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 (페이퍼백)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태식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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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계'라는 걸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상호 긍정적 반응으로 지속되는 세계라고 보고 싶다. 그런데 오늘날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계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인간계가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파국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와 그 격차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존의 가치가 붕괴되는 과정은 한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격해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첼시와 그녀의 가족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현관이 있는 집에서 사는 부유한 백인 가정이다. ... 첼시의 어머니 웬디는 ... 자녀들의 성장과정에 철저하게 관여했다. ... 첼시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은 늘 집에 있었다. ... 첼시의 부모는 해마다 그녀의 생일에 환상적인 주제로 파티를 열어주었다. ... 첼시는 자신이 대학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다. ...첼시는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로스쿨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42-45쪽)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도중에 그만두었고, 자신의 부친처럼 트럭 운전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정원사와 같은 임시직에 간간이 고용될 뿐이었다. ... 데이비드는 많은 곳으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아버지가 교도소를 들락날락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자랐다. ... 양어머니에 대해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미치광이에요, 술에, 약과 마약에 취해 지냈어요." ... 최근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강도 행각으로 구금되었다. ... 학교를 떠난 이후 데이비드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플라스틱 공장, 조경공사 등 다양한 임시직 일을 해왔다. ... 그는 이런 삶의 경험으로 인해 다양한 피가 섞인 배다른 어린 동생들에게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45-50쪽.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청년에 대한 스케치는 이 책의 주제를 이끌어나기기 위한 출발점이다. 로버트 D. 퍼트넘은 재산, 교육, (가족)관계를 기준으로 구분되는 계층이 혼인, 출산, 양육, 교육, 진로, 이혼 등 생애사의 과정에서 어떻게 격차가 벌어지게 되며 그 격차가 더 커지게 되고 그 결과 각각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차들이 파괴하는 관계망이 궁극적으로 한 사회를 어떻게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가는지를 분석한다.


물론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면 사회적 제 문제들의 일단이 어느 정도 개선의 여지를 가질 수 있음을 여러 연구결과들을 분석하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퍼트넘은 이러한 문제들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발언의 기회마저도 어느 한쪽이 독점하도록 만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한다.(341-344쪽)


미국의 사례들을 들어 격차의 대물림 문제가 다음 세대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것이지만, 단지 그러한 경향과 교훈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듯하다. 오늘날 미국에서 반지성주의, 반정치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결국 이러한 격차의 확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책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물론 불평등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결국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천년 전부터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이렇게 불평등이라는 것이 사회구성원들이라면 감수해야 할 돌이킬 수 없는 경향처럼 받아들여지는 때에 수천년을 경유하며 공유해 온 저 교훈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퍼트넘은 일찌기 대외정책과 대내정치의 상호관련성에 대하여,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내정치가 필연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양면게임이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공공행정의 연구자인 동시에 정치적 관점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제출하는 그답게 이 책에서 역시 일정한 대안을 제출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즉시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안을 제시하는데, 각각의 안들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안들이 실현될 수 있는 실천경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이다. 대안에 동의하는 세력들이 정치세력화되어야 할 것이나 현재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인 반동의 경향은 대안의 정치세력화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깃들게 한다. 동시에 격차의 확대경향이 낳고 있는 정치혐오는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버리게 만들고, 그렇잖아도 과잉대표되는 자들의 목소리를 더욱 키운다. 악순환은 반복된다.


그렇다고 "답이 없다" 이러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관계가 파괴되고 인간세계가 소멸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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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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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은 최근 한국에서 상당히 각광을 받은 저자이다. 이전에 번역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


이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그래서 기대가 있었다. 기대만큼의 책이다. 내용은 뭐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글 자체가 과거에 냈던 칼럼들 등을 엮은 것이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다. 그냥 읽으면 된다.


