를 표시한 그림. 입사각과 반사각의 각도가 같다.

 

이것으로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 대해서는 충분할 텐데, 이 물체들은 오직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이제 복합물체들로 나아가보자.

- 스피노자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추상하는 것은 원자 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물체는 그 자체로 실존하는 어떤 물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물체들을 추상한 것. 가장 단순한 성질-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로 추상되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이 합성해서 복합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복합물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합성해서 생기는 것인데, 이 부분들도 역시 복합물체. A라는 복합물체를 구성하는 B1 B2 B3..... B1 B2 B3.....들도 복합물체고, 이것을 구성하는 C1 C2 C3....... 이것도 복합물체.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무한히 분해 가능한. 계속 분해해도 가장 단순한 물체가 나오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복합물체.

- 그렇다면 단순물체에 대해 자연학소론에서 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자연학소론 시작할 때 물체의 본성에 관해서 간단하게 논의하겠다고 하는데, 가장 단순한 물체로 스피노자가 추상한 것은 복합물체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다보면 운동이라든가 물체가 갖는 그 자체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복합물체는 실존을 가지고 있고 질량, 크기, 강도, 표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측면만을 가지고 물체의 가장 원초적인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단순한 물체를 추상한 것.

 

정의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별된다.

- union ‘연합이라고 할지 합일이라고 할지 고민이 있다. 2부 정리13에서는 합일이라고 했고 같은 단어니 통일시켜서 합일이라고 해야할지 연합이라고 해야할지에 대해.

- 복합물체로 오니까 벌써 크기라는 개념이 들어온다.

- 어떤 관계“ certa + ratio. certacertainfixed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걸 ‘fixed’로 번역해서 엄밀한 관계라고 번역하게 되면 아주 엄격하게 정해진 비율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러면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 비율을 이렇게 엄격하게 해석해버리면 개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이 너무 취약해진다. 예를 들어 도마뱀 꼬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고 팔이 없어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율이 깨어져버린다고 실제로 정체성이 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분이 사라지더라도 그 정체성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 보조정리4와 보조정리5를 보면 스피노자의 생각은 훨씬 다이다믹하다. 개체와 환경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개체는 일부를 환경에 내어주고 환경은 일부를 주고, 그 반대도 성립하고, 이게 개체가 실존하는 방식이다.

- 요청4에도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 신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말하자면 인간 신체를 계속해서 재생시킨다regeneratur“ 재생시킨다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말이다. 개체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주변 환경과 교환하면서 재생된다는 것. 그래서 certa ratio엄밀한 관계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처럼 예전이었으면 시체였을 속성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기 쉬운 시대에서는.

 

- 이 정의는 개체에 대한 정의를 두 측면에서 내리고 있다.

1) 주변 물체들의 압력에 의한 규정: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1부 정리28에 나오는 독특한 실재들의 타동적 인과관계 또는 보조정리3에 나오는 단순한 물체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것을 표현

2)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의한 규정: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2부 정의7이 연상된다. singular thing.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의 핵심은 원인이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해서 개체 모두가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는 것. 다수의 개체들이 모여 공동의 결과를 산출.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와는 강조점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이 singular thing도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러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 그런데 이러한 개체에 대한 정의 때문에 주석가들은 개체성의 이중적 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아주 순수하게 자연학적/물리학적인 기준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로서의 기준. 그런데 3부에서 스피노자는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라고 부르고, 인간의 경우에 그걸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코나투스에 대한 정의는 3부 정리6, 정리7에 나온다.

- 3부 정리6 각각의 실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3부 정리6은 좀 놀라운 정리다. 왜냐면 어떻게 보면 관성원리와 똑같은 명제인데(‘운동하는 물체는 운동하는 한에서 계속 운동하려고 한다/ 정지하는 물체는 정지해있는 한에서 계속 정지하려고 한다), 관성원리와 굉장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3부 정리6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양태들, (1부 정리34에 의해)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실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을 신의 속성들/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는다‘.

- 즉 정리6의 문장 자체는 자연학소론에서 봤던 관성원리를 표현하는 바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여기에 내적인 역량을 부여한다. 이 물체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이 경향을 실재가 갖고 있는 내적인 역량으로, 내적인 역량의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리7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정리7의 증명 마지막 부분에서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역량 또는 노력은 실재의 주어진 본질, 또는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는 실재의 본질,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 역량이라고 정의한다.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자연학소론에서 우리가 봤던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는 내면성도 없고 이런 역량의 개념이 없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가 개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했다고 말한다. 1) 형이상학적인 측면(3부 정리6, 정리7의 코나투스 개념) :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정리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내적 역량을 갖기 때문에 그렇다. 그 역량이 이 개체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니까. 2) 순수하게 물리학적이고 자연학적인 측면. 역량 개념도 없고 본질, 내면성도 없는 개체. 그러니까 1)2)는 다른 정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들뢰즈는 관계와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관계는 실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본질은 말 그대로 본질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관계가 지속의 차원에 속한다면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 아무튼 자연학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와 코나투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의 문제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계속 나오게 되고(최근에 영미 주석가들중에서도), 실존과 본질의 구별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그래서 매우 문제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4부 정리39와 주석을 더 보면 다른 측면들도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 마지막으로 2부 정리24의 증명을 한 번 보자.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서로 운동을 전달하는 것인 한에서만(보조정리3 다음에 나오는 정의를 보라)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이 문장을 라틴어 원문에 더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 자체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이 부분들이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들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가 바로 개체이고, ’인간 신체와의 관계없이 개체로 간주된다는 것은, 이를테면 여기서 부분A가 떨어져 나오면 이 A는 더 이상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이 부분 자체가 하나의 개체인 것이고, 이 부분A를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들, 즉 개체들B,C,D,E......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 부분들은 A를 포함해서 더 이상 신체의 부분들이 아닌 독립된 개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개체들이 얼마나 느슨하고 취약한가. 개체를 이루는 이 부분들이 떨어져 나오면 (아무런 관계없는) 또 다른 개체가 되는 것. 이 부분들이 서로 일정하게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면 그때만 개체의 부분이 되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 animata

