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수전 손택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자세히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이었다. 수전 손택의 작품을 읽어본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삶이나 행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 책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보라색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전 손택의 사진이 실린 표지에 저절로 손이 갔다는 게 맞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건 인트로 텍스트 때문이었다.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모든 책에는 본문에서 발췌한 문장이 인트로 텍스트로 들어가는데, 이 인트로 텍스트를 보는 순간 읽고 있던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롤링스톤>지의 에디터 조너선 콧이 수전 손택을 인터뷰한 책이다. 다양한 매체의 인터뷰를 엮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인터뷰를 원래의 호흡대로 담았다.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그녀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부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다. 졸업 후에도 꾸준히 수전 손택과 교류를 이어갔던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은유로서의 질병』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를 제의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1978년은 수전 손택에게 중요한 시점이었다. 1977년에 대표작인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해 한창 주목을 받고 있었고,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서 수술과 투병으로 보낸 2년여 동안 구상한 또 다른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된 시점이었다.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로 돌아온 그녀는 모두 열두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과 철학과 취향과 생활을 꾸밈없이 풀어놓았다. 수전 손택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제 간의 끈끈한 교집합을 통해 그 어떤 인터뷰보다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이 수전 손택의 모습을 담게 된 것이다.


P.2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미 그해 <롤링스톤>지에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바 있는 콧이 손택의 사후에 편집도 논평도, 그 어떤 다른 매개도 없이 열두 시간에 걸친 긴 대화 속에서 포착한 그녀의 '육성'을 그대로 다시 한 번 '옮겨 적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도 인터뷰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첨언과 해석의 권리를 포기하고 불필요한 신화의 양산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몰개성적 '글'이 아니라 1978년 싱그러운 어느 여름날, 파리와 뉴욕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발화된 사적이고 특수한 '말'을 성실하게 포착한다. 추임새와 웃음소리를 포괄하는 이 대화 속 수전 손택의 말에는 목소리가 있고, 체온이 있고, 감정이 배어난다. 그녀의 삶을 종단하는 서사는 없지만, 그녀 삶의 짧은 한 순간을 함께 횡단하는 체험이 있다. 


여느 인터뷰들이 근황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듯, 그녀의 투병 생활과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대표작들의 표지를 어떻게 골랐는지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서부터, 수전 손택의 글쓰기론에 대해 진중하게 풀어내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와 뮤지션 같은 예술적인 취향, 성과 사랑, 영감이 되는 도시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손택의 모습을 담고 있다.


P.16-17 '서문' 중에서
"나는 인터뷰라는 형식을 좋아해요." 그녀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좋아하는 거죠. 그리고 내 사고의 상당 부분이 대화의 소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혼자 해야 하고 그래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꾸며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건 본질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활동이거든요. 저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대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기회를 주죠."


P.33-34
콧: 베트남 방문에 대한 에세이에서 선생님은 수치와 죄책감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시죠.
손택: 뭐,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요. 어떤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병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임감을 느끼고 싶어요. 사생활에서 곤경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면, 예를 들어 잘못된 사람과 얽혔다든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면 –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 –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더욱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거든요. (…) 제가 보기에는, 병이 들어서 치명적인 질환을 앓는 건 마치 자동차에 치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앓아눕게 됐나 걱정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면, 최대한 합리적으로 올바른 치료를 모색하고 진심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질병과 공범이 될 수도 있어요.


P.66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P.160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했는데, 그렇게 여러 삶을 살면서 남편을 두는 건 아주 어려워요. 적어도 제 결혼은 그랬죠. 말도 못하게 치열한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면서 오랜 세월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변화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홍콩으로 날아가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건 무책임한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삶과 기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P.187
1년 열두 달, 아니 심지어 열 달이어도 뉴욕에서만 살 수는 없어요. 이건 완전히 인위적인 삶이죠. 그렇지만 뭐 어때요? 자기 공간은 스스로 창조해야만 해요. 침묵과 책들로 가득한 공간 말이에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전 손택의 지성과 매력과 취향에 감탄하며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로 보이고 또 기억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가는 수전 손택의 모습에서 나 역시 삶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유와 철학을 권하고, 열정과 탐구심을 자극하는 그녀, 수전 손택. 나에게 수전 손택이라는 인생의 북극성을 만나게 해준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의 머리맡에서 환하게 빛나길 바란다.