다만, 그가 책 전반을 통해 내려고 의도했던 결론인지는 모르겠으되, 최근 내가 고민하고 있는 어떤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누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누가 그 줄거리를 쓰는가, 그 줄거리가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늘 던질 수 있다."(90쪽)


이미 많은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법에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과는 별개로 법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법이 형평을 잃었다는 것을 매번 실감하면서 분노함에도 또다시 일이 생기면 법에 의존한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리베카 솔닛이 제기한 저 문제의식은 여전히 법에 적용된다. 법을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누가 법을 만드는가, 법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리베카 솔닛이 책 전반에서 언급하듯, 문제는 정치다. 하지만 그 정치는 리베카 솔닛이 말하든 투표의 중요성이라든가, 투표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상태를 어떻게 개성할 것인가라든가 하는 것에 한정될 수는 없겠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어떤 말이 결국 말 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제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 확인의 작업으로서 정치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 고민이 출발하는 지점은, 즉 법을 누구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출발하는 지점은 누가 정치의 주체가 될 것인지로 소급된다.


어떤 책이 문제의식과 함께 결론까지 제공할 것을 바라는 건 일종의 욕심이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혼자서 병원균을 발견하고 치료약을 만들고 백신까지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은 어쩌면 공자가 이야기했던 '정명'과 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명확한 결론을 유도해주는 건 또 아니다.


하지만 결론을 찾고 그 결론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건 여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내 몫으로 남는가? 아냐, 난 이제 좀 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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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근현대 음식 서울문화마당 7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지음 / 서울책방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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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러고보니 책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책 핑계로 신세한탄만 한 듯. 하긴 뭐 리뷰라는 게 따로 있겠나. 책의 내용에 대한 정리나 책을 읽다보니 느낀 바를 간략히 적으면 그뿐이지, 무슨 형식을 따지고 깊이를 잴 일은 아닌 듯 싶다. 그건 전문적인 평론가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오늘 점심은 뭘 먹었더라? 아침은? 뭐 돌이켜보면 대충 어떤 음식물을 섭취했는지 기억은 나겠지만, 이렇게 그저 끼니를 때웠다는 정도로 내 몸에 들어가는 것들이 취급되는 건 서글프긴 하다. 음식을 먹을 때,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언제적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본 말인데,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든다"는 그 말이 상당한 무게로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나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작용하는 하고 있는 먹을 거리에 대해 이렇게 무심한 건 곧 내 몸과 마음에 대해 스스로 무심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게다가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은 먹거리를 입에 넣도록 만들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일 터이다. 입에 넣고 씹기만 하면 되도록 음식을 조리한 사람이나, 그렇게 음식이 될 식재료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나, 그것을 내 집까지 옮겨준 사람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원천적 재료가 되어준 식물이며 동물에 대한 감사, 그것을 단 한 마디 말로 "잘 먹겠습니다"로 퉁치는 게 적절한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어떤 무엇인가의 생명과 땀과 숨결이 고스란히 내 몸으로 들어와 나를 만드는 것이니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그건 그렇고, 음식은 또한 시절과 장소를 많이 타는 것이기도 하겠다. 나는 21세기 한국의 서울에서 살고 있다. 태어나기를 조상 대대로 이 땅에서 난 사람들의 뒤를 이었고, 못살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그랬듯이 먹고 살기 위해 몰려든 서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서울 변두리를 헤메고 살아간다. 이 동네 특유의 음식문화는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입맛을 좌우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입맛에 맞는 음식물을 섭취하다보니 이 공간에 잘 적응하는 몸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또 내 몸과 관련을 맺게 된다.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공수되는 각종 식재료와 온갖 도처에서 출발한 각종 요리법이 섞여 있는 국제적 대도시 서울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요리들이 지천에 널려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익숙한 것에 먼저 눈길이 가는 법. "서울의 근현대 음식"은 그래서 좀 쉽게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왜정시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동안 서울의 음식문화에 대해 다룬다. 시대의 변천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지금 서울의 음식문화라는 것은 굴곡진 역사 속에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서울의 역사 속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문화가 공존하고, 전쟁을 겪으면서 또한 개발독재의 광풍을 겪으면서 전국각처에서 몰려든 온갖 지방의 음식문화가 얼키고설킨 것임을 알게 된다. 하긴 아무리 대를 이은 노포라고 할지라도 앞세대의 입맛과 뒷세대의 입맛이 변함없을 것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겠지만.


