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20 ”신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증명 신과 (앞의 정리에 의해) 그의 모든 속성들은 영원하다. (정의 8에 의해) 신의 각각의 속성은 실존을 표현한다. 따라서 (정의 4에 의해) 신의 영원한 본질을 설명하는 이 동일한 신의 속성들은 동시에 신의 영원한 실존을 설명한다. 곧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것이 동시에 신의 실존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신의 실존은 영원 진리다.

따름정리2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도 따라나온다. 2.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불변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실존의 관계에서 변화된다면, (정리 20에 의해) 또한 본질의 관계에서도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명증한 것처럼) 참이 거짓이 되어야 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

 

* 1) 1부의 전반부: 정리1~정리15

- 우주의 논리적 구성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의 우주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다.

 

2) 1부의 후반부: 정리16~정리36

- 만물의 근원인 실체와 신, 신과 만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신이 산출하는) 무한한 만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것.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신이 어떻게 산출하는지)

 

* 1부 정의3 실체에 대한 정의 + 정의5 양태에 대한 정의 +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다.“

*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 = 만물

* 정리18: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일시적 원인 이행적 원인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이 외재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바로 신이다.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는 외재적이고 타동적이지 않다. 1부 정리15을 염두한다면 정리16은 사실 당연하다. //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 역으로 말하면, 신은 만물에 내재해있다.

 

* 정리21~23: 스피노자가 양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대목. 무한양태에 대해서도. 그동안 우리가 양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1부 정의5, 공리1이 전부였다.

* 정리24~25에서 어떻게 신이 만물 안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작용하는지 부연한다

 

* 1부 정의5에서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이 매우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데카르트에 비해서도 독특하다. 라틴어의 Modus. 방식. 데카르트는 양태를 물체의 색깔이나 촉감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개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모드라고 한다.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과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

 

*** 여기에 더해 스피노자 양태 개념의 충격적인 점은 바로 정리21~23에 걸쳐 나오는 무한양태 개념이. ? 양태는 어디에 의존하고 있고 실재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닌데 이걸 무한하다!라고 말하니까. 유한한 양태라는 것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무한하다니. 이 무한양태 개념은 스피노가 실체가 우주 전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유한양태에 말하기 앞서서 무한양태를 21~23에서 말하고 있다.

 

정리21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실존해야 했으며 무한한 것이어야만 했다. 또는 이 동일한 속성에 의해 영원하고 무한하다.

 

- 항상 실존했고 실존하고 있고 -> 영원하다는 이야기. 무한하다는 이야기.

- 무한양태의 무한성과 영원성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갖게 되는 것. 만약 자기 자신에 의해 무한성 영원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실체다. 그러나 양태라는 것은 정의5에서 실체의 변형.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이때 다른 것이 바로 실체. 실체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것. 즉 여기서 갖는 양태의 무한성은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 , ”신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무한하고 영원한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정리22 “신의 어떤 속성이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한에서, 그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해야 한다.”

 

-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정리21의 무한양태

- 변양: modification 모디피카치오 (정리8의 주석2에 나온다). 스피노자는 양태(모두스)라는 말을 더 자주 쓰고 변양(모디피카치오)는 거의 쓰지 않는데 변양과 양태를 같은 의미로 쓴다. 여기서는 양태라고 쓰지 않고 변양이라고 썼다. 양태라고 썼으면 덜 헷갈렸을 텐데ㅋㅋ

 

1) 속성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실존하고(=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 속성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변양된다)

2) 그리고 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이 속성으로부터 -> 또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가 따라 나온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다

1) 신의 속성으로부터 직접 따라 나오는 무한한 양태

2) 이 직접 따라 나온 무한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무한한 양태

*** 스피노자 연구자들끼리 1)을 직접적 무한양태, 2)를 매개적 무한양태라고 부른다.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해서 따라 나오는 무한양태기 때문에.

 

***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또 없는가. 없다. 뭐가 나올 것도 같은데. 이를테면 유한양태. 여기서 유한양태가 따라 나올 것도 같은데. . 유한한 양태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 누가 이렇게 생각했냐면 헤겔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신-> 속성->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유한양태, 이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우주가 환원하는 순서다, 라고 말했다. 완전한 신에서부터 덜 완전한 속성, 덜 완전한 직접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매개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유한양태 순서로.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끝이다.

 

***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은 그냥 속성과 다른가. 다르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이라고 스피노자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면,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한에서 속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다 원인은 속성이다. 출처는 속성.

*** 가령 연장속성을 예로 들면, 스피노자가 직접적 무한양태를 운동과 정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물질적 우주에서 바로 따라 나오는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운동과 정지.

*** 스피노자가 생각한 직접적 무한양태는, 속성이 갖게 되는 특성 중 하나다. , 직접적 무한양태를 산출하지 않으면 이 속성은 속성일 수 없는 것. 어떤 속성이 속성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산출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물질이 물질이려면, 물질은 운동을 해야하고 정지를 해야 한다. 이 운동과 정지를 스피노자는 연장이라는 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라고 보는 것이다. 물질은 항상 운동과 정지 중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매개적 무한양태는?

- 2부 정리14 보조정리의 주석(55P) : 어떤 개별적인 개체라는 것은 복합물체. 개체들이 모여가지고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 상위의 개체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렇게 죽 나아가다보면 자연전체를 하나의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다. 자연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물체들은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된다그러니까 단 하나의 개체로 사고되는 자연,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스피노자는 슐러에게 보내는 예순네 번째 편지에서 이것을 우주전체의 모습이다라고 이야기 (강의록 10)

 

- 여기서 말하는 우주전체는 실체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연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전체로서의 자연. 실체는 개체가 아니다.

- 부분과 전체를, 스피노자는 notion이라고 부른다. 통념이라고 부르지, 부분-전체를 real thing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분과 전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상의, 상대적인 부분과 전체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체로서 인식된 자연전체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다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태양계, 은하계, 우주 이런 것들. 우리가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물체들.

- 사람-> 국가-> 지구-> 태양계 -> 우주, 이런식으로 죽 나아가다보면 이 자연 안에 우주라는 것을 여러 개의 개체들이 합성해서 만든 최상위의 개체처럼 인식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하지만 이 최상위의 개체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동일하지 않다. ?? 이것은 원인이 아니니까.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으로서의 실체가 생산해낸 결과다.

*** 직접적 무한양태도 매개적 무한양태도 실체가 원인. 이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는 결과들의 집합이지, 여기에는 논리적으로서의 원인은 빠져있다.

- ”매개로 해서원인으로 해서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분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주전체 모습이라는 것이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원인으로해서 따라나오는 게 아니다. 우주전체 모습의 원인은 속성이다. 이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라는 매개로 해서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연장속성이 원인이 돼서따라 나온 결과가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원인으로서의 연장개념이다. 1부 정리14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이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물질적인 자연, 내재적 원인이 없고 내적 동력이 없는 기하학적 자연. 여기서 운동이라는 것은 단지 위치이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처럼 연장이 신의 속성이 되면, 그러니까 물질적인 연장이 신의 바깥이 아니라 신의 안에 들어와 있고 신을 구성하는 것이면, 신이 갖고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 자연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자연이 아니라 무한하고 다이나믹한 동력학적인 자연. 그러니까 연장개념이 없으면 운동과 정지는 단지 기하하적인 장소 이동, 위치 이동에 불과할 텐데 스피노자에게는 연장개념 자체에 동력학적인 원인개념이 들어가 있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운동과 정지 역시 동력학적인 것이 된다. 이게 두 사람의 차이이며,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에 원인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근거.

- ”운동과 정지를 전제로 했을 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공간이라는 것은? 정리15에서 스피노자와 데카르트는 진공을 부정했다. 진공을 부정했다= 우주 전체가 물질로 가득 차있다, 충만하다, 공백이 없다. 그러므로 연장이라는 것 자체와 공간은 구별이 안 된다. 공간 자체에 다 물질이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 정리21의 증명

첫 번째 부분: 무한성 증명/ 두 번째 부분: 영원성 증명

-”신의 관념에서 주의해야할 점! 신의 관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념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 스피노자는 2부 정리3과 정리4에서 이 신의 관념이 무한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연장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가 운동과 정지라고 이야기했다면, 사유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무한지성이다.

