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 animata

 

- 그런데 이 문장에서 다소 불분명한 것은 스피노자가 왜 정신화되어 있다고 할 때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2부에서부터 5부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가리킬 때 일관되게 ’mens‘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정서 내지 정념과 관련해서는 animus, 곧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면 여기서는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영혼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anima라는 명사의 동사 형태인 animata(동사 기본형 animo)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역시 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 ‘영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anima생명의 원리’, 곧 신체가 움직이고 활동하고 생존할 수 있는 원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렇게 기존의 anima, 영혼이라는 개념이 식물이나 동물, 인간의 생명 원리로 이해되면, 스피노자가 <에티카> 1부 정의2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그리고 각각의 속성에 속해 있는 물체들과 관념들의 독립성, 상호 작용 불가능성이라는 기본적인 존재론 원리에 위배된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2부 정리35의 주석에서 anima의 전통적인 용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anima라는 용어는 단 3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 사실 스피노자가 “anima”라는 용어를 쓸 때는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왜 스피노자가 비일관성의 위험을 무릅쓰고 animata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신조어를 사용하지 않는 스피노자의 용어법과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늘 기존에 사용되는 철학, 신학, 정치학의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되, 이 용어들에 자신의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cf. 3[부록] 20항의 해명’). 이는 자신이 비판하거나 해체하고자 하는 기존 철학의 담론과 문제설정 내부에 위치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적 전략을 수행하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기존 철학과 동일한 용어, 동일한 개념, 동일한 어법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내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animata라는 기존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통상적인 용법과 달리 신체의 생명원리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을 가리키는 뜻을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다른 개체들에게서 신체와 합일되어 있는 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 및 다른 개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질적 차별의 관계가 아니라 정도상의 차이의 관계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나오는 문장들은 이러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다.

 

- mens 정신. 어떤 인식 작용, 지각 작용, 의지 작용과 관련해서 많이 쓰는 단어

animus 정서 정념 정서적인 어떤 작용

 

animus마음이라는 말에, mens정신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마음정신은 다르니까. 우리가 마음이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정신이 지옥이다/ 정신이 괴롭다같은 말은 잘 쓰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정서와 감정에 연결해서 쓰기 때문이다. 반면 mens는 인식/지각/의지 작용에서 많이 쓴다. 이를테면 정신 똑바로 차려!“ (물론 조금 예외적인 쓰임새로 마음대로 해라가 있다)

 

anima: 영혼. 이때 영혼은 생명, 생명의 원리. 이런 것을 가리킴.

animata는 동사 animo의 수동형으로 animo : 생기를 불어넣다 활력을 주다

animata :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생명을 얻다. 생기를 얻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anima를 쓸 때는 스콜라 철학 anima라는 말, 그러니까 이 단어의 원래의 뜻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이다. ‘정신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단어를 스피노자는 스콜라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썼다. 그 뜻은 무생명체도 영혼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생명체도 정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는 오직 생명체에만 아니마타를 결부시키는데 스피노자는 이 아니마타를 다른 모든 개체, 무생명체까지에도 다 결부시킨다.

 

- 스피노자는 anima라는 말을 딱 세 군데에서 쓴다. 2부 정리35의 주석, 3부 정리57의 주석, 5부 서문 데카르트의 정념론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그가 아니마라는 용어를 쓸 때 용법들을 보면 다 비판적이다. 그런데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는 비판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아니마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왜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른 표현을 쓰지 않고 아니마타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면-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이런 사례가 2부 정리44의 따름정리2에도 나온다. ”sub (quadam) aeternitatis specie“ 영혼의 관점. 이것도 스피노자가 만든 말이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영혼의 상하라고 번역했는데 subunder라는 뜻이고 specie가 양상이라는 뜻이라서 그냥 그 말 그대로 조합해서 상하라고 했다.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고 상관없는 번역. sub specie는 사실 관용적인 표현이다. ~한 관점에서 ~한 측면에서라고 할 때 쓰는 말.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져다가 영원의 관점에서라고 쓴 것이고 이 표현은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래서 라틴어 사전에 sub aeternitatis specie를 찾으면 스피노자가 바로 나온다

 

- 어쨌거나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고, 기존 철학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거기에 아주 다른 새로운 자신의 용법을 불어넣는다. 이게 스피노자의 아주 중요한 점이다. 기존의 용어를 가지고 와서 자기 철학의 용어를 불어넣는 것.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데리다와 아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deconstruction 기존의 철학담론의 해체하는 작업. 물론 데리다는 신조어를 굉장히 많이 만드는 철학자이지만. 실체, 속성, 양태 같은 용어들도 데카르트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데카르트는 이 실체 개념을 쓰면서도 그것을 일관되게 끝까지 쓰지 못한 사람이다. 5부 서문에서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전혀 다르다고 하면서,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본인 스스로가 사유속성 연장속성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고, 인간을 이야기할 때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도입한 사람인데 그런데 관되지 않다. 반면 스피노자는 그 원리를 아주 끝까지 밀어붙여서 데카르트 철학을 비판하고 홉스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넘어선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의 용어법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 이런 관점에 비춰보면 이 아니마타라는 개념도 스콜라 철학, 데카르트가 쓰는 용어를 가지고 와서 이들이 생각지 못했던 개념까지 이 단어를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용어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하고 다른 개체들이 정신화되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인간하고 비인간 무생명체 사이의 질적인 차이,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해야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걸 별로 안 하고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일이긴 하다. 논문 쓸 게 많아지니까ㅋㅋ 스피노자는 주석의 그 다음 부분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부연한다.

