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연재를 시작하며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의 내 주변이 그렇습니다. 마음은 연재소설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몸은 치과에 다니고 있군요. 진료의자에 누워서 고통을 잊기 위해 무슨 생각인가를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뻤던 순간들, 깨어나기 싫었던 꿈들, 여행길에 스쳐 지났던 잊히지 않는 풍경들과 광장의 사람들이 풍기던 열기, 껴안거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던 어린애들이나…… 그리고 별 하나하나 같은 나의 모국어를.
치과에서 돌아와서는 젊은 날에 읽었던 책들을 몇 페이지씩 다시 읽곤 했습니다. 책을 가슴에 얹어놓고 잠이 들기도 했지요. 읽은 책을 버리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나날들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내게는 지난 시절에 읽은 책들이 답을 주고 새 길을 열어주고 느슨해지려는 나를 긴장시키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이미 읽은 책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가 되살아나는 것일 테죠. 진료의자에 한 시간쯤 누워 있어야 했던 어느 날은 나의 당신들에게 전하지 못한 채 비밀이 되어버린 내 마음들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들이 이 소설을 진행시켜나갈 것입니다. 치과를 다니는 일과 동시에 주차장을 복구하라는 구청의 지시 때문에 집 담을 허무는 공사를 벌였습니다. 쓰지 않은 주차장 자리에 작년 봄에 버려질 위기에 처한 모과나무를 심어뒀었지요. 복구하려면 모과나무를 파내야 했어요. 모과나무를 살리기 위해선 부득이 담을 허물어야 했습니다. 마취가 덜 깬 퉁퉁 부은 뺨으로 돌아와 허물어진 담 근처에 서서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불안한 모과나무를 응시하며 너 살리기 위해 저 담을 부수고 있어, 그러니 죽으면 안 된다, 혼잣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설의 제목을 새로 지었다가 버리고 다시 짓고를 반복했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 둘이 쌍둥이처럼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겨우 온 힘을 다해 두 이야기를 떼어놓으며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제목으로 정합니다. 젊은 날 열독했던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얻어온 것입니다.
연재를 마칠 때까지 새벽 3시에 깨어나 아침 9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요가원에 다녀와 점심을 지어 식구와 먹고 어쩌면 조금 더 잘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간혹 누군가를 만나 밤늦게까지 헤어지지 못해 이야기를 더 나누거나 길을 걷는 일도 있겠지요. 그런 날들 속에서도 되도록이면 이른 저녁을 먹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3시쯤엔 깨어나는 단순한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설은 완성되겠지요. 여러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쓰여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 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다시 한번 찾아 읽는 그때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소설로 탄생하기를요. 바흐는 가까운 사람들이 멀어져가도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연주한다고 말했지요. 이번 소설에게 바라는 내 마음도 그런 것입니다.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주는 마음이 읽혔으면 좋겠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언어는 상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쓰고 누군가는 읽으며 치유되고 회복하기를 바라지만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지요. 물위에 떨어진 꽃잎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듯 붙잡지 않고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이 치유인지도 모르겠어요.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듯이요. 아마도 그 과정에서 문학으로서의 그 ‘무엇’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할 테지요. 무엇이 발생할지는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쓰는 나도 모릅니다. 그 ‘무엇’은 얼마 전 이탈리아 강진 때 잔해에 깔린 채 서른 시간 동안 뜨개질을 하며 구조를 기다렸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띨 때도 있을 거고, 그때에 겨우 스물셋과 넷이었던 젊은 약혼자들이 서로 껴안은 채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는 모습일 때도 있겠지요. 어떤 과정을 통하든 완성된 후에는 쓰는 나와 읽는 당신께 작은 치유의 시간이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 새벽 3시에서 아침 9시까지 집중하고 몰입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쓰는 일이 나에겐 행동이며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증언이랍니다.
혹, 이른 새벽에 깨어나거든 이 세상 어딘가에 쓰는 나도 깨어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 깨어 있는 셈이 되겠지요.
수차례 약속을 지연시켰으나 말없이 기다려준 알라딘!
고마워요!
2009년 여름,
신경숙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