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웃는 남자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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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상권의 제 2권, 폭풍우 치는 바다에 대한 챕터를 읽고 나니, 37% 읽었다고 나오네요.


서사는 참으로 느릿느릿하게 진행됩니다.


심리에 대한 묘사, 사건에 대한 묘사, 상황에 대한 묘사 등

묘사는 참으로 풍성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삶에 대한 통찰이 녹아들어가 있는 듯한 그런 문장들...

또는 묘사 자체가 매우 독특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문장들...


위고라는 지난 세대의 대문호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방식을

다는 아닐지라도 조금씩 맛보면서 배우는 마음으로 읽어야 겠구나라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하지만 읽는게 참 느리긴 느리네요~



<2015.04.15>


웃는 남자 상권을 완독했습니다.


상권을 마치고 나니,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주인공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배경에 대한 소개가 이제 끝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소개를 받고 나니, 하권에서는 대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상권의 마지막 부분, 그윈플레인과 데아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다 보니, 하권에서는 그게 위험에 처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


빅토르 위고는 참.. 거창한 작가네요.


표현이 정말 길고 풍성하지만, 뭔가 차원이 다른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같은 장면, 같은 사람을 저보고 표현하라고 했으면 빅토르 위고와 같은 문장, 표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꽉 짜여진 탄탄한 구성을 기반으로 스피디하게 전개되어가는 현대의 소설 스타일에 중독된 저로서는 이런 올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끝까지 쫓아가겠다는 것이 아닌, 읽는 그 순간 순간, 내 눈에 들어와서 머리로 흘러들어가는 문장 하나하나를 되새기는 것을 목적으로 읽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읽다보니, 조금씩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온라인 모임 통해서 여러분들과 같이 읽게 되어서, 어려웠지만 상권이라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힘내시길.. 

조금씩 차근차근 읽다보면, 얻는게 꽤 많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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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적 떼 열린책들 세계문학 55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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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14>


실러라는 이름이 제게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가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에 들어가는 환희의 송가의 저자이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외에는 그의 작품을 접해 본 기억이 없네요.


제가 기억하는 그는 희곡을 쓰는 극작가라기 보다는 시인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희곡은 일상적인 소설이나 연극의 대사라기 보다는 뭔가 서사시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대사 하나하나가 서사시 같은 느낌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테니슨의 '이녹 아든'이란 서사시를, 지루함을 참고 꾸역꾸역 읽었던 때의 느낌이랄까요.


플롯은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지극히 평면적입니다. 

사건의 전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인지 뭔가 터무니 없고, 

마지막의 극적인 변화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결말은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실러의 목적은 그 부분을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빠른 장면 전환과 대화를 통해 극을 긴장감 있게 구성해 나가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삶의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연극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대한 담아내려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인상적이었던 대사들 가운데, 특히 4막에서 카를의 긴 독백이 기억에 남더군요.




어째서 페릴루스는 나를 황소로 만들어, 뱃속의 뜨거운 불로 사람들을 불태우게 만들었단 말인가.


(권총을 장전한다) 


시간과 영원은 단 한순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내 뒤에서 삶의 감옥문을 잠그고 내 앞에서 영원한 밤의 안식처 문을 여는 잔인한 열쇠여, 나에게 말해다오! 오, 어디로, 어디로 나를 데려갈 것인지 제발 말해 다오! 지금껏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데려갈 것이냐! 자, 보아라! 그 광경 앞에서 인간의 정신은 축 늘어지고, 유한한 것의 활기는 사그라지고, 감각의 경박한 원숭이, 즉 환상은 쉽게 남의 말을 믿는 우리에게 기이한 허깨비를 보여준다. 


아니, 아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름 없는 내세여!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나는 다만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내 자아를 데려갈 수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외부의 사물들은 다만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내 하늘이고 내 지옥이다.