- 그렇다면 사유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는 뭘까? 아무도 모른다. 다 추측만 할 뿐이다. 이것은 다 슐러라는 사람 때문이다ㅋㅋㅋ

- 63번째 편지에서 슐러는 직접적 무한양태와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를 알고 싶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64번째 편지에서 답을 한다.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들로는, 사유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지성이 있고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가 있습니다.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로는 우주 전체의 모습이 있는데 이는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됨에도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

- 이상하지 않은가. 두 번째 정리의 사례로 우주전체의 모습 하나만 이야기했다. 슐러가 한 번 더 편지를 보냈어야지! 선생님, 하나 빠지셨는데요? 사유의 경우에 매개적 무한양태가 뭔지 말씀해 주셔야죠, 라고 질문을 했어야지. 이거 분명 궁금했을 텐데. 이게 지금 사람들을 몇 백년째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주석가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이게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은 평행론에 따라서 우주전체 모습의 관념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가 이 하나를 가지고 두 개 모두에 답했다(연장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사유에도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왜 여기에서만 찾냐 5부에서도 찾자고 하고 제각각이다. 그래서 논문 쓰기 굉장히 좋다ㅋㅋㅋ 스피노자가 아무 이야기도 안 했으니까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생겨나는 시간과 소멸하는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것 = 기원과 종말이 있다는 것. 시작 이전과 끝 이후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때는 사유속성으로부터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가. 따라 나오겠지. 하지만 신의 속성과는 무관하겠지.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가진 신의 관념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가설에 모순이다.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의 관념이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하려면 무한해야 한다(귀류법)

- 창조론은 우주의 영원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신 이전에 무가 있었어야 하니까. 창조라는 시작이 있어야 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정리23: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모든 양태는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거나 아니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어떤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다.”

 

정리24-29는 유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딱 부러지게 유한양태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어쨌든 정리28, 28가면 singular thing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정리24: “신에 의해 생산된 것들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신이 단지 생성원인일 뿐 아니라 존재원인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이나 신체, 인간 같은 개별적 존재자를 유한실체라고 간주하고 있고, 신에 의해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자기 스스로 실체처럼 존립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의5, 공리1, 정리15에서 일관되게 실체와 양태를 구별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스피노자에게 신을 제외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더욱이 유한실체는 논리적 모순에 불과하다(양태도 무한한데, 실체가 유한할리가!!!).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신에 의존한다면,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처음 생성될 때만이 아니라 생성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 이것이 따름정리의 의미다.

- 정리25에 가서 다시 할 이야기지만, 마지막 문장처럼 이야기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개체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자립성을 박탈한 것처럼 보인다. 생성될 때뿐만 아니라 재생산될 때도 지속될 때도 항상 신이 있어야 존립할 수 있으니까. 신이 없으면 유한한 양태들은 존립할 수 없으니 매순간 신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니까 비실재적, 비자율적으로 보이는데. 정리25로 가보자.

 

정리25: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존재하는 개체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이다.

- 정리15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데, 이유는, 정리15가 신과 만물 사이에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제시한 명제라서 그렇다. 정리16부터 정리36까지가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 증명할 때 다 정리15로 돌아간다. 정리15가 이하의 논의들의 출발점이라서.

- 정리24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정리25는 플라톤주의를 겨냥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의 요체는 이데와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 이게 중세철학에서 나타날 때는 영원한 본질의 세계와 유한한 실존의 세계로 구별이 된다. 본질이라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사물의 본질과 실존은 엄밀히 구분된다. “사물들의 실존이 시간적이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것이라면, 사물들의 본질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원형(이데아로서)에 입각한 것으로 영원히 존립하는 것이다

- 신이 창조한 것은 사물들의 실존. 사물들의 본질은 스콜라 철학식으로 말하면 가능태로, 잠재태로 있는 것. “possibility 가능태로 존재(본질) + 신이 existence를 부여 -> actuality를 갖고 현실태” -> 이게 바로 창조. 본질 자체는 actuality는 없지만 possibility 가능태로서는 계속 영원히 존립하고 있다

- 스피노자는 정리25에서 이러한 플라톤주의 모델을 반박한다. “하지만 증명에서 공리4와 정리15에 근거를 두고 있듯이, 스피노자가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한에서, 사물들의 본질이 신이라는 궁극적 원인과 무관하게 영원히 존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이 만물의 실존만이 아니라 그 본질들에 대해서도 작용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석에서처럼 기분 나쁠 때는 생산 안 했다가 기분 좋을 때는 생산했다가 이런 거 아니고 만물을 필연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넘치도록 전능해서. 무한한 생산자로서.

 

-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개체들로부터 일체의 독자적인 실존과 행위의 역량, 또한 사유의 역량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인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들은 아무런 자율성과 실재성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으니까. 신은 만물의 존재의 원인이자 지속의 원인이기도 하니까. 신 없이는 인간은 아무런 역량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이라는 점이다.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은, 신의 속성이 지니고 있는 본성, 곧 그의 무한한 역량을 양태들 역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중세식으로 말하면 분유’)할 뿐이다.

 

*** 스피노자의 존재론의 윤리적인 함의를 이야기할 때 항상 유념해야할 점

- 신이 양태하고 맺는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스피노자식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양태들이 표현한다’, ‘신이 양태들의 원인이다’, ‘신이 양태들의 실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본질의 원인이다’, ‘양태들을 생산한다같은 표현들에서 나오는 신과 양태의 관계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신은 양태들에 있어서 타자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자, 어떤 개체 사물과 타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항상 염두하는 것인데, ‘유한하다는 말은, 자신과 타자의 것에 대해서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자신의 타자를 전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유한한 사물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동물을 먹기도 하고 식물을 먹기도 하고, 먹고 먹히는 생태 사슬을 거부할 수 없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존재하려면 타자와 positive한 관계만 맺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유한자와 타자의 관계의 기본적인 측면인데-

 

-신은 그렇지 않다. 신은 무한자다. 신은 어느 경우에도 양태를 배제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신은 양태들로부터 무언가를 뺏거나 박탈하지 않고 양태들에게 항상 근거와 역량을 제공한다. 존재할 수 있는 역량,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주는 존재. “신은 타자가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신과 양태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다. 신은 양태에 대해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으니까. 신은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무언가를 제한하고 박탈하는 게 아니라.

-문제는 양태가 신으로부터 신의 절대적인 무한한 역량을 다 갖고 올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게 바로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의미.

- 그러니까 양태의 자율성의 근거!!는 신이 준 긍정성과 역량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는 점. 물론 그걸 얼마나 표현하는지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개체마다 다르지만. 나중에 가면 코나투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역량. 그러니까 신과 피조물, 신과 양태들과의 관계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 ‘실체가 양태의 원인이다라는 말과 실체가 양태의 본질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신은 양태의 원인이기는 해도 양태의 본질은 아니다. 양태는 각각 개별본질이 따로 있다. 이 개별본질이 코나투스. 양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립하려는 노력. 양태들의 본질이 코나투스.

- 그 근거를 꼭 으로 놓았어야 하는 이유. 이 당시에는 신이 만물의 근거, 만물을 사고하기 위해 거쳐가지 않을 수 없는 전제였기 때문에 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 당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를테면 동양철학자였다면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자연만 이야기한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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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지난 시간 강의 again)

- 이사야 벌린의 아주 유명한 <자유에 관한 에세이 4Four Essays on Liberty(1969)>

- 예전에는 “liberty”를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요즘은 “freedom”을 더 많이 쓰는 추세

 

*** negative liberty 소극적 자유:

- 핵심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로부터의 자유. 자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소극적 자유의 대표자로 스튜어트 밀, 칸트를 꼽았다.

- 다른 연구자들 중에는 소극적 자유를 근대에서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홉스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많다. 토마스 홉스: “장애물이 없으면 자유다

 

*** positive liberty 적극적 자유:

- 간섭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이것만 가지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

-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정신적, 도덕적 이런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고귀한 목표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자유다

이 예로 드는 것이 루소와 스피노자

 

*** 냉전자유주의 : 벌린 같은 사람을 우리는 냉전자유주의라고 부른다.

- 냉전: 1940년대 말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고 ->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는 것을 냉전이라고 하는데.

- 냉전자유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서서 자유세계, 서구에서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들: 칼 포퍼는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두 권짜리 책이 대표작에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우두머리로 지목,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열린 사회를 주창한다(1권에서는 플라톤, 2권에서는 막스 헤겔에 대해 비판) 프랑스에서는 레이몽 아롱 Raymon Aron,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가 대표적. 그가 1944년에 쓴 <노예의 길>은 미국에서 수십 만권이 팔리며 그를 아주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이자 사회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이사야 벌린.

- 이들 모두는 다 냉전시대에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자유주의의 특징은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선 이념적 가치로서의 자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요쟁점으로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 그게 공산당이 됐든 국가가 됐든 상위세력들이 개인의 자유들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로서의 소극적 자유는 1980년대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 그러나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고 신자유주의가 약속과는 다르게 사회를 엄청나게 불평등하게 만들다보니, 소극적 자유개념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팽배해졌다.

