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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의 -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2021 세종도서 하반기 교양부문 선정도서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0
한재각 지음 / 한티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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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movement)’은 대부분의 경우 예외적인 어떤 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려 의욕할 때 벌어진다. 사회구성원의 비율 중 소수를 점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서 경험하는 불편함, 부조리한 권력에 의해 억제된 정의로움을 향한 갈망,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양극화 구조에 대한 분노 등이 그 출발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다양한 운동은 일종의 인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범주를 여정의 종점으로 상정한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이건 제도적 보장이건 간에, 적어도 인정이 이루어졌다는 건 그 운동의 주체와 의제를 사회적 예외로 배제할 수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므로.

 

그런데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운동의 고단함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안들이 있다. 노동운동, 성평등운동, 차별철폐운동 등이 그 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동은 반전평화운동일지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안의 해결을 위해 운동을 한다는 건 운동의 주체에게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용기를 요구한다. 영영 지속될 것만 같은 사안을 앞에 두고 아마 이건 안 될 거야라는 비관을, 기어이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낙관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사람들이 최근 가장 많이 등장하는 분야가 바로 생태환경분야이며, 특히 근래 지구적 환경문제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멸종저항 운동이다.

 

지난 315, 멸종저항운동의 활동가들 더불어민주당 당사의 출입문과 지붕을 점거했다. 점거에 참여한 활동가 중 한 명은 자신의 행위를 보편선험적 가치인 자연법에 따라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미래를 지키기 위하여 법으로 만들어놓은 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는 인류 전체의 존재를 소거해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깨끗한 환경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현행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는 공포마저 날려버릴만큼 강한 힘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물론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보편선험적 가치인 자연법에 따라라는 고차원적인 이유가 아니라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는 고전적 민중가요의 가사를 읊었겠지만.

 

그날 더불어민주당 당사의 출입문을 점거한 활동가 중 한 명은 그러한 투쟁을 각오하기 위해 아예 책까지 출판을 해놓고 달려갔다. “기후정의를 쓴 한재각이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멸종저항 활동가가 쓴 기후정의라니 라임이 착착 입에 붙는 듯한 느낌은 물론 나만의 착각일 터이지만, 언행일치, 시종여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글을 쓰고 몸을 던진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이제 간이 오그라들고 몸도 성치 않아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당사 점거 같은 건 엄두도 못 내는데. 훌륭한 책을 냈기에 당연히 책을 구했고, 거기에 저자 사인까지 받았고, 그랬더니 서평을 쓰라고 하니 점거는 못해도 이거는 해줘야겠다는 사명감에 뭔가 끄적여야 해서 이 글을 쓰고 저자를 칭찬하는 건 아니다.

 

기후정의의 내용은 이쪽 방면으로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충격적인 내용도 없고, 뭔가 확 깨는 새로운 사안을 소개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 다 알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이 여전히 그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심각한 문제들을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상황이 제공하는 공포는 다른 게 아니라 바뀔 가능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절망이다. 개인은 물론이고 자본도 알고 있고, 각국의 정부도 알고 있으며, 국제사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만 그런 게 아니라 과거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앞으로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북극곰의 피골이 상접할 상황을 만들어갈 것이다. 멸종의 위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가 말 그대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형국이다.

 

두려움의 끝에 희망은 있는가? 불행히도 기후정의는 그런 희망 따윈 제공하지 않는다. 기껏 유나버머(Unabomber)를 끌고와서는, “개혁보다 혁명이 쉽다고 뻥을 친다. 쉽긴 뭐가 쉽나? 그렇게 쉬웠으면 벌써 혁명을 골백번은 했지. 그런데 그래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솔직히 이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다. 아니 이렇게 김새는 소리를. 게다가 이렇게 덧붙인다.

 

절망과 분노가 깊을수록, 이 혁명의 절박성은 커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최대의 적은 비관과 무기력함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혁명의 유토피아적 상상이 생존을 위해 가장 현실적이라는 점을 되새기자.” - 기후정의, 191.

 

훌륭한 선동(agitation)인데, 과연 이러한 선동은 유토피아적 상상을 불러 일으켜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 멸종위기종 인류를 격동하여 비관과 무기력함을 딛고 일어나 개혁보다 쉬운 혁명을 일으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안이 있는가? 아주 오래된 문제제기인 만큼 대안도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다. 한재각이 기후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열거해놓고 있는 대안은 한재각이 이 책 쓰면서 아이디어가 솟구쳐 새롭게 내놓은 대안들이 아니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완전히 탈탄소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현행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겠다는 정치사회적 결의이며, 이를 요구하고 추진해 갈 정치사회적 세력이다. 민주주의를 혁신하고 확장하려는 목표와 노력이다. 기후정의 동맹을 구축하여 전환을 거부하는 화석연료 자본주의 동맹과 맞서 싸워야 한다.” - 기후정의, 196

 

