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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고 들어오다 늘 그랬듯 오른쪽 책장에 시선이 멈췄고, 무릎 쯤 닿는 거리에 꽂혀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위로는 편애하는 일본 소설들이고 왼쪽에는 시집과 에세이, 오른쪽에는 국외 소설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끔 한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있으면 '그냥 꺼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는다.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요즘엔 동경만경이 꽂혀있는 칸의 책들이 자주 눈에 띄고 주로 그 책장에서 하나둘씩 불러내어 무작정 내 놀이 상대로 맞이한다. 지난주엔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이 생각나 꺼내 읽고, 내친김에 만화도 읽었다. 체온계가 장착되있는 것처럼 선생님의 가방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 세계에 압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로 스르르 스며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 느낌 때문에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듯 무작위로 꺼낸 책을 책상으로 모셔오곤 하는데 동경만경도 그랬다. 사랑이 언제 끝났죠? ... 정말 모르겠어. 라는 대사가 압권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일식> 을 인용하는 미오는 닿을듯 말듯하며 연인으로 지내는 료스케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인터넷 미팅 사이트에서 만났다. 시작이 그랬기 때문인지 둘은 연결되있지만 쉽게 연결을 끊고 지내고 접속한(=만난) 순간에만 뜨겁다. 사랑하는데, 먼저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하니 나와 같이 죽자 살자 하며 사귀어보자는 말은 판도라의 상자인듯 꺼내지도 못한다. 헤어지는 게 두려워서, 헤어짐 이후의 이별을 홀로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이게 사랑일까 하는 의심에 혼란스럽다. 낯선 서로가 만나 말하고, 웃고, 나누고 하는 일들에 공허를 느끼고 있다. 지금 웃으면 뭐해, 금세 헤어질걸. 지금 사랑하면 뭐 해, 난 결국 혼자인걸. 새로운 기기 발명이나 편리한 삶의 도구들은 새로울 것도 없는 시큰둥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독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이슈가 되지 않는 세상에 살다보니 외려 내 삶이 이상하게 외로워져 버렸다. 내가 그에게 접속하지 않는 순간, 나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외로움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접속할 때만 연인. 사랑이 언제 시작됐지? 정말 모르겠어. 미오도 료스케도 대답은 회피하고 있다. 한때 친구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잘 만나 놀고 헤어져 돌아설 때의 느낌이 애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때로는 그 이상 막연히 쓸쓸했다. 애인이면 결혼이라도 하지 친구들과는 결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마음을 많이 빼앗긴 탓이었다. 이럴때는 제도권이라는 영역이 감정을 다스리는데는 괜찮은 것 같은데 미오와 료스케는 결혼은 커녕 사랑이야? 아니야? 로 밀고 당기고 당기고 밀고 있다. 그 말을 과연 누가 먼저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물음표가 많아지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격을 의심해봐야 한다. 사랑의 초입은 단순하고 무지막지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한다면, 일단 밀고 들어가버린다. 우왕 좌왕하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인 강렬한 감정일 수 있다. 망설여지면 사랑하지 마세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멋있고 좋았나 싶게, 참 좋다, 고 잠깐 생각했다. 얘네 둘, 끝까지 이런다. 끝까지 막연한 감정을 시험한다.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던 두 사람은 서로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다음날 도쿄만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근무처에 있던 두 사람은 통화를 하며 서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끊임없이 서로를 탐색만 하던 미오와 료스케. 료스케가 미오에게 말한다.

 

"음, 만약에 말야, 지금 내가 여기에서 그쪽까지 헤엄쳐서 널 만나러 간다면...... 내가 너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 계속 내 곁에 있어줄래?"

"그게 머야. 너무 좋은 조건 아니야?"

".......자 그럼, 만약 내가 지금, 바다로 뛰어들어 도쿄만을 헤엄쳐 너에게...... 미오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날...... 끝까지 좋아해줄 수 있겠어?"

료스케의 말이 선명하게 미오의 귀에 와 닿았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뭔가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를 '미오'라고 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좋아. 만약 정말로 료스케가 거기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건너오면 끝까지 좋아할게."

