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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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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고을에 원님이 부임하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일들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귀신이 나타나서 그렇다고 수군거리고, 아무도 그곳에 부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혜롭고 대담한 한 관리가 자신이 그곳으로 가겠다고 지원한다. 밤이 되자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처녀귀신이 나타났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서 혼란을 일으킨다고 관리가 호통을 치자, 귀신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자신을 보자마자 다들 죽었다고 말한다. 다음날 관리가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자 그날 밤 단정한 모습의 처녀귀신이 인사를 하였고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익숙한 귀신 이야기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恨)을 품은 귀신은 주로 여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이라고 다 같은 귀신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야담(野談)집에 귀신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므로, 사후세계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반사회적 행위이며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 또한 금기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반들이 심심풀이로 읽었던 야담집에는 귀신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필자와 독자가 사대부 양반들이다보니, 성별에 따라 귀신의 행동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남자 귀신은 그야말로 신사적입니다. 그들은 귀신으로 나타나도 가족의 안전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에 충실하고, 후손은 그들을 조상신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저승세계에서는 관리로 활동합니다. 살아서 누리던 신분제와 관료체제, 가부장제가 사후 세계에서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자 귀신은 원귀나 자살귀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귀신 이야기는 귀신의 슬픈 사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관리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귀신을 물리친다는, 똑똑한 남성들의 문제해결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그녀의 사연이 그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왜 죽어야했을까?
   귀신 이야기는 사대부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는 사실 외에도, 시대 상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평생 가정 안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녀는 가족 구성원에게서만 보호받았습니다. (그것마저도 완전하지 않았지요.) 누명과 모함, 가족의 박해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남성은 살아있다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여성은 자살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충(忠)· 효(孝)· 절(節)이라는 문화 속에서 희생당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따라서 귀신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자살은 개인의 심약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이념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귀신의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 것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 딸, 일부일처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떤 여성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p.173  
   

   이러한 귀신 이야기는 당시의 정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절박한 이들의 요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귀신의 저주에 평생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는 해도- 지위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에 있다면, 자신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야담집과 고소설을 중심으로 귀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귀신 이야기를 짧게나마 비교하여 짚어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일한 전제를 바탕으로 챕터마다 설명하고 있어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쉽긴 했으나, 구성상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무심코 흘려들었던 귀신 이야기, 특히 처녀귀신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익숙한 것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몰입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 처녀귀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위를 잊어보시면 어떨까요? (비가 오는 날에도 꽤 어울릴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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