 

*

하지만 우리는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를 가져와서 자기 이야기식대로 확 바꾼다

 

-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에 따라 관념으로서의 정신의 대상, 곧 신체의 실재성의 정도에 따라 실대성도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으로서의 정신들 사이의 차이는 정신들의 대상을 이루는 신체들(또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1) 스피노자에게서 신체들 또는 물체들만이 아니라 정신들 내지 관념들도 서로 다르다는 것. 곧 서로 구별되는 개체성 내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2) 정신들의 이러한 개체성 내지 독특성은 신체들의 차이에 의거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제기되어 온 오래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 내지 개체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이는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유래하며 18세가 반스피노자주의 저술가들(여기에는 라이프니츠주의자들, 말브랑슈주의자들, 뉴턴주의자들이 망라되어 있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으며,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와 헤겔에 와서 철학적 영향력을 얻게 된다.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스피노자주의와 반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들이 있지만 특히 Jonathan Israel, <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2부 정리13의 주석의 이 대목 및 뒤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이다.

 

-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유명한 전통적인 비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가 없다. 실체만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서양학문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인데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스피노자에 대한 항목이 몇 십 페이지에 걸쳐 있는데 여기서 벨이 스피노자에 했던 비평이 후세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벨의 핵심들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체도 없고 자유의 여지도 없다는 것. 뭔가 어떤 아주 현명하고 자비로운 신 개념을 설정해야 어떤 개체들간의 차이도 설명할 수 있고 자유도 설명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 철학에는 맹목적인 필연성만 존재하고 자연 전체의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의 차이도 자유도 없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이 18세기에 상당히 널리 확산된다. 특히 라이프니츠 추종자, 말브랑슈의 후예들 심지어 뉴턴의 추종자들에 희애 반스피노자주의가 확산되는 것. 18세기 말이 되면 독일의 프리드리히 야코비Friedrich Jacobi라는 신학자가 독일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을 정립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코비의 책은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스피노자의 학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야코비의 스피노자 비판은 독일관념론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대논리학이나 철학사 강의 등에 스피노자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이것 역시 철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스피노자의 철학에 개체도 없고 자유의 의지도 없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 된다.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신학정치론>이다. 물론 신학정치론의 논점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모세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가 야만적인 히브리인들을 이끌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오랫동안 번영시키고 안정되게 이끌었다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신학정치론에서는 예수도 매우 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은 다 상상력만 뛰어났지 지적으로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예수는 철학적이기도 했고, 다른 예언자들과 다르게 신학으로 소통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사기꾼>은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정치론에서 많은 인용문을 가져오고 있지만 스피노자보다 훨씬 래디컬한 종교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읽어보면 재미있고 시원하다ㅋㅋㅋ 아주 신랄하고. 이 책이 워낙 유명해서 스웨덴의 여왕이 이 책을 구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다는 일화가 있다. 검열도 심했고 발견 즉시 다 압수해서 불태워버리는 그런 책이었기 때문에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는데 돈을 굉장히 많이 들여서 결국 구해서 봤다고.

 

- 아무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저 비판들은 그의 사후부터 계속 따라다녔던 비판들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과 관련해서 보면 바로 이 관념들이 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며, 한 관념의 대상이 다른 관념의 대상보다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 그 관념이 다른 관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 표상적 실재성). 이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인간 정신이 다른 정신들과 다르고 다른 정신들에 대해 우월한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 대상, 곧 인간 신체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하는 이야기)부분의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다 이 부분을 부연하고 보완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인간 신체의 본성에 대해 알아야하지만, 이 책은 자연과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니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피하겠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같은 사람에게 자연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이 또한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죽 논증하는 책 한 권을 따로 써야한다. 그래서 일단 이 <윤리학> 책에서는 자세한 논의는 넘어가고 이어지는 정도로만 말하겠다면서, 물체/신체의 우월성이 어떻게 정신의 우월성과 연결되어있는지 간략하게 자신의 논점을 제시한다.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2) 그리고 어떤 물체의 작용이 그 물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지며, 그 물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 자기 의존에 의한 논변

물체/신체 : 어떤 물체/신체의 작용이 그 물체/신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 작용하기 위해 그 물체와 함께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더 적어진다.

물체/신체의 정신 : 그 물체/신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판명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능동적이면 능동적일수록 신체도 정신도 능동적.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능동” “수동의 의미는 3부에 가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는 아직까지는 스피노자적인 그 능동/수동이 아니다. 이 능동/수동을 잘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3부에 가면 더 보게 될 것이다.

 

- 1)2)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 하지만 1)은 어떤 물체/신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 그리고 이것과 합치하는 정신의 지각능력을 가리키는 데 반해(cf. 2부 정리29 및 따름정리와 주석) 2)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어떤 물체/신체 및 정신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물체/신체는 수동적이면서도 1)과 같은 여러 가지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이는 물체/신체가 능동적이면서 1)과 같은 능력을 갖는 것보다 못하다. 더욱이 물체/신체는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1)의 측면에서도 작용 및 수용 능력이 다면적이지 못할 수 있다.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만 여전히 수동적인 경우

작용 및 수용의 능력이 다면적이면서도 능동적인 경우

(여기에 작용 및 수용이 다면적이지 못하지만 능동적일 수는 없나? 다면적이지 못하면 수동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가 우리 신체에 대하여 완전히 혼동된 관념밖에 갖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내가 뒤에서 이로부터 연역해낼 다른 여러 가지 것도 이해할 수 있다2)에서 유래한다. cf. 2부 정리29와 따름정리, 주석, 2부 정리40의 주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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