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육아 - 하루 10분, 아이와 소통하는 시간
정진영 지음 / 예문당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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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결혼도 안 한 저에게 '육아'는 거리가 있는 단어이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참 막막합니다. 의식주와 더불어 고민할 거리가 얼마나 많을까요. 경험자인 분들은 "일단 생기면 다 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얀 도화지에 제가 그려나간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의 시작점이 되는 셈이니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교육'입니다. 밝고 바르게,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로 자라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릴 적 제가 그러했듯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부모가 아이의 세상을 함께 만들어주세요

   이 책의 저자도 그러한 고민을 하며 육아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성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아이가 즐겁게 책을 접하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고른 그림책을 아기가 함께 보며 대화하고 배워나갑니다. 생후 몇 개월 안 된 아이에게 한글과 수학을 애써 주입하는 교육은 그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계산과 지식보다는, 사람과 자연과 바른 시선을 품은 아이로 자라나야겠지요. 
 
* 부모가 자녀의 그림책을 직접 선택해야 하는 이유 (p.24~25)
1. 책은 자녀의 영혼을 위한 양식입니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과 같이 부모가 아이의 책을 고르는 안목도 깊어져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계를 전문가의 추천 도서 목록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 참고: 그림책 서평을 모은 책, 도서관에서 직접 그림책들을 읽고 목록을 정리한 후 어린이도서연구회, 한우리, 사단법인 행복한아침독서 등에서 추천하는 목록과 비교

2. 부모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책이라면 장기적으로 볼 때, 아이에게 읽어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아이가 평소에 인지해오던 부모의 생각과 전혀 다른 가치에 대해서 말한다면 아이가 혼란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그림책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부모의 큰 기쁨이 됩니다. 자녀의 생각과 관심사를 잘 이해할 수 있으니 더욱 깊이 소통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다양한 책과 다양한 방법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주 어릴 때 외에는 그림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살펴보니 매우 많은 그림책들이 출간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촉감을 발달시키는 헝겊책, 시각적인 흥미를 이끌어내는 팝업북, 상상력을 키워주는 글자 없는 그림책, 때로는 오디오북, … 주제도 다양해서 일반적인 그림책 이야기에서부터 영어와 수학까지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여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가지 방법의 독후활동으로 연결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나들이, 미술관이나 동물원, 친척집과 같은 외출을 할 때 아이와 함께 읽을 그림책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아(育兒)는 육아(育我)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곧 어른들의 마음을 키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아기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림책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해 보세요.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면 마음 나누기가 수월해집니다. 책으로 소통하는 가족의 힘은 어려운 상황에서 빛을 발합니다. 서로 응원하고 위로할 수 있도록 어른과 아이가 책으로 가득한 정원을 함께 가꿔보세요.  - p. 201  
   

   책의 주제처럼 그림이 풍부해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저자가 직접 읽어보고 고른 그림책들이어서 꼼꼼한 설명이 돋보입니다. 챕터별로 그에 해당하는 그림책을 소개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뒷부분에는 0세부터 7세까지 자녀의 연령과 이야기의 주제에 따라서 그림책을 분류해두어서 한 눈에 목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아이에 따라 개인차는 있겠지만, 책 속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같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를 가진 분에게, 키우는 분에게, 곧 결혼하는 분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엄마만 읽는 것보다는 부모가 같이 읽고 함께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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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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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가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1900년대 초에 한 신경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회상록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 그는 독일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엘리트이자 유산 계급의 사람이었으나, 건강염려증 및 강박증으로 두 차례 치료소에 입원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두 번째로 입원한 후 7년동안 그가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학문적 관찰 대상으로서 전문가들의 판정에 맡기고자 이 책을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p.332)