P.204-205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 다시 선 그 순간의 그녀는, 이 인터뷰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의 패기를 당당히 드러낸다. 좋은 세상은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너그러워야만 하며, 그 누구도 늙었다는 이유로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눅 들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객관적 세계의 실재를 부정하는 유심론의 신화와 폭압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친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질병과 공범이라고 말하며, 삶을 긍정하고 삶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을 뛰게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음악과 예술의 힘은 대중•순수미술이라는 간극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든 이항 대립과 클리셰의 허위와 착시를 뒤흔들고, 진실을 복잡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비판적 사유의 가치를 열렬히 옹호한다. 그리고 이 대화 속에서, 그렇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사적인 사람 손택과 준엄하고 엄정한 공인 논객 손택의 무의미한 신화와 이항 대립은 허물어진다. 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들의 풍요로운 향연은 그녀 자신의 말대로 준엄한 “윤리주의자”와 “정신 나간 탐미주의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나르시시스트와 자기 성찰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성과 자기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전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한 사람 속에 어우러지는지를 날카롭게 일별하게 하고 신화의 장막을 뛰어넘어 인간 손택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가 사람을 풍문으로 알 수 없듯이, 오로지 만남으로만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인터뷰는 그 순간 승리자로서 생의 정점에 서 있던 손택을 '만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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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은 하루 (윈터에디션)
구작가 글.그림 / 예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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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오늘 하루.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열병을 앓고 청각을 잃은 사람에게 이제 눈까지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위인전에서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5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누군가의 이야기. 바로 귀가 큰 토끼 캐릭터 '베니'를 그린 구작가의 실제 이야기다.

 

P.24-27

귀가 들리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던 저는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어요. 엄마는 말을 해보지 못한 제 혀가 굳을까 봐 설탕을 입 주변에 묻혀 빨아 먹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소리를 낼 수 있게 제 손을 엄마의 목에 갖다대고 그 울림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러고선 다시 제 손을 제 목에 갖다 대고 비슷한 울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연습을 쉬지 않았어요. 그냥 놀고 싶었던 저와 하나라도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엄마. 아무도 모르는, 나와 엄마만이 아는 시간.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지루하고 힘겨웠던 시간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네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상대적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불행에 위로를 얻고 남의 행복에 좌절한다. '이 사람은 나보다 처한 환경이 불우하니까, 이 정도면 난 행복한 편이야.' 혹은 '누군 나보다 이만큼 더 가진 게 많은데,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불행해.' 이 책이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진 조건 안에서, 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다 있는 것들이 왜 나에겐 없느냐고, 자신에게 없는 것만 찾으며 처한 환경을 불평하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에게 없는 나만의 것을 찾아 가꾸고 만들어가는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P.58

남의 조건과 환경을 부러워하다보니 부러움이 비교가 되어버리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행복지수가 낮아진 게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없다고 생각한 건 단순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많은데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닐까.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행복과 불행은 절대적인 기준과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과 불만에서 행복과 불행의 명암이 나뉜다. 구작가는 귀가 들리지 않고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된 불행 앞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불행을 출발점으로 삼아 소리를 못 듣는 자기 대신 잘 들어주었으면 하고 귀가 큰 토끼 캐릭터 '베니'를 만들었다. 청각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시각까지 잃어야 하는 불행을, 오늘부터 당장 버킷리스트를 실천할 수 있는 자극제로 삼는다.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의 또 다른 인생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감각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P.246

세상에 시각장애인 화가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에게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화가는 물감의 온도를 느끼면서 색을 고르고, 또 어떤 화가는 다른 한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리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귀가 안 들리지만 짧은 순간 많은 부분을 스캔하는 능력이 있고, 깊은 관찰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눈이 안 보이면 촉각과 후각이 굉장히 예민해질 것만 같아요. 물감의 온도, 그런 걸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지 아직은 상상이 안 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이 보일 때 수많은 색깔을 보았으니, 그 색들을 모두 기억해서 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손바닥이나 손에 쥐어진 붓으로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화가가 될 것 같아요. 슬픔 감정도 기쁜 감정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행을 불행으로서 끝을 내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우리에게 있다. 불행은 때때로 유일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불행을 이용할 수 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의 말처럼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귀가 안 들리는 구작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은 불행이 찾아왔듯이,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처럼 불행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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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손꼽아 기다렸던 4월이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마음에 바람이 불어 찰랑거리는 계절, 봄.