그러다보니까 소극적 자유 개념에 대한 불신 회의가 팽배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자유의 개념이 소극적 자유의 개념.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가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반박할 때, 그릇된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소극적 자유 개념이다. 신이 전능하거나 자유로운 사람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신의 자유로움을 신이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자유로움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그 안에서 제약을 받으면 자유의 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니냐고 착각한다.

- <신학정치론> 6장의 제목이 [기적에 대하여]인데, 이것은 기적이라는 개념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기적이라는 것이 자연적 법칙이나 현상을 위반하는, 그런 법칙이나 현상이라고 믿기 어려운, 성경의 바다가 갈라진다거나 여호수아가 해를 지지 않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인데,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자유라고 착각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조차도 넘어설 수 있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들을 자유와 전능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 2부 정리3의 주석에서 포테스타스 개념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신의 전능을 왕의 힘과 비교한다. 왕이 자기 마음에 들면 법을 세우고 내키는대로 법을 폐기하고 막 이런 것.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개념 대비.

- 스피노자한테 자유라는 것은, 정의7에서 그 개념을 제시했듯, 본성의 필연성에 입각해서 행위하고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입장에서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신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다른 존재, 타자에게 제약돼서 실존하고 행위하고 작업하도록 되어있다. -> 스피노자에게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는 즉, 타자가 없는 것. 타자 없이 자기원인에 의해서만, 자기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행위하는 것,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 같은 자유원인은 부조리한 것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비판

 

- 여기서 스피노자가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릇된자유개념은 데카르트의 개념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간한 책에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16304월과 5월에 메르센 Mersenne 신부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 적혀있는 영원진리창조론. 그에게 영원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전능함이었다. 영원진리조차도 신에 의해 창조됐고, 신이 그러려는 의지만 있다면 이 영원진리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신은 그 정도로 파워가 있다!는 내용인데 즉 영원진리창조론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려는 것이 바로 저런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한 거부다.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는 것.

 

- 데카르트의 이야기가 너무 신학적이고 어이없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형이상학적으로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진리가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 아닌가. , 진리를 규정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 니체식으로 이야기하면 진리를 규정하는 권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권력에 의해 진리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후대에 가서 니체가 됐든 막스가 됐든 프로이트가 됐든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경로가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 이를테면 프로이트의 유명한 말, ”무의식은 모순을 모른다“. 이때 모순은 모순율이다.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영원진리 중 하나가 모순율인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모순율을 모른다, 모순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차원의 일이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루어진다는 것. 물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고유한 규칙이나 매커니즘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 133의 주석에 가서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정리17 주석의 또 다른 논점은,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아,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 정리15의 주석에서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연장의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정리17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의 본질과 엮어서 말하고 있다.

- 한 사람의 실존이 생성 성장 소멸 변형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본질은 다 똑같다(사람의 본질은 영원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본질에 관해서는 이들 모두 완전히 합치할 수 있지만 실존 속에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실존이 사라진다해도 다른 사람의 실존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의 본질이 파괴되고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사람의 본질 역시 파괴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사람이라는 본질이 사라져버리면 다른 사람이라는 본질도 사라져버린다. 구멍이 난다. 진공이 생긴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 코나투스

- 코나투스라는 개념은 라틴어로 말하면 노력. “존속하려고 애쓴다”. 이 코나투스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평범한 말이다(사실 나는 존속하려고 애쓴다는 말을 듣자마자 매우 울컥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평범한 말을 잘 뜯어보면 참 신기한 단어다. 존속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농담 삼아 왜 사니이런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산다는 것은 굉장히 평범하지만 굉장히 심오한 활동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아주 이상하다. 왜 살까, 도대체. 누군가는 죽지 못해 산다고도 하는데, 그 죽지 못해 산다는 것도 참 신기한 것이다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 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아래에는, 근저에 있는 현행적 본질은 코나투스에 있다고 말한다. 살려고, 존속하려고 애쓰는 것. 참 평범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참 신비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 산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영원성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존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사르트르가 스피노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 정리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 타동적 원인 causa transiens : 자기 바깥에 결과를 생산해내는 원인.

신에게는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동적 원인일 수 없다.

 

* 정리19: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 데카르트의 관념이론 중에서 흥미롭고 스피노자 철학에도 영향을 준 용어법이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 formal reality objective reality. 데카르트가 objective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표상적이라는 뜻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이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는지 정리된 것을 읽어보면 낯선 용어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이런 걸 보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이후에 우리의 인식의 지평이 너무 좁아졌구나, 칸트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용어를 써가면서, 신을 호출해가면서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 사유의 영역을 막 제멋대로 상상했는데 칸트 이후에 그 반경이 너무 좁아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칸트의 불가지론, 우리는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이라 현상세계에만 국한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이 독창적이지만 인식의 범위를 이렇게 딱 정해버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다 가상이다, 라고 인식의 범위를 좁혀버린 그런 점에 있어서 아쉽다(존재 자체, 존재 너머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괄호로 묶어 본문 밖으로 빼어버린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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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잇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1-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자연, 우주라고 하는 것의 논리적인 구조. 유일한 실체로 되어있고 그 유일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 정리16부터 시작되는 후반부에서는, 그러면 이 유일한 실체로서의 자연이 만물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자연의 인과구조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1부 후반부에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 정리16에서부터 바로 생산(=“따라 나와야 한다”)에 대한 이야기.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

- 증명: 어떤 사물 어떤 실재가 실재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실재가 포함하고 있는 특성은 더욱 많다. 그리고 신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그 속성 각각은 또 무한하니까 ->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2 신은 자신에 의한 원인이지 우연에 의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름정리3 신은 절대적으로 제일원인이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 작용인 causa efficiens 카우자 에피키엔스 (efficient cause) : 동사로 하면 에피케네. 이 말은 말 그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이라는 뜻이다. , 작용인은 어떤 결과를 산출해내는 원인이라는 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 신은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작용인: 신이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해낸 원인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정의 16에서 벌써 원인에 관한 몇 가지 표현들이 나오고 있다. 강의록을 보면.

-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쓰기 전, 초기에 썼던 <소론>에 보면, 당시 대학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철학에서 상당히 널리 쓰이던 원인개념의 분류법들을 스피노자가 차용을 해서 8개의 원인을 구분하고 있다. 특히 이 작용인이라는 것을 8개의 원인으로 구분해서 제시하고 있다.

- 네덜란드어로 원인개념들이 적혀있는데, <소론>은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것이지만 그 라틴어 원본은 사라지고 1861년에 네덜란드 번역본판이 발견된다. 이것도 스피노자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쯤 지난 후이다. 라틴어 원본은 아직 못 찾았다. 이거 발견하면 큰 돈이 될 텐데 유럽에 가시면 헌책방 이런 데에 이 책이 있나 한 번 찾아보자ㅋㅋㅋ

 

2. 그는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실행하지 자기 바깥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신은 자유원인 free cause이지 자연적 원인이 아니다

자유원인: 이성 or 원리에 합당하기는 하되, 자신에게 외재적인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원인

필연적인 혹은 자연적 원인: 자신 바깥에 있는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는 원인

-> 신은 자유원인이다. 이성에 맞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신이 그 법칙을 만든 것이니까. 신이 그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사물들은 신이 만들어놓은 그 법칙에 종속되니까.

5.

8. 신은 무한하고 부동적인, 그리고 우리가 그가 직접 창조했다고 말하는 실재들의 가까운 원인이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이다.(“떨어져있는 원인” “가까운 원인은 스콜라철학의 용법. 나중에 2부 정리 후반부에 다시 언급된다)

 

- 가까운 원인:

*** 매개 없이 직접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 불과 열의 관계(, 유출적 원인이랑 비슷한 개념)

*** 정리15에서 모든 것은 신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이게 바로 신이 만물의 가까운 원인이라는 뜻이다. 신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 아무 것도 신 없이는 인식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 -> 신이 만물의 원인이다: 어떤 매개도 없이 신이 바로 원인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원인: 저렇게만 이야기하면 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특수한 사건, 작용에 일일이 다 관여한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여기에 조건을 붙인 것이다. 신이 가까운 원인이기는 하되 그런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건에 일일이 다 간섭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에는 매개를 통해서 (매개라는 것은 자연법칙이 되겠다. 물리적인 법칙, 화학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 생리학적 법칙, 심리적 법칙 같은 일반적 법칙, 그보다 조금 더 특수한 법칙을 통해) 신이 원인으로서 작용을 한다. 그러니까 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특수한 실체로부터 떨어져있는 법칙이다.

 

이것들이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썼던 원인에 대한, “작용인에 관한 용어법들의 의미다.

- 이중에서 <에티카>에 살아남은 원인들은 내재적 원인-타동적 원인/ 가까운 원인-떨어져있는 원인/ 자유원인-자연적인 원인 이런 것들. 대신에 유출적 원인 능동적 원인 작용적 원인 부차적 원인 주요원인 등의 번거로운 용어법들은 다 사라진다.