 

- 그런데 이 문장에서 다소 불분명한 것은 스피노자가 왜 정신화되어 있다고 할 때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2부에서부터 5부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가리킬 때 일관되게 ’mens‘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정서 내지 정념과 관련해서는 animus, 곧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면 여기서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영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anima라는 명사의 동사 형태인 animata(동사 기본형 animo)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역시 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 ‘영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anima생명의 원리’, 곧 신체가 움직이고 활동하고 생존할 수 있는 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렇게 기존의 anima, 영혼이라는 개념이 식물이나 동물, 인간의 생명 원리로 이해되면, 스피노자가 <에티카> 1부 정의2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그리고 각각의 속성에 속해 있는 물체들과 관념들의 독립성, 상호 작용 불가능성이라는 기본적인 존재론 원리에 위배된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2부 정리35의 주석에서 anima의 전통적인 용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anima라는 용어는 단 3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 사실 스피노자가 “anima”라는 용어를 쓸 때는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왜 스피노자가 비일관성의 위험을 무릅쓰고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신조어를 사용하지 않는 스피노자의 용어법과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늘 기존에 사용되는 철학, 신학, 정치학의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되, 이 용어들에 자신의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cf. 3[부록] 20항의 해명’). 이는 자신이 비판하거나 해체하고자 하는 기존 철학의 담론과 문제설정 내부에 위치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적 전략을 수행하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기존 철학과 동일한 용어, 동일한 개념, 동일한 어법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내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animata라는 기존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통상적인 용법과 달리 신체의 생명원리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을 가리키는 뜻을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다른 개체들에게서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 및 다른 개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질적 차별의 관계가 아니라 정도상의 차이의 관계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나오는 문장들은 이러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다.

 

- mens 정신. 어떤 인식 작용, 지각 작용, 의지 작용과 관련해서 많이 쓰는 단어

animus 정서 정념 정서적인 어떤 작용

 

animus마음이라는 말에, mens정신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마음정신은 다르니까. 우리가 마음이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정신이 지옥이다/ 정신이 괴롭다같은 말은 잘 쓰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정서와 감정에 연결해서 쓰기 때문이다. 반면 mens는 인식/지각/의지 작용에서 많이 쓴다. 이를테면 정신 똑바로 차려!“ (물론 조금 예외적인 쓰임새로 마음대로 해라가 있다)

 

anima: 영혼. 이때 영혼은 생명, 생명의 원리. 이런 것을 가리킴.

animata는 동사 animo의 수동형으로 animo : 생기를 불어넣다 활력을 주다

animata :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생명을 얻다. 생기를 얻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anima를 쓸 때는 스콜라 철학 anima라는 말, 그러니까 이 단어의 원래의 뜻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이다. ‘정신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단어를 스피노자는 스콜라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썼다. 그 뜻은 무생명체도 영혼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생명체도 정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는 오직 생명체에만 아니마타를 결부시키는데 스피노자는 이 아니마타를 다른 모든 개체, 무생명체까지에도 다 결부시킨다.

 

- 스피노자는 anima라는 말을 딱 세 군데에서 쓴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데카르트의 정념론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그가 아니마라는 용어를 쓸 때 용법들을 보면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는 비판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아니마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왜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른 표현을 쓰지 않고 아니마타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면-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이런 사례가 2부 정리44의 따름정리2에도 나온다. ”sub (quadam) aeternitatis specie“ 영혼의 관점. 이것도 스피노자가 만든 말이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영혼의 상하라고 번역했는데 subunder라는 뜻이고 specie가 양상이라는 뜻이라서 그냥 그 말 그대로 조합해서 상하라고 했다.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고 상관없는 번역. sub specie는 사실 관용적인 표현이다. ~한 관점에서 ~한 측면에서라고 할 때 쓰는 말.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져다가 영원의 관점에서라고 쓴 것이고 이 표현은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래서 라틴어 사전에 sub aeternitatis specie를 찾으면 스피노자가 바로 나온다

 

- 어쨌거나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고, 기존 철학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거기에 아주 다른 새로운 자신의 용법을 불어넣는다. 이게 스피노자의 아주 중요한 점이다. 기존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자기 철학의 용어를 불어넣는 것.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데리다와 아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deconstruction 기존의 철학담론의 해체하는 작업. 물론 데리다는 신조어를 굉장히 많이 만드는 철학자이지만. 실체, 속성, 양태 같은 용어들도 데카르트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데카르트는 이 실체 개념을 쓰면서도 그것을 일관되게 끝까지 쓰지 못한 사람이다. 5부 서문에서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전혀 다르다고 하면서,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본인 스스로가 사유속성 연장속성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고, 인간을 이야기할 때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도입한 사람인데 그런데 관되지 않다. 반면 스피노자는 그 원리를 아주 끝까지 밀어붙여서 데카르트 철학을 비판하고 홉스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넘어선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의 용어법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 이런 관점에 비춰보면 이 아니마타라는 개념도 스콜라 철학, 데카르트가 쓰는 용어를 가지고 와서 이들이 생각지 못했던 개념까지 이 단어를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용어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하고 다른 개체들이 정신화되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인간하고 비인간 무생명체 사이의 질적인 차이,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해야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걸 별로 안 하고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일이긴 하다. 논문 쓸 게 많아지니까ㅋㅋ 스피노자는 주석의 그 다음 부분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부연한다.

