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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 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작가의 말' 中
백신패스가 처음 적용됐을 때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고립감을 느꼈다. 바깥 나들이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할 공유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없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벽으로 느껴졌다. 백신 미접종 상태로는 지인에게 차 한잔 같이할 수 없었고 한 달도 전에 미리 예매해 둔 연극을 PCR검사를 받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백신패스는 물리적인 제약 이전에 심리적인 차단이었다.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 어딜가도 혼자. 그날도 혼자 커피를 주문하고 서성이던 서가에서 김연수를 다시 찾게 됐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에 끌려 펼쳤지만 막상 읽기를 결정한 건 ‘작가의 말’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는 ‘심연’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고 쓴다. 작가는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그 ‘심연’ 저편에 말을 걸었기 때문에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심연에 둘러싸여 침잠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가 작가에겐 서사의 실마리가 됐다. ‘심연’을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하려 시도하는 일, 주변과의 단절 상황에서 작가의 시도가 의미깊게 느껴졌다.
물론 마음은 단단히 먹었다. 내게 김연수의 소설은 그의 에세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작가에 대한 나의 편견을 확인했다. 그의 소설이 모두 하나같으리라는 편견. 책은 시작부터 막힘이 없었고 어딘가 이해력을 시험하는 대목이 분명 있으리라는 조바심은 어느새 잊혔다. 서사도 서사지만 문장이 시였다. 막힘없이 읽었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차오르는 말들을 삭이기 아쉬웠고 좋음을 나누고 싶어졌다.
소설의 첫 대목 주인공 카밀라가 작가로 변신하는 장면이 흡인력있었다. 미국에 입양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카밀라는 양모의 죽음 이후 양부로부터 어린 시절 물건이 담긴 상자를 배송받는다. 이십일 년 동안 이질감을 느꼈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남자친구 유이치는 카밀라에게 유년을 소재로 글을 써보라고 제안한다. “사물에 들러붙은 삶의 흔적”은 카밀라를 작가로 만들고 친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나는 유이치의 말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매일 시간을 정한다. 한 시간 정도라면 가장 좋겠고, 삼십 분이라도 상관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기억해. 뭔가 쓰는 순간, 넌 작가가 되는 거야.”). 그 시간이 되면 노트와 연필을 들고 그 상자 앞으로 간다. 눈을 감은 뒤, 상자에 손을 넣고 무엇이든 처음에 잡히는 물건을 꺼낸다.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그런 물건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듯(“갓 태어난 아이의 시절로 돌아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지.”). 우선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사물의 표면을 관찰한다. 그다음에는 기다린다. 자기 내부에서,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 아래에서, 무의식의 짙은 어둠을 뚫고, 마그마가 꿈틀대듯이 어떤 일들이 떠오를 때까지.
p.27
유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부담갖지 않고 글을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매일 쓰기,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순서나 논리 같은 건 신경쓸 필요 없이” 받아쓰기, 하루에 최소 세 페이지는 반드시 채우기,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를 덮은 뒤, 지정된 장소에” 두고 숙성과정을 거치기. 남자친구의 친절한 코칭은 카밀라의 유년을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라는 책으로 변신시킨다.
양모의 단속 덕에 카밀라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카밀라의 심연이었다. 이십 여년간 묻혔던 과거는 죽음을 앞둔 양모의 유언과 상자 속 사진 한 장으로 열렸다. 소담스레 핀 동백꽃을 배경으로 찍은 갓난 아이와 어린 엄마의 사진. 카밀라는 사진 한 장과 친모가 출산 당시 열일곱 살이었다는 양모의 말을 붙들고 심연 건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은 고등학교 재학 중 임신과 출산을 했고 그 결과 카밀라와 자신의 심연을 만들었다. 지은이 친부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에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를 띠게 된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동료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한 아버지의 존재는 지은을 고립시켰고 친부를 밝히지 않은 임신과 모두가 만류했던 출산은 그녀를 막다른 길로 몰았다. 친오빠를 비롯한 친구, 선생님 그 누구도 지은의 진실에 닿지 못했다. 지은은 자신의 아이가 타인과의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날개가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쏠린 오해의 심연을 아이의 날개로 건널 수 있길 바랐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
p.244
지은의 ‘날개’는 강제 입양으로 꺾였다. 날개 잃은 어린 엄마는 깊은 바다 심연으로 가라앉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아이가 자신보다 더 나이를 먹고 엄마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편견이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이 날개를 달고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소설은 사람 사이에 놓인 층층의 심연을 드러낸다. 심연은 한 사람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자신의 마음과 불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두움 너머로 말을 걸어보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저 너머 누군가가 응답해올 때 회피했던 진실을 덮어버렸던 과거를 마주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밀라는 친모의 바람대로 이름을 ‘정희재’로 바꾸면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그때 있었던 일을 보여주던 또다른 ‘희재’를 만난다.
사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 불가사의하게 그 사이를 건널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와 겹쳐 읽혔다. 김초엽 작가가 상호 이해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공존을 그렸다면 김연수 작가는 십 년쯤 전에 사람 사이의 간극을 넘을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 두 작가가 보이는 다름은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려워진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사람 사이를 보는 시야가 더 촘촘해졌음에 대한 증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사람 사이의 ‘이해’라는 행위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속단은 관계의 실패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사람 사이의 넓은 거리, 그 사이를 건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혼자 좋고 말 수 없어 한국 소설 읽기 모임 토론 도서로 추천했다. 참여자 모두 김연수의 발견을 외쳤다. ‘관계’에 집중해서 읽은 나와 달리 시적인 문장에 집중해 읽거나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와 엮으면서 죽은 지은의 목소리를 더한 구성을 눈여겨본 분도 있었다.
내가 심연의 고독을 건너는 방법은 책이다. 책으로 상대를 만날 수 있고 관계를 잇는 도구도 책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에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라 노래했고 지은은 딸 희재를 ‘날개’ 삼아 희망을 발견하려 했다. 내게 날개 달린 희망은 책 하나로 수렴된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