 

*** 정리16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 :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cadere 카데레 : 원래 떨어지다”(fall)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포함되는” “들어오는을 의미.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 모순을 지니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식될 수 있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산된다는 것

인간지성과 무한지성은 다른 것이다. , 저것은 인간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범위가 크다

신은 만물의 작용인이다. 모든 것이 신을 제1로 해서 생산된다.

 

* 정리17 “신은 자신의 본성의 법칙으로부터만 행위하지, 결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강제되지(coactus) 않는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1) 신의 완전한 본성 이외에, 신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신으로 하여금 행위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 어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름정리2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왜냐하면 신은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정리11 및 정리14의 따름정리에 의해),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위하고(정리17에 의해)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7에 의해) 신만이 자유원인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제약된다 coactus”

이 단어는 1) 제약된다 2) 강제된다 구속된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 신 바깥에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신과 무관한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서 신은 무언가에 제약/강제되지 않는다.

 

* 증명: 신 바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내재적일 수밖에 없다

* 따름정리1과 정리17의 차이: 정리17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강제되지 않는다인데, 따름정리1신 안에서까지 포함한다.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개념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자유원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정리17의 주석, 정리33의 주석에서 나오는 논의를 이해할 때 특히)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이 있다. 일단 자유는 우연이 전제되어야 생길 수 있는가? 이것부터 모르겠음.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에서 자유의 여지가 없다는 비판의 흐름에 동의가 안 된다. 사실 이건 현대인들이 자유에 대해 착각하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법칙은 다 제약이고, 법칙 바깥의 예외, 그러니까 이걸 우연의 여지라고 한다면, 이러한 예외는 자유의 전제처럼 오해하는 방식. 그래서 뒤이어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 재미있는 것은, 정의7에서도 봤고 정리17의 따름정리에서도 봤지만 윤리학 3,4,5부에 가서도 스피노자는 자유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신을 자유원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윤리학 3부에 가면 능동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윤리학 4부에 가면 자유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유로운 인간 자유로운 사랑 이성적인 인간. 5부에 가면 제목 자체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이다. 스피노자가 자연 안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라고 강하게 이야기하니까,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부터 5부까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에는,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자유개념하고 스피노자 철학의 자유개념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그런데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특히 정의7에 나오는 자유는 전혀 그런 자유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어 있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것은 간섭과 장애물이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개념과 나중에 스피노자가 3,4,5부에 가서 인간학적인 의미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차이가 있는데, 그 자유 개념 또한 간섭의 부재로서의 자유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 위험하냐면,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바로 전체주의로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러니까 적극적 자유라는 게 개인의고귀한 윤리적 태도, 윤리적인 어떤 규범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윤리적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가령, 국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목표, 국가가 이것을 달성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할 고귀한 목표다, 이것이야말로 프로레탈리아가 부르주아 독재를 분쇄하고 노동자 농민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고귀한 이상이다라고 해버리면, 이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민중이고 이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거나 이상을 저버린 사람이 된다. , 이렇게 되어버리면 적극적 자유는 사람들을 집단이 설정한 목표로 얽매이게 하는, 강제의 원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 그래서 벌린이 볼 때 스피노자나 루소 같은 사람하고 스탈린하고 그렇게 거리가 먼 게 아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스탈린이 된다는 이야기. 나치즘.

- 그런 이유도 포함해서, 사실 20세기 후반에 특히 영미정치철학에서 PL은 논의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NL, Negative Freedom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 이것을 어떤 식으로 분류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것이 이사야 벌린이나 존 로스를 거치면서 자유주의의 철학적인 원리로 체계화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 반면에 유럽철학 쪽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좀 더 철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들이 꽤 있다

 

- 어쨌든 이런 흐름과 별개로 스피노자가 퍼지티브 리버티의 사상가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특히 벌린이 규정한 의미에서 퍼지티브 사상가인지에 대해서.

- 일단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이 자유개념하고 소극적 자유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유개념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스피노자의 자유개념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이것에 주의해야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간섭의 부재로 이해한다면 <에티카>를 읽는 데에 있어 이해 안가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 이렇게 복합적인 자유개념이기에, 따름정리2에서 신만이 자유원인이다라는 이야기를 해놓고 스피노자는 아마 찜찜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개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까? 그래서 긴 주석을 붙였다. 주석은 자유원인의 뜻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부연할 목적으로 붙였고 상당히 중요한 주석이다.

 

1)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의 적수들이 이해하는 자유원인의 개념: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유개념의 핵심으로 삼는다.

-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신학자 철학자들은,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야하는 것도 중단시킬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이런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고 진정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반박하면서 스피노자는 이런 표현을 쓴다.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고 말한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일어나지 않도록 또는 그에 의해 생산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자유원인이다라고 이해한다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신의 권한에 존재하는 것, 신의 역량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걸 자유원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능력을 갖고 있는 일인데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바로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바로 반박한다. 이는 마치 그들이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거나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인데“ -

-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2직각과 같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게 삼각형의 본질이고,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사실인데(그리고 이렇게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들이 쓰는 신은 자유로운 원인이다라는 말은 마치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주어진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조리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따라 나오지 않게 하는 것, 이 상태를 자유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 주석에서는 스피노자가 논리적인 범주 안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신학적인 용어법, 성경에 대한 구절들을 가지고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주석에서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따라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기적인 것이고, 중세신학에서 기적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핵심은 자연법칙을 중지시키는 것, 자연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 <신학정치론>에서도 말하지만, 성경을 보면 여호수아가 적과 싸울 때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해를 정지시켜놓았다든가(밤이 되지 않고 낮이 되게 해놓았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다든가, 이런 것들이 바로 기적의 사례다. 이런 기적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적인 인과질서를 중지시키거나 위배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전의 법칙에 따르면 해가 져야하는데 신이 일으키는 기적이 그걸 중지시키는 것이다.

- 신학자들은 신의 전능함의 징표를 바로 저기에서 찾는다. “신은 전능하다라는 말을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등등에서만 그치지 않고, 신의 진짜 전능함을 자연 법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면모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것. 초자연적이고, 신비하고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

-스피노자는, 신이 자유원인이라는 걸 잘못 이해하면 바로 저들같은 주장이 나올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연법칙을 건너뛰거나 중지시키거나 위배한다고 해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 자유원인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생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바로 그의 권능 안에 있는 것이라는 구절.

-여기서 선생님이 권능이라고 옮긴 것이 바로 포테스타스의 개념. 포텐시아와 쌍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서 포테스타스는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아니고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이다. 반면에 포텐시아는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작동하는 힘.

- 스피노자가 볼 때 신이 갖고 있는 힘을 포테스타스로 이해한다는 말은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이 선택이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포테스타스가 힘을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신학적인 방식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견해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신의 힘이라는 것은 결코 집행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포테스타스의 힘이 아니라 본성의 필연적인 힘에 따라 실행되는 활동이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다른 것의 제약없이 필연적으로 집행되는 실행되는 활동. ,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개념은 포텐시아에 입각한 자유개념이다. 포테스타스처럼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런건 인간의 자유고 왕의 자유일 뿐이다. 2부 정리3의 주석을 잠깐 보자

 

*** 요약/정리:

2부 정리3을 같이 읽어보면-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신학권력을 강화하고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고 대중의 의심을 조장한다. 나중에 3부에 가면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아주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자유로 이해하는 것은 가상이고 착각이다. 3부에 가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 포테스타스를 번역하는 문제

- 포텐시아는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대충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는 반면에, 포테스타스는 경우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하는 단어다. 정치철학에서는 주권이나 권력, 권한이 될 때도 있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권능이 좋기도 할 것이고 인간학에서는 능력이라고 번역해야 더 적절한 경우도 있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정립된 것도 최근 30년의 일이다. 들뢰즈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할 필요성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더욱 이 구별을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 네그리. 물론 네그리의 구별법은 너무 단순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항상 그런 성향이 좀 있다. 아주 독창적인 발견, 독창적인 개념을 잘 제시하는게 그것들을 너무 단순하게 막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걸 지성의 낙관이라고, 지성의 난관, 의지의 비관, 실제로는 안 되더라도 한 번 된다고 생각해보자ㅋㅋㅋㅋㅋ 자기가 직접 그런다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기고 좋네 지성의 낙관 의지의 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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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와 속성

 

- 실체에 대한 정의: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속성은? 속성은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 스피노자는 윤리학 어디에서도 속성이 자신안에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실체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속성이라는 것은 성질이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이기는 한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항상 어떤 실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속성(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삼각형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삼각형의 변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직선인 것과도 같은. 삼각형도 그 세 직선이 동시에’ ‘집합적으로 구성되면서 삼각형이라는 본질을 갖게 되고)이다.

