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양장)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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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는 밤처럼 검어서 해가 지면 밤과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녀석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온전히 볼 수 있지만, 세상은 녀석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여유롭고 우아한 재태로 해바라기를 하며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p.6


맛있고 재미있는 냄새가 나는 진짜같은 휴가를 찾아 나선 검은 고양이와 학교 쓰레기장에 쪼그려 앉아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고뇌하던 중학생 정인이 눈을 맞춘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와 사는 정인은 일주일에 세 번 수제 버거 가게 '햄버거 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태주가 신경쓰일 때, 갈수록 쇠약해지는 할머니도 걱정될 때마다 정인은 혼자있을 수 있는 쓰레기장 공터를 찾는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의 고민을 알아주는 듯한 묘한 고양이를 만난 것이다.


왜 박태주는 노력 없이 가진 것들을 난 갖지 못할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받는 입장에선 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p.14


고양이의 이름은 "헬렐 벤 샤하르", 정체는 "악마", "정확히는 "휴가 중인 악마"였다. 고양이는 메이지 37년 나쓰메 소세키의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었으며, '침몰하지 않는 샘(Unsinkable SAM)'이라는 별명을 가진 함재묘로도 살았다. 타는 전함마다 침몰하는 운명을 당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았고 60년쯤 후에는 할리우드에 진출해 『테일즈 오브 테러』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역사상 유명한 고양이는 모두 "헬렐 벤 샤하르"였던 셈.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가게 된 정인은 일하던 직장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억울함에 분노가 폭발한 정인은 홧김에 일하던 가게의 유리창을 깨는데 그 순간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면초가에 빠진 아이에게 헬렐이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 원하는 것을 말하면 다 이뤄주겠다고. 


정인은 할머니와 했던 대화들을 떠올린다. 할머니는 사는 게 지옥이 되는 순간을 아는 사람이었고 손자가 다른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자꾸 불평하면 안돼. 불평하면 사는 게 지옥이 되니까.

p.15


그리고 막연한 상상으로는 현실을 일굴 수 없음을 가르쳤다. 사람 인(人)자가 두 개의 막대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이런 상상, 저런 상상, 좋은 상상, 나쁜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상상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상이 통하지 않는" 일이 있고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용기를 내 마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세상엔 '만약에'가 안 통하는 것도 있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나한테 중요한 건 그거예요.

p.108


엄마가 떠난 후 "곱씹어 삼킨 외로움"은 "근사한 고명"이 되어 소년이 "급하게 철들며 포기해야 했을 욕심들"에 풍미를 더했다. 악마는 소년의 욕망과 상상을 이뤄주는 대신 그 작은 영혼을 원했을 것이다. 정인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한 악마의 판타지 속에서 빠진 것을 찾아낸다. 정인에게 마음을 연 친구 재아는 응달에서 자라는 클로버의 흙을 북돋워주면서 "꼭 꽃을 피"우라며 응원했었다. 해를 좋아하지만 자리를 잘못잡은 클로버는 정인의 다른 모습처럼 보인다. 적절한 환경은 아니지만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지지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걸 소년은 알았다. 언제 달라질지 모를 상황에 불평을 일삼으며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 보다는 "오늘을 즐겁게 사는 것도 나중만큼 중요하다"는 정인의 말은 헬렐의 유혹에 대한 답이 된다. 


난 싫어.

잃어버리기 싫어. 내 마음대로 안 풀린다고 걷어차 버리고 싶지 않아. 기억도 삶도, 세상도.

p.225


얼핏 정인의 선택은 가혹해보였지만 복지사 선생님의 활동 덕에 얼마간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아이를 도우려는 손길들의 힘은 미약하고 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구조적 힘은 크기만 하다. 소설 속 정인의 도덕적 선택을 응원한다. 그러나 바른 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발밑을 살피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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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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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차를 진하게 우린 후 나무 막대에 거즈를 감아 적셨다. 그리고 엄마의 입으로 가져가 맛보게 했다.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매일 같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우렸다. p.11


이시안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치사율이 5%가 넘는 감염병 유행이 시작되었다. 해외여행 사실을 숨기고 격리를 하지 않은 친구가족과 접촉하여 이시안의 가족도 감염이 되었다. 이시안과 아빠는 회복되어 퇴원했지만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이시안은 육년 간 엄마의 간병을 하고 있다. 엄마는 산소 호흡기에 의해 숨을 쉬고 스스로 음식을 삼키지 못 한다. 백온유 작가의 장편소설 『페퍼민트』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지는 않지만 그 자장안에서 간과되기 쉬운 지점들을 건드린다.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pp.191-192


