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언어를 학습하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없다. 언어 자체보다 두 언어 사이의 좁은 공간이 중요하다.
나는 A어로도 B어로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A어와 B어 사이에서 시적 계곡을 발견해 떨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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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책방에 요즘들어 유독 자주 방문하게 된다. 책방 주인이 일주일에 한번 정도 책 진열 구성을 바꾸는 것 같은데 그 때마다 책 구경을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만 내놓는게 아니라서 출간된 지는 좀 됐지만 참 좋아서 세상의 빛을 더 받기에 마땅한 책들을 그때 그때 선택하는 것 같다. 종종 책방 주인이나 점원의 자필 추천 문구가 표지에 끼워진 책들이 있는데 그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근에는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 책이 나란히 메인 매대에 올라와 있었다. 



외람된 얘기지만... 유독 프랑스의 동아시아 소설 번역책 표지가 좀....구리다. 뭐랄까 그... 좀 촌스러운게... 다 결이 통일된 그런 촌스러움이다.... 그들은 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표지로 구현한 것 같은데, 그들이 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애초에 죄다 구리기 때문에...결과물도 결국 구리게 되는.... 저 표지의 뒷통수... 박상영 작가님의 뒷통수 아니냐구ㅎㅎ 친구가 말하길 저 뒤에 보이는 배경 풍경이 어딜봐서 대도시냐며ㅋㅋㅋㅋ 한국의 대도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극대노 ㅋㅋㅋㅋㅋ 


저저번주에는 그 단골 서점에서 파트너에게 줄 선물로 (겸 나도 좀 읽을까 하고) <세계 끝의 버섯>을 샀다. 서점에 있진 않았어서 주문해서 입고 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사러 갔었다. 책을 주문했을 당시 출판사가 파업을 해서 입고가 언제 될 지 모른다고 서점 직원이 말해주었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나? 생각보다는 빨리 받았다. 마침 책을 찾으러 간 날이 할로윈이었는데, 선물용이라고 말하니 직원이 사부작 사부작 거리면서 꽤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종이 포장을 해 주었다. 짜잔! 박쥐 모양이 참 귀엽다. 조금이라도 사진이나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 책은 이북 말고 종이책으로 읽고 싶은데, 저번에 한국에 가서 사 오려 했으나 무게 이슈로... 사 오지 못했고 그렇게...쭉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이었는데 문득 프랑스에 찾아보니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어서, 파트너도 아주 좋아할 것 같은 주제와 소재여서 여차저차 선물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프랑스어판 표지가 훨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그저께 산 책 또 소개. 한국 출판계 뿐 아니라 이제 프랑스 출판계의 큰 손이 되어가고 있다 (아님)

Alice McDermott (앨리스 맥델못? 한국어로 뭐라고 발음하나요?)의 <Absolution>과 Mariama Bâ의 <Un chant écarlate>.


<Absolution>은 알라딘에서 찾아 보니 원서로는 나온다. 알라딘 기준으로는 출판일이 2024년 10월이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원서가 나오자마자 한달 만에 불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건가..? 빠르군... 나는 일단 커버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책을 집었다. 그리고 보통은 줄거리 요약이 나와있는 책 뒷면을 봤는데 아무런 요약이 안써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펼쳤더니 책 날개 안쪽 왼편에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었다. 프랑스어 번역본의 요약 줄거리는 이러하다 (번역은 제가 한 것으로 오역이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


1963년, 사이공에 막 도착한 젊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파트리시아는 그녀의 첫번째 가든파티에서 세 아이의 엄마인 샤를렌을 만나게 된다. 샤를렌의 막내딸인 레이니는 자신이 갖고 있는 바비 인형의 모든 옷 컬렉션을 뿌듯하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딱 하나가 부족하다. 그것은 바로 'áo dài'. 이에 가정부이자 훌륭한 재단사인 릴리가 즉석에서 아오자이를 만들어준다. 이에 영감을 받은 샤를렌은 이름하여 '사이공 바비'라는 이름의 자원 모금 행사를 열기로 한다. 이 행사는 파트리시아에게, 이국적인 접대와 자선사업의 위선적인 경묘함이 다스리는 미국인 부인 사교 모임의 기둥인,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과 친목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60년 후,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가 된 파트리시아는 그녀의 인생에서 이토록 특별했던 시기에 대해 레이니에게 이야기 해 준다. 당시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녀의 친구가 가진 것과 같은 이미지의 가족을 꾸리는 것에 불과했던, 전쟁 당시 해외로 나가게된 기혼자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백과 성찰의 형식으로 쓴 긴 편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건넨다.


