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서 새벽빛이 툭툭, 터진다. 눈이 시다.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
이 작품은 육 개월 동안 연재된 원고를 초고 삼아 지난겨울 동안 다시 썼다. 겨울만이 아니다. 봄과 이 초여름 사이…… 아니, 방금 전까지도 계속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쇄되기 직전까지도 쓰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책이 나온 후에도. 어째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도 계속 이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작년 초여름, 첫 문장에 들어가기 전에 아래와 같은 약속을 했었다.
―새벽 세시에 깨어나 아침 아홉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요가원에 다녀와 점심을 지어 식구와 먹고 어쩌면 조금 더 잘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요. 간혹 누군가를 만나 밤늦게까지 헤어지지 못해 이야기를 더 나누거나 길을 걷는 일도 있겠지요. 그런 날들 속에서도 되도록이면 이른 저녁을 먹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세시쯤엔 깨어나는 단순한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설은 완성되겠지요.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 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다시 한번 찾아 읽는 그때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소설로 탄생하기를요. 바흐는 가까운 사람들이 멀어져가도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연주한다고 말했지요. 이번 소설에 바라는 내 마음도 그런 것입니다. 멀어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주는 마음이 읽혔으면 좋겠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언어는 상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쓰고 누군가는 읽으며 치유되고 회복하기를 바라고 그리 되어도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오는 법은 없지요. 물 위에 떨어진 꽃잎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듯 붙잡지 않고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이 치유인지도 모르겠어요.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듯이요. 아마도 그 과정에서 문학으로서의 그 ‘무엇’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할 테지요. 무엇이 발생할지,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는 쓰는 나도 모릅니다. 그 ‘무엇’은 얼마 전 이탈리아 강진 때 잔해에 깔린 채 서른 시간 동안 뜨개질을 하며 구조를 기다렸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띨 때도 있을 테고, 그때에 겨우 스물셋, 넷이었던 젊은 약혼자들이 서로 껴안은 채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는 모습일 때도 있겠지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 완성된 후에는 쓰는 나와 읽는 당신께 작은 치유와 성장의 시간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를 위해 새벽 세시에서 아침 아홉시까지 집중하고 몰입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쓰는 일이 나에겐 행동이며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증언이랍니다. 혹, 이른 새벽에 깨어나거든 이 세상 어딘가에 쓰는 나도 깨어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 깨어 있는 셈이 되겠지요.
약속대로 이 소설은 새벽 세시에서 아침 아홉시 사이에 씌어졌다. 작품 속의 화자들이 새벽 거리를 걸어다니고 새벽 시간에 서로를 찾아다니거나 새벽에 내리는 눈을 보고 새벽 빗소리를 듣고 새벽에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풍경이 잦은 것은 이 작품을 쓰고 있던 시간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시간도 새벽이다.
여러 개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사랑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내게는 사랑이 죽음이기도 한 것인지 끊임없이 죽음이 따라 나왔다. 작품을 쓰는 동안 놀랍고 쓰린 마음으로 애도해야 했던 연이은 큰 죽음들의 잔상이 내 책상 앞까지 따라왔을 수도 있고…… 함께 지내다가 예기치 않았던 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게 남긴 내상들이 나를 그쪽으로 인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이었든 작품을 마쳐놓고 한동안 얼굴 한쪽이나 어깨 한쪽이 무엇에 쓸린 것처럼 아파 작품을 저만큼 밀어놓았다.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 새벽 시간…… 가만히 원고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펼쳐놓고 한쪽으로 쏠려 있는 이 작품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아니라 죽음 이야기가 되어버렸어, 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기뻤던 순간들을 줄기차게 생각했다. 깨어나기 싫었던 꿈들을, 여행길에 스쳐 지났던 잊히지 않는 풍경들을, 광장의 사람들이 풍기던 열기와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던 어린애들의 어여쁜 뺨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숨소리와 그들이 번성시킬 아름다움을. 그 여운들이 별 하나하나 같은 나의 모국어에 실려와서 이 작품을 사랑 쪽으로 이끌고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하여 이제야 이 모습이 되었다.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을 향한 나의 이 발신음이 어디에 이를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울한 사회풍경과 시간을 뚫고 나아가서 서로에게 어떻게 불멸의 풍경으로 각인되는지……를 따라가보았다. 최승자 시인의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제목을 생각해냈다. 가능한 시대를 지우고 현대 문명기기의 등장을 막으며 마음이 아닌 다른 소통기구들을 배제하고 윤이와 단이와 미루와 명서라는 네 사람의 청춘들로 하여금 걷고 쓰고 읽는 일들과 자주 대면시켰다. 풍속이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도 인간 조건의 근원으로 걷고 쓰고 읽는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 안에서 나는 작품 바깥에서 글쓰기를 했던 셈이다. 미래의 이야기를 쓰면서 팔이 떨려 책상에서 몇 번이나 벌떡 일어났던 순간, 단이의 이야기를 쓰다가 젊은 청년의 우수에 마음이 고즈넉해져 새벽 거리를 쏘다녔던 순간, 글을 쓰지 않는 새벽에 실종과 의문사에 이른 이들의 기록들을 식탁 위에 펼쳐놓고 읽다가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졌던 순간…… 종래는 작품 속의 그들 또한 글쓰기 앞에서 뭔가에 벅차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느꼈던 그 모든 순간순간들을 여기에 부려놓고 이제 나는 다른 시간 속으로 건너간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2010년 5월
신경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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