미오는 일부러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약속 장소에 동시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필연같은 우연으로 느껴져서인지 료스케는 대담한 제안을 하고 미오는 대담하게 받아들인다. 대담한 실험이 없이는, 목숨과 불가능을 걸지 않고서는 빠지기조차 힘들어진 엘오브이이. 이것이 이별을 대신하는 프로포즈라면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겠다. 때로는 이별이 사랑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랑 고백이라면, 같이 헤엄칠 준비를 해야지. 그게 사랑 아니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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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대로 글 쓰고 놀 수 있는 공간들을 모두 닫아버렸다는 걸 며칠전에야 알았다. 글이라는 게 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말 할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입을 다물었고 손을 멈췄다. 그러다보니 나는 더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버렸다. 먼지가 되기 전까진 글 쓰며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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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5-1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

플레져 2015-05-14 13:28   좋아요 0 | URL
하이:D

프레이야 2015-05-1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잘 오셨어요. 먼지 걷고 청소 좀 하셨나요? ㅎㅎ 먼지가 되기 전까진 쓰며 놀자에 동감입니다.

플레져 2015-05-14 13:29   좋아요 0 | URL
아차차... 먼지는 쓰면서 조금씩 날려버릴게요^^
잘 지내셨죠?

프레이야 2015-05-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대문사진 보니 ‥ 시데 다녀오셨어요? 그동안

플레져 2015-05-14 21:13   좋아요 0 | URL
저 사진은 오래전에 걸어놓은건데요,
몇 년 전에 다녀온 터키, 파묵칼레에요 ^^

프레이야 2015-05-14 21:15   좋아요 0 | URL
아, 파묵칼레 입구. 저는 지난 12월에요.^^

icaru 2015-05-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우아 반가워라잉ㅇㅇ;;

플레져 2015-05-14 21:14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죠? ^^
은근 슬쩍 방 문 열었어요~
 

  

 

 

 

 

 

 

 

 

 

 

 

 

 

2007년 1월 초,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발표되었던 그 때, 한겨레신문 문학담당 최재봉 기자의 기사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당선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단편 소설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하는 시대, 라고. 정확한 문장은 아닌데 이런 뉘앙스는 분명하다. 비단 그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때부터 한국 소설에는 장편 소설 바람이 불었고, 온갖 장편소설 문학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돌풍이었다. 아마도 어떤 자구책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단편에 치중되어있지 말고 장편도 같이 균형을 맞추자는. 그런데 그게 꼭 필요할까.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은 어떤 지점에선 편향적이며 편협하다. 취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을 발견했고 선 채로 몇 페이지를 재미나게 읽었다. 책이 좀 두툼해서 빌리지는 않고, 도서관에 올 때마다 몇 장씩 읽기로 했다. 웹 검색의 꼬리들을 따라가다 한겨레 홈피에서 책의 근원이 된 기사 꼭지를 발견. 책에도 실려있을 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서재와 이야기가 담긴 동영상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단편이나 중편에 애착을 지닐 뿐 장편은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단편은 장편의 역할을 해 왔어요. 전력을 기울여 쓴 것이니까 장편급이라 할 수 있지. 요즘 장편소설을 열심히들 쓰고 있던데, 결국 작가들이 출판사에 놀아나는 거라고 봐요. 단편에 이것저것 너절하게 넣어 살찌우면 뭐가 되겠어요? 장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장사꾼의 논리일 뿐이야.”

 

장편을 쓰라고 했던 기자와 단편 중편만 애정한다는 평론가의 우연한(?) 대화가 퍽 재밌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을 좋아하고,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단편 소설은 짧지만 강렬한 그 무엇 이상이다. 장편소설 붐이 일면서 단편 소설을 읽던 나도 멈칫했다. 어떤 의무처럼 책을 주문할 때 장편소설 한 권쯤은 선별했다. 여기엔 얄팍하고 팔랑이는 내 귀도 문제겠지만, 그래도 모두들 장편, 장편하니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태생에 맞는 글 읽기를 강조하는 건 어떨까. 오래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엉덩이가 묵직해도 오래 한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출판 시장이 불황이다 파국이다 하는 시절에도 팔리는 책은 팔린다. 작가들에게도 매니아, 팬 층이 있지 않으면 책 한 권 팔기 힘든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장편, 단편 가릴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떤 부류가 고집하고 선호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내 몸의 생리구조에 맞춘 독서를 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미, 독자들의 생리 구조에 맞춰 읽으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불황임에도 쏟아져 나온다.

