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사람의 본질, 상처의 본질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만이 치유자일수 있는 곳, 그곳이 트라우마 현장이다. 외형이 아름다운 품새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최우선인 실전 무술이 이기는 살벌한 싸움터다.

적정한 기술이 사람의 삶을 바꾸듯 적정한 심리학 이야기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위력을 갖는실용적인 심리학 정도로 바꾸어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와 내 옆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존재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일 수 있다는 오래된 명제는 자기 존재 증명의 영역에서 더 확실한 진리다.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원 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상대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내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아는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