슈레버의 편집증적 망상체계

   다니엘 파울 슈레버에 따르면, 그는 세상이 멸망해가는 세대에 신의 선택을 받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몸 전체가 쾌락신경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신경에 흡입력이 있어서 여러 영혼의 조각을 가지고 있고 신의 일부분도 그에게 흡입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는 순수한 영혼과 검증된(순수하지 않은) 영혼이 있습니다. 검증된 영혼은 슈레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슈레버가 고함을 치거나 원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 영혼들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많은 일을 겪어서 예전과 다른 심장을 가지게 되었고, 갈비뼈의 일부분이 산산조각나고 위가 없어졌으며 식도와 내장, 척수와 머리가 고통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순수한 영혼들은 신의 광선으로 슈레버를 치유해주기 때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어도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책의 처음보다 나중 부분에서 슈레버가 좀더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여성화(탈남성화)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거역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내 신경의 흡인력으로 인해 신은 오래전부터 내게서 떨어질 수 없도록 묶이고 말았다. 신이 내 신경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은 - 신에 의해 추구되는 정책은 바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탈남성화가 이루어지는 것 말고는 없다. 다른 한편, 신은 세계질서에 적합한 영혼들의 존재 조건에 따라 지속적인 향유를 요구한다. 나의 과제는 일단 한 번 생겨난 세계질서에 어긋나는 관계 하에서 영혼쾌락을 가능한 한 풍요롭게 키워냄으로써, 신이 계속 향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 273~274


    흔히 생각하는 신경병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슈레버는 자신이 집착하는 것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만들어낸 망상 세계 역시 오랜 시간 사고해온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망상과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면, 그의 지적 능력과 지성과 기억은 정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슈레버의 회고록의 의의

   이 책은 슈레버의 회상록과 후기, 담당의사였던 베버 박사의 법의학 감정서, 항소이유서 및 고등법원의 판결문(금치산 판정 철회)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책의 뒷부분을 읽으면서 슈레버의 시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저자를 바라보며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금치산 판정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기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슈레버의 편집증적 망상 체계는 현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등의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편집증의 원인을 어릴 적 잃은 아버지와 형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된 동성애적 소망으로 보았고, 윌리엄 니덜란드는 의사이자 교육자이던 부친의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교육에서 원인을 찾았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슈레버의 망상과 파시즘 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p.476~478)

논리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괴기한 이야기가 500여 페이지에 달하여 집중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해제에 나와있는 대로, 슈레버의 문체가 복잡한 구조이고 분열증자들의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기는 데 한계가 있어 읽기가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관심을 가졌고 영향을 받았던 슈레버의 회고록인만큼,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 원본인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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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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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들을 떠올리면 참 다양합니다. 생각을 끄적이는 수첩, 여러가지 형태의 책갈피, 외국 도시들에서 구입한 워터글로브, 부모님으로부터 선물받은 만년필, 수년 동안 어디에서든 함께 했던 노트북, 요즘 컴퓨터를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폰, … 다 고를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물건들은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단순히 '좋아한다'를 넘어서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의미를 찾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버드, 코넬, MIT 등 34인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있습니다. 익숙한 또는 들어봄직한 각기 다른 34개의 사물이 등장합니다. 목차에서 사물의 이름들을 훑어보았을 때에는 그에 얽힌 사연을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보았습니다. 제가 아끼는 사물들에 어떠한 추억 또는 사람이 얽혀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엄숙하고 경건한 주름에 싸인 너무나 풍만하고 육감적인 작은 가리비 모양의 마들렌이 그렇듯이, 지워지거나 잠들어버린 사물의 형태는 내 의식 안에 제자리를 찾을 소생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아주 먼 과거에서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을 때, 인간은 죽고 사물은 부서져 산산조각난 후에도, 훨씬 연약하나 오래 견디고, 실체를 찾기 훨씬 힘들고, 훨씬 끈질기고, 훨씬 충실한, 냄새와 맛은 유일하게 오랜 시간 남겨진다. 마치 영혼처럼 다른 모든 폐허 가운데 홀로 기억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져지지 않는 작은 한 방울 정수 속에 흔들림 없이,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품는다.  