- 가령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노란색은 성질인데 노란색이라는 것은 노란색을 띄는 물건을 통해 존재한다. 성질이 깃들어있는 실체, 다른 말로 하면 subject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좀 어색하다.

-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속성이라는 개념을 크게 확장했다. 그래서 사실상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를 들면 연장속성의 경우 물리적 우주 전체, 사유속성의 경우 심리적인 우주 전체를 아우른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랑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림. 어떤 사람은 실체-속성의 관계를, 하나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든가 피리로 부는 것,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 실체-속성의 관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이것은 속성이라는 것을 마치 하찭은 표현방식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

- 삼각형 비유가 더 들어맞는다. 그러니까 실체가 속성보다 상위개념이 아니라 속성 없이 실체는 있을 수 없고, 실체 없이 속성은 있을 수 없다. 속성들이 동시에 있어야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이 하나하나 따로 있으면 안 되듯이. 그게 동시에 세 개가 있어야 삼각형이라는 실체가 되듯이.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어떤 실체도, 따라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속성들이 독립적이니까 분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럴 수 없다.

- 증명방식의 차이: 정리12는 정리6에 의거하고, 정리13의 경우는 정리5에 의거하는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정리12에서는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채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공통된 의견:

- 데카르트 철학의 굉장히 고유한 주장 중 하나가 물체는 분할될 수 있다이다. 더 나아가 그냥 분할되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다.

- 스피노자도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물체는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원자에 대한 부정이다. 세상에 원자 같은 것은 없다. 물체의 가장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자라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최소단위에서 분할이 끝날 테니까.

- 만약 원자가 존재한다면 세상에는 진공이 존재한다. 이 두가지는 항상 같이 간다. 궁극적인 단위로서의 원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원자들 사이의 간극이 있다는 말인데(원자와 원자 사이에 간극이 없다면, 그건 원자라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간극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 있다는 것이다(정리15 주석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 , 스피노자와 데카르트 모두 공통된 의견:

모든 물체는 무한히 분할/ 원자가 없다/ 자연 안에는 진공이 없다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중요한 차이점

- 데카르트는 신은 물질적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만약에 신(실체)이 물질적이라고 한다면, /실체가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다. 유한한 부분들로 계속 쪼개진다는 이야기. 이것은 무한한 신,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어떤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고 주장

- 물체적 실체는 연장실체를 의미한다.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말은, 실체가 아니면, 그러니까 실체가 아닌 물체면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불가.

 

*** 정리13의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물체적 실체도라는 말.

- 왜냐면, 이 주장에는 물체적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체적 실체, 다른 말로 하면 연장실체, 연장속성. , 연장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연장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는 의미와 같다.

- 이 당시에 신은 연장하는 실체다, 물질적인 실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피노자 밖에 없었다. 아마 홉스의 생각은 스피노자랑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는 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홉스가 스피노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신학정치론>을 염두해 두고 나라면 그렇게 대담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스피노자의 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이다/ 연장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당대에 아주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은 일단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라도, 신이 연장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매우 불경한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사실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연장이라는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이야기. ”물질적인 자연이 신적이다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적인 자연이 다이나믹하다. 다이나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내재적인 역량을 갖추고 어떤 결과를 스스로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그런데 이렇게 물질적 자연이 내재적 원인을 갖고 있다라고 사고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 특히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 데카르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그냥 기하학적 공간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과 단덜하고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전제는 자연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힘을 다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내재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은 측량이 불간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동적인 자연. 측량불가능한 자연. 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물체. 이런 자연은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매우 불가능한.

- 데카르트가 이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자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배제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을 기하학적인 평면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이 양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계산도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아무런 내적인 힘이 없는 자연, 기계론적인 자연.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자기철학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에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 , “자연 자체는 원인을 부여할 수 없고, 원인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 바깥의 신이다라는 주장.

 

- 스피노자는 이 주장을 부인. 신즉자연, 자연 자체가 신이다.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자연이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부딪혔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제기된다. 그럼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가. 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

- 불행히도 스피노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책을 쓰려고 했다면 바로 이 문제를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원인으로서의 역량. 하지만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자연철학에 관학 책을 썼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모르겠다.

- 아무튼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적으로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 신과 자연을 같은 것으로 봤고, 2)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배제했던 원인개념을 자연 안에 포함을 시켰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게 없는 굉장히 역동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어떻게 이것을 자연철학적인 체계로 구성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과제다. 스피노자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연개념에 원인개념을 넣어줬다. 그러니 정리13의 따름정리는 굉장히 중요한 것!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 24

물체의 본성은 무게나 딱딱함이나 색 등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연장에 있을 뿐이다. :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이나 물체 일반의 본성이 딱딱하다거나 무게를 지니고 있다거나 색을 띠고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자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이, 넓이, 깊이로 연장되어 있다는 데 있는 것임을 지각하게 된다

-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과 단절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 연장이 물질에 대한 본성이다. = “물체들은 모두 연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이 당시의 새로운 물리학자들 또는 자연철학자들이 도입한 도록에 1차 성질, 2차 성질 구분이 있는데 색이나 딱딱함 무게 같은 것은 물체가 갖고 있는 2차 성질이고, 물질이 갖고 있는 1차 성질은 연장이다라고 이야기. 2차 성질은 물체가 갖고 있는 본연의 무엇이 아니고 우리의 지각에 따라 규정되는 주관적 성질이다.

 

*** 234

이로부터 물질은, 비록 우리가 파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무한정하게 많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스피노자는 분명히 물체는 무한히 분할 가능/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 불가라고 선 그음. (”물체가 실체인 한에서그래, 이 어구 정말 어마어마한 어구구나.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진다)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어떤 속성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될 수 없으며(정의 6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정리11에 의해), 만약 신 이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의 어떤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동일한 속성의 두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인데, 이는 (정리5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실체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증명의 첫 번째 부분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아주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은 유일하다 곧(정의6에 의해) 자연 안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미 정리10의 주석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따름정리2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2.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는 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 ”절대적으로 무한한이라는 말과 유 안에서 무한한의 말을 구분.

* 신은 정의6에 의해 무한한, 세상의 모든 속성을 포괄하고 있음-> 만약 신 외에 어떤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 중에 하나로 표현해야함 -> 그런데 정리5에서 하나의 실체는 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 외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정리5에 위배됨 -> 따라서 신 말고는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

 

* 경험적 유일성과 필연적 유일성

경험적 유일성: 원래 여러 개였는데 하나만 남았다(두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어쩌다보니 하나만 남은)

필연적 유일성: 이 유일성은 신이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다. 실체가 갖고 있는 프로프리에타스(특성) - 유일성 무한성 영원성 분할불가능성 자기원인성 (cf: 전지하다 전능하다 자비롭다 지혜롭다 <- 이런 것들은 프로프리에타스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은 인간이 갖는 성질을 신에게 투사한 것으로 상상적 성질이라고 말함)

 

* 따름정리2에서도 연장개념,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정리13의 따름정리2와 함께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아주아주 중요한.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안에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 의미) ,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증명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정의3에 의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고(정리14에 의해), 그런데 (정의5에 의해) 실체 없이는 양태들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양태들은 신의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공리1에 의해). 따라서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 범신론(pantheism),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이 아니다

pan: 모든 것. 그리스어 + theos. 범신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말.

-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단 스피노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고, 범신론이란 표현자체가 스피노자 사후 30년이 지나서 나온 말이다.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정리1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물이 모두 신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범신론이랑은 다른 것이다.