서울의 음식문화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몰랐던 사실이 주는 신선한 흥미를 유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산한 그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네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느끼면서 기분이 축축해지기도 한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을 경영했다고 알려진 손탁의 말년이 불우했던 점을 보면 시대에 휩쓸린 개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24쪽) 


음식문화 역시도 신구 문물의 충돌과정에서 세대차이를 보이게 되고, 여기서 신세대와 구세대의 알력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오늘날이나 예나 다를 바가 없음을 보며 피식하게 된다.(71쪽) 하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게 모든 구세대의 불만이려니와. 


음식이 나오는 과정이나 음식의 상태나 그걸 먹는 사람들의 행태가 '설렁설렁'해서 설렁탕일 수  있다는 말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93쪽) 선농단이니 몽고의 말에서 나온 이름이니 하는 것들을 들을 때에는 갖다 붙인 결론처럼 여겨져 영 마뜩찮던 설렁탕의 이름이었더랬다. '설렁설렁'해서 설렁탕이라니 이게 얼마나 딱 맞는 이름인가.


추어탕 집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요즘 시쳇말로 잠입취재를 한 어떤 이가 남긴 말이 가슴을 친다. "속담에 '보고 못 먹는 것은 그림속의 떡'이라 하지만 저로 보면 추탕집의 음식물입니다. 아침 다섯 시부터 저녁 열한 시 열두 시까지 제 손으로 뜨고 집는 국과 고기와 과일과 술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나 제 입으로 들어오는 때를 혹 보셨습니까."(99쪽) 노동자들의 삶은 왜정시대나 지금이나 그렇다. "전국에 내 손으로 지은 집이 몇 채인지 모르는데, 내 집 한 칸이 없다"던, 평생을 노가다판에서 살다 간 아버지의 말도 그렇고. 한 벌에 몇 백을 호가하는 고급 브랜드의 옷을 만들었지만 평생 몸빼작업복이 가장 잘 어울렸던, 평생을 봉제공장 다니던 어머니도 그렇고.


서울배추라고 불리던 재래종 배추로 담근 김장을 먹어본 일이 없는 처지인지라 그 맛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입장이지만, 가능하다면 한 번 먹어보고싶기는 하다. (183쪽) 하긴 어릴적에 큰 집에서 김장을 담글 때면 적게는 5백포기에서 많게는 천포기를 담그는데, 절여 쌓아놓은 배추며 무가 코찔찔이 어린애의 눈에는 무슨 성벽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걸 김장 담가 분가한 집들까지 온 식구들과 나누는데 아무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더랬다. 산골인지라 배추를 마련하려면 집에서 기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딘가서 상당분량을 사와야 했는데, 내 기억에 집에서 기른 배추와 사온 배추는 생김새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뭐 그게 재래종이었는지 뭔지는 모르겠다.


책 말미에 다양한 서울의 먹자골목 이야기가 나온다.(220쪽 이하) "종로빈대떡, 신림동 순대, 성북동 칼국수, 마포 돼지갈비, 신당동 떡볶이, 용산 부대찌개, 장충동 족발, 청진동 해장국, 영등포 감자탕, 을지로 평양냉면, 오장동 함흥냉면, 동대문 닭한마리, 신길동 홍어, 을지로 골뱅이, 왕십리 곱창..." 성북동 칼국수 골목만 못가봤구나...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예전 청진동 해장국집 본점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던 한시가 있었는데, 해장국집 찬양하는 내용이었더랬다. 피맛골 다 부서지고 난 후인지 그 전인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아무튼 언젠가 갔더니 그 편액이 사라지고 없기에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일하는 사람들이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눈치를 주길래 뻘줌했던 일이 있었더랬다. 아무튼 지금도 청진동 해장국집 가끔 간다만 예전같은 느낌은 못 느끼겠다.


