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 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 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맟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詩 함민복



Photo : 플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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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도 배불렀다는 말... 와 닿습니다.

플레져 2006-05-2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저 짠한 풍경에 오늘 마음이 무너졌어요...

hnine 2006-05-3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 고맙습니다. 오늘 아침 저에게 의욕을 주는군요.
공지영의 '절망을 이기는 법'이었던가? 하는 소설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퍼갈께요.

플레져 2006-05-3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맑은 아침입니다.
더없이 좋은 날 맞으시기를...^^

가시장미 2006-05-3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안녕하세요! :)

아침에 남겨주신 글인데... 오늘 하루의 시작이 조금은.. 조금은...
조금이라도 평온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부터 하루를 신나게 시작해야 하는데. 투명한 사진을 보고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바람 2006-05-3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함민복 씨 시를 읽네요. 사진도너무 좋아요

플레져 2006-05-3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가시장미님아, 넘 오랜만!
잘 지냈나요? (문득 반말이 어색어색 ^^;;) 신나는 하루 보내고 있지요?
다시 만나 반가워요!

하늘바람님, 비오는 거리, 차 안에서 찰칵...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