 

*

하지만 우리는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를 가져와서 자기 이야기식대로 확 바꾼다

 

-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에 따라 관념으로서의 정신의 대상, 곧 신체의 실재성의 정도에 따라 실대성도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으로서의 정신들 사이의 차이는 정신들의 대상을 이루는 신체들(또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1) 스피노자에게서 신체들 또는 물체들만이 아니라 정신들 내지 관념들도 서로 다르다는 것. 곧 서로 구별되는 개체성 내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2) 정신들의 이러한 개체성 내지 독특성은 신체들의 차이에 의거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제기되어 온 오래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 내지 개체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이는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유래하며 18세가 반스피노자주의 저술가들(여기에는 라이프니츠주의자들, 말브랑슈주의자들, 뉴턴주의자들이 망라되어 있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으며,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와 헤겔에 와서 철학적 영향력을 얻게 된다.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스피노자주의와 반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들이 있지만 특히 Jonathan Israel, <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2부 정리13의 주석의 이 대목 및 뒤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이다.

 

-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유명한 전통적인 비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가 없다. 실체만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서양학문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인데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스피노자에 대한 항목이 몇 십 페이지에 걸쳐 있는데 여기서 벨이 스피노자에 했던 비평이 후세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벨의 핵심들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도 없고 자유의 여지도 없다는 것. 뭔가 어떤 아주 현명하고 자비로운 신 개념을 설정해야 어떤 개체들간의 차이도 설명할 수 있고 자유도 설명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 철학에는 맹목적인 필연성만 존재하고 자연 전체의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의 차이도 자유도 없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이 18세기에 상당히 널리 확산된다. 특히 라이프니츠 추종자, 말브랑슈의 후예들 심지어 뉴턴의 추종자들에 희애 반스피노자주의가 확산되는 것. 18세기 말이 되면 독일의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라는 신학자가 독일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을 정립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코비의 책은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스피노자의 학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야코비의 스피노자 비판은 독일관념론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대논리학이나 철학사 강의 등에 스피노자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이것 역시 철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스피노자의 철학에 개체도 없고 자유의 의지도 없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 된다.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신학정치론>이다. 물론 신학정치론의 논점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모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가 야만적인 히브리인들을 이끌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오랫동안 번영시키고 안정되게 이끌었다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신학정치론에서는 예수도 매우 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은 다 상상력만 뛰어났지 지적으로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예수는 철학적이기도 했고, 다른 예언자들과 다르게 신학으로 소통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사기꾼>은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정치론에서 많은 인용문을 가져오고 있지만 스피노자보다 훨씬 래디컬한 종교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읽어보면 재미있고 시원하다ㅋㅋㅋ 아주 신랄하고. 이 책이 워낙 유명해서 스웨덴의 여왕이 이 책을 구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다는 일화가 있다. 검열도 심했고 발견 즉시 다 압수해서 불태워버리는 그런 책이었기 때문에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는데 돈을 굉장히 많이 들여서 결국 구해서 봤다고.

 

- 아무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저 비판들은 그의 사후부터 계속 따라다녔던 비판들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과 관련해서 보면 바로 이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표상적 실재성).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부분의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다 이 부분을 부연하고 보완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인간 신체의 본성에 대해 알아야하지만, 이 책은 자연과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니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피하겠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같은 사람에게 자연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이 또한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죽 논증하는 책 한 권을 따로 써야한다. 그래서 일단 이 <윤리학> 책에서는 자세한 논의는 넘어가고 이어지는 정도로만 말하겠다면서, 물체/신체의 우월성이 어떻게 정신의 우월성과 연결되어있는지 간략하게 자신의 논점을 제시한다.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2) 그리고 어떤 물체의 작용이 그 물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지며, 그 물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 자기 의존에 의한 논변

물체/신체 : 어떤 물체/신체의 작용이 그 물체/신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진다.

물체/신체의 정신 : 그 물체/신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능동적이면 능동적일수록 신체도 정신도 능동적.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능동” “수동의 의미는 3부에 가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는 아직까지는 스피노자적인 그 능동/수동이 아니다. 이 능동/수동을 잘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3부에 가면 더 보게 될 것이다.

 

- 1)2)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 하지만 1)은 어떤 물체/신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 그리고 이것과 합치하는 정신의 지각능력을 가리키는 데 반해(cf. 2부 정리29 및 따름정리와 주석) 2)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어떤 물체/신체 및 정신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물체/신체는 수동적이면서도 1)과 같은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이는 물체/신체가 능동적이면서 1)과 같은 능력을 갖는 것보다 못하다. 더욱이 물체/신체는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1)의 측면에서도 작용 및 수용 능력이 다면적이지 못할 수 있다.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만 여전히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이 다면적이면서도 능동적인 경우

(여기에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지만 능동적일 수는 없나? 다면적이지 못하면 수동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가 우리 신체에 대하여 완전히 혼동된 관념밖에 갖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내가 뒤에서 이로부터 연역해낼 다른 여러 가지 것도 이해할 수 있다2)에서 유래한다. cf. 2부 정리29와 따름정리, 주석, 2부 정리40의 주석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리11 인간정신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는 이미 2부 정의3에서 관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나는 관념을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인간 정신을 관념이라고 명확히 제시한다. “인간정신은 관념이다라고 정리하는 첫 정리. 스피노자의 관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대로 표상이라고 받아들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이 없는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사유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관념이며, 따라서 관념은 자신의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실재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는 실재다. “관념은 양태다라는 말은 관념이 실재다라는 말과도 같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달리 말하면 인간 정신과 동일한 관념이 있으며, 또한 뒤에서 계속 보겠지만, 인간정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으로서의 정신이 산출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이다. ,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혹은 소유하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관념이 담겨있는 상자나 틀 같은 그런 것.