『페퍼민트』는 감염병의 전파자와 감염자를 등장시켜 감염병의 참혹함 이면의 간병노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에 늘 존재하지만 죽음만큼이나 불편해하고 회피하는 간병노동이 감염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잘 녹아있다. 간병이 백온유작가의 말처럼 ‘상상으로 면역력을 기를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간병을 하게 되는 가족들이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나는 나의 20대를 웬만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p.158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이 365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20대의 이시안과 30대의 이시안, 40대의 이시안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소변 통을 비우는 모습을 내가 상상하고 만다는 거야. p.211


엄마가 없어지면 내겐 무엇이 남지. 간병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홀가분하기보다는 또 다른 막막함이 나를 덮친다. p.216


학교가 끝나면 학원대신 병원에 가서 엄마를 간병하는 이시안에게 입시학원이나 성적, 수능, 대학, 장래희망은 다른 세계 이야기다. 이시안은 엄마의 간병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어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이시안은 6년 전 감염병 전파자가 되자 갑자기 이사를 간 김해원가족을 우연히 만나 평범한 고등학생의 일상을 경험한다. 이시안은 엄마를 간병하는 상황을 숨기고 보통의 고등학생을 흉내내지만 자꾸만 어떤 선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두렵다. 병원비를 대느라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처분했던 이시안의 아빠는 실직하나 취직이 되지 않는다. 빈곤으로 간병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이시안의 아빠는 ‘그만하는 게 어때.’라며 엄마의 산소통 밸브를 잠그려 한다.


대한민국에서 간병의 책임은 전적으로 가족에게 지워지지만,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선택권은 환자와 가족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환자가 산소호흡기를 하게 되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싶어도 산소호흡기를 떼는 것은 불법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시작된 연명치료를 환자나 가족의 결정으로 중단하지 못 한다. 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자가 호흡을 못하면 기계호흡기를 달고, 음식을 삼키지 못 하면 튜브로 강제 주입한다. 치료에 동반되는 통증과 경제적 부담과 일상생활을 포기해야하는 간병노동의 고통은 환자와 가족의 몫이다.


기계호흡기가 의료에 사용되기 전에는 인간은 스스로 호흡을 못하게 되면 임종하였다. 인위적으로 영양분을 신체에 주입하는 시스템이 의료에 도입되기 전에는 음식을 스스로 삼키지 못하면 인간은 임종을 맞았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고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하면 임종을 맞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임종의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고 가족은 슬플지언정 죄책감에 빠지거나 범죄자가 되지 않았다. 기계호흡기가 의료에 도입된 것이 1940년대 전후이니 80년 전에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임종을 맞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시안의 엄마가 연명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심장이 멈추었을 때, 스스로 호흡이 어려울 때, 음식을 삼키지 못 할 때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임종을 했더라면 이시안 가족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시안의 엄마는 딸이 미래를 포기하고 자신을 간병하기를 원할까? 식물인간인 상태로 연명치료로 인한 고통을 계속 견디기를 원할까? 기계호흡기와 인위적인 영양공급과 약물로 임종까지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


백온유 작가의 소설 『페퍼민트』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간병이라는 상황에 맞닿은 개인의 삶과 도덕, 정치, 법, 경제 문제를 고민을 깊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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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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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낭독 모임의 진도가 중세를 통과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까지는 비교적 단선적인 역사가 진행된 반면 서로마 멸망 후의 역사는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중세를 다룬 책들을 몇몇 들여다보며 읽기의 중심을 잡아보려하지만 유럽사의 일부를 이루는 나라 혹은 가문들이 늘어나다보니 뇌용량의 한계를 경험한다. 그중 가장 문제적인 나라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이다. 영국은 영국대로 브리튼 섬 주변의 사건들을 둘러보면 될테고 프랑스는 또 나름대로 틀을 갖춘 왕조사가 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출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보니 넓디 넓은 땅 이곳저곳의 제후들이 시대와 힘의 강약에 따라 명멸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계보를 거칠게 정리해보면 오토(작센)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로 이어진다. 왕조 사이사이에 벨프 가문, 룩셈브루크 가문 등이 배출한 황제가 한 둘씩 등장하다 보니 질서 정연한 계보가 기억 속에 새겨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부터 헝가리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있었고 역사도 길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인물도 많다. 세계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 몇 명으로 대략 갈무리해야하나 싶었을 때 눈에 들어온 책이 마틴 래디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 동유럽학 대학의 교수인 마틴 래디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취약", "시대착오적", "돌발적"같은 용어로 판단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이 가문이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이자 평화의 보증인, 학문의 후원자임을 자부했고, 세계를 통치할 운명이라는 신념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10세기 말엽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미한 시작부터 20세기 마지막 황태자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그들의 제국, 그들의 상상력과 우리가 그들을 상상한 방식, 그들의 의도, 계획, 실패 등을 설명"한다.