60년 후, 이제는 과부가 된 패트리시아는 레이니에게 당시 자신의 삶의 특별한 시기를 긴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하며, 당시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친구의 가족처럼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음을 떠올린다. 이 편지는 전쟁 중 해외로 파견된 남자들의 부인 역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형식으로, 동시에 그들의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국, 앨리스 맥더못은 여성 내면의 섬세한 통찰을 통해 기억의 오류를 포착하고 주인공이 구속을 향한 여정을 떠나는 과정을 함께 그려낸다.


아... 사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페미니즘. 제국주의. 인종주의. 계급. 이 모든 키워드가 잘 버무려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지 않나요? 이 주제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소설의 소재로 '베트남 전쟁 중 베트남에 파견된 미국 외교관 부인들의 그사세'를 생각해냈다니 일단 처음 이름 듣는 작가님에게 박수!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판 표지가 더 예쁘다고 생각.. 이 책이 칵테일파티로 시작이 되는데 뭔가 표지가 이야기의 첫 장면을 잘 담은 것 같다. 그리고 그링이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칠한 것 같은 색감도 책과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책이 좀 긴데 아무튼 화이팅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책은 Mariama Bâ의 <un chant écarlate>. 

1929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태어난 세네갈 흑인 무슬림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인 마리아마 바는 평생 두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이토록 긴 편지(Une si longue lettre)>와 바로 이 책, <Un chant écarlate >. 한국말로 직역하면 <다홍색 노래> 정도가 되겠다. 작가는 평생 3번의 결혼과 9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고 홀로 키웠다는데...... 

절판이 된 이 도서를 검색하니 딱 한 사람이 리뷰를 썼는데 바로 그 분은 잠자냥님... 역시...... 잠자냥님의 후기는 여기에 들어가면 보실 수 있다. ( https://blog.aladin.co.kr/socker/9297984   )














아무튼, 이 책 뒷면에 쓰인 줄거리 요약을 번역하자면 이러하다.

1980년대. 다카르에 정착한 귀족 특권층의 딸 미레이와, 세네갈 저소득층 가정의 아들인 우스만. 이 두 대학생은 대학교 강의실에서 만나게 된다. 이 어린 커플은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한다. 그들의 사랑은 전통, 사회적 압박, 그리고 가족의 반대에 저항할 수 있을까? 1929년 세네갈에서 태어난 마리아마 바는 여성 해방을 위한 수많은 싸움을 벌였으며, 그녀의 소설 <이토록 긴 편지>는 1980년, 그녀가 사망하기 1년 전 그녀에게 노마상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1/3 정도 읽었는데 문체가 굉장히 시적이고 모르는 단어들도 많이 나와서 속도감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미레이는 세네갈로 파견된 외교관의 딸인데, 이 외교관이 (그러니까 미레이의 아빠) 완전 겉과 속이 다른 위선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고지식하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딸을 완전 구속한다. 겉으로는 세네갈인들을 존중하는 척 하지만 겉으로는 흑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도 하지 않고 경멸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미레이가 바칼로레아(한국의 수능과 비슷한 시험) 이후에 본국, 그러니까 프랑스로 돌아가 대학을 가게 하지 않고 세네갈에 계속 남아 다카르 대학교에 다니게 한 것도, 외교관인 자신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딸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새끼이다. 이에 미레이는 아빠의 구속에 날뛰듯 반대하고 68혁명에도 참가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뿌리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같은 부잣집 공주님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구간이 많다. 부정부패, 평등,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뜨거운 학생이지만 너무나 부잣집에 대대로 귀족 집안 출신이라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크고, 세상을 글로 배운 느낌이 없지 않은 미레이. 반대로 우스만은 다카르 외곽의 조그마한 비스킷 공장을 운영하는 독실한 이슬람교 집안의 아들이다. 우스만의 아버지는 과거 *세네갈 티라이외르,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항상 절뚝거리며 걷는다. 엄마 야예 카디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하고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르는 현모양처이다. 우스만의 부모님 가족은 '여느 가족들과는 다르게' 일부일처제이다. 어릴 적부터 동네 사내아이들의 시시껄렁한 장난이나 남성성을 뽐내는 허풍에 관심이 없고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는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도 관심이 없다. 알라와 뜻,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신에게 충성하는 신실한 삶을 꿈꾸던 감수성 뛰어난 모범생 우스만은 처음으로 미레이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 입을 마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아무래도 소설이라는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등장인물 중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거나 동일시를 하게 되는데 이 소설만큼은 잘 모르겠다. 나는 가난하지도 (우스만의 집은 제대로된 욕실도 없고 차가운 구리 판자로 만들어진 간이 샤워실에서 아침에 몸을 씻는다), 부잣집 딸도 아니고, 우리 아빠는 외교관도 아니고, 과거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이자 동시에 오늘날 선진국(....할말하않)인 곳에서 나고 자랐다. 가부장제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나의 꿈을 정해주지도, 종교의 신념이 강제된 적도, 아니, 무교 집안에서 자랐다. 나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다. 나는 내 인종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주류인 사회에서 나고 자랐지만 현재 있는 곳에서는 소수 인종으로 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있다. 내가 결코 체험할 수도, 생각할 기회도 없을 그런 다양한 얽히고 설키는,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정체성들의 교차점들을 등장인물들이 나 대신 얽히고 설키고 꼬이고 풀고 자르고 해 주기 때문이다. 이래서 책을 읽는거지... 책을 읽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납작한 사람이었겠지.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런 책을 읽고 살지 않는 삶.