 

다음 아고라에 서울시 교육감 후보, 민주진보진영 단일후보인 조희연후보의 둘째 아들이 쓴 글을 읽다가 오래 멈춘 대목이 있다.

 

이를 무릅쓰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저희 아버지가 최소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공정하게 평가받을 기회라도 얻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입니다. 인지도가 없으면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들의 책, 출판사들은 언제나 그 출판사가 그 출판사다. 마케팅과 홍보의 힘도 있겠지만 그 외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작가들의 책을 만나는 건 참 어렵다. 그 사람들이 잘 쓰니까, 라고 말하면 할 말 없는데, 기회라는 것은 여전히 한쪽에만 향해 있는 것 같다. 이건 그들만의 잔치, 로 남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나는 우리나라 문학이 아는 사람만 아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어떤 장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의 문은 많은 것 같아도 열린 문은 언제나 좁을 뿐. 어디에도 휘둘리지 말고 내 취향에 충실하는 독서가 정말 재미있는 독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글의 결말은 이렇게 하자. 선거를 잘하자. 선거 잘해서 세상 좀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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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3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하도 안 나타나셔서 이제 여기는 안 오시나 했습니다.ㅋ
잘 지내죠?
중국처럼 문학인에게도 나라에서 월급도 주고 하면 좋을텐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단편 쓰는 게 장편 보다 어려운 건데 내가 작가라면 단편을 쓰고 싶고,
독자라면 장편을 읽고 싶고 해요. 이런 이율배반이 어딨습니까?ㅎㅎ
요즘도 글 열심히 쓰시죠? 어찌지내는지 궁금합니다. 플레져님.^^

플레져 2014-05-30 18:12   좋아요 0 | URL
보고 계시죠? 열심히 서재에 글 쓰고 있는 모습을...ㅎㅎ

다락방 2014-05-3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플레져님 아니십니까!
어제 영화리뷰는 집에 돌아가는 길 스맛폰으로 보았는데 오늘 이렇듯 피씨로 페이퍼를 만나니 더 반갑네요.(이게 대체 무슨말?)

간혹 들러주세요, 플레져님.

플레져 2014-05-30 18:15   좋아요 0 | URL
시스터 보셨나요? 이 더위에 겨울 배경이라 시원~하게 볼 수 있고...
또... 좋은 영화라 생각되니 꼭 보세요!
간혹, 때때로, 틈틈이 들를게요. 반겨해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

푸른희망 2014-05-3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을 무척 좋아합니다... 너무 단편만 읽어서 내가 읽기에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요.. 긴 호흡이 힘들고 장편도 좋은 작품이 많지만 뭔가 중언부언하며 곁가지가 많다는 생각도 하구요. 짧지만 길게 생각할 수 있는 단편을 좋아하면서 드러내기는 힘들었는데.. 왠지 내가 틀린 건 아니구나... 라는 위안을 받고 갑니다.. 잘 읽었고 공감합니다. 선거는 잘해야겠죠 !!

플레져 2014-05-30 18:16   좋아요 0 | URL
푸른희망님 안녕하세요.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을 근래에 첨 뵙는 것 같아 저도 반갑습니다.
지적하신대로 짧지만 길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주는 것이 단편소설인 것 같아요. 즐독하세요!

비연 2014-05-3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플레져님. 넘 반갑습니다!!!!

플레져 2014-05-30 18:16   좋아요 0 | URL
비연님 오랜만이에요 ^^!
 

올해부터 매일 짧게나마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라기 보다는 그날의 소소한 기록에 불과한 일들이다. 그날 통화한 사람, 오랜만에 문자 안부를 주고 받은 사람, 인터넷 주문한 상품,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 제목, 새로이 알게 된 단어의 뜻, 그날 마신 커피의 양, 다음달 카드지출내역서 등등을 짧게 기록하고 낙서한다. 갑자기 적어야 할 메모도 다이어리에 다 쓴다. 그러면 그 계좌번호는 어디있지? 그사람 연락처는 어디있지? 할 필요 없이 다이어리를 찾으면 된다. 오늘 아침엔 제법 긴 일기를 썼다. 일기도 쓰고 짧은 기록과 낙서를 할 수 있게 된 건 올해 받은 제법 묵직한 다이어리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수첩, 양장본 사이즈의 다이어리를 애용했었다. 내가 직접 날짜를 써야 하는 만년 다이어리 형태였다. 그러나 올해 선물받은 다이어리는 날마다 한 페이지씩 올해의 날짜가 새겨져있고, 그 한 페이지는 그날치 나에게 주는 여유처럼 느껴져 기록할 맛이 난다. 다이어리를 후루룩 넘기다보니 올해 내 앞에 다가올 날들이 참 많고,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들었다. 모든 것이 다 고맙고 감사하다. 캄사!!