책을 펼치자마자 다섯 페이지에 걸친 가계도를 마주했다.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듯한 자손들은 이름 없이 '아들 3명과 딸 2명'처럼 표시했음에도 무려 다섯 페이지. 10세기부터 20세기까지, 천 년의 시간 동안 가계도이니 자손의 수가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책에 언급될 인물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수만 많은 게 아니라 이름들의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것 또한 읽기의 방해 요소다. 아버지 '페르디난드'의 아들도 '페르디난드', 손자도 '페르디난드'다. 이쯤 되면 정말 집중해서 읽지 않고는 문맥을 이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역사는 잘못이 없다. 읽는 사람의 지력이 문제일 뿐. 책을 얼마간이라도 읽어보면 시대별, 지역별로 나뉜 가계도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말엽에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분인 슈바벤 공작령에 속한 지역에서 시작했다. 칸첼린이라는 이름의 조상에서 출발한 가문은 초창기만해도 "약탈자이자 도적"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가문의 소유지 이름에서 유래한 '합스부르크'라는 이름도 18세기에 이르러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나타났고, 실러의 유명한 역사 담시譚詩 「합스부르크 백작」1803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p.37


저자는 14세기 경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부 역사학자들의 상상과 달리" "결코 "가난한 백작들"이 아니었다"며 가문의 부상 요인이 우연에 기대고 있다고 말한다. 남다른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력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경쟁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공백을 틈타" 상속 재산과 칭호를 얻어 가문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여러 귀족 가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치적 요인 때문에 부상했다고 본다. (…)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부상한 데에는 이른바 "포틴브라스 효과"의 영향이 더 컸다. (…) 포틴브라스처럼 합스부르크 가문도 경쟁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공백을 틈타서 득세했다. pp.41-42


초창기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리를 이끌었던 혈통의 지속성은 18세기 카를 6세의 시기에 어려움을 맞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산력 덕에 다시 이어졌다.


책은 큰 테두리에서 시간 순서를 따르면서 각 시기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을 주제별로 묶어 다룬다. 예를 들어 '제18장 무역상과 식물학자, 그리고 프리메이슨'에서는 마리아 테리지아 부부와 아들 요제프 2세 시대를 다룬다. 작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과 신대륙 식민지를 잃고 축소된 상황을 마리아가 쇤부르 궁전을 꾸미는 장면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리고 요제프 2세가 무역을 통해 해외 식물을 들여오는 과정이 이어진다. 요제프 통치 시기에 비록 영토는 축소됐지만 황제는 무역을 통해 다른 세계에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돈벌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수집과 보급"을 위해 교역을 했다. 자연사 수집품에 대한 관심은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에게서 이어졌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에 진열할 수집품을 사들였을 뿐 아니라 박물관 사업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고 운영에 시간을 투자했다. 슈테판의 과학적 노력은 프리메이슨 사상과도 연결점이 있었고 후에 "보편적인 형제애"를 기본 사상으로 여기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저자는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활동을 들여다보면서 그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서술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크 예술을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시킨 대목도 눈여겨 볼 만하다. 저자는 바로크를 "레오폴트 1세와 그의 두 아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치세와 연관된 예술 형태"로 정의한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바로크'라는 용어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며 바로크 양식이 건축, 그림, 교회 행사, 종교극, 음악 등에 적용된 사례를 설명한다. 저자는 음악을 다룬 대목 끝부분에서 레오폴트 1세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다. 책의 곳곳에는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인식을 짚어주는 부분들이 있다.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쇠락이 아닌 통치자로서의 운명에 대한 신념으로 해석하고자 한 저자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다.