아무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밀린 책이 너무 많아서....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도 영 진도가 안나가고 있는데...(공쟝쟝님, 제가 중도 포기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ㅠㅠㅠㅠ ) 그것도 불어로 언제 다 읽냐.. 내가 저번에도 읽어보겠다고 하고 후기 안 남긴 책들이 꽤 되는데 이번에는 꼭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아니, 그 전에...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이만 총총..


(Tirailleurs sénégalais; 프랑스의 식민지인 부대 중 가장 잘 알려진 식민 부대로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의 토착민들로 구성었으며 1857년에 창설되었다. 초창기엔 프랑스의 아프리카 남사하라 지방의 정복과 마다가스카르의 정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였다. 당시 병력 충당이 어려웠던 프랑스는 자국 식민지 흑인들을 강제, 반강제로 징병하여 프랑스 국기 아래 싸우게 하였다.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명목하에 주로 이들은 최전선의 총받이로 '쓰였'다. 공식적 집계로만 약 20만명의 세네갈 티라이외르 병사들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 달자의 역주, 위키피디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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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1-14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자님 프랑스 사시는군요! 부럽네용. 박상영 책 표지는 너무 웃기네요. 한국 대도시를 뭘로 생각하는건지ㅎㅎㅎ 극대노할만 합니다.

달자 2024-11-14 18:56   좋아요 1 | URL
그쵸ㅋㅋㅋ 아니 제목부터가 대도시인데 대체 ㅋㅋㅋㅋ..... 프랑스는 추워요 연말이 되니 한국에 너무 돌아가고 싶어지네요

공쟝쟝 2024-11-14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미 중도 포기(는 아니고, 저는 좋아하는 책은 애껴 읽어요 ㅋㅋㅋ)한 사람이라 할 말은 없지만 ㅋㅋㅋ 달자님 가계시면 따라 갈게요… 일단 이거 900페이지좀 치우고 갈게요!!
사라 아메드 넘 아름답쥬?

건수하 2024-11-14 10:43   좋아요 1 | URL
아.. 저도 좋아하는 책을 애끼나봅니다. 전 심지어 읽지도 않고 애끼고 있습니다 ...

공쟝쟝 2024-11-14 11:28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만나긴 하는데 헤어지기 싫어하는 거라구욧!! ㅋㅋㅋ 수하님은 안만난 거 ㅋㅋㅋ 😤

달자 2024-11-14 18:57   좋아요 1 | URL
수하님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읽지도 않고 애끼는 책들 있습니다 많구요^^.... 좋아하는 책은 아껴있는 그 마음 넘 알죠. 근데 사라 아메드 이 책은 특히 초반이 (서문이) 너무 안읽혀서 책 펼치자마자 고비가 찾아왔지만... 그거 넘기니까 괜찮더라구요 역시 ㄴㅓ무 좋고 아름답습니다

2024-11-14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4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4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4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4-11-14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도시의 사랑법 배경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에 저런 표지 ㄷㄷ 한국의 대도시... 서울은 너무나 대도시인데 말입니다 ^^

아래 올려주신 두 책 다 재미있어 보이네요. 요즘 소설은 거의 못 읽고 있는데...