*** 범재내신론(penentheism) 어떤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인 만물은 다 신 안에 있다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또는 범내재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범신론에 비해 이게 정리15에 더 부합하는 표현이기는 하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말이기는 하지만, 이 학설 자체는 매우 오래된 학설이다. 고대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 신학에 다 나오는 말이고, 사도바울의 표현 중에 그가 신 안에 있고 신으로 있고 신으로 의해 존재하고(신에 의지하고 있고 신에 근거를 두고 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건 스피노자 정리15와는 다르다. 범내재신론에는 신은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초월적인 관계에 있음.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고, 신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 유물론: 19세기 유명한 맑스주의자 중에 플레하노프(레닌의 철학 스승)가 스피노자를 상당히 좋아했다. 스피노자야말로 막스주의 선구자이자 유물론자였다고 주장함.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이랑도 또 다르다. 막스주의에서는 파생관계이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우열 종속관계가 아니고 동등하고 자율적이다. 스피노자가 연장하는 실체, 즉 연장속성을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유물론자들이 저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스피노자는 사유속성도 똑같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유물론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 , 정리15는 신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인식하는, 또는 모든 실재가 지니고 있는 실존과 행위 역량, 사유 역량의 근거임을 의미한다. 곧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실존하거나 행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 바깥에,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다.(신이 모든 것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라 신 자체가 그 자연 안에 속해있는 것이다)

 

*** 스피노자의 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의 연속이다. 지금, 이 지금, 저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지금의 지금이 있고 과거의 지금이 있고 미래의 지금이 있고 먼 미래의 지금이 있고, 이 지금들이 죽 연속되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세상에 진공과 원자라는 것이 있지 않은 것처럼, 12, 12, 하루 이틀,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결국 분할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인위적으로 상상적으로 쪼개어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위로 분할이 되고 이런 단위로 합쳐지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조금 더 실재적인 것으로 스피노자는 지속을 이야기한다. duration. 이것에는 유한한 점도 있지만 무한정할 수도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그러니까 시간은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어놓은 아주 상상적인 사고상의 구별’ ‘사고상의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 rational being: 이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고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고상 만들어낸 범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고상으로 만들어낸 것. 시간을 포함해서, , 종 이런 것들도 rational being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리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 real being: 실재적인 어떤 것. 그리고 스피노자는 지속을 여기에 넣는다. 물론 실재적인 것이는 한데, 사물의 본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물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영원성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칸트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범위나 종류가 다르다. 오히려 현대철학에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스피노자 철학을 연결시킨다면, 지속이나 영원성이랑 연결을 시키면 된다.

 

* 정리15의 긴 주석은

- 연장 속성이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것, 곧 신이 물체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자신의 논증을 진행한다.

- 들뢰즈가 윤리학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되어있다. 정의 공리 정리 증명으로 이어지는 엄밀한 논증이 있고, 서문 주석 부록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윤리학이 있다. 자기의 적수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는. 때문에 윤리학을 하나로 읽어서는 안 되고 두 개로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런 면모가 너무나 잘 드러나 있는 주석이다. 적수들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 표현도 아주 신랄하고 논쟁적이다.

  

*** 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신이 인간처럼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념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참된 인식과 아주 먼 주장이라는 점을 긍정-> 신은 물체적이지 않다, 곧 신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여기까지는 스피노자가 보기에도 타당하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의거하여 그들은 연장 실체 자체를 신과 분리시켜, 신이 연장 실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연장실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를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 논거

1. 물체의 분할 가능성에 의거한 논변:

무한하다고 가정된 물체적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눠보자. 이 두 부분이 1) 유한한 경우 2) 무한한 경우로 나뉠 것이다. 1) 하나의 무한자가 두 개의 유한한 부분으로 구성되는 셈인데 이것은 부조리 2) 하나의 무한자가 다른 것보다 두 배가 더 큰 셈인데, 이 무한한 양을 피트 단위로 분할할 때와 인치 단위로 분할할 때에 숫자12배가 차이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AB 직선과 AC 두 개의 직선이 처음에는 규정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직선은 무한하게 연장되니까) 나중에는 그 거리가 규정 불가능하게 벌어지며 규정 가능한 것이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변하는데, 이 세 가지 모두 부조리하다 -> 따라서 물체가 무한하다고 가정할 경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물체는 유한하거나 아니면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2. 신의 지고한 완전성에 의겨한 논변:

신은 지고하게 완전한 존재이기에 아무런 수동성을 가질 수 없는데, 물체가 분할 가능하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어떤 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체가 신의 속성이라면 이 두가지는 부딪힌다. 따라서 물체적 실체는 신에게 속할 수 없다.

 

*** 스피노자의 반박

그들이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 모든 부조리한 논거들은 결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무한한 양을 가정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눈 화살은 사실은 그들 자신을 향해 날아간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인 이 부조리한 주장으로부터 여전히 연장하는 실체는 유한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마치, 원은 사각형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상하면서 원은 그것으로부터 원주까지 그어진 모든 직선이 같은 길이를 지니는, 그러한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꼭 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물체적 실체(정리8, 정리5, 정리12를 보라)에 대하여, 그것은 유한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이 유한하고 다수이며 분할 가능한 부분들로 합성되어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물체적인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양태로서의 물체를 얘기하는 것이다. 물체적 실체로 실체인 한에서는 무한하고 유일하고 분할불가능한데, 그들은 물체적 실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물체만 생각한다. 유한한 것으로서의 물체. 물체를 실체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양태로만 생각한다.

 

- 그들의 논리는 무한한 물체를 규정했을 때 이렇게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온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거들은 물체적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이 가정자체가 이미 틀렸다. 물체적 실체는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정리12와 정리13의 따름정리에서 보여주었다.

- 그들이 연장실체는 유한하다거나 연장실체는 신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부조리한 논거들은, 그러니까 무한한 양에 대한 이들의 반박은 모두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로 측정 가능하며, 또한 유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 자체가 이미 틀렸다. 무한한 양은 유한한 단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고 유한한 부분들로 나뉠 수도 없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1) 실체가 부분들로 합성될 수 있다 2) 무한한 물체, 무한한 양이라는 것도 부부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유한한 부분들을 합치다보면 무한한 양이 될 수 있다, 같은 것들을 부당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실체인 한에서!” 어떤 물체적 실체도 분할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증명까지 다 했다.

 

- 그들은 실체적 물체와 양태적 물체를 완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물체가 분할된다, 분할된 물체가 서로 부분으로 구별된다라고 하면, 이것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물체가 분할된다고 말하면, 양태적으로 분할되는 것.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도, 구별도 안 된다. 정리11부터 정리13 따름정리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양태인 한에서 분할될 수 있지만 실체인 한에서 분할될 수는 없다. (결국 이것도 유한실체를 상정했던 데카르트주의자들과 유한실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스피노자의 논박의 연장선상 혹은 불가피한 전제같다. 스피노자 주석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결국 그거잖아. ‘니들이 지금 실체와 양태를 계속 혼동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ㅋㅋㅋ 그러니까 데카르트주의자들은 계속 스피노자의 실체인 한에서의 물체적 실체를 계속 컵이나 책상 같은 양태적 물체와 혼동한 상태에서, 저런 두 가지 논거를 들어 물체는 유한하거나 신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 다시 보는 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선이 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공상한 다음, 선은 무한하게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여러 논거들을 고안해낼 줄 안다. 그리고 정말이지, 물체적 실체가 물체들이나 부분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체가 면들로 합성되고 면들은 선들로 합성되며 마지막으로 선들은 점들로 합성된다고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리고 이 점은, 명석한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모든 사람, 특히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인정해야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도록 분할될 수 있다면, 다른 부분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쇄를 이루고 있는 동안, 이 부분들 중 하나가 소멸되어사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들이 진공으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들어맞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가 시간을 상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은 마치 점과 같은데 점과 같은 것에서 선으로서의 지속이 어떻게 가능하냐.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들은 진공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물체적 실체도 인정을 해야지.

 

- 스피노자의 실재적 구별은 속성과 속성 사이의 구별이다. 속성은 자율적이고 다른 것의 간섭이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서로 인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물체적 실체가 그 부분들이 실재적으로 분할될 수 있다면”- real distinction으로 구별되는 것 중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하나에 전혀 영향이 없어야 한다. , 하나가 사라져도 독립적으로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진공이 생긴다. 사라진 물체가 다른 물체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럼 진공이 생기는 것. 그런데 참으로 만약 실재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는 다른 것 없이도 자신의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안에 진공이 존재하지 않고(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모든 부분은 진공이 존재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이 동일한 부분들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곧 물체적 실체는 실체인 한에서는 분할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물체적 실체가 분할이 된다면(너희의 가정대로), 그 중 하나가 소멸되면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길 텐데, 그런점에서 너희들이 진공을 부정한다면(그리고 그들은 진공을 부정했다) 너희들은 물체적 실체가 분할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야하지 않겠느냐)

 

***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 스피노자가 이후에 자연철학에 관해 쓸 생각을 하고 그것을 염두해 둔 다른 곳”. 그러나 그는 그것을 쓰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진공에 대해 쓴 다른 곳들이 있긴 있다. 스피노자 초기저작 <데카르트 철학원리>에서 진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데 그건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을 썼다기보다 데카르트의 관점이 어떻다는 것을 쓴 부분.

- 또 하나는 출판되지 않은, 생전의 편지에서 나온다. 매우 유명한 12번째 편지. 스피노자와 매우 친한 네이으르와의 편지. <무한에 관한 편지>라고 주석가들이 부르는 편지. 이 편지에서 그는 무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네이으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무한의 문제에 대해 제일 체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시간에 대한 문제, 수에 대한 문제도 나오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편지다.

 

- 물체와 물체는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적으로 구별된다. 그러니까 있던 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체로 변용된다.