-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데 존재는 라틴어로 하면 esse, 어떤 경우에는 essentia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리11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정신은 관념이다이다. 어떤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그렇다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는 무엇일까? 아직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신체다. 그러니까 정리11신체의 관념이 바로 정신이다라는 말이다.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 신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 정리11의 증명

 

-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 정리10의 따름정리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그랬고,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스피노자가 변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태로 대체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에는 예를 들면 사랑, 욕망, 의지 등등이 있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실재의 관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 의해) 관념 그 자체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관념일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실재는 아닌데, 왜냐하면 무한한 실재는 (1부 정리21과 정리22에 의해) 항상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2부 공리1”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다. Q.E.D.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이것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명제다. 유한지성을 지닌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서부터 따라가기 다소 어려운 결과들(이어지는 내용들)을 도출한다.

- ”인간정신의 본질은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 ”인간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은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과 반대에 있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은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다. 영원진리가 어떻게 창조가 되는가. 영원하다면서?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데카르트가 1630년에 메르센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신에 대해서 우리는 entendre할 수는 있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comprendre는 라틴어의 adaequatio 같은 것. 외부 사물과 우리의 지성이 일치하고 합치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아다이콰치오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며, 인간 지성과 신의 지성에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괴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들으면 아니, 인간지성이 신의 지성의 일부라니!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지각한다고 말할 때 신이 지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이 신은 무한한 신이 아니다.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자연전체로부터 개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신이 어떻게 개별정신으로 분화되어가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덧붙이면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는 인간정신이 개체화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유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지는 정리13에 가면 알 수 있다.

- 이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관념들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과 연쇄를 이루고 있는,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속에 실존하는 한 양태인 한에서,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하는 것은 정리9에서 말하듯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 지각하는 것과 같다. 또는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다. 이는 1부 정리34, 36, 그리고 2부 정리3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인간 정신에 의해 전개되는 한에서의 신의 사유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으, 나중에 3부 정리7의 표현을 선취한다면,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부 정리14에서 정리29까지 전개될 부적합한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의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따라서 인간 정신이 적합한 또는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 정신은 바로 무한한 사유역량으로서의 신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그 뒷문장은 인간 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의 신을 말하고 있다. 이때의 신은 앞문장 속 신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내적인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인간정신의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정신은 신의 사유역량을 부분적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때의 신은 인간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구성하는 신 -> 인간의 정신은 그 일부일 뿐이다 -> 그러므로 부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 즉 결론은 인간정신은 진리의 역량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제한적으로 가질 수 있다

 

*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에서 표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이 표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 중에 하나로 그는 “pli”라는 어간이 들어가는 세 가지 용어에 주목 한다. le plithe fold ‘주름이라는 뜻으로 그는 이 말을 키워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설명하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라는 책을 1988년에 펴낸다.

implicare/ explicare/ complicare

- implicare는 함축하다, explicare는 보통 뜻으로 말하면 설명하다가 되겠지만 존재론적인의미로 하면 펼치다’. 가령 본질을 설명하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펼치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complicare는 원래대로 하면 무언가를 뒤엉키게 하다’, ‘서로 얽히게 하다라는 뜻인데 들뢰즈가 complicare를 주목할 때는 신 또는 실체가 만물을 감싸안는 것, 포괄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들뢰즈는 <표현의 문제>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 사실 스피노자는 implicare라는 용어를 에티카에서 한 번 밖에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implicare 대신에 involvere를 쓴다. 1부 정의1,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도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에서 involvere를 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함축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involvere를 쓰면서 어떤 경우에는 implicare를 쓴다. 사실 들뢰즈는 속으로 굉장히 아까웠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왕 같은 뜻이라면 involvere 대신에 implicare를 써줬으면 어미가 딱딱 맞을 텐데. 어쨌든 그는 스피노자를 직접 인용할 때는 involvere를 쓰지만 같은 뜻이니까 involvere라고 쓴 것도 implicare라고 간주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implicare를 써서 세 개의 구도를 쓴다. 들뢰즈의 의도, “pli”라는 어간을 갖는 세 개의 용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표현 개념을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정리12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 정신에 의해 지각되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곧 만약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 물체라면, 이 물체 안에서 정신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우리가 2부 정리7에서 살펴본 이른바 평행론명제,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은 같은 것이고, 신의 사유역량과 신의 현행적인 행위역량이 동등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나오기 때문에, 정리12의 증명에서 말하듯 정리9의 따름정리의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스피노자가 정리12의 주석에서 말하듯 정리122부 정리7의 주석에도 근거를 하고 있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안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안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그러니까 항상 어떤 속성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른 속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상응하는 것이다. 정리12에 들어가면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 다 지각이 된다고 말하는데 연결된다.

