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않았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 이 세상에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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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천천히 죽어가는 말기 암과 같았다. 적이 죽어가는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않았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이 힘겹게겨우겨우 흘러갔다. 저녁이면 먼 섬들 사이로 저무는 햇살에 갯고랑 물비늘이 반짝였고, 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멸하는 날들은 기진맥진했다.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기이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속으로 스몄고, 수면을 스치는 잔바람에 빛들은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석양에 빛나는 먼 섬들이 어둠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거두어들였고, 빛들은 해 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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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와 공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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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 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적의 후미 너머 먼바다에서, 다시 거꾸로 돌아서는 보름사리의 썰물이 대낮의 햇빛 속에서 반짝였다. 그 물비늘 빛나는먼바다까지, 이 많은 적들을 밀어붙이며 나는 가야 할 것이었다. 거기서 존망의 길이 어떻게 뻗어 있을 것인지는 나는 알 수없었다. 조금씩 일렁이던 물길의 가운데가 허연 갈기를 세우며일어섰다. 물결은 말처럼 일어서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젊은 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 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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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나의 죄는 유죄가 되어도 하는 수 없을 것이었다.

 우수영의 가을 물빛은 날카로웠다. 먼 산과 먼 섬 들의 갈핏빛 능선이 도드라졌고, 바람의 서슬은 팽팽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바다에서, 저녁마다 노을은 투명한 하늘 위로 멀리 퍼졌다.
 적은 오지 않았다. 저녁노을의 붉은 기운이 갑자기 검게 바뀌거나, 저무는 수평선 쪽에서 먼 섬들이 흔들려 보이면 비가 내렸다. 적은 몇 달째 오지 않았다. 먼바다 쪽에서 붉은 구름과 흰구름이 어지럽게 뒤엉키면 바람이 불었다. 망군望軍들은 산꼭대기에서 일몰의 바다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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