레오폴트 1세는 흔히 오페라에 돈을 너무 많이 쓰고 건축에는 너무 적게 썼다는 비판을 받지만, 이는 부당한 지적이다. 빈이 오스만 제국으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건축 공사가 성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건축의 기회가 제한되었고 빈의 거리는 비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p.278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성들은 '정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여성들이 보통 "번식 기계"나 "신심의 본보기"로 여겨질 때 합스부르크 가의 여성들에겐 죽은 남편 대신 통치권이 주어졌고 섭정으로 지명됐으며 재산분할 과정에서 상속자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저지대 국가들을 다스릴 적출 남자 상속자가 부족할 경우에는 여성들이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 "남성적인 공적 세계로 넘어가는 여대공들과 부인들, 과부들"의 존재가 "기존 질서나 정상적으로 형성된 권력의 위계질서를 뒤엎은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할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자들에게는 도덕적, 육체적 타락을 둘러싼 그런 상상이 결코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가,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누린 권력도 정상 상태의 부자연스러운 역전 현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자들의 입장에서, 권력과 권력의 정통성은 그들이 속한 왕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그 왕가의 위대함은 생물학적 차이를 초월했다. p.347


마틴 래디 교수는 결론에서 오스트리아ㅡ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1918년 이후의 역사를 그리며 합스부르크의 의미를 되짚는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피난처도 없"어지자 분열된 신생국가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다시 주변 제국에 점령됐다. 저자는 일부 역사가들과 작가들이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을 "극악무도한 간수"로 치부한다고 지적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민족 정체성을 초월"한 "보편성"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개별 영토와 개별 민족의 통치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인종"을 "단일화된 통치권"아래 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만이 민주주의적 성격을 유지했고, 경쟁 세력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소련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밖의 모든 곳에서는 결국 1989년에 잇달아 일어난 민중 혁명으로 붕괴할 때까지 공산주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

하지만 중앙 유럽의 정치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헝가리의 역사학자가 내놓은 전망이 옳았다는 결론을 피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자였다면 더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p.515-516


책 앞부분의 가계도와 사이사이 합스부르크의 지배 영역을 표시한 지도, 두 부분에 걸쳐 첨부한 상당 분량의 칼라 도판을 오고가며 본문 내용을 읽어가다보면 멀미기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천 년 세월을 압축해서 지난다고 생각하면 어지러움은 당연하지 않을지. 다 읽었다고 생각한 순간 수많은 이름들의 잔상만 머리 속에 남았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는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을 책이 아니다. 10세기 이후의 유럽사를 읽을 때면 틈틈이 들여다 봐야할 참고서로 여겨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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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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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북아일랜드 분쟁 현장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한 소설이었다. 대의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약자의 삶을 가렸다. 자고 나면 시체가 발견되는 동네에서 소녀의 삶은 존중받지 못했다. 다들 그럴 거라는 추측과 그래야 한다는 강박이 소녀의 남다름을 짓눌렀고 사태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작가는 전쟁의 불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막혀있는 심리와 누구에게도 보호를 청하지 못하는 소녀의 혼돈을 그렸다. 불친절하게 덜컹거리는 문장은 소녀의 마음이 흐르는 그대로는 드러냈고 읽는 사람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다. 소녀가 느끼는 어두움을 문체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덕분에 소설의 결말이 더 반가웠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갑갑한 공기를 문장으로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장과 소설이 추구하는 바가 훌륭하게 합치된 소설이었다.


애나 번스는 작품을 빨리 내는 작가가 아니어서 후속작을 많이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전에 출간한 작품이 번역돼 나왔다. 데뷔작 『노 본스』. "작가 자신이 나고 자란 벨파스트의 마을 아도인을 배경으로 한 소녀와 이웃들의 일상을 통해 북아일랜드의 무장독립투쟁 시기를 그린 첫번째 장편"이다. 그러고 보니 『밀크맨』 이전의 두 소설이 합쳐저 세 번째 소설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노 본스』에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아도인의 상시 전쟁 상황을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로 그렸다면 두번째 소설 『작은 구조물』은 "폐쇄적인 범죄자 가족 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세번째 소설 『밀크맨』은 무장투쟁 중인 북아일랜드 어느 마을의 한 소녀가 겪는 일을 소녀의 시점으로 다룬다. 『노 본스』는 『밀크맨』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성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인 동시에 『밀크맨』 이야기의 절반을 다룬 책으로 보였다.