 

- 따라서 2부 정리12의 명제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2의 명제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제의가 된다. 다음 같은 회의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이 자신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각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지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변화들을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일까? 세포 하나하나의 생성과 소멸까지 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 정리13의 증명

 

1) 만약 신체가 인간 정신의 대상이 아니라면-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이 우리의 정신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실재의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신 안에 존재할 것이고 ->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은 그 다른 실재의 정신에 있지 우리의 정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고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2) 만약 신체 이외에 또 다른 정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1부 정리36에 의해) 그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정신 안에는 이 다른 대상의 결과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할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5에 의해 그것에 대한 관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 따라서 우리의 정신의 대상은 실존하는 신체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벌써 다 예측하고 공리로 넣어 놨다ㅋㅋㅋ 우리가 공리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왜 여기 나와 있나 했는데 이때 써먹으려고ㅋㅋㅋ 공리로 넣어놨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명한 진리로서 공리로 설정해놓은 것이다. 아마 스피노자가 물리학 자연학에 관한 책을 썼다면 이것을 공리로 놓지 않고 아마 증명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까,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가 이 책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신체가 무엇인지, 우리 신체의 본성이 무엇이고 특성이 무엇이고, 근육은 어떻게 되어있고 같은 생리학적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인가. ? 우리의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과 우리의 인식 능력, 지적 역량이 향상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신체 역량이 향상되고, 우리의 지적 역량이 향상되어야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능동성을 갖게 되고, 우리가 능동성을 획득해야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스피노자 에티카의 목표인 것이다.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공리4에서는 느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지각, 인식방식이다. 스피노자가 느낀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칸트였으면 이것을 내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 인간이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지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 여기에서 느낀다라는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2부 공리4에서 이미 느낀다sentimus senti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스피노자가 느낀다고 쓴 표현은 감각적인 지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각하다는 동사가 주로 외부 대상이 우리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일 내지 사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리킨다면, “느낀다는 동사는 우리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느낌은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느낌이 다 부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표현도 다소 애매하다. 에드윈 컬리는 “The human body as we aware of it”이라고 번역했다. sentimusbe aware of로 번역. 그런데 저 영어 번역도 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라틴어에 prout라는 단어를 컬리는 as로 번역했다. 느끼는 대로, 자각하는 대로, 감지하는 대로. 그런데 이 prout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좀 불분명하다. 여기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1) ‘인간 신체가 우리가 느끼는 바와 똑같이, 실제 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느낌이 신체의 본성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말은 인간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경우에만 실존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우리가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느끼는 경우에만,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에만 신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느끼지 않으면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존재론적으로 무. 이것을 철학사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험론자였던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같은 사람이 한 유명한 말 존재는 지각이다로 대표되는.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이 전제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명제로 이해하는 것이니까,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는 의미이니까 역시 부적절하다.

3) 아니면 2)와 다르지만, 신체는 우리가 느낌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CT를 찍고 MRI를 찍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의학교과서나 생물학교과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인지 아주 정확한 인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신체를 느끼는 것, 배고프면 허기가 느껴지고 졸리면 졸음이 느껴지고 아프면 고통스럽고 이런 방식이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인식하는 가장 1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 적합한 인식을 얻기 전에 원초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지각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긴 말 하지 않고ㅋㅋ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후기 데카르트 철학의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은 사유의 질서에 속하고 신체라는 것은 연장의 속성에 속한다, 이 양자는 서로 섞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해놓고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도 이야기하는 것. 어떻게 서로 섞일 수 없는 게 합일을 이루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 더 나아가서 데카르트가 나중에 <정념론>에서 정념 passion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정신에 능동적으로 작용해서 영혼에 생겨난 관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체가 우리 영혼에 작용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신체가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정념을 갖게 된다고. 그런데 정념의 영향을 받게 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 사람은 뭔가 일관성 있는 삶을 살기 어렵고, 유덕한 삶을 살기 어렵고, 도덕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유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정념을 억제해야하고, 그러려면 반대로 정신과 의지가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서 신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신체의 능동성을 억제해야 정념의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경우 신체와 정신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데카르트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 명제를 가지고 데카르트의 심신상호작용을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간학도 잘못됐고 데카르트의 윤리학도 문제가 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강의 정리- 2부 정리8이 어려웠던 이유는 형상적 본질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2부 정리8이 현행적 본질 형상적 본질이 뚜렷하게 나뉘는데, 들뢰즈 철학에서는 이것을 virtual 형상적 본질, actual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virtual한 형상적 본질이 actualize해서 actual한 현행적 본질이 되는가이다. 이런 구분은 자칫하면 플라톤주의로 가버릴 수 있다. 플라톤주의로 빠지지 않고 이 길을 우리가 잘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form 형상을 정의할 때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forma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리8에서 실존하지 않는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1부 정리11의 다른 증명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를 비교하며 살펴봤는데 저 실존하지 않는의 이유도 초월적인 이유가 아니라 독특한 실재와 연관된 이유였다. 이를테면 다윈의 종 멸종이론이라든가 이미 먹어버려서 없는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우리는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서 알아두고 넘어가자.

 

정리9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며,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제3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의 원인을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된다.

 

1)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 곧 양태이며 따라서 양태인 한에서의 관념은 그것이 속해있는 속성, 곧 사유속성 안에서 다른 양태들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인과 관계를 맺지,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 내지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thing이다. 관념은 물체 같은 양태다. 양태로서의 물체가 연장 속성 안에서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양태로서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부 정의2에서 나온 자신의 유안에서 유한하다는 점이다. 같은 유안에서. 즉 관념은 물체에 의해서는 한정될 수 없다.

 

2) 더욱이 정리9에서 문제가 되는 관념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A라고 하자)이다.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관념 역시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B라고 하자)이며,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관념A의 원인이 되는 관념B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내지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스피노자가 1부 정리15에서 말하듯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 모든 건 다 신 안에 있고, 신은 무한하면서 모든 걸 품고 있다. 신 그 자체로 보면 무한하다. 동시에 신은 유한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적 우주는 신/ 연장을 이렇게 분리해버린, 매우 타동적인 세계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유일한 피조물들과 초월적인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무한한 신이 아니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리18), 곧 무한하게 많은 자연 사물들 내에 내재해있는 신이며, 역으로 이러한 자연 사물들은 신의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따라서 우리가 어떤 독특한 실재가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 다른 독특한 실재는 또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고 할 때(1부 정리28), 원인으로서의 독특한 실재는 유한한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전체로서의 연장이 변용된 것이 바로 각각의 물체이다. 즉 물체는 유한하게 변용된 것이지만, 무한한 연장 속성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무한하다. 관념도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정리9에서 하는 말이다.