 

 

어제는 눈발 날리는 가운데 산책했다. 트레이닝복에, 패딩조끼에, 장갑에, 모자에 눈발이 그득그득 쌓였다. 돌아오는 길엔 눈발이 내 앞으로 들이쳐 얼굴은 고스란히 눈을 맞았다. 그게 다 얼굴의 반을 가려주는 마스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마스크가 보이기엔 좀 요상해도 한여름엔 자외선 차단 해주지 (과연...) 추운 날엔 보온효과도 커서 늘 애용한다. 마스크는 늘 내가 놓아두던 자리에 놓아두곤 했다. 한 며칠 산책을 걸렀더니 마스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웬만해선 물건을 잘 잊어버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매일 사용하는 일상 용품은 눈에 띄는 곳에 두어 잊어버릴 수도 없다. 첫번째 마스크를 잊어버렸던 날의 아득함이 떠올랐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일몰 직전의 늦가을 산책로는 풀숲에서 기기묘묘한 소리가 들린다. 새들의 움직임이 빤하지만 해질 무렵의 소음은 괜한 오싹함을 선사하기도 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하면서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통화는 할 수 있지만 먼 곳에서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 대한 예의 같아서 마스크를 벗고 통화를 했다. 마스크는 내 귀 한 쪽에 걸려 있었고 바람은 여전했다. 십 여분쯤 통화를 했을까. 통화를 마친 후 마스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내 손때가 묻은 소지품은 가치로 따질 수가 없다. 사소한 소지품이어도 그것이 사라지고나면 잠깐의 균열과 불편함이 생긴다. 당장 새것을 마련할 수는 있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길을 잃은 그레텔의 두려움을 껴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뛰거나 걸으면서 내 뒤에서 따라오던 산책객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산책로에서 산책하는 이들은 거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쳐도 금세 외면하고 자신의 리듬으로 되돌아갈 줄을 안다. 내가 마주친 산책객들은 다섯 명의 여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들 모두 그 흔한 산책객의 필수품인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마스크를 못 보셨나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왠지 유난스러워 보여서, 그녀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결국 나는 마스크를 찾지 못했다. 그건 두고두고 어떤 안타까움을 주었고 산책로에 나설 때마다 한동안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스크는 금세 장만했지만 손때가 묻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그나저나 내 두번째 마스크는 또 어디로 간걸까. 패딩 점퍼 주머니도 뒤져보고, 심지어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없다. 얼른 약국으로 가 새 것을 사야하는걸까. 끙...

 

 

 

마스크만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읽었던 책 제목도, 내용도 잊어버렸다. 읽은 책을 또 주문하고 말았으니. 그것도 열흘 간격에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

 

 

바로 이 두권이다. 문제의 두 권의 책. 
재미있게 읽었다. 독서 중 인상깊은 구절을 따로 메모해두기도 했다. 그런데 책 검색의 검색 꼬리를 따라가다가 이 책들이 몹시 신선하게 와닿아서...목차까지 확인했음에도 덜컥 주문을 한 것이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여러번 읽어도 좋으니까, 다시 또 읽고 있다.

술꾼의 품격도 다시 읽어도 좋다. 다만, 이 책은 날이 풀린 후에나 읽어야겠다. 

(아, 그러고보니 술꾼의 품격을 페이퍼에 올린 적도 있는 것 같다.........ㅠㅠ)

 

 

 

