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깊이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사랑했던 가족이나 연인이 가장 원망스럽고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이유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에 대한 성찰이범주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바로 멈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퇴로가 막힌 밀봉된 삶 속에서 무슨 수로 자유롭고 인간답게 사나.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행했던 협박성 계몽이 부모의 도리나 역할인 줄 알았던 폭력의 시대가 지금은 아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끝나야 한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엄마의 그런 태도에 깊이 감동받았다. 이런 엄마의 아들이어서 어린 아들도 자기 마음을 정확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엄마의 아들이어서 자기 마음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게 작동했던 마음에 관한 학습이 결국 아이 자신을 보호했을 것이다. 친구를 때린 아이의 마음도 언제나 옳다.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
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석구석 비춰주는 거울처럼,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나를 담고 있는 누드 사진처럼 ‘거부감 들지 않고 다정하게, 그러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공감 유발자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혼내서 얼마나 속상한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사람의 본질, 상처의 본질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만이 치유자일수 있는 곳, 그곳이 트라우마 현장이다. 외형이 아름다운 품새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최우선인 실전 무술이 이기는 살벌한 싸움터다.

적정한 기술이 사람의 삶을 바꾸듯 적정한 심리학 이야기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위력을 갖는실용적인 심리학 정도로 바꾸어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와 내 옆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존재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일 수 있다는 오래된 명제는 자기 존재 증명의 영역에서 더 확실한 진리다.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원 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상대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내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아는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쪽 -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는 감당할 수 없는 넓이로 아득했고 나는 한 척의 배도없었다. 
.
.
.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나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가진 한웅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