- 즉 정리9에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무한한 신이 정리9에서의 이유라면,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식의 신, 기복신앙의 신이 되어버린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등등. “무한한 한에서의 신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의 반대개념이다


증명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다른 사유 양태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사유 양태이며(2부 정리8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의해)(=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사유양태다), 따라서 (2부 정리6에 의해) 오직 신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즉 관념은 관념 안에서 인과를 맺지, 물체와 인과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1부 정리28에 의해) 신이 절대적으로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러하며, 이 후자의 사유 영태 역시 신이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2부 정리7에 의해)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실재원인으로 바꿔 말하는 것. 즉 실재는 곧 원인이다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독특한 관념의 원인인 것은 바로 다른 관념, 곧 신인데, 이는 신이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며, 이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Q.E.D.

 

- 정리91부 정리28과 짝을 이루는 관념의 연쇄를 말하고 있다. 1부 정리28에서 A라는 독특한 실재는 B에 의해, B라는 독특한 실재는 C에 의해, C라는 독특한 실재는 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1부 정리28에서 독특한 실재가 그 대상이었다면 2부 정리9에서는 사유 속성 안에 존재하는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된 관념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증명에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 , 1부 정리28에서처럼 관념 역시, 관념A는 관념B에 의해, 관념B는 관념C에 의해, 관념C는 관념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관념A, 관념B, 관념C.....들은 바로 신이 아니라, 신이 변용된 한에서의 관념이다.

 

따름정리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증명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2부 정리3에 의해),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이 독특한 실재의 다른 관념에 의해 변주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앞의 정리9에 의해). 그런데 (2부 정리7에 의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에서 말하듯이 스피노자가 2부 정리3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면 신은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신이 전지한 것은 앞의 정리9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피조물들의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자리에서 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그런 것이다. 즉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변용된 한에서!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리9가 뜻하는 바를 더 정확히 해명하고 있다.

-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 : 예를 들면 내가 물컵을 보면서 갖는 관념. 그런데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여기서 어떤 관념은 정신이고, 인간 정신의 독특한 대상은 신체이다. 인간이 연장 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신체로 나타나고 사유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정신으로 나타나고 유니온에 의해 표현될 때는 코나투스로 나타나고. 그리고 정리10에서는 인간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인식을 갖고 있다, 무의식적 인식이든 비자각적 인식이든, 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어쨌든 2부 정리9 정리10 정리11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정신과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스피노자가 계속 정신과 신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을 어떤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는 뜻 그대로 하면 그냥 우리 정신, 어떤 관념인데 스피노자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서 이야기를 할까. 정리10에 가면 이 답의 실마리를 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10 인간의 본질에는 실제의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또는 실체는 인간의 형상forma을 구성하지 않는다.

 

정리10은 인간은 본성상 실체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은 2부 공리1에서 말하듯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본질로부터 따라나오는 신의 특성)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따라 나오는 명제다.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공리로서 제시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적으로 증명이 된 명제는 아니다. 2부 공리11부 정의1을 합쳐서 생각하면= 인간은 유한하다. 이걸 스피노자가 공리1로 깔고 2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공리1에서 정리10은 너무 쉽게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modificationibus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니까 따름정리를 정리10과 연결해서 요약하면- 1부 공리1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 아니면 양태다. 그런데 정리10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가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에는 뭐가 속하겠는가. 변용, 여기 표현대로라면 변양에 의해 구성된다. 그게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 modificatio modification 변양. 이 모디피카치오가 가장 처음 나왔던 것은 1부 정리8. affectio 변용과 같이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모디피카치오를 드물게 쓴다. 이 모디피카치오를 쓸 때의 용법을 보면 아펙치오와 별로 다르지 않게 쓴다. 변용, 양태, 이런 말들과 같이. 에티카에서 변용affectio, 변양modificatio, 양태modus는 같은 뜻으로 봐도 된다.

- substantia 실체 / affectio 변용 신과 다른 모든 것 (= modus 양태)

* 2부 정리14에 가면 물체 자체가 하나의 변용이고 여기에 또 변용이 일어나서 변용의 변용이 일어나는데 스피노자가 하필이면 이 물체가 겪는 변용에도 “affectio”라는 단어를 붙인다.

* 3부에 가면 affectus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감성, 정서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정신의 변용과 관련되어있다. 그러니까 단어는 둘 다 affectio인데 뜻이 다른 것.

- 들뢰즈는 양태와 변양을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의 한 양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양태인가?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양태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인간을 그냥 양태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된 게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을 단순히 정신과 신체와 같이 양태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그런데 들뢰즈가 보니까 스피노자가 모modusaffectio라는 말 외에 modificatio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그는 이 말을 채택해서 인간처럼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와 연장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변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만인가. 아니지ㅋㅋ 다른 존재자들도 관념과 물체가 다 합일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변양들 무한하게 많은 변양들이니까. 어쨌든 들뢰즈는 modificatio라는 말을 그런 용법으로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는 그런 용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 정리10의 주석

 

- 따름정리에 함축되어 있는 쟁점들을 풀어내는 것이 주석의 내용이다. 1) 분명히 모든 사람은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1부 정리15에서 제시한 명제이며,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 문제는 사람들이 1)2) 많은 사람은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없이는 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본질에 관한 통상적인 정의인 2)는 스피노자 2부 정리2에서 제시한 본질에 대한 정의와 매우 다른 것이다. 2부 정의2에서는 상호성이 있는데, 2)의 명제에는 그런 상호성이 없고 본질이 중심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2)는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즉 스피노자는 지금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질과 원인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읽어보면 사람들은 신이 본질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 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본질을 혼동하고 있다.