3월에 읽고 싶은 신간 에세이에는 봄만큼 기다렸던 저자들의 반가운 신간이 많아 행복했다.




마스다 미리 『하기 힘든 말』


우선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 마스다 미리. 우리가 쉽게 놓치고 마는 아주 작고 사소한 감정이라도, 그녀는 감정의 결을 세심하게 살려 독자의 마음으로 전달하고,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잊고 지냈던 감정을 전달 받은 독자는 만화를 통해 공감하고 위로 받는다. 이게 바로 마스다 미리가 가장 잘하는 그녀만의 강점(이라 쓰고 매력이라 읽는다). 개인적으로 마스다 미리의 매력은 에세이보다 만화에서 확실히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그녀의 에세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출간된 『하기 힘든 말』은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기대가 된달까. 


출판사 서평에 '가끔은 내 스스로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이럴 땐 본인이 평소 쓰는 말과 하지 못하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자. 말이라는 열쇠가 내 마음의 비밀을 풀어줄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에 눈이 번뜩. 마스다 미리가 발견한 '하기 힘든 말' 속의 생활의 발견은 어떤 모습일지. 아마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말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란 사람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나에게는 임경선이라는 이름보다 캣우먼으로 더 익숙한 그녀. 그동안 그녀의 글을 쭉 읽어오며 느꼈던 확실한 감정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꼿꼿하고 매력이 넘치는 그녀가 십 여년 동안 인생 상담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던 인생의 핵심 가치들을 정리한, 삶의 다섯 가지 태도들에 관하여 쓴 에세이.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태도(attitude)는 '어떻게'라는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문제이자,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고유 자산이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고유 자산을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내 삶의 태도와 기준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노우캣 『옹동스1』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노우캣'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스노우캣의 소중한 동반자 나옹과 둘째 고양이 은동을 데려온 후 세 가족이 겪어나가는 다정한 이야기를 담았다.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 곳곳에 등장하는 사소한 에피소드에도 배시시 웃음에 새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단순히 고양이와 살아가며 생기는 에피소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로 인해 위로받고 힘을 얻는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가 고양이가 아닌 강아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동물이 아닌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선생님 혹은 제자일 수도 있다. 나와 눈을 맞추고 기꺼이 안아주고 용기를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참 행복해진다. 그러한 소중함을 담고 있는 스노우캣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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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괜찮겠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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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본업은 소설가이고 자신이 쓰는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다고 말이다. 나 또한 맥주보다는 우롱차 타입의 하루키를 더 좋아하는 독자 중 한 명인데, 최근 하루키의 우롱차만큼이나 따뜻하고 고소한 우롱차를 만났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장 따뜻한 작가로 꼽은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 『그것도 괜찮겠네』가 바로 그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일상의 사소한 경험도 놓치지 않고 거기서 삶의 행복을 찾는 맛의 우롱차라면,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답지 않게 착한 미스터리 소설가의 인생을 다독이며 사는 맛이 나는 우롱차라고나 할까. 산문집으로 그를 처음 접한 나는 '정말 미스터리 작가라고? 아동문학 작가가 아니라?' 하고 생각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글이었다.


추리소설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데뷔 직후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10주년 되는 해에는 에세이집 한번 내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그는 10년 뒤에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겠지, 막상 그때가 되면 흐지부지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선선히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그가 등단할 때 담당 편집자였던 신초사의 아라이 씨가 "에세이집 말인데요, 어차피 쓸 거 데뷔작이 발매된 날에 맞춰 출간합시다."라고 선언한 것. 그렇게 해서 이사카 코타로의 등단 1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썼던 산문들은 모아 낸 책이 『그것도 괜찮겠네』다.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소함 중 하나는 바로 '덧글'이다. 에세이집이 나올 걸 생각지 않고 에세이를 썼다가 나중에 한 권으로 묶는 과정에서 일종의 후일담이랄까, 어떤 제안으로 이 글을 쓰게 됐는지, 그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을 덧글 형식으로 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을 때가 가장 재밌어서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을 정도였다.