예전 같은 느낌이라... 결국 나도 옛 추억 운운하는 구세대가 되어가나보다. 천지에 새로운 맛들이 넘치는데 이 책을 보면서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다니. 아아...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책 읽다가 이런 느낌 들면 아주 열적다. 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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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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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시간이었다. 연초에 난데없이 심장 스탠트 시술을 하고난 후부터 일년 내내 모든 것이 꼬였다. 


그동안 봐주고 있었던 듯 온갖 병증이 다 나타나기 시작했고, 뭔가 움직이려고만 하면 탈이 났다. 기진해버린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떠난 여행 중에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질 않나, 심지어 힐링을 하라고 친구가 큰 돈 들여 떠나보내준 여행길에서 또 몸에 공사를 해야할 일이 터졌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햄스트링이 찢어져 거의 한 달을 걷지도 못했다. 간만에 등산을 갔다가 옴팡지게 더위를 먹고 그냥 골로 갈 뻔 했고. 특히나 더웠던 8월의 어느 날, 결국 더위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 나를 관찰하던 짝지가 오밤중에 동해에 나를 떨궈준 덕분에 미치기 일보 직전에서 멈출 수 있었다.


육체적 건강만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이후 터져나온 모든 문제가 다 내 탓인 듯 돌아왔다. 병원에 있을 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들이, 정작 퇴원하고 나서보니 아무 일도 해놓은 것이 없었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 그 일이 되지 않았느냐는 닥달이었다. 걱정말고 병구완을 잘 하라던 덕담은 그냥 입바른 소리였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이들이 일의 진척이 없음을 다그쳤다. 낭인으로 떠돌 때는 같이 하자고 다가와 자신들이 뭐라도 대단한 도움을 줄 듯 하던 자들은, 기껏 알량한 감투 하나씩 얻어 걸리고 나더니 거지취급을 한다.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궂긴 대소사가 겹치면서 서로에게 아쉬운 감정을 갖게 되질 않나...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조차, 나는 아직도 2018년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주하게 된다. 나름 젊었던 날 큰 변곡점을 지나면서 다시는 삶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고, 지난 30년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만큼 힘겨운 한 해였다. 도대체 내가 살아갈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정도로.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선배들을 연이어 잃었고, 성실하게 활동했던 활동가 동지들 몇이 또 그렇게 영면했다. 


거의 공항이라고 해야 할만큼 넋이 나갔고, 주변 사람들이 우려할 정도로 정줄을 놓았다. 그러다 여름 한 철 더위가 꺾일 무렵,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공감이 있었다. 마치 내가 겪은 그 심적 상태들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 하였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엔 공통된 것이 있는가보다.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정작 내 아픔의 강도가 높아지고 지연될 수록 차갑게 식어간다. 눈 앞에서는 누구보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지만, 내게 맡겨 놓았던 일들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떠안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혹시 다른 이들이 아플 때 지금 내게 저들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말과 행동은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던 사람에게 폭력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아파서 고생하던 그 누군가는 내 말과 내 행동을 보며 어떤 분노와 회한을 느꼈을까? 역지사지란 이렇게 그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뜨끔하게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큰 병이 훑고 지나간 후 다시 시작되는 생의 시간들을 받아들이면서, 저자인 아서 프랭크는 "내가 좇는 회복의 의미이자 질병이 주는 기회를 나는 '덤으로 얻는 삶'이라고 부른다."라고 정의한다. 그의 투병기를 읽다보면 그가 세계에 대한 온갖 서운함을 넘어서 얻은 이 깨달음이 '덤으로' 얻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아보는 시간을 경유하면서 결국 자신의 삶 자체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통해 사유의 경계를 확장했다.


그래,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면에는 바로 그 아픔으로 인해 새롭게 눈뜨게 되는 세상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을 더욱 사랑해야겠다는, 더불어 내 몸과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은 저자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다만, 속이 좁은 탓으로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은 거두기 힘들 듯하다. 그렇다고 모종의 관계를 일도양단하듯 다 끊어낼 수는 없다.