- 1)2)가 저렇게 연결되어버리면 3-1) “그들은 신의 본성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하거나3-2) “아니면 피조물들은 신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고 믿는 셈 같은 양지택일이 나오기 마련이다. 3-1)의 경우, 피조물의 본질에는 신의 본성이 속하기 때문에 피조물, 특히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 3-2)의 경우라면 피조물은,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따라서 마치 꼭두각시와도 같은 완전히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그리하여 그들이 충분히 일관되지 못, 곧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며, 이는 그들이 철학함의 순서를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제1원인이며, 따라서 인식이나 존재에서 제일 앞서는 것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혼동하며, 오히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원인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적 실재들에 대해 숙고할 경우 그들은 다름 아닌 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최초의 허구들, 곧 그들이 자연적 실재들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그 위에 쌓아올린 그 허구들/ 허구들이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 제일 원인을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길게 말한 바와 같이 신인동형론적 관점을 낳기 쉽다. 이런 허구적 관점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안티 스피노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ㅋㅋㅋ

 

과학적인 인식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아마 과학적인 지식이 많이 누적이 되더라도 그것이 철학에서 이해하는 제1 만물의 원인이라든가 세계의 근거라든가 그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양자역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 신자도 있을 테고ㅋㅋ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의 누적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1부 부록에서 길게 논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대신 왜 자신이 통상적인 본질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떤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것,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본질개념을 제시했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이는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과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 , 스피노자 자신은 실체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인식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독특한 실재들의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만 모든 독특한 실재의 원인이지만 독특한 실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면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정리8을 정리해보면,

-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양태들)의 관념들

이 두 가지가 대응관계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독특한 실재인데, 이것은 어떤 인상을 주냐면, 형상적 본질은 독특한 실재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데,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무관하게 양태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

 

* 정리8의 따름정리

1)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

-> 사물이 갖고 있는 현상적 본질

2)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 사물이 갖고 있는 현행적 본질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실재가 끝나기는 끝날 것인데, 언제 끝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 5부 정리21에서는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라면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고 과거 실재들을 회상할 수도 없다라며, 정신이 상상/기억/회상을 하는 건 신체의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리22에서는 하지만 신 안에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리21지속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고, 정리22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체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현행적: 지속. 신체 / 형상적: 영원. 신의 속성 안

- 5부 정리21, 22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현행적 본질은 지속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형상적 본질은 영원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실재는 지속의 차원에서는 현행적 본질을 갖는데 영원의 차원에서는 형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들 각자가 다 영원의 차원에서 (지속의 차원에서 갖고 있는 코나투스와는 또 다른)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을 포괄하는 것 아닌가? 지속도 영원에 포괄되는 것 아닌가?

- 또한 이렇게 되면, 플라톤이 감각적 세계와 형상적 세계/이상적 세계 두 개를 구별했듯이 스피노자도 지속의 차원과 영원의 차원, 현행적 본질의 차원과 형상적 본질의 차원 이렇게 두 개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플라톤주의가 되어버리는, 플라톤주의적인 세계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스피노자 철학이랑 잘 맞지 않는다. 1부 정리17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

- 여기서 보면 창조적 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신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 -> 곧 창조, 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지각하거나 식별하거나 발견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지성은 본성상 사물이 먼저이고 우리의 지성이 그 다음에 오거나, 혹은 동시에 온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적수들에 따르면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니까, ,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 지성이며,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플라톤주의적인 신학이다.

- 이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앞에서는 신의 지성을 창조적 지성이라고 했는데, 그와 다르게 신의 의지를 지성하고 구별하는 경우다. 그때는 신의 지성이 인식하는 것을 ideal type, 원형으로서 이해한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이 있고, 신의 지성이 그걸 인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창조한다. ideal type으로서의 원형들, 이데아들은 다 영원한 것이다. <- 이것 역시 플라톤적인 생각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초기 저작 중 하나인 <형이상학적 사유>에 나오는 구별법을 염두에 두는 것도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기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책이자 유럽철학계에서 아주 큰 명성을 얻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일종의 부록으로 덧붙여진 저작인데,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다. 스피노자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기보다 당대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철학 용어들을 정리해서 그 개념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으로 부르는 것은 스콜라철학을 말한다.

- 12.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 이런 것들만 봐도 플라톤주의는 스피노자 철학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정리17의 주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1부 정리33의 주석이나 정리31의 주석만 봐도 스피노자가 여러 대목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과 맞지 않는다.

- 플라톤주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신과 무관한 영원성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고, 이것은 또 뭔가 초월적인 세계를 상정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초기저작부터 계속 이런 초월성을 비판해왔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들이 많다.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정신하고 잘 맞지 않는다.

 

-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2부 정리8, 5부 정리21, 22에서, 스피노자가 영원성과 지속을 상당히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고 2부 정리8을 보면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아주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게 정리8이 매우 troublesome한 정리라고 말했던 이유다. 스피노자 철학하고 플라톤주의는 뭔가 잘 맞지 않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플라톤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런 이원론적인 모습들이 군데군데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과 지속,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 본질과 실존, 이런 식으로. 또 하나 유명한 대목은 1부 정리18에 나온다.