P.15 '지루해? 그럼 제가 한번…'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늘 한결같지만 다른 이의 손으로 빚어진 영상과 문장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가능하면, 그것들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뭔가 줄 것이 더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를 키울 자유는 저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덧. 이 글은 『오듀본의 기도』가 출간되기 전 신초 미스터리 클럽상을 수상하고 나서 바로 쓴 에세이입니다. 처음 받은 원고 청탁이다보니, 이 에세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다음부턴 전화 한 통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후로도 에세이를 쓸 때는 꼭 저만의 취향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P.76 '원숭이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덧. 어느 날 센다이에 온 친한 기자 한 분이 선물을 가져왔다며 큰 상자와 작은 상자를 내놓더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느 게 좋은 겁니까?" 겉만 크고 속이 빈 것보다는 작지만 실속 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저는 작은 상자를 골랐습니다. 그랬더니 열고, 열고, 또 열어도 작은 상자들이 계속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대체 뭔가 하면서 계속 열다가 마침내 제일 작은 상자를 열었더니 '에세이 의뢰'가 들어 있지 뭡니까. 당시 에세이는 무조건 사양할 작정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웃음이 터져, 승락했습니다. 그것이 이 에세이를 쓰게 된 사연입니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창조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보고 체험한 일에 대한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그게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소소한 일상도 진심으로 대하는 법들이 가득한 이 책은 남들한테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작은 일에도 나다운 게 뭘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잘해보겠다고 일을 벌였다가 흐지부지되고 만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다. 캐러멜 콘에 들어 있는 땅콩의 양이 포장지에 나온 이미지와 다르다며 '모든 소비자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조사에 항의 전화를 한다거나, 어딜 가나 주머니에 개 사료를 넣고 다닌다거나, '개의 코가 촉촉이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발라준다거나 하는 것들. 크고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위안을 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글 속에 담긴 따뜻한 인생관을 보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6-117 '나그네 비둘기'

생각해보면 도라에몽이 없었으면 저는 나그네 비둘기의 존재를 몰랐을 겁니다. 그 말은 결국 나그네 비둘기가 등장하는 소설도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미스터리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도라에몽』은 저에게 소중한 만화라 할 수 있죠. (중략) 만약 자식이 생기면 그 아이에게 읽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제가 생각날 때마다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도라에몽』 전집을 갖춰놔야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일 하고픈 일입니다. 아! 그런데 전집을 수납할 공간이 없네요. '도라에몽, 내게 넓은 방과 큰 책장을 보내줘.'


P.139-140 '개 코에 침 바르기'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는 늘 개 사료가 들어 있습니다. 손수건은 없어도 개 사료는 상비합니다. 캔에 든 질척한 것이 아니라 건조시킨 과자처럼 생긴 것들인데 봉투나 상자에 넣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답니다. 대체 그 옷을 누가 어떻게 빠는지, 잔돈과 헷갈려 개 사료를 내미는 일은 없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개 사료를 갖고 다니다가 길에서 개를 만났다 하면 어이! 인사를 하고 얼른 주머니에서 사료를 꺼냅니다.

(중략) 그리고 '개의 코가 촉촉히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얘야, 너 괜찮니?" 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개의 코에 발라줍니다. 옆에서 보면 본말이 전도된 건 아닌가 싶지만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코에도 침을 발라주는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그 아기는 할아버지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신변잡기 같은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을까? 등단 10주년 기념? 팬 서비스 차원?’ 이사카 코타로 역시 10주년이라는 타이밍은 구실이지만, 그것을 빼면 에세이집을 낼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은 에세이를 다시 읽다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자극 없는) 날들을 보내왔는지 알게 되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반성했다고.


물론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라면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이사카 코타로가 추천하는 책과 영화, 음악들이 중간중간 언급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고, 작가가 어떤 계기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집필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서 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작가의 단면을 좀 더 확장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52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인물이 말하는 ‘오토매틱 레버(자동변속 기어-옮긴이)’ 운운하는 대사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대사는, 당시 저 자신이 매일 육아와 글작업에 정신이 없어 조금이라도 다음 일을 떠올릴라치면 아예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고, 또 누군가 저한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날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보면 앞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가끔 정신적으로 패닉에 빠질 지경이 되면 이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는 소중한 단편입니다.


책에서 어렵고 무겁고 진지한 의미를 찾고 싶다면, 책을 읽는 시간의 가치를 따진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을 때, 모든 일이 시시하고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기운이 쭉 빠진 어느 날, 따뜻한 우롱차 한 잔처럼 권하고 싶은 산문집이다.