이주은의 글은 편안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그림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녀의 책들을 다 소장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이주은이 말하는 그림과 다르게 또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글의 모양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사라지기만 하는 것 같지만 아주 새롭게 무언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기억은 잊혀지는 특성보다 불현듯, 새삼, 문득 떠오르는 성질이 더 짙다. 어떤 일과 연관하여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셜록 시리즈>를 보면서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언니는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언니는 늘 셜록과 괴도 루팡 사이에서 귀여운 갈등을 하곤 했다. 누굴 더 좋아해야할까! 나와 제법 터울이 났던 언니는 혼자만의 갈등을 즐겼고 결국 루팡을 선택했다. 대신 셜록이 살던 집 주소 베이커 스트리트 221B를 언니의 책상에 이름 붙였다. 그 시절 언니의 책상은 아주 컸다. 작은아버지가 학창시절 쓰던 책상이었다. 나는 언니가 학교 간 사이 그 책상에 누워, 아니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불량하게 다리를 꼬고 누워 세계명작동화를 읽거나 잠이 들곤 했다. 책상은 나의 놀이터였고 어린 나에게는 과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언니의 책상 이름을 떠올린순간...내 안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잠들어있다는 걸 알았다. 기억은 언제든 나를 찾아올거라는 생각에 문득 내일이, 미래가 기대가 된다. 올 한 해의 날짜가 꾹 꾹 새겨져있는 두툼한 다이어리의 날짜가 새삼 설레는 것도 다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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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2-02-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들고 손에 챡 감기는 다이어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작년 연말부터 올해까지 다이어리 산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결국 대충 타협해서 쓰고 있습니다 ^^;

플레져 2012-02-02 22:08   좋아요 0 | URL
연말이면 다이어리 고르는게 연중 행사에요 ㅎㅎ
맘에 드는 다이어리 고르셨어요?
쓰다보면 곧 정이 들거에요^^

icaru 2012-02-0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늘 부르짖고 다니는 모토가 그것인데요, '기록 좀 하자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니까, 기억이 지좋을대로 사실 왜곡해버리는 횡포도 막을겸사...' 그러나 전, 기록을 잘 안 하네요. 못하는거지요 ㅎㅎ
셜록 시리즈라 하시면, 시즌2가 시작된 BBC 드라마를 말씀하시는 것일려나? ㅎ 명절에 시즌2 2부까지 봤거든요. 플레져님은 유년 시절도 멋지구리~해요!! ㅎ 기억력도 좋으시구..
이주은 씨는 알라딘에서였나, 어디에서였나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는데 그의 프로필에서 주부로서 일상을 고단하게 살았구나, 하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주은 씨 글이 플레져 님에게는 그렇구나! 이렇다하게 읽은 책이 없으니, 꼭 읽어봐야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문체나 글 스타일을 안다는게,,, ㅎㅎㅎ 저도 있거든요. 잘 읽히고, 내 주파수와 잘 맞다고 생각되는 문체!
아무튼, 다른분들 속삭이셔서 저도 비밀글로 속삭일까 하다가, 내용 중 은밀한 부분이 없으므로 통과--!

플레져 2012-02-02 22:10   좋아요 0 | URL
제가 얼마전에 정말 아주 멋진 스토리가 떠올랐거든요. 어떤 막연한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이 안나는거에요 ㅠㅠ 그게 정말 엄청난 화력을 갖고 있는 장면같았다며 미련을 못 버리고 틈만 나면 그 장면을 떠올리려고 애쓰다...지쳐가요...흑.
이주은씨 인터뷰를 찾아봐야겠어요 ^^ 이분의 문체가 무지 편안해요. 정든 친구가 읽어주는 느낌 ㅎㅎ
담엔 은밀한 부분도 섞어주세요 ㅋㅋ

2012-02-07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4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살인병기가 되어버렸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고귀한 질문. 그저 따라야만 하는 미친 상황에서 그들이 찾은 해법은 나의 동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것. 살아서 만나게 된다면, 그순간을 진정 맞이할 수 있다면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공격하리라.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생명을 빌미로 자존심 싸움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해야만 했던 그 시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에 선 긋기를 하며 머리를 쓰진 말았어야 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영화의 젊은 군인들 과거 이력은 아주 조금 짐작할 수 있다. 수혁(고수) 은 어눌하고 순진한 이등병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야 할 나이었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야 하는 출발선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무엇을 했는지는 전장에선 중요하지가 않다. 그들은 처참할 정도로 살인 병기가 되어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들 중 전쟁이 원하는 인물이 되버린 사람은 수혁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싸운다. 거기엔 상하 명령이 중요하지 않다. 수혁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안다. 지도를 펴놓고 이쪽은 우리 땅, 저쪽은 니네 땅 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일 때,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수혁이 찾은 해답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는 좀 더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었다. 전투기 폭격으로 먼저 초토화시킨 다음 진군하는 작전이다.  185쪽.  

