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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ㅣ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평점 :
* 질문: p.332 "1951년에는 여덟 명이, 이듬해에는 열다섯 명이, 그리고 1953년에 이르러서는 스물아홉 명의 아이들이 팔려 나갔다."
- 지역 범위가 무엇? 난허 현을 말하나?
마오쩌둥은 지식인에게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고 그들이 스스로의 열정을 증명하길 바랐다. ...... 주석의 새로운 지시에 헌신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지식인들이 토지 개혁 임무를 맡은 공작대의 일원이 되어 농촌으로 향했다. 그들은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지내고 일하면서 그리고 당 간부들이 모든 마을을 상대로 계급 분석하는 일을 도우면서 자신의 손을 더럽혀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농촌의 전통적인 지도자들이 지주나 반역자, 폭군 등으로 고발된 비판 대회에 참가해서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279)
실행 단계의 개혁을 지켜보는 것은 한층 더 힘든 도전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토지 재분배 과정에서 발생한 원초적인 폭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희생자들이 폭행과 고문을 당했으며 형구에 묶여 매달리거나 때로는 총살되었다. 한쪽에서 진행되는 선전과 다른 한쪽에서 벌어지는 혁명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육체적 학대를 목격한 뒤로 마음속에서 불신이 꿈틀거렸지만 애써 외면선 채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급 투쟁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니이면서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비판 대회와 조직적인 약탈의 비열한 측면을 외면하기 위해서 마음속에 모두를 위한 풍족한 공산주의의 비전을 떠올려야 했다. 그들은 자신이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 류위편의 친구 중 한 명은 반동분자로 사형 선고를 받은 한 남자를 직접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손을 너무 심하게 떨어서 총알이 전부 표적을 비껴갔다. 결국에는 사형 집행대 소속의 정규병들이 그를 대신해 임무를 완수했다. (280)
중국의 중요한 국경 지대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1953년에 <자치권>이라는 공허한 선물을 받았다. 중국 전역에 <소수> 민족들을 위한 자치 구와 자치 현, 자치 주, 자치 지구 등이 연이어 등장했다. 신장은 이슬람교도들이 오랫동안 단일 국가인 위구르 공화국을 염원해 왔음에도 굴자 근처의 시보족과 북쪽의 카자흐족, 파미르 고원 사리콜 지역의 타지크족 등 여러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 하지만 이 지역 내 여러 <자치> 구역들 간의 경계는 어떤 민족 집단도 수적으로 우세한 지역을 퉁제할 수 없도록 정해졌따. 단일 소수 민족이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영토는 분할되었고 그에 따라 위구르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던 지역에서 위구르 족의 자치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 이는 예측 가능한 분할 통치 전략이었다. 또는 고대 중국의 전술을 빌리자면 <이이제이...>의 경우였다. 이러한 통치 구조를 바탕으로 공산당은 철저하게 모든 중요한 결정을 통제했다. (320)
마을의 전통적인 권리와 관습은 무시되거나 파괴되었다. 토지 개혁을 통해 몰수되거나 재분배되지 않은 이를테면 가축에게 풀을 뜯게 할 수 있는 목초지와 황무지, 바닥물이 드나드는 늪지 또는 아이들이 땔감을 모을 수 있는 강둑과 삼림지 같은 공동 재한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국가가 전부 집산화하기 전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하고자 했다. ...... 합작사의 도입으로 전체 경작지 면적은 오히려 감소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땅을 출자했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몫이 너무 작아서 굳이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버려진 땅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 심지어 열심히 관리되던 땅이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계단밭을 완전히 망가지도록 방치한 쓰촨 성의 농부 왕쯔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만간 공동 소유로 바뀔 텐데 무엇 때문에 공을 들이겠는가?> (334)
스탈린의 죽음이 마오쩌둥에게는 해방이었다. 마오쩌둥은 마침내 모스크바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 그의 정치적 시각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는 크렘린 궁에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으며 두 공산 국가의 수도 사이에 설치된 전신선은 계속 웅웅거렸다. 하지만 소련 측에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제2의 10월 혁명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전쟁에서 미국과 싸워 휴전을 이끌어 낸 마오쩌둥과 견줄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 주석은 소련의 지도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353)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고문 방식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다르면 수감 생활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잦은 매질이나 중노동, 심지어 끝없이 계속된 굶주림도 아니었다. 바로 사상 개조였다. 한 희생자는 노동 수용소를 <세심하게 구축된 정신적 아우슈비츠>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영국인 무선 통신사 로버트 포드는 4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매질을 당한 뒤에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뿐더러 마음 한구석에서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상 개조를 통해 정신적으로 고문을 당하면 돌아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사상 개조는 그 사람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깊은 내면에 영향을 끼치고 정체성 자체를 공격한다.> (382)
얼마 안 있어 노동 수용소계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수용 시설이 등장해서 새로운 제소자들 가운데 30만 명을 소화해 냈다. 이 시설은 <노동을 통한 재교육>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오자오라고 불렸다. <노동 개조>를 의미하는 라오가이와 달리 라오자오의 경우에는 소송 절차가 완전히 생략되었고 완전히 <재교육>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 불순분자를 무한정 잡아 둘 수 있었다. ... 1956년 1월에 공식 승인된 이 암울한 세계는 중노동에 투입될 정도는 아니지만 자유를 누릴 자격도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이제는 체포될 경우 어떠한 형태의 재판도 없이 그대로 사라질 수 있었다. 라오자오의 활용은 1957년 8월 이후부터 극적으로 확대될 터였다. (383)
적어도 한 지역은 성공적인 결과를 보였다. 바로 신장이었다. 1949년 펑더화이에 의해 합병된 뒤로 신장에는 10만여 명의 제1야전군 소속 군인들이 계속 주둔 중이었다. 혹시 모를 분리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국경을 지켰고 1954년에 신장 생산 건설 병단이라는 대형 개발 공사 소속이 되었다. ... 머지않아 이 개발 공사는 일대에서 가장 큰 지주이자 고용즈로 발전했다. ... 국가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국가였다. 1949년에 이 지역에서 중국인은 기껏해야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불과했지만 5년도 지나지 않아서 <한족 식민지 개척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할 정도로 성장했다. 자발적인 정착민이 거의 없었고 정치범 중에는 더더욱 자발적인 정착민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가 주변의 위구르족이나 이슬람교도보다 부유하게 살았다. 징벌적 유배가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식민지화 프로그램 중 하나의 토대가 된 것이다.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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