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차 대여행 1 - 독일 아름드리 어린이 문학 8
미카엘 엔데 지음, 선우미정 옮김 / 길벗어린이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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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일의 판타지 작가, 미하엘 엔데의 <기관차 대여행>을 읽었다. 이 동화에서 보면 나라 이름들이 참 재미있다. 기쁨의 나라, 행복의 나라, 색동나라. 그런데 어느날 고통의 나라에 사는 무시무시한 용이 전 세계 아이들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용감한 주인공들은 고통의 나라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러 떠났다. 드디어 도착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딱딱한 돌 책상에 앉아서 어금니 부인이라는 용으로부터 공부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구구단을 못 외는 아이에게는 사정없이 회초리가 가해졌고, 말대답을 하는 아이도 건방지다고 매로 다스렸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나라'였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장면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이 내가 겪고 보아왔던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득 나라들의 이름이 다시금 새삼스러워진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행복의 나라, 기쁨의 나라에 살고 있을까? 우리 어른들 가운데 '어린이, 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 '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어른이 몇이나 있을까? 아이들에게 놀이를 빼앗는 것은 엄연한 인권 침해다. 권리는 시혜와는 다르다.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가 놀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놀 시간이 필요하다. 학교로 학원으로 과외공부로 쫒겨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빼앗기는 것이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느낀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과 친구를 사랑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가슴아파하는 모든 경험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 아이들다운 그 모든 과정을 잃어버린 그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생각조차 두렵다. 세상이 각박해진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돌아보자.

'아무도 이등은 기억하지 않는 사회'를 강요하면서 이등부터 꼴등까지 모든 아이들을 소외시키는 이 고통의 나라는 이제 끝나야 한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아이들의 외침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용감한 주인공은 이 현실세계에는 없는 것일까? 동화 속에서 용감한 주인공이 아이들을 구출해서 나오는, 가장 즐거워야 할 그 장면에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경쟁시대'라는 용, '성적제일주의'라는 용들을 무찌르고 우리아이들을 행복의 나라, 기쁨의 나라로 데려오고 싶다. 동화가 끝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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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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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라는 이름이 먼저 내 눈을 잡아 끌었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피어라 수선화',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멋진 한세상', '붉은 포대기'... 어느 것 하나 제쳐 둘 것없는 작품들이다. 가난과 여성이라는 뻔한 주제를 뻔하지 않게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이 작가에게 나는 이미 충분히 매료당해 있었다. 그런데, 그네가 마흔에 길을 나서다니...

마흔에 떠나는 길은 이십대나 삼십대에 떠나는 길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흔의 인간은 절대로 삶을 불확실한 공간으로 내몰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마흔의 실직이 두렵고, 마흔의 셋방살이가 두렵고, 마흔의 불륜이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직장과 내 집과 가정은 '안정'을 뜻하는 것들니까. '길' 역시 불안한 공간이다. 그 공간으로 마흔의 삶이, 더구나 공선옥이 떠났다니, 이 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은 책을 펼쳐드는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 내내 부풀려져서 결국은 나를 통곡하게 만들었다. 그냥 흐르는 눈물도 아니고, 꺼이꺼이 소리내며 내 온 가슴을 휘저어 놓는 감동이었다.

