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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의 독서 - 김영란의 명작 읽기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책읽기의 쓸모』의 확장판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 이 책이 전작의 후속작이라고 썼지만 『토니외 크뢰거』와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가 겹쳐들면서 같은 책을 더 길게 다시 읽는 기분이 들었다. 다루는 작가와 책들이 다르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지만 저자의 차분한 문장과 편안한 분위기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 것같다.
『시절의 독서』는 저자의 삶의 경로에 따른 독서의 흐름을 따라 구성한 책이다. 저자가 살아온 시절을 책 꾸러미로 대신 보여준달까. 저자는 "책에서 세상과 싸울 무기를 구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세상을 납득해보려는 도구를 찾아왔다"고 말한다. 『책읽기의 쓸모』에 이어지는 설명이다. 저자는 대법관이라는 전문직을 수행하면서 주부로 양육자로의 역할에 충실한 한편 다독가로서 자기 자리도 놓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보여주는 작가들의 생애를 보면 '김영란 대법관'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김영란 저자' 될 수 있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읽었고 그 읽기를 삶에 적용했다. 독서를 '현실 도피'의 일환이 아닌 진실 탐구의 '도구'이자 '무기'로 삼은 것이다. 저자는 '거짓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거짓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말에 의지했다.
루이자의 경우, 어린 시절 가족들이 모여서 가상의 세계를 짓고 부수고 한 놀이들이 상상력을 키워주는 데 강력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반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는 이웃에 살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루이자의 상상 속 세계를 보편성을 지닌 세계로 끌어 올리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루이자의 어깨를 무겁게 만든 가족들이 결국 그녀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p.48
책에 소개된 저자 김영란의 '시절'을 통과한 작가는 모두 8명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 브론테 자매들,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카프카와 쿤데라, 커트 보니것, 안데르센이 그 면면이다. 다독가의 빽빽한 책장에서 골라 모셔온 작가들이터. 저자는 다수 작가들의 생가 또는 기념관을 방문했다. 일 때문에 출장을 가도 작가들을 잊지 않고 찾아다닌 모양이다. 작가들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고 글을 썼는지를 저자 자신의 방문기를 통해 보여준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콩코드, 영국의 브론테 박물관, 덴마크의 안데르센 생가를 묘사한 글은 각각의 작가들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화시켰다. 문학 작품을 만들어낸 '보이지않는 신의 손'처럼 느껴졌던 작가들이 '몸'을 가진 인간의 형상으로 파악되면서 그들이 남긴 문학이 더 현실감을 지닌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브론테 형제자매들의 작은 책 만들기는 맏딸 마리아와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시작되었다. 살아남은 아니들은 작은 책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작은 책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따. 아이들은 죽음을 극복하는 행위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 정령의 마법으로 되살아나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 정령들은 바로 브론테가의 아이들이었다.
p.57
루이자 올컷이나 브론테 자매처럼 함께하는 가족이 꿈을 꾸는 계기를 주고 꿈을 꿀 수 있게 단련까지 해주었던 경우와는 달리, 버지니아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벗어나서 접하게 된 블룸즈버리그룹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부모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버지니아에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블룸즈버리그룹이 주어졌다.
p.112
저자가 다룬 작가들은 서로서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컷은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의 열렬한 팬이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어느 시점에 브론테의 생가를 순례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싸우기를 단념했던 '집안의 천사'와 치열하게 맞닥뜨렸던 작가는 도리스 레싱이었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금색 공책』을 읽고 레싱의 위대함을 선언했다. 애트우드가 상상했던 엄혹한 미래는 이미 카프카와 쿤데라의 세계에서 예견되거나 확장됐다. 이렇게 작가들의 세계는 어느새 저자 김영란을 구성하는 일부가 됐다.
(…) 그들의 삶에 대한 사유는 종내는 나의 사유가 되었다. 비록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의 시간을 구성했지만 결국 나는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의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을 마칠 무렵이 되자 결국 책을 통해 만난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인물들이며 나였다는 생각 또한 든다.
p.268
김영란 저자의 책이 놀라운 건 그가 전'대법관'이었던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저자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일을 놓지 않은채 가부장적 질서에 맞춰 가정을 꾸렸다. 그의 독서는 모두 그 과정에 이루어졌다. 읽은 것을 자신의 사고 체계로 수렴하고 책과 책, 저자와 저자를 연결해 더 깊은 인식의 세계에 들어섰다.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이 생각난다. 진리를 찾는 인물들의 사상과 일대기를 연결하고 연결해 거대한 감동의 그물망을 짜냈던 포포바처럼 김영란 저자도 읽어온 책과 사람을 엮어 자신의 시절을 그려냈다.
간신히 집안의 천사와 싸워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둔다 해도 유령과 바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습과 편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
버지니아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도리스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쳤고 마지막까지도 이 문제에 몰두했다. 도리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처럼 20세기 작가들에 대한 러시모어산에 새겨질 인물로 꼽힐 수 있게 된 까닭은 이런 좌절의 경험을 진솔하게 써내려가서 버지니아가 말한 두번째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갔기 때문이다.
p.154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별개다. 저자처럼 읽는다고 누구나 이런 책을 쓰지는 못한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저자의 놀라운 읽기에 대해 알고 나니 저자의 쓰기가 궁금해 진다. 그는 어떤 경로로 이런 쓰기에 도달하게 된 걸까. 일기를 썼을까, 메모를 썼을까, 필사를 했을까. 틈틈이 썼을까, 시간을 정하고 썼을까. 어릴 때부터 쓰기도 좋아했을까, 어느 날 쓰는 재능을 발견했을까. '쓰기의 쓸모' 아니면 '시절의 글쓰기'를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