출판사에서 받은 서평도서는 출간본의 앞부분만을 가제본이었다. 작품 전체를 읽지못했으므로 초반의 설정들이 어떤 결말을 위해 준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소설은 아도인에 사는 어밀리아라는 이름의 일곱 살 아이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1969년, '트러블'이라 불리는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둘러싼 혼란기"가 열린 때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우며 끈덕지게 의심하는 성격"의 어밀리아는 "평소처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과 "길 어귀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생각과 달리 트러블은 이후 30년간 계속됐다. 트러블은 계속해서 더 "과격한 죽음"이 발생하는 기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왜 열여섯 먹은 아이가 60년, 70년 남은 시간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세 사람은 그날 오후에 밀타운 공동 묘지에 묻혔다. 다들 처참한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다음의, 새로운, 과격한 죽음에 묻혔다.

pp.146-147


이야기는 아이의 시점에서 아이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로 시야를 넓힌다( 『밀크맨』에서 주인공 소녀의 시각에서 마을 사람들을 묘사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로 건너갈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고 어밀리아는 자라난다. 트러블 초기에는 영국군으로 참전한 친척이 아도인 마을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상황은 엄혹해진다. 영국군은 적일뿐 더이상 친척이 아니었고 과거 혈연의 친근함을 기억하던 청년은 한때 인사를 나눴던 아이에게 목숨을 잃는다.


주변에 산재한 폭력은 가정에도 스몄다. 어밀리아의 부모와 형제들은 서로서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부모는 자녀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못본체 외면한다. 가족간 폭력은 상시적이었고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달리 폭력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어밀리아는 폭력을 거부하듯 음식을 거부하게 된다. 30년가 지속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작가의 의도 가운데 하나였을까. 일상을 넘어선 폭거를 상상할 수 없었던 아이는 폭력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죽음과 떨어진 일상을 무시한 채 살아간다. "일상적인 것"이 삶을 구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시야에 아버지의 죽음이 박혀들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는 일상의 귀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비록 아버지의 노력은 실패하지만.


(ㄴ) 집에서 죽을 수는 없다, 어린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왔다가 발견하면 안되니까. 그래서, 늘 그러듯 일상적인 것들ㅡㅡ이웃 사람들, 하늘, 분홍색 노을, 팔을 스치는 늦여름 산들바람ㅡㅡ을 무시하며 어떤 것에도 눈을 주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앨로이시어스 팰런의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을 뭐 하러 보나? 그게 지금 나를 구해줄 수도 없는데.

p.131


아도인 마을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트러블의 끝을 맞이하게 될까. 어밀리아는 세상에 대한 거부로 시작됐을 거식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밀크맨』의 결론을 초기작에서부터 보여줄 것인가. 차마 읽어내고 상상 속에 재현해보기 두려운 장면들을 작가 애나 번스는 차분한 문장으로 적어냈다. 『밀크맨』의 원형이 되는 인물들을 찾아보고 부커상 수상작으로 변모할 작품의 모태를 눈여겨볼 수 있다는 점은 『노 본스』 읽기의 또 다른 수확이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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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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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서른 두 살의 천문학자 지연이 서울을 떠나 천문대가 있는 희령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빛이 없는 어두운 산골을 배경으로 하려다보니 천문대를 떠올렸고 지연에게 천문학자라는 직업을 부여하게 됐다고 했다. 밝음을 멀리한 산을 올라 새카만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는 일은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하기 어려울 듯 하다. 마음 속 심연에 더해 눈 앞에도 암흑이 펼쳐진다면 외로움은 치유되기 힘들테니. 그래서일까. 우주를 연구하는 현실의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는 유난히도 밝은 사람이다.


