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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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기대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성과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들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 속에 있는 여타의 선택받은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에둘러 가는 길 위에 놓여 있곤 했다. 당황스럽게도 이러한 상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방치되었다. 학문과 성과 또는 그 방법론 간의 기능연관의 파괴는 대중지성에 대한 일종의 죄악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한권의 책을 통해 파괴된 이러한 기능연관을 대중들에게 돌려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논문작성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학사/석사/박사(우리 기준에서 말하고 있다)과정 속에 있는, 또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자기자신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결과물인 '논문'에 대한 '도구상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지 '도구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마치, 도구에 대해 얘기하면서 능청스럽게 '정신'을 깨우쳐 주는 장인처럼 그는 논문과 방법간의 기능연관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엄밀한 '자세'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래서, 그가 학문적 겸손(4.2.4)이란 항에서 "이것은 윤리적인 설교가 아니다. 책읽기 및 카드 정리 방법들에 관한 것이다"(p205)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p207)라는 정말 비도덕적인(?) 경구를 말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발레 수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항의 긴 중반부를 아우르면서 교훈적 포석이 된다.

사실, 이 책은 '매우' 교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몽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경험주의에 기우는 방식인데, 그러한 방식은 스스로의 경험에 부여하는 냉혹한 시선 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에코의 경험을 여러가지 변주로 읽어가게 하는 '즐거운 거리(distance)'를 부여한다.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경험을 '환기'시키면서, 이 책의 어느 장과 절 또는 항에 중요성을 부여할 권리를 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처음 '1장 졸업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를 읽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써왔던 글들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하는 것을 익살스럽게 깨달을 수도 있고, 반면에 1장을 시큰둥하게 보고나서 '2장 테마의 선택'을 보면서 스스로 잊어왔던 그래서 종종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쓰기에의 실패로 귀결되었던 논문의 주제선정에서 무릎을 탁 칠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물론 이것도 내 개인적인 변주다) 이 책의 가장 큰 도구적 장점은 3장과 4장에 있다고 보인다. 이 장에서 에코는 자료조사(3장)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4장 작업계획 및 카드정리)라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정말 무서울 정도로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 장과 절, 항들에서 '자료'들은 그 자체로 유기적인 연관을 형성하면서 테마 속에서 구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선택과 그것의 배치에 관한 사항은 논문을 써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치의 필요성만을 느꼈을 뿐 구성의 방법에 대해서는 넋놓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아마츄어적인 순진함으로 어떤 '직관'을 바라면서 독서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마치 번갯불처럼 스쳐가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는 이 장을 통해 그런 것들이 전혀 부질 없지는 않더라도, '천재'들에게만 허용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천재'에 대한 언급은 꽤나 시니컬한 문맥 속에서 튀어 나오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천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학문적 작업에 있어서 그러한 '천재의식'은 오히려, 논문을 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쓴 사람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문적 겸손'이다.

그러나, 학문적 겸손은 "많은 자부심을 감추고 있"(p208)다. 그 자부심은 바로 '원고쓰기'(5장)와 '최종적 원고작성'(6장)에 필요한 덕목이다. '누구에게 말하는가'(5.1), '어떻게 말할 것인가'(5.2)는 바로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스스로 소심해져서 구구한 변명을 늘여 놓거나 논문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심난하게 스스로를 옹호하거나 하는 건 "짜증나는 것"(p261)이다. 인용문(5.3), 그리고 각주(5.4)의 작성은 그러한 변명이 쓸모없다는 것을 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확인시키고, '우는 소리'보다 한 마디의 논리적 명제나 권위있는 참고자료를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더욱더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할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이 "테마에 대해 언급된 모든 것에 대해 ...... [자신보다] ...... 더 잘아는 사람은 없다"(p263)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논문을 제출하지 말라"는 것이 에코의 충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작업들은 "양심에 꺼리낌이 없도록"(p263) 해야한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지고 있지만, 감추어져 있는 윤리적 '방침'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학문적 양심'이라는 덕목이다. 학문적 양심은 곧장 '엄밀함'이라는 근대적 학문자세(Descartes적인)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논문의 어떤 행과 paragraph에 대해서도 한치의 '거짓'이나, '지적 허세' 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지'를 거부하는 것에서 나온다. '2.5 필수적으로 외국어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에코는 외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대중들에게 조금은 무리일 성싶은 요구를 한다. 테마에 대해 1차적 원전은 꼭 그 원전의 언어로 읽으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외국작가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면 그 작가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없다"는 규칙은 에코에게나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엄밀함'이라는 덕목 아래서 정당화된다. 사실, 에코의 지적은 참으로 정당하다. 어떻게 우리가 '연구'를 하면서 '외국어'를 모르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적 상황은 더 비참해 보인다. 최소한 '영어'나 '영어권' 언어 둘은 알아야 서양철학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있다. 모든 번역은 미심쩍으며, "논문을 쓴다는 것은 바로 여러가지 종류의 번역이나 보급에 의해 잘못된 바로 그곳에서 원래의 사상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52)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금욕적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에코는 이 책을 씀으로써 학문적 성취물에 대한 일종의 '도구상자'를 대중에게 선물한 셈이다. 그러나, 선물은 단지 기뻐하라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도구상자'는 쓰는 사람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면서 변주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도구를 이용해 단련함으로써 가장 엄밀하면서도 유용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의 성과물이지 도구상자의 성과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말 '즐거운 지식'(Nietzsche)일 것이며, 동시에 '힘들 뿐만 아니라 드'(Spinoza)문 것, 즉 '고귀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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