처음 강원도산골 길에서 만난 지복덕 할머니의 삶에서부터 눈물이 치솟아 오르더니, 노동자 배달호씨의 죽음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목이 다 쉬어 올랐다. 작가가 이런 글을 쓰고 나면 한바탕 앓고 말듯이, 읽는 나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눈이 부어올라 참 힘들게 힘들게 읽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 형제 자매들의 삶이 그 곳에 오롯이 피어나는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없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지킬 수있는 품위를 말하고 싶다고 했던가? 가난한 이들의 '존심'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던가? 그네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그네는 정말 제대로 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의 토대는 늘 사람살이가 아닌가. 안동하회마을을 찾았을때, 그곳에는 상술은 없고 사람살이만이 있다는 그네의 말을 읽고 '아하' 싶었다. 우리들의 삶은 박제화된 아름다움이 아니다. 조잡한 관광지 기념품을 놓고 파는 아주머니의 삶도, 민박집을 하는둥 마는둥 하는 아저씨의 삶도 모두 오늘, 안동 하회마을을 이루고 있는 삶이다. 사람들 찾아오는 거 번잡스럽지 않냐는 작가의 말에 '고맙지 뭐, 그덕에 이렇게 사는데.' 라고 하는 주민의 말에서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품위를 읽어낸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가난하기에 서로 부대끼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귀찮은 것도 번잡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대낄 필요없이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나 누리는 감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이제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밀랍인형처럼 여유있는 사람들의 눈요기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가난을 구경하기 위해 동정이라는 관람료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야기 하고 있다. 팍팍하고 구질구질 해 보여도 살아있는 가난, 그 속에 인간의 길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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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 풀과 벌레를 즐겨그린 화가 어린이미술관 3
조용진 지음 / 나무숲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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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신사임당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신사임당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현모양처, 율곡 이이라는 대학자의어머니... 남성 사회에서 강요된 그녀의 삶은 여학교에 세워진 동상과, 현모양처라는 말에 갇혀서 오랫동안 난도질 당해왔다. 그녀가 훌륭한 화가였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평가 역시, 그녀가 자식을 팽개치고 남편을 봉양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더라면 칭송되지 않았을, 한낱 잡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십대를 지나면서 '신사임당'이란 이름은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젊은 여성인 나에게 너무도 불편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삼십대가 되면서 그 이름이 다시금 돌아봐진다. 그 시대에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어떻게 억압당했던가를 생각하면, 그녀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온화한 미소뒤에는 온갖 고뇌와 갈등을 감추고 살아왔던 인간이 아니었을까,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책은 사실, 신사임당이란 인물에 대해 정공법으로 접근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또, 어느 시대건 여성들의 눈높이가 여리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생명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풀과 벌레들, 그리고 관념과 철학이란 것으로 위장되어 있는 남성들의 허위가 감히 근접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세상을 우리에게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다. 하나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 그 속에 녹아있는 신사임당의 자아와 삶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아름다웠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이제 온전히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위인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뻤고, 늦게 나마 신사임당의 작품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접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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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소리가 들리니 엘린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김라합 옮김 / 일과놀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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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 노동이 사회학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이전 부터 '일'은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구드룬 파우제방의 글은 평화, 평등이라는 그녀의 철학이 늘 일관되게 드러나 있어서 의심없이 읽는다. 이 책도 그녀의 이름만으로 골라잡은 것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래봤자, 아버지의 실직이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 얼마나 가족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지 놀랍도록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업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 실업으로 인한 가족들의 불안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게 써 내려가고 있는 작가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처럼 사회안전망이 더 잘 보장되어 있는 나라에서조차도 '실업이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관계, 그리고 인간의 자아를 망쳐들어가는데, 하물며 우리 사회는... 책을 읽는 내내 지난 구제금융시대를 맞이하면서 해체되어가던 우리 이웃들의 아픔이 오롯이 박혀왔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밝히고 있는 동화들이 막연한 희망과 설교를 늘어놓는 단점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이 동화는 현실이 아픔을 과장되게 그리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가족 구성원들의 노력을 강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이란 완전한 시대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불완전한 시대. 인간의 삶이란 늘 그 불완전한 시대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완전한 희망을 찾는 것 역시, 인간이 아니던가. 더 나은 학력, 더 나은 직장이 이 불완전한 시대에서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허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허상에 목매달기보다는 따뜻한 인간애가 불안을 이겨낼 힘이라는 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면 '강물소리가 들리니, 엘린'을 한번 권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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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물 산하어린이 9
권정생 / 산하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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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가 물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진보하긴 하는 걸까? 더 편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빠르게 살 수 있는 것? 그게 진본가? 진보한다는 게 뭐지?' 나는 진보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더 이상 타인을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원시공산제 사회부터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 발전은 인간이 더 이상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아도 되는 생산력을 가져왔다. 그러나, 과연 지금 세상이 그러한가? 그 발전된 생산력이 진정으로 인간의 삶에 진보를 가져왔는가?

권정생 선생님이 글을 읽으면 늘 이 고민을 다시금 맞닥뜨린다. '강아지 똥', '무명저고리와 엄마', '하나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몽실 언니',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등을 통해서 보여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의 철학은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열통의 물이 있는 세상에 열사람이 산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덟통을 차지해 버리면 나머지는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싸울 수 밖에 없다.' 많이 가지는 것이 죄악인 삶. 그 선명한 철학은 선생님의 삶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동화를 들라면 꼭 이 '하느님의 눈물'을 권한다. 이 동화를 처음 읽었을 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남 우세스러운 것도 잊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산토끼 돌이는 하루 종일 굶었다. 댕댕이 풀이랑 민들레 꽃이랑 먹으면 죽어버리니, 차마 먹을 수가 없다. '정말 넌 착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을 텐데 어쩌지.'하는 햇님의 말에 돌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한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요. 괴롭지만 않다면 죽어도 좋아요.' 그 착하디 착한 산토끼 돌이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지금도 나와 같이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산토끼 돌이를 굶겨 죽이고 있겠지. 산토끼 돌이의 그 절박한 흐느낌은 서른해를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내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 괴로움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쳐야만 하는 괴로움이었다. 그 괴로움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현실 자본주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을 '선'이고 '합리'라고 가르친다.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괜한 연민을 가지는 아이들을 오히려 사회 부적응자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인류가 피땀 흘려 이룬 진보의 결과가 고작 이런 세상이라면, 정말 이 세상엔 희망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나는 무수한 희망들을 만나고 보았다. 산토끼 돌이의 삶을 지켜주기 위한 노력들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났다. 아마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들이 한없이 밑바닥을 훑고 있지만 절대로 절망스럽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현실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그 작은 힘에 내 삶을 얹어보면서 오늘도 기도한다.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보리수 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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