천문학의 매력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깨닫게 됐다. 우주적 신비를 설명하는데 온갖 인문 고전이 인용돼 있는 걸 보고 놀랐고 그런 비유를 통해 머리 위 하늘 넘어 어딘가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었다. 그러나 관심은 거기까지. 칼 세이건에 비견될 만큼의 문학적 필력이나 쉬운 서술을 만나지 못했다.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보다는 좀 쉬운 대중서를 보고 싶었지만 마땅히 눈에 띄는 책을 찾지 못하고 번역서의 부피나 난이도는 지레 겁을 먹게 하기 충분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순수 국내파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의 에세이다. 저자가 천문학자이라는 희귀한(?) 직업을 갖게 된 과정과 우주에 대한 애정, 천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동안 있었던 일 등을 적은 글들이 모여 있다. 물론 지구과학 공부를 제대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가 쉽게 서술했을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의 내용 일부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책은 '천문학'이라는 세계와 그 안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는데는 충분했다.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온라인으로 연결해 두 시간 가량 이어진 강연에서 심채경 저자는 시종일관 밝고 맑은 얼굴로 자신의 책에 대해, 우주에 대해, 그것을 연구하는 일에 대해 즐겁데 이야기했다. 일견 어렵게 느껴지는 분야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저렇게나 경쾌 발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문학쯤 하는 사람이라면 피곤에 찌든 얼굴에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으리라는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하긴 칼 세이건도 내 편견에선 한참 멀긴 하다.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저자는 뭘 해도 열심히, 푹 빠져서 하는 사람이었다. 천문학 연구도 그렇지만 독서에도 마찬가지 열정을 발휘하고 있었다. 책 읽는 방법으로 "딴 생각을 많이 하는 독서"를 권한 저자는 자신이 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읽기를 사례로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외계를 포함한 시공간이 뒤섞인 여행을 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심채경 저자는 『제5도살장』을 '시간 순으로 재조합하기', '배경만 골라 읽기', '시야를 바꾸어 읽기', '등장인물 찾기', '개인적 경험과 연결시키기' 등의 방법으로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특히 '시야를 바꾸어 읽기' 방법에는 '공상과학(SF)'으로, '반전(反戰) 소설'로, '정신착란자의 관찰'로 읽어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읽었다. 한 권의 소설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딴 생각'을 보여주는 독서다.


책을 보면서 저자의 문장력을 눈여겨 보게 됐다. '연구자'의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문장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쉽고 잘 읽히는 일상적인 글을 쓰면서도 콕 찌르는 위트를 잊지 않았다. 문장력의 바탕은 '일기 쓰기'였다. 저자는 5살때 그림일기로 시작해 20대까지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것들을 20대 어느 시절 읽어보고는 전부 폐기했다고. 그리고는 읽기는 다시 보지 않기로 했다는데 조금 더 시간이 흐를 때까지 보존했으면 다른 판단을 하지않았을까 싶었다. 현재는 메모지, 회의록 구석, 블로그 등 그때그때 손닿는 대로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쓰기 연습이 충분히 돼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쓰기가 생활화돼 있는 사람이었다. 저자의 문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기고 싶은 대목들 중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p.13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읽은 '재능'에 대한 부분과 상통하는 대목도 반가웠다. 정세랑 작가는 '질리지 않는 것이 대단한 재능"이라고 썼는데 심채경 저자의 경우도 '즐거운 지루함'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 그러다보니 한 단계 전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지루함이 자연의 ㅎ나조각을 발견하는 것을 이어진다면 금상첨화다.

pp.78-79


천문학자의 관측과정을 서술한 대목에서는 저자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담긴 대목이다. 누군가 이런 문장을 읽고 관측하는 일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다소 길지만 남겨두고 싶다.


오후 느지막이 올라가서 하늘 플랫을 찍어놓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노을을 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기계처럼 오직 관측에만 집중하는 시간. 망원경 시야에 타깃이 들어오도록 맞추고, 초점 조절하고, 노출 주고, 로그 적고…… 그러다 보름달이 가까이 오면, 달빛이 너무 밝아서 내 타깃이 안 보인다며 불평도 하고 달이 너무 예뻐서 감탄도 하며, 의자에 푹 파묻혀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그러다 달이 지면 오기 전까지 다시 모니터 속으로 빠져든다. 허락된 짧은 밤이 다 지나면 아쉬운 마음으로 박명을 맞으며 다시 플랫을 찍는다. 벌게진 눈으로 돔을 닫고 망원경을 제자리에 파킹한다. 유독 밤새 빈틈없이 관측한 날은 파킹하는 그 순간이 가슴 끝까지 뿌듯하다. 너무 졸려서 미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는, 관측자 숙소의 암막 커튼이 주는 그  따뜻한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잠들고 싶은, 관측하기 딱 좋은 날.

p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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