-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원인 개념을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내재적/ 타동적.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영어로는 transitive cause. 타동적 원인은 결과를 자기 바깥에 생산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외재적 관계가 있는 것. / 내재적 원인은 신이 자신이 생산한 결과를 신 바깥에 산출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 산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은 모든 것의, 즉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 자체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좋은 대목이다. 신이 만물에 내재적 원인이라면 만물끼리는 어떻다는 말일까?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 인과관계가 있는데 그러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거기에도 신과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가 있을까? 스피노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니까 신과 만물사이에는 내재적 관계가 있는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타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 여기서 1부 정리28을 찾아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1부 정리28은 바로 사물과 사물 사이, 특히 유한양태와 유한양태 사이의 관계를 아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정리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신과 만물 사이에는 내재적인 관계가 있는데, 각각의 사물과 사물들 사이에는 정리28과 같은, 타동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우주에는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 이 두 가지 인과관계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1부 정리18과 정리28에 나타난 이원적인 인과관계, 2부 정리8에 나오는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의 이원적인 본질 관계, 5부 정리21과 정리22에 나오는 지속과 영원의 이원적 관계...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은 한편에서 보면 매우 반플라톤적인 철학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여러 대목들을 보면 매우 이원론적인 것들이 있다.

 

-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는 일관성이 없다, 어디서는 이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영원성이라는 단어, 신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무신론자로 보일만큼 반신학적인 반기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에티카>15년이 걸린 책이기 때문에 쓰면서 초기 생각하고 후기 생각하고 많이 달라져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너무 편리한 방법이다. 어쨌든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게으른 사람들이다. 열심히 보면 충분히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다. (<- 이게 바로 학자들의 논쟁법이다ㅋㅋ)

 

*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같은 개념이라는 관점에 대하여

 

-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분명히 본질에 대해 두 개의 개념, formal essenceactual essence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스피노자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 같은 개념이다.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런데 우리가 후자처럼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 일단 우리가 처음에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눠서 설명하게 만들었던 그 대목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이것이 무슨 이야긴가. ”신의 속성 안에서만 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슨 말인가.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부 정리8의 주석2

- 하지만 변양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으로, []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실체]의 개념에 따라 그 개념이 형성되는 것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체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지성 바깥의 실체들의 진리는 오직 그것들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관념 대상들이 없는 관념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변양들이 지성 바깥에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그것들의 본질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변양인 한에서)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존하지 않는 변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라는 것은 뭘까? 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를 끄집어내보면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매우 다른 근거율을 제시하고 있다.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 별다른 이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가 더 당연한 상태니까)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신의 역량이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생산적 본질이라서 무엇이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게 없다? 있어야 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존재라는 것이 무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존재와 대립하는 형이상학적인 무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 무는 항상 실재 속의 무이다. 실재 속에 항상 있어야 했는데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

- 삼각형이 실존한다면 왜 실존하는지 그 이유가 필요하고, 부재한다면 부재의 이유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도 스피노자 근거율에 따르면 이유가 있다. 그냥 당연히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걸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 정리하면- 1부 정리8의 주석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에서 봤듯이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이라고 하면 그 변양들의 실존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 그렇다면 이 다른 것을 우리가 굳이 실체나 속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주석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빵학원에 다니면서 빵,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어제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내가 아이스크림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만들어서 다 먹었고 맛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게 됐다. ? 내가 먹었으니까. , 아이스크림이 부재하는 원인을 지정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살이 쪘다.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그 아이스크림은 뭔가 효과를 내면서 사라졌다(유령처럼 나의 뱃살에ㅋㅋ)

- 이 아이스크림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이다. 이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어떤가. 아이스크림은 실존하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지 않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분명 어떤 관념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 적합한 관념을 갖고 있다. 내가 원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는 것= 적합한 관념.

- 그러니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적합한 관념. 그리고 이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실재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이 독특한 실재를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형상에 대한 관념, 독특한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그 form, form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적합한 관념이다.

- cf) 데카르트 <성찰>에 유니콘의 예가 많이 나오는데 그걸 가리키는 스피노자의 용어가 있다. “사고상의 존재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ena rationis라고 쓴다.

 

*** , 정리하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에 대해 내가 관념을 갖고 있는데 그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나는 레시피를 갖고 있고 실제로 만들어서 성공을 했으니까.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은 뭐냐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

- 지금 이 독특한 실재에는 actual essence 현행적 본질은 없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현행적 본질은 없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독특하 실재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형상적 본질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걸까, 다른 걸까? 다르지 않다. 왜냐면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

- 그러니 우리가 형상적 본질을 뭔가 초월적인 것이라든지, 뭔가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 예에서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이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행적 본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 4부 정리4와 증명으로 가보자.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능동적일 수 없다), 그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그러한 변화들만을 겪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인간은 항상 외부원인에 의한 작용을 겪는다)

- 증명을 가면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보존의 역량은 신의 일부, 자연전체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현행적 본질이라는 말을 딱 두 번 쓰는데 3부 정리7과 바로 여기, 4부 정리4의 주석에서다. 두 번 다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역량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 곧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다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원인으로서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 전체의 원인의 역량의 한가지 표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스피노자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자연전체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물과 땅과ㅋㅋ 모든 것들이 다 기여한 덕이다. 좁게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선생님과 이 강의를 알게 해준 사람들 같은 여러 외부 원인 덕분이다.

 

***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는 영원의 차원에 있고 속성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지속의 차원에 있고 유한성의 속하는 두 개의 본질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대목들을 참조하면 꼭 그렇게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정신, 지양에 더 잘 들어맞는다. 앞으로 우리가 더 나아가다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기회들이 계속 있을 것이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의 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