- p.110,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용문 중에서
 
   

이들의 짧은 이야기는 제가 예상했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어린 시절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해주었던 사물, 가족과 사랑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는 사물,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사물, 삶의 어느 시점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사물,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해 주는 사물, 명상을 도와주는 사물 등 일상 속의 평범한 사물에서 다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일기장을 엿보듯 그들의 삶의 어느 순간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물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생활은 더욱 편리해지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물을 보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사고가 구체화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물을 숭배하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의 수필에 하나의 이론 또는 철학이 함께 실려있어 그 내용을 곱씹어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철학과 일상을 소재로 한 수필의 중간 정도의 무게를 유지합니다. 철학에 좀더 기울어서 무겁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지만요. 사물과 사물이, 또는 이론과 이론이 결합하여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이론이 하는 한 가지 역할은 사물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낯선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이론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사물이 어떻게 우리의 내적인 삶의 일부가 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이용해 세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지 탐구할 수 있다. 
이론이 사물을 낯설게 한다면, 사물은 이론을 익숙하게 한다. 그래서 추상적인 것이 살아 숨 쉬는 경험에 가까운 구체적인 것이 된다.  -p.384
 
   

   다양한 사물과 이야기가 있는 만큼 모든 이야기에 공감할 수는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읽는 사람에 따라 자신과 같은 생각을 몇 가지쯤은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에서는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좀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덧) 83쪽(슈퍼히어로)의 16번째 줄에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는데, 다음 발행에서는 수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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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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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고을에 원님이 부임하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일들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귀신이 나타나서 그렇다고 수군거리고, 아무도 그곳에 부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혜롭고 대담한 한 관리가 자신이 그곳으로 가겠다고 지원한다. 밤이 되자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처녀귀신이 나타났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서 혼란을 일으킨다고 관리가 호통을 치자, 귀신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자신을 보자마자 다들 죽었다고 말한다. 다음날 관리가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자 그날 밤 단정한 모습의 처녀귀신이 인사를 하였고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익숙한 귀신 이야기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恨)을 품은 귀신은 주로 여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이라고 다 같은 귀신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야담(野談)집에 귀신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므로, 사후세계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반사회적 행위이며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 또한 금기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반들이 심심풀이로 읽었던 야담집에는 귀신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필자와 독자가 사대부 양반들이다보니, 성별에 따라 귀신의 행동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남자 귀신은 그야말로 신사적입니다. 그들은 귀신으로 나타나도 가족의 안전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에 충실하고, 후손은 그들을 조상신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저승세계에서는 관리로 활동합니다. 살아서 누리던 신분제와 관료체제, 가부장제가 사후 세계에서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자 귀신은 원귀나 자살귀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귀신 이야기는 귀신의 슬픈 사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관리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귀신을 물리친다는, 똑똑한 남성들의 문제해결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그녀의 사연이 그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왜 죽어야했을까?
   귀신 이야기는 사대부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는 사실 외에도, 시대 상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평생 가정 안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녀는 가족 구성원에게서만 보호받았습니다. (그것마저도 완전하지 않았지요.) 누명과 모함, 가족의 박해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남성은 살아있다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여성은 자살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충(忠)· 효(孝)· 절(節)이라는 문화 속에서 희생당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따라서 귀신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자살은 개인의 심약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이념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귀신의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 것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 딸, 일부일처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떤 여성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p.173  
   

   이러한 귀신 이야기는 당시의 정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절박한 이들의 요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귀신의 저주에 평생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는 해도- 지위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에 있다면, 자신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야담집과 고소설을 중심으로 귀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귀신 이야기를 짧게나마 비교하여 짚어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일한 전제를 바탕으로 챕터마다 설명하고 있어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쉽긴 했으나, 구성상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무심코 흘려들었던 귀신 이야기, 특히 처녀귀신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것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몰입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 처녀귀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위를 잊어보시면 어떨까요? (비가 오는 날에도 꽤 어울릴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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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디자인을 위하여 Ⅱ
마이클 프리맨 지음, 유명순 옮김 / 해뜸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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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번역이 망쳐놓은 예시. 이전 책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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