네가 외면한 곳, 삭막한 잿더미에 뒤덮이고 고독한 밤과 영원한 황야만이 펼쳐지는 곳을 나에게 남겨줄 것이야? 그러면 나는 침묵의 황무지를 환상으로 채우고, 혼란스러운 비참한 광경을 분석하는 여유를 영원히 누릴 것이다. 아니면 끊임없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새로운 불행의 현장을 통해서 나를 한 단계 한 단계 파괴할 것이야? 내세에서 엮어지는 생명의 끈은 현세의 것처럼 쉽게 자를 수 없는 것이더냐? 


너는 나를 그 무엇으로도 만들 수 없다. 나에게서 이 자유를 앗아 갈 수 없다. 


(권총을 장전하던 손길을 문득 멈춘다.) 


지금의 고통스러운 삶이 무서워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단 말이야? 불행에게 승리를 넘겨 주어야 한단 말이야? 아니! 나는 참고 견디련다! 


(권총을 훌쩍 내던진다) 


내 자존심이 고통을 이겨 내리라! 기어이 뜻을 이루고 말리라.




소리내어 말해지는 대사이지만, 사실은 혼자만의 상념이겠지요. 어찌 보면 이 또한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당당함은 무엇일까요. 잔혹한 운명 앞에 홀로 단독자로 서겠다는 이 당당함은.


최근의 소설에서 이런 당당함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득 김훈의 이순신이 생각나긴 하네요.)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은 18,19세기의 계몽주의,모더니즘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단독자로 서는 당당함만 있으면 뭘하나 싶습니다. 결국 잔혹하게 얽힌 운명의 힘 앞에서 주변 사람도 파멸시키고, 자신도 파멸해 갈 뿐인데요.


1782년에 독일 만하임에서 연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엄청난 호응을 가져왔고, 1792년 파리에서도 대 성공이었다 합니다.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으로, 절대주의 왕정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몇백년 간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통과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전쟁, 살인, 폭력 등이 일상화된 지 몇 백년, 그 가운데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요. 


삶의 비극적 현실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기어이 뜻을 이루고 말리라'는 카를의 모습은 오래 전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이 죽음 앞에서 '자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유'는 그렇게 도피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오랜 평화의 시대를 살아오다 보니,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 조차 잊은지 오래지만, 또한 그만큼 스스로 직면해야 하는 현실에 무감각해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알고보니 도피의 삶은 아니었는지, 알고보니, '자유'가 아니라 '예종'의 삶은 아니었는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세월호 1주기를 한 달 남겨둔 2015년 3월이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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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80일간의 세계 일주 열린책들 세계문학 147
쥘 베른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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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어렸을 때, 어린이 버젼으로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결말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나이 들어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설레임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와 달랐던 점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느낌이었습니다.

1870년대의 세계는 유럽의 식민지 지배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있던 때 이지요.
수에즈 운하, 인도의 도시, 홍콩 등을 묘사하면서 '마치 영국의 도시 들이 점점이 이어진듯 했다'라는 문장이 새삼 다가오더군요. 

시공간적으로 그 장소들의 현재를 어렸을 때보다는 더 잘 알기에 그 여행의 험난함이나 어려움 등이 더 잘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필리어스 포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현실 세계의 인물로 가깝게 다가오지 않네요. 그 자체가 특이한 인물이어서라기보다는, 그 특이함에 대한 배경이나 이유, 내적인 논리 등이 소설 속에서 잘 배어나오지 않은 듯 합니다.

늘 비슷하게 천방지축 같은 파스파르투가 차라리 평면적이지만, 조금은 더 현실적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포그에 대해서는 읽고 난 뒤에도 영 느낌이 없네요.

이 책의 한계는 필리어스 포그의 캐릭터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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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1-1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 리루프입니다. 블님 통해서 알게 됐어요. 반가워요. ㅎ

하얀소망 2016-11-15 17:26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eBook]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8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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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는 문외한인 나에게도 현대 문학에서의 조이스란 이름은 사뭇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다. 율리시즈라는 소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책의 첫 페이지 이상은 읽어볼 생각도 못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소설은 쉽게 시도해 볼 수 없는 철옹성과 같았고, 그래서 결국 내겐 잊혀져 있었다.