그래서 한 가지 다짐을 한 게 있다. 


살아온 궤적때문에 주변에는 사회운동을 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켜켜이 쌓여왔던 책임의 한계를 벗어내지 못한 채 병으로, 사고로,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 눈물로 이별을 애도하고, 그러면서 하나같이 "그 뜻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며 그제야 "편히 쉬시라"는 덕담을 한다.


나도 과거엔 그러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말 하지 않을 거다. 뜻을 잇긴 뭔 뜻을 잇고, 편히 쉬라는 덕담은 왜 항상 떠난 후에야 한단 말인가? 떠나간 자들이 떠나기 전에 그 책임을 나눠서 져 주던가, 그가 힘들어 영영 떠나기 전에 좀 편히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저 덕담들은 그저 산 자들의 자기 위로밖에는 되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가 떠나기 전에 그와 함께 책임을 져주거나 그가 쉴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 거라면, 구눈가가 떠난 다음에 내 스스로의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저따위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것이 내 입장에서 '덤으로 얻는 삶'을 살아가는 나름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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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겨울 에디션)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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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청년이 컨베이여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스물 네살... 그 나이를 듣는 것만으로 눈물이 흐른다. 


아직도 '신성한 노동'까지는 아니지만, 노동의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는 교조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내게, 일 하지 말자거나 일터를 탈출하자거나 하는 말은 상당한 거부감을 동반한다. 그러한 발화들은 나름의 맥락이 있겠지만, 일 하지 않으면서 영위되는 삶의 앞뒤양옆위아래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이 있어야만 하고, 그 노동이 있어야만 일하지 않으면서 영위되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다보니, 일단 일 없이 살자는 말에 호감이 먼저 들리가 없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책 제목은 선뜻 호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물론 책의 내용은 열심히 살지 말기를 당부하기보다는 그 '열심히'라는 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문장은 가볍고 삽화도 가볍지만 그 뜻이 가볍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할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 저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접했다. 이 죽음이 전해지던 시간에, 국회에서 어떤 국회의원은 "싸구려 노동판"이라는 말로 상대 당의 의원들을 야유했다. 통곡을 할 일이다. 


이런 저런 일들이 우연하게 겹치면서, 마음이 영 좋지 않은 터에, 리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즈음 정말 가슴에 담고 살던 심정을 비슷하게 언급한 책의 내용이 있어 그대로 옮겨보려 한다.


"노동의 가치를 갂아 내리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노동이 진짜 기치 있고 신성하다면 값을 잘 쳐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진될 때가지 일해서 우리가 받는 액수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것이 신성한 노동의 가치란 말인가. 더 환장할 노릇은 노동에 값어치를 매기는 사람, 우리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자본가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동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뼈 빠지게 일해야 받는 돈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현실이 이러니 노동이 신성하다, 가치 있다 찬양하는 건 노동자들을 더 값싸게 부려먹으려는 자본가계급의 세뇌교육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아니면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소리거나. 아차,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계급토쟁(?)이나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모독할 생각은 없다. 그냥 돈 버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소설 한번 써봤다. 우리 사회는 평등 사회이고, 신분이나 계급 같은 건 엇다는 거 다들 아시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번다. 그런데 돈 버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는데도 간신히 삶을 유지하고 사는 정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시간도 없고, 내가 좋아흔 것에 몰입할 시간도 없고, 심지어 다시 일하기 위해 재충전할 시간도 없이 일을 한다. 아니, 그래야만 돈을 준다. 내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건지, 이쯤 되면 일해서 돈을 번다는 게 형벌처럼 느껴진다. 노동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 이 형벌을 끊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저자의 이 문제제기는 학술적인 차원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 땅의 모든 장삼이사가 공히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전문적인 이론으로 이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가?


스물 네 살 청년의 영정을 보면서 '열심히'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왜 살려고 일하는 사람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일을 해야 하는가? 이게 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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