 

- 정리8의 주석2에서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된다는 것을 상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는 물체적 실체가 분할된다, 이것을 바로 부분들이 real distinction하고 있다, 부분들 하나가 완전히 소멸해도 다른 물체가 물체로서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한다, 이럴 때 완전히 소멸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에 진공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왜 실재로서의 물체가 분할되지 않는데(실제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자꾸 물체를 부분으로 쪼개는가. 이것을 여러 가지 작은 양들로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서 생각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 물체가 분할된다고 생각하는 것(=물체를 양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상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체를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 요약: 스피노자의 논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물체를 실체로 부르면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될 수 없다. 실체가 분할된다고 하면 실체가 다른 실체로 나뉘어진다는 이야기이거나, 그 실체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쪼개진다는 이야기인데 둘 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내가 이미 증명했다. 그러니 실체로서의 물질이 분할된다는 것, 스피노자가 진공과 관련해서 이야기한 것은, 실체 중에 하나가 사라져도 나머지 실체는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진공이 생긴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진공이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물체가 분할가능하다. 물론 물체는 분할가능한데, 실체로서 분할가능한게 아니라 양태로서 분할가능하다. 이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성과 변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양태로서이지 실체로서 생성/변용/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체로서 생성되면 그건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것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로서 소멸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진공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건 부조리한 주장이다.

 

***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실체와 속성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보면 그는 실체와 속성 사이에 정확하게 구별을 제시했다. “형상적 구별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 사이에 사고상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구별이 안 되는데 분석에 필요상 인위적으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게 바로 사고상의 구별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속성은 사실 구별이 안 되는 문제다.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점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약간 왜곡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프러프리에타스는 real being이다. rational being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적인 성질이다.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질. 다른 실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물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성질. 본질은 아니고,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이다. 중세철학자들은 사람의 특성을 웃을 수 있는 동물’ ‘털 없는 두 발 동물이렇게도 말했는데, 아무튼 이런 특성은 실제적이다. 신 또는 실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

 

*** 속성의 주관적개념론/객관적개념론 다시 한 번

- “지성이 지각하는의 지성을 유한지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속성이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없으니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 즉 신의 본질은 인간의 지성이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불가지론을 전제하게 된다. 즉 신을 초월적 위치에 놓는 것. 그럼 우리가 말하는 신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특성을 전가해버리는 것이 된다.

- 울프슨이 주장하는 게 바로 이것. 그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중세유대사상과의 속성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 중세유대사상에서 신은 초월적이고 신의 본성은 심플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의 본성은 단순하다. 신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다, 라고 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속성들이 만약 객관적이라면 신의 본질이 무한하게 많은 것이 되어버린다. 연장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사유 속성도 신의 본질이 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속성들이 다 신의 본질이 되어버린다 -> 그럼 신의 본질은 심플한 게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유대사상가들은 신의본질을 심플하다고 했고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신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투사한 게 맞다, 그게 속성이다라고 이야기함.

- 이런 관점을 배제하기 위해 그 지성을 무한지성이라고 한 것.

- 사실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하는 한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나 유한한 지성이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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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만약 이것을 부정할 경우, 할 수 있다면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이렇게 되면 (공리7에 의해) 그것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리7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Q.E.D.

 

* 정리11은 중세철학 및 근대철학에서 이른바 신 존재 증명 과정(demonstraion of the God) 이라고 불리는 것의 형태로 되어있다.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3개의 증명과 주석 제시

* 정리11의 증명1은 귀류법.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귀류법에 따라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다.

* 증명2: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causa sive(or) ratio- 존재하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 핵심적인 스피노자 철학의 형이상학

*** 1)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는 그 이유가 사물의 본성 안에 있거나(,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본성 안에 있거나), 2) 어떤 경험적인 이유에 의해서 존재하거나(실재의 본성 밖에 이유가 있거나)

*** 네모난 원은 실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성 안에 있다.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불가능.

*** 실체가 왜 존재하는가는 그 이유가 실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 안에 함축되어 있다(정리7) 원이나 삼각형은 본성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자기원인적이 아니라) 물체의 보편적 본성의 질서, 자연의 어떤 법칙에서 따라 나온다.

 

*** 매우 흥미로운 형이상학적 주장. 여기 깔려있는 생각은 모든 것은 본성상 존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중요한 전제). , 실존하려는 경향. 모두 그런 경향이 있는데 왜 실존하지 않나? 그것을 가로막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 본성상 잠재적으로 다들 실존하려고 한다. -> 그러므로 신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만약- : 신의 본성 밖에 있다=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그 이유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다른 본성이냐? 만약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라면 이건 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신이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나 원인이 있다고 해보자.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상호작용 인과 작용 할 수 없다. 즉 신하고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 -> 따라서 그 이유는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 왜 신의 본성이 모순을 함축하냐면 신이라는 것은 실체니까. 신은 본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신의 본성 안에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갖고 있다고 하면 저것과 부딪힘-> 모순.

 

* 강의록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le de la Nature et de la Grace> 7.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 라이프니츠의 이 문장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자연(넓은 의미의 자연/ 존재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것 모두)

- 은총(즉 실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넘어서!)

형이상학이라면 실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재를 창조한 것에 대한 질문. 신학적 질문. 이프니츠 입장에서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납작했다. “도 질문이 돼야한다. 형이상학적인 ”. 아무것도 없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등한 것. (그 말은 반대로 말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질문이 뜻하는 바는 왜 존재하는가. 이 우연은 누가 가능하게 했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신... 그분....) 저 질문 자체만 듣고 너무 멋있었는데 추론해나가며 답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깼다ㅋㅋ

 

*** 스피노자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 개념.

 

* 스피노자: 무는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시간의 개념으로 놓았다?) 그러니 왜 실존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왜 실존하지 않는가? VS 왜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까. 당연히 없는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없는 것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유를 밝히자!

 

* 스피노자는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지 않고, 비실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실존의 양태 중에 없음상태로 실존).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는 실재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실존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 이것은 논리적 근거나 인과성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 1) “는 이미 존재로 포괄되니까 2) “는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 없어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상태인 것. ,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

 

*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자 또는 실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는이라는 규정, “그것말고 달리~ 일 수 없음라는 규정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므로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저 스피노자의 문장에 필연으로써그 이유, 왜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필연성을 이미 잔뜩 부과했는데 거기에 뭘 물어!)

 

*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규정은 라이프니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능태인 본질에서 현실태인 실존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는 부재함을 가리킨다(왜냐면 이미 본질 안에 실존이 들어가 있는데, AB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A에서 B로 움직일 수가 있나!). 본질은 항상 이미, 영원하게 실존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존은 항상 이미 본질의 행위, 현행적인 본질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암묵적으로 자연의 외부나 자연 이전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무를 가정하는 궁극적 근거에 관한 문제설정과 무관하며, 근본적으로는 부정이나 결핍, 무를 포함하지 않는 존재, 있음의 순수한 실정성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적 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창조론을 너무나 뒷받침해주는 것이니까! 스피노자에게 이 세계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나타나는 기원따위는 없다)

 

*** 스피노자 주장: 형이상학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무의미한 말. 라이프니츠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혹세무민 하고 있다 VS 라이프니츠의 주장: 스피노자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라이프니츠는 원래도 긴 글보다는 10-20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 워낙 쪽글들을 많이 써서 분류에 애를 먹는 바람에 아직도 전집이 완성이 안 됐다. 100년 동안 편찬 중상태로 아직도 한 권씩 나오고 있다. 불어로 쓴 게 대부분이고 소수의 글들을 독어와 라틴어로 썼다. 이 시대에는 불어가 우리나라의 영어 같은 지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지난 번 강의와 묶어서 생각해보면 흥미롭게 이어짐)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17세기 철학은 여러모로 참 재미있다. 데카르트와 메르센 신부. 메르센 신부는 철학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지만, 훌륭한 사교성을 바탕으로 17세기 후반 유럽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유명한 사상가와 많이 알고 지냈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역할. 그래서 메르센 신부의 전집은 대부분 편지다(이거 어쩐지 재밌다ㅋㅋ 역시 그 시대의 사교성이 활발한 사람들은 지금의 sns처럼 편지를 사랑) 데카르트가 1630년에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 이게 17세기 철학이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영역 이외에 또 하나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순전히 사변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매우 재밌는 이야기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ㅋㅋ)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을 앞으로 <에티카>에서 보게될 것이다.

 

-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신은 진리가 아닌가? 진리의 신이 있고 진리 위의 신이 있고 그런 것인가? : 1) 진리로서의 신이 있고(“전지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지성 // 전능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의지, 이렇게 신한테 저 두 가지가 다 있다고 보는 것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지성 + 의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지성이나 의지는 같은 것이고 지성이나 의지는 신의 본질과 무관하다.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고 신의 본질(=실체의 본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였다. 실체의 본질은 속성 밖에 없다. “실체의 본질=> 속성이것은 스피노자가 일관되게 하는 말이다.