최근에 키르케고르와 도스트예프스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면서, '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조명받게 되었는가를 간략하게 강의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그 어려운 '의식의 흐름'을 즐길 수 있게 된 듯하다. 1916년에 발표된 이 소설도 19세기에 시작된 그 흐름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3개장 정도는 새로운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형이상학적인 대화로 점철된 5장과 신부의 설교로 가득한 3장은 잘 와 닿지는 않았지만, 2장과 4장은 생각보다 멋있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절망스러웠던 20세기 초의 아일랜드의 상황에서 어떻게 예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그 새롭고 위험한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던 걸까. 그런 상황 한가운데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에서 새로운 방향에 대한 열정을 찾아내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소설의 마지막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삶이여, 오라, 나는 이제 백만번이라도 경험의 현실과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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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의심스러운 싸움 열린책들 세계문학 60
존 스타인벡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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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과 영화로 내게 기억되는 작가지만, 정작 '분노의 포도'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본 기억도 없고.

다만 20세기 초 미국의 일반 서민의 삶을 매우 건조하게 그려낸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어 읽게 되었다. 오래 전에 구매해놓은 열린책들 세계문학 오픈파트너 이북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었다.

3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사과 과수원 농장주들과 그들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파업으로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어느 지역의 금력과 권력을 독점하는 소수의 농장주들은 총과 법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너뜨리려 하고, 그에 대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든 저항하려 하지만, 사실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이 파업이 시작되고, 조직화되는데 기여한 사람은 맥이라는 열성 공산당원과 이 파업으로 공산당 활동에 처음 합류하게 되는 짐이다. 초기에 소개 되는 짐의 성장 배경과 가족사는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하다. 그런 배경이라면, 정말 아무 잃을 것이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하겠구나 싶었다. 반면 맥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는 끝까지 그 과거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기에 그의 생각과 행동 또한 짐과는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짐의 말과 행동은 이해가 가지만, 맥의 말과 행동은 조금 낯설고 새롭게 느껴진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농장주들을 비판하는 것으로만 보일 수 있다. 분명 그러한 면을 포함하지만, 또한 맥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 활동 또한 섬뜩하게 느껴지게 된다. 농장주들의 폭력이 잔인하고 섬뜩할 만큼, 맥의 사고 또한 냉혹하기 이를데 없다.

개개인의 생명과 행복에 대한 존중을 각자 자기들의 목적보다 후순위에 놓는다는 점에서 맥과 농장주들은 극과 극에서 묘한 공통점을 드러낸다. 그러한 사고 방식을 통해 이루게 되는 체제는 결국 마찬가지라는 말을 스타인벡은 하고 싶었던 걸까?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인 전체주의, 집단주의의 씨앗을 맥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개인의 생명을 집단의 이익보다 후순위에 놓은 결과로, 결국 '집단'을 상징하는 일부 권력층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독재체제로 변했던 스탈린 정권과 북한 정권의 모습이 맥의 - 생각보다 낯설지 않은 - 말과 행동에서 느껴져 온다.

그렇다고 농장주들이 대표하는 체제의 모습 또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결국 공산주의나 20세기 초의 자본주의나 다수의 희생위에 소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이란 점에서는 묘한 일치점 가지는 것이 아닐런지.

이 소설은 발표되었을 때 좌우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당했다 한다. 좌나 우나 각자 충분히 불편해할만한 모습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현실적이었던 것이라니. 30년대라면 스탈린의 잔혹한 독재가 세계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던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의심스러운 싸움' 이란 제목은 그만큼 의미심장한다.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그 싸움을 위해서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소설은 사실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 듯 하다. 그냥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마음 아프다. 마지막 결론은 그만큼 많은 걸 보여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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