달자 2024-11-14 18:54   좋아요 0 | URL
그쵸 아니 서울을 뭘로 보고^^ 대황당^^...... 전 반대로 요즘 소설만 자꾸 읽고 싶어요~

2024-11-15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이 페이퍼 진짜 대박이네요. 감정의 문화정치 포기하지 않으시도록 저도 읽어볼까요? 일단 시작한 책이 많긴 한데.. 흠흠.

다락방 2024-11-15 07:49   좋아요 1 | URL
앗 이 댓글 제가 쓴건데 왜 비로그인으로 되어있을까요?
[이토록 긴편지]를 읽어볼까 싶은데 잠자냥 님 별 셋..이네요?
하여간 이 페이퍼 너무나 아름답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프랑스에서 서점 가고 책 사고 책 읽는 달자 님, 진짜 흥하세요. 꽃길만 걸으세요!!

달자 2024-11-15 21:37   좋아요 0 | URL
누구신가 했네요 다락방님 ㅎㅎㅎㅎ 잠자냥님 왜 별 세개일까.. 잠자냥님이 그렇다 하면 생각보다 별로일지도...? 근데 잠자냥님 별점 기준 은근 빡세시잖아요 (아닌가?)
 

우리는 보고서가 원주민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개인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P87

과거에 벌어진 일에 가담하지 않았던 호주인들이 개인적으로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한편, 우리나라가 과거에 했던 일과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 일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일과 부끄러운 일이모두 있다는 마땅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호주 총독, 《이제는 이들을 집으로》, 1997)

여기서 치유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치유받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둘러싼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보고서는 호주 원주민의 고통에 대해 백인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백인 국가에는 백인들만 살지 않는다. 보고서가 말하는 책임은 불균등하게 부여된다. 호주 원주민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백인 청자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력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와 같은 서사에서화해는 수치심을 드러냄으로써 과거를 청산한 백인 국가에 원주민 개개인이 포함되는 일이 되고 만다(5장 참조). - P88

이미 지적했듯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 타자의 몸(여기서는 국가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이 국가의 고통으로 전유되고 타자의 상처가 국가의 손상된 피부로 물신화되는 일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아야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배우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고통에 응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원주민이 아닌 청자는 고통을 일으킨 역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원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의 증언을 원주민에게서 빼앗아버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은 우리의 느낌에 관한 것도, 그들의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89

이들과는 가까이 있고 어떠한 이들과는 멀리 있다. 내가 어떤 세계에 있다는 것은 그 세계를 만든 역사에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우리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배웠던 곳은 보고서에 실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내가 역사에 연루됐음을 이해하는 ‘지식‘은 쉽게 다가오지도 명쾌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역사를 내가 연루된 것으로 이해하는 지식은 역사를 다르게 느낄 때, 몸과 세계의 표면을 다르게 살아낼 때 비로소 지식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 P90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는것을 알려준다. 공감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없는 고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일이 아니라 [몸, 역사, 공동체를] 다르게 살아내는 일이다. 이는 행동을 요구하고 집단적 정치를 요청한다. 고통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초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 곁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배우는 정치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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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13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다 말앗는데.. 달자님 읽을 때 같이 읽고 싶당😭😖

달자 2024-11-13 23:30   좋아요 0 | URL
근데 책이 진도가 참 안나가요 특히 서문? 부분 넘 어려워요🥲
 

상처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이 문제인 이유는 서로 다른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데 있다. 모든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가정할 때, 피해는 자격의 문제가 된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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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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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다 OOO(이)다. OOO은 유대인일 수도, 겁쟁이일 수도, 화가 난다, 일수도. 각자의 신념으로 살아간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종교일 수도, 양심일 수도 있다. 습관일 수도, 관습일 수도, 돈일 수도. 각기 다른 신념이 모인 고된 삶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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