- 정리12-14에서 다루게 될 것들: 스피노자는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을 특성이라고 했고. 신에게도 이런 특성이 있다고 했다. 신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특성. 자기원인, 영원성, 무한성 같은. 이것들은 특성이지 본질이 아니다. 정의12-14까지는 이런 다른 성질이 나올 것이다.

 

*** 라이프니츠에게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신이 창조했으니까. 양자택일이 가능한 무와 존재. 스피노자에게는 아니다. 우주는 계속 존재해왔고 영원하다. “무로부터의 창조이런 것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했다 사라졌다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 죽음에 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생물의 종이 멸종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은 없다. (여기서 나의 질문: 스럼 스피노자는 모든 것들은 무한하다가 전제였던 것일까?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과연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이를테면 지금 세상에 30종이 존재하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원래 400종이 있는 가운데 370종이 없어진 건지 500종인데 470종이 없어진 건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는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럼 조차도 무한한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 자연의 일부인 인간. transformation. 인간은 다른 종류의 물질 형태였다가 어떤 조합에 의해서 이런 형상을 갖게 된 것.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은 진화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 역량 potentia VS potestas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는 저 두 가지가 다 단어로 구분되어 있는데 영어에는 “power”라는 단어가 일괄적으로 저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그래서 번역하는 데에 고민이 따름

-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저 두 개를 잘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중에 정치학에 관한 논의에서 특히 중요하다. 2부 정리3에 가면 potentiapotestas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나온다.

- 그 오해의 내용: 포테스타스는 어떤 주체가 자기 의지대로 임의대로 행사할 수 힘을 말한다. 이를테면 왕이 자기 마음대로 기존의 법을 폐지하거나 제정하거나 하는 것. 하지만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신이 그렇게 마음대로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마치 신의 포텐시아를 포테스타스로 오해한다. 그래서 신의 역량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 그러니까 신의 역량을 왕의 역량과 같은 것으로 혼동한다. 포테스타스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대로 주체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 에드윈 컬리의 <윤리학>을 제일 좋은 번역이라고 추천했지만, 컬리의 맹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구분이 중요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다 “power”라고 번역해놨다. 나중에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1993년에 낸 논문집에서 자기비판을 하는데 1985년에 <에티카>를 번역할 때만 해도 이 두 가지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아, 이건 꼭 구분했어야 했구나,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고.

- 이 두 개를 가장 세밀하게 구분한 사람은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그가 1981년에 낸 책이 <The Savage Anomaly 야생의 별종>인데, 이 야생의 별종은 바로 스피노자다. “17세기 서양 근대철학 역사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아주 별종이었다. 어떻게 분류가 안 되는이라는 내용이 골자인데,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고 번역되어 나왔다. 물론 잘못된 번역이다. 제목부터 이렇게 잘못 번역했는데, 혹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면 피해가야 한다ㅋㅋ 읽을 수가 없다. 얼마 안 돼서 절판됐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고, 번역이 엉망이라서 읽을 수가 없고ㅋㅋ

- 네그리의 저 책에서 다중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다중이라는 용어를 스피노자 철학에서 처음으로 발굴해낸 것이 바로 이 책. “다중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가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스피노자의 다중이라는 것에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재번역되어서 나오지 않을까? 아마도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이탈리아어를 잘 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를 잘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무니까(정말 없을 것 같다ㅋㅋ)

- 저 책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네그리의 제자 마이클 하트.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의 또 다른 중요한 테제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포테스타스는 지배권력이 행사하는 힘. 권력자라거나 미신적 신이라거나 신학적 철학자의 힘이다”. 그렇다면 네그리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 이 두 개념을 하트가 어떻게 구별해서 썼을까? 그는 역자 서문에서도 굉장히 강조한다. 포텐시아를 대문자 Power, 포테스타스를 소문자 power로 번역했다. 정말 궁여지책으로 낸 아이디어다.

-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번역을 한다. 자기가 처음 보면 신조어인 줄 알고 신조어를 막 만들어낸다. 하지만 외국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 방금 컬리나 하트 이야기를 했지만, 이게 그렇게 중요한 말이라면 포텐시아는 “potential”로 쓰고, 포테스타스는 “power”라고 썼을 수도 있을텐데(이게 바로 우리나라식 번역이다) 근데 potential에는 포텐시아가 갖는 능동적인 의미가 없으니까 고심 끝에 그 단어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막... 포텐시아를 역능이라는 말로 풀어썼다. 저건 그냥 능력을 뒤집은 말에 불과하다ㅋㅋㅋ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인 줄 안다.

어쨌거나ㅋㅋ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증명3

실존하지 못함은 무능력 = impotentia

-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존재자들, 많은 개체들은 세상에 존재한다 = 존재할 수 있는 역량potentia을 갖고 있다.

-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보다 역량이 작은 것들은 실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실체로 실존하거나 양태로 실존하니까. 그리고 양태로 실존하려면 실체가 필요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증명3에 딸린 주석.

- 후험적 a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선험적 aporiori 아포리오리

- 증명3에서 나는 경험적(후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입각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의미로 시작해서 요약하면- 우리가 존재하잖아. 우리 인간이, 우리 유한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잖아. 우리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그럼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보다 역량이 더 큰 신이 실존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 이게 바로 후험적인 증명.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니까 증명3에서는 이렇게 증명을 해봤는데 이는 그들이 오직 외부원인들로부터 따라나오는 실재들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선험적으로도 증명해보겠다.

- 핵심은 외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양태/변용)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

 

* 정리12-14는 신의 특성을 도출해내는 정리들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의미: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 실체가 분할된다 = 실체가 여러 부분으로 쪼개진다

- 정리1213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핵심 논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증명 절차도 거의 동일하다. 스피노자는 정리12에서 가설적으로 다수의 실체를 전제한 가운데, 실체를 분할되게 만드는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참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논점을 이끌어낸다. 그 다음 정리13에서는 여느 실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에 대하여, 이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동일한 논점을 이끌어낸다. 귀류법.

- 정리12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만이 아니고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 정리13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

 

* 정리12 증명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되면 1) 분할된 부분들이 실체의 본성을 유지하는 경우 2) 유지 못하는 경우

1)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그럴 때 이 말은 하나의 실체로부터 다수의 실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리6에 의해 모순된다(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2)의 경우. 이것은 부분들이 전체와 아무런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의 실체는 (분할된) 다른 실체와 공통되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 ,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것들은 서로 인과작용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전체는 부분들 없이 존재하고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대로 부분들도 전체와 무관하게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의4와 정리10에 의해 모순된다. -> 분할될 수 없다

- 자연이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연이 두 개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 * 정리10을 살펴보면서 여기서 주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의 실체의 각each 속성하면- 이것은 마치 실체가 전체고 each 속성들은 실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라고, 실체-속성은 전체-부분의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하지만 정리10의 술어를 보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속성 각자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논리적 자립성(정의3에서도 나오지만)을 갖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상위에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 실체-속성이 전체-부분의 관계라면 자립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이해하면 저 술어에서 위배된다. 그래서 정리10은 매우 복잡하고 어떤 점에서 역설적이다. 요지는, 속성들은 실체에 공통적으로 집합적으로 속해있지만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니다. 속성들 하나하나가 자립성을 가진 채로 실체에 속해있다. 사유속성 없이도 연장속성이 인식될 수 있듯이(그 반대도 마찬가지듯이) 자립적으로 성립한다. 그렇다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두 개의 상이한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실체의 본성에는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한다고한다.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러니까 각각의 속성은 다 자립적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실체에도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 실체가 속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이라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함께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것. 영원히.

 

* 속성은 실체의 각각 다른 표현들이다. 각각의 속성이 실체를 전부 다 표현한다. 2부 정리7로 가보자. 유명한 평행론. 여기에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order and connection.

*** 주석을 보자. ”곧 무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하나의 동일한 것이 두 가지 속성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이 논리가 나중에 3부에 가게 되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하지만, 이렇게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두 개의 양태지만, 이 두 개의 양태가 구성하는 인간이라는 통일체는 동일한 코나투스를 표현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가 때로는 정신을 통해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똑같은 코나투스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과 신체, 인간과 정신이 부분-전체 관계가 아니다. 실체-속성의 관계가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 인공지능인 AI가 속성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스피노자라면 사유속성이라고 할 것 같은데 사유속성을 벗어난 새로운 속성이 될 가능성은? 아마 스피노자는 AI, 이게 바로 내가 말한 정신이야! 내가 말하는 관념이야! 라고 말할 것 같다ㅋㅋㅋ 그럼 무한지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ㅋㅋㅋ 그렇겠지, 무한지성의 일부겠지. (사유나 연장속성이 아닌 속성의 예를 찾아보기 위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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