그러나 전쟁은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했다. 아니면 늦어도 정전협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끝났어야 했다. 또는 1951년말, 한 달간 임시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끝날 수도 있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기 위해 무려 159회의 회담이 열렸다. 그동안 쌓인 정전회담 관련문서만 해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회담 기간 내내 양측은 누가 정전회담 기간중의 약속을 위반했는가를 놓고 줄곧 싸웠다. 276쪽.  


회담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이 오가는 동안, 남 북한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국군의 젊은이들은 38선 주변의 고지 위에서 수없이 다치고 죽었다.  277쪽.

 

오래전 어떤 인연으로 외국인 친구와 잠깐 교우한 적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문득,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분단국가에 사는 만큼 그 이야기를, 전쟁 이후의 삶, 전쟁 중의 삶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겪지 않았으므로 잘 모르겠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건 내 부모 세대가 겪은 일들이고 나는 관심 밖의 일이라는 생각만, 혹은 아무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웃고 말았다. 한참후에 그것 아니어도 지금은 너무 견디기 힘들다는 변명을 찾아내곤 흐뭇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는 한국전쟁 당시 어린이였다. 엄마는 가끔 한강 다리를 건너고 난 후 다리가 폭격되어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노라며 회상했다. 하도 많이 들은 이야기여서 이골이 나기도 하는데 엄마는 티브이에서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만 보아도 그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내가 알지는 못하였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들과 조우한다. 방관 이나 외면 모드로 일삼기엔 가슴 한 켠이 쓰린 이야기.  

 

올해 3월에 터키에 갔었다. 앙카라 한국 공원에 들렀다. 국사 교과서에서 앙카라 한국 공원을 본 기억이 났다. 그저 부모 세대만의 일이라고 했던 어린 마음이 부끄러워 나는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무관심하게 존재해도 내가 속한 땅의 역사와 흔적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공원을 지키는 아저씨는 한국전쟁에서 희생한 군인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터키 참전 용사들의 이름과 나이를 훑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스물 한 살, 스물 세 살, 스물 두 살... 그 나이땐 몰랐다. 지나고보니 그 나이가 얼마나 어리고 어린 나이인지 이제는 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가 몹시 얄팍했지만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젊은이로 살아가는 건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게 주어진 현실, 내가 처한 사회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 나는 움츠러들었고 쥐죽은듯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할 일을 찾고 그쪽을 향해 뛰어가다보니 어느 정도 움츠린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왜 그들이 젊은이들을 그곳으로 보냈고,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좀 더 가슴이 넉넉해질지도, 시야가 뚜렷해질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알고 지나가야 하는 시절, 살아있는 자의 의무겠지만 그어느때보다 더 젊은 날은 그렇다. 그 시절의 젊은이도 지금의 젊은이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면, 어떤 것도 흘려보낼 수 없는 시절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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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0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모르는 전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이산가족으로 80세가 다 된 친정아빠의 전쟁통 이야기를 가끔 떠올리는 정도에요. 터키의 젊은이들은 그렇군요.
아빠의 이야기는 대하소설감인데 그걸 그냥 묻혀야하는 (능력이 안 되니) 저는 별로 좋은
딸이 아닌 거 같아요.ㅠ
플레져님 그곳에도 비가 많이 왔나요? 여긴 이제 좀 멈췄어요.

플레져 2011-08-01 22:40   좋아요 0 | URL
서두르지 마시고 아버님의 말씀을 정리해두면 어떨까요?
지인 중에도 아버님의 전쟁이야기를 간직한 분이 있는데
그분도 늘 고민하시더라구요. 그냥 흘리기엔 너무 아깝고 귀하다고.

오늘도 비가 내렸어요. 스콜처럼 화르르 쏟아졌다가 햇빛이 쨍 났어요.
지난주부터 계속 그렇답니다. 지독한 비가 내리는 요즘이에요.

2011-08-01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8-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로 보아도 이렇게 짠한데 터키에서 마주친 그 젊은이들과 더 젊었을 그들의 흔적을 보는 순간 플레져님은 얼마나 울컥했을까요...

플레져 2011-08-01 22:42   좋아요 0 | URL
활자로만 보았던 전쟁 이후의 느낌을 손으로 만진 것만 같았어요. 아무런 느낌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아저씨를 뵙는 순간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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