덧.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당연히 좋을 책이지만, 나처럼 『그것도 괜찮겠네』를 통해 그의 팬이 되고 소설을 찾아 읽게 되는 독자도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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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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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사이가 좀 유별난 편이다.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부부싸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두 분 사이는 다정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빠와 어색해졌다는 주변 친구들과 달리 우리 집은 딸 셋 모두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 서울에, 대구에, 포항에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금도 가족 채팅방에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물론 사이가 각별하다고 해서 가족 간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곱씹어 보면 갈등의 대부분의 원인은 의사소통에 있었다. 꼭 전해야 할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은 부끄럽고 어색하다는 핑계로 꼭꼭 묻어두기만 했고, 이해하고 보다듬어줘야 할 걱정스러운 마음은 감정을 앞세워 삐뚤게 내뱉고는 했다. 가깝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한 채 던진 크고 작은 말과 행동들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오해로 쌓였다. 가족과 사이가 좋은 것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오사 게렌발의 신작 『가족의 초상』을 읽게 되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큰딸 마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5막 1장의 심리 드라마를 다룬 이 책은, 한 가족의 붕괴를 유발한 어떤 사건에서 시작된다. 마리의 부모인 라이프와 건에게는 절친한 친구 라그나르가 있다. 그가 친구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친구의 딸인 열여덟 살 마리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리의 집에서 거하게 술을 마신 라그나르를 마리가 차로 데려다 주다가 라그나르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다음날 술이 깬 라그나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과하지만, 오히려 마리의 부모는 친구인 라그나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마리를 꾸짖으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후 부모인 라이프와 건, 그들의 두 딸 마리와 스티나, 그리고 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라그나르, 이 다섯 명의 인물들이 경험한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저마다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다. 공통적인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모두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을 위한 시도와 각자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P.41 엄마 건의 이야기

"마리는 결코 내가 상상했던 딸아이가 되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 나 또한 순진하게도 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사춘기 반항도 겪고 엄마와 딸 사이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선의의 논쟁도 벌이리라 꿈꾸었다. 함께 토론하고 조언도 하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렇게 해서 훗날 사위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언젠가 한쪽 부모와 자식이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도? 어째서 다들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 엄마라고 해서 왜 무조건 아낌없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어도 말이야. 엄마라고 해서 왜 자신을 지킬 권리를 가져선 안 되는 거냐고?" 


P.61-62 아빠 라이프의 이야기

마리는 자주 이런 질문을 했지. "그때 말이야,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어? 느낌이 어땠어? 그리고 지금은 어때?" 하지만 어째서 그런 골치 아픈 일들로 굳이 소란을 피우려 드는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략) 마리가 내게 이야기를 한다는 건 필시 우리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는 표시였을 거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애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리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나인지, 아니면 나에 대해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는 게 그 애인지 모르겠다… 마리는 내 도움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래 보인다. 하지만 그 애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꽁하니 맺힌 데가 있어서 그런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점이 정말 혼란스러워 미치겠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진다. 


P.89 동생 스티나의 이야기

때때로 난 언니 자신이 바로 그 파괴적인 경험들을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무슨 얘기든 훨씬 더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최악의 상태까지 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린다. 어쩌면 주제 넘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째서 언니는 나처럼 될 수 없는 거지? 현재 우리 상황에서 볼 때 어닌는 내가 자기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언니는 조금이라도 나를 본보기로 따라야 한다고! 게다가 무슨 권리로 언니가 내 인생 계획을 비판할 수 있지? 그것도 자기 입으로 매장돼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삶을 가지고서! 그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냐고!


오사 게렌발은 각 인물들에 대해 개개인의 감정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심리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 불능과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딸의 고통을 외면하는 부모와 서로에게 무관심한 부부, 매사 비관적인 언니와 낙관적인 동생의 불가피한 갈등. 처음에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가장 많이 사랑하기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가족.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가족의 초상이 이와 같지 않을까.


『가족의 초상』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로 간의 관계를 짚어볼 기회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각자 성격과 성향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그로 인해 서로 간의 다름과 서로 간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금도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미 생긴 상처를 없애주지는 못해도, 생채기 난 마음에 연고 같은 책이 되어줄 것이다.


추천사 / 박세현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소장, 상명대학교 만화학과 외래교수)

집이란 물리적 공간은 인간에게 가장 평온하면서도 행복을 주는 안식처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가족은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거추장스럽고, 누구보다 더 잘 통할 것 같지만 때로는 도통 속마음을 모르겠고, 지원사격하는 아군인 것 같지만 때로는 폐부를 칼로 찌르는 살인마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렇듯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성장하면서, 나아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가족은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모두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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