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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자신을 비하할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이다
(서프라이즈 / 튜링 / 2010-06-13)

한겨레는 수많은 민주시민들이 자책과 고통 속에 반추하는 이름 ‘노무현’을 비하하는 ‘X현’이라는 단어를, 그 뒤에 장사라는 말까지 붙여 고인을 추모하는 숱한 시민들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한겨레가 주는 상처는 한나라당이 주는 상처와는 많이 다르다. 누가 나를 비하한다고 해도 그것이 가족일 때와 전혀 낯선 타인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랑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고 애통해하는 사람을 비하할 때, 우리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플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러한 단어를 쓰는 한겨레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시중에 떠도는 숱한 이야기들을 ‘인용’했을 뿐이며, 어쩌면 그런 식의 표현을 쓰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쓴 단어에 가깝지 않나 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겨레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제목에 반감을 느낀다면 사과할 용의는 있지만, 크게 보았을 때 엄연히 존재하는 그런 단어들을 굳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겨레 데스크는,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단순한 정치인과 지지자를 넘어 일종의 낭만적인 자아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노무현에 대한 그 어떠한 비난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해, 이성적 토론보다는 모멸감과 감성적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단순한 전달기능조차도 이런 감성적 동일시에 의해 재단되는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자기들끼리 말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누가 사석에서 그런 식으로 이번 사건을 말하거나 바라본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인격과 직관, 보편성과 공감이 없이 극단적인 논리를 추구할수록, 자신은 더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은 놀랄 만큼 많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요소를 지식과 정보에 비해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런 강경한 지식논리지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일반인’들과 구분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이런 ‘감정배제’ ‘인격배제’ ‘직관배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데스크는 많은 민주시민에게 질문할 것 같다. “노무현을 비하하지 말라는 법칙은 누가 만들었는가? 일개 정치인을 마치 초월자라도 되는 양 이 사회 전체가 존경해야 하는 가? 그것은 획일화가 아닌가? 왜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지지자집단에 의해 언론이 컨트롤 되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내 귀에는 분명히 그런 질문들이 들린다. 나는 한겨레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그것을 존중해 주고 싶다. 한겨레는 노무현을 비하할 권리가 있다. 또한 이 사회는 그것을 금지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모든 것은 가능하며 우리가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한, 한겨레의 그런 모습도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인정하고 싶다.

하지만 한겨레는 이걸 알아야 한다. 한겨레를 구독하고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그 어느 독자도, 한겨레를 그저 신문 중의 하나로, 정보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종이매체의 한 종류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민주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이상의 집합체이고, 비록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매체라 하더라도 그 뒤에는 참된 언론을 바라는 시민들의 인격이 흐르고 있다고 말이다.

한겨레는 스스로를 그저 신문의 하나로, 민주시민들의 인격과 공감과는 무관한 지식매체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엄연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논리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X현’이라는 단어의 정보적 중립성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한겨레에 단순한 소형언론기업 이외의 그 어떤 의미를 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질 것 같다.

한겨레가 민주시민들이 받은 많은 상처를 그저 ‘편협한 정치관이 만들어낸 지식과 정서의 혼란’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조그만 박스에 실린 사과문 정도의 안타까움만 느낀 채 그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을 생각이 없다면, 많은 민주 시민 역시 한겨레를 그저 단순한 영세 언론사 이외에 그 어떤 의미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한겨레의 가치혼란은 사실상 오늘날의 진보지식인들이 가진 자가당착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인격이 짓밟히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진시켜온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민주세력은 사실 그 어떤 지도자나 정교한 사상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시민들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자유, 인격이 짓밟히지 않을 자유, 그 어떤 사상이나 지식 이전에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되는 자명하고 정당한 감성을 보호받고자 하는 열망에서 반민주세력 척결, 부조리와 가치관 전도를 타파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민주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민주시민들은 지식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나 자료 정보 이전에 그 무엇에도 선행하는 인간과 사회의 기본적인 자명함, 그 어떤 논증이나 사상이전에 존재하는 도덕적 진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불의한 권력에 의해 개인이 위험에 처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당하지 않으며, 모든 이들은 자신의 고유한 인격에 의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보편적 타당함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러한 ‘도덕적 자명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자명함은 현대적인 민주국가라면 그 어느 나라라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규범으로, 결코 그것이 어떤 논증을 통해 반박되거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인류문명의 보편적 규범들이 무시된 채 살아왔고, 그것이 비로소 존중되고 하나의 국가관으로 확립된 것은 지극히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노.무.현’은 결코 어떤 사상이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싸우고 외쳤던 것은 그 어떤 논리체계나 지식도 아니었으며, 권력에 의해 개인이 침탈되고, 최소한의 공정성과 보편성조차도 존중되지 않는 전근대적 권력을 타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싸웠으며, 자신이 비판받고 모욕당할 가능성조차 열어주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다.

나는 어떤 이들이 노무현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도덕성을 한국사회에 심기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마저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특정 사상과 이해관계의 상징이기 이전에, 이 사회가 가진 기본적인 보편성과 가치를 위해 투쟁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투쟁은 그 사람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혹시 어떤 사람들이 ‘마틴 루터킹’을 ‘검둥이 목사’라고 부르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많은 분리주의 흑인운동가들은 마틴 루터킹을 반대하지만 과연 그들이 마틴 루터킹에 대한 인격적 모독까지 이해해 줄까 생각해 본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틴 루터킹이라는 이름에는 그저 흑인운동의 한 갈래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보편적 도덕과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싸웠던 한 인간의 존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킹을 어떻게 평가하든, 인격을 모독하는 일은 그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겨레가 노무현을 비하할 권리를 존중한다. 한편으로는, 노무현을 그저 정치적 파당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한겨레의 매서운 지식인성이 무척 안쓰럽다. 인류의 역사는 정교한 논리의 아성이 기괴한 일탈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논리의 지식체계를 쌓아올리기 전에는, 보편적 도덕과 타당함의 지휘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겨레가 기어이 지식의 객관성, 형식화된 논리의 순결성만을 강조하면, 나 역시 한겨레를 그저 정보매체의 기능성만으로 평가하고 싶다.

한겨레가 자신들의 기준으로 자신들이 평가되는 것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으리라 믿는다.

 

튜링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7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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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6-15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공감가는 글이네요.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 혹은 국가 운영면에서 나중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모르지만 인격적인 면에서 본다면 아마 1,2등을 하실 분이 아닌가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