그렇다. 다시 운동(movement)의 대의로 돌아가 보자.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보편적인 사회에서 탈탄소화는 예외적인 것 내지는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이러한 역관계를 전도시켜 탈탄소화의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운동이 한재각이 선동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경과로 봤을 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듯 보인다. 사람들은 깨끗한 공기를 원하는 동시에 비행기 타고 세계일주를 꿈꾸기도 하니까. 전자는 훌륭한 일이지만 남의 일이길 원하고 후자는 환경을 생각하면 꺼림칙하긴 해도 나의 일이길 바란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게 현실이고, 이런 현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빨리 기후위기 · 생태위기가 가속화되어 인류멸종이 현실화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기후정의가 보여주고 있는 상황은 더 덧붙일 것 없이 심각한 상황이며, 기후정의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더 늦출 수 없이 시급한 과제다. 그러므로 비관을 체질화하고 있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한재각의 선동이 더 많은 사람에게 먹혀들어가길 바라게 된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세상이 움직여서 파멸의 회로를 멈추고 절멸의 신호를 끄게 되길 갈구하는 거다. 왜냐고? 어차피 망할 거 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주제에 왜 한재각의 선동에 찬동을 하냐고?

 

옛말에 이르기를, “먹고 죽은 놈은 때깔도 곱다고 했다. 마찬가지 아닐까? 좋은 공기 마시다 죽은 놈은 때깔도 곱지 않겠나 말이다. 죽으면 꼭 화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남길 터이지만, 입관할 때는 때깔 곱게 입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게 기후정의를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의 이유다


아, 그리고 이 책은 환경교과서가 아니라 정치교과서임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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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 다산은 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정약용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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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산이 자식들에게 보낸 서한 중 고르고 고른 고갱이가 이정도란다. 그 아버지가 마침 귀양가서 천리 먼 곳에 계셨기 망정이지 모시고 있는 처지에 이렇게 매사 감놔라 배놔라 했으면 그 자식들이 가출을 하거나 출가를 했을 듯.


중년 한남들의 행태를 시쳇말로 "Latte is horse~"라고 하더니만, 그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듯 하다. 하긴 뭐 세상살이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냐만은, 다산의 이 서한집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꼰대들 훈장질은 변함이 없는 것이겠다.


그렇지 뭐. 피라미드를 쌓을 때나 만리장성을 놓을 때나 기성세대는 "요새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라고 하는 거고, 청춘들은 "라떼는 말이여~"라며 윗세대를 디스하는 거고. '군바리'들의 영원한 테마가 있잖은가? 요즘 쫄따구들 빠져가지고...


그런데 말이다. 아니 이럴 수가.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스며 나오고,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말이지. 어랏, 이런 줴길. 내가 그만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이 꼰대의 훈장질이 남의 이야기같이 들리지 않는 구절이 있더란 말이다. 아아, 세월이여. 이럴 수가.


자유분방보다도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38~39쪽) 술을 자제하라거나(135쪽 이하) 하는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그 외에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더라. 특히 잘 나갈 때 인심과 못나갈 때 인심의 차이라든가 자기관리의 엄정함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심하게 동의가 되기도 하고.


그런데 이 서한들을 보니 다산은 자식들에게 안타까움을 많이 가졌을지언정 자식들을 인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닥달은 있는데 칭찬은 인색하고. 편저자가 그런 글들만 모아놨는지는 모르겠으되, 엄부의 자세는 훌륭할지 몰라도 내가 그 자식이었다면 아마 삐딱해지지 않았을까.


스스로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또는 자식들을 한참 뒷바라지 해야 할 때 귀양살이를 떠나 그 소임을 못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다산은 너무나 엄격한 지도지침을 전달했던 듯 하다. 아버지의 기대와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고 자책했을 그 자식들이 왠지 가엾어 지기도 하고.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편저자의 해설에도 참조할 이야기들이 많다.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지 몰라도, 경륜이 있는 이야기마저 꼰대들 훈장질로 치부되기 십상인 시절이다. 하지만 그런 시류가 적절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른다운 어른이 없으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경륜이 녹아 있는 가르침이 아쉽다. 나는 혹여 누군가에게 꼰대짓을 하고 있지 않나하는 경계심과 아울러, 꼭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입닥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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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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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뭐 세계가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딱딱하게 써낸 글들만 보는 시절이 있었다. 아, "있었다"라는 과거형 표현은 어색하다.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까. 꽤 장시간을 딱딱한 글만 본데다가 논문이니 보고서니 하는 딱딱한 글만 쓰다보니 뇌가 경화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에세이 쓰는 수업 몇 시간을 들었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수업시간에 다른 수강생들의 글을 낭독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게 너무 재밌는 거다. 세상엔 나 말고, 그동안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말고,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고 살면서 무슨 얼어죽을 변혁이니 진보니 떠들어댔는지 쑥쓰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수필들을 몇 편 일게 되었고, 아예 그런 류의 책들을 보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이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는 책이다. 지은이가 여러 경로를 거쳐 요리의 세계에 들어갔고, 지금도 요리관련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데, 그동안 있었던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놓은 게 이 책이다. 먹는 거 관련된 책들을 근간에 몇 편 봤는데 그 중에서도 꽤 재밌는 책이었다.


유튜브 보면 왜 그런 거 하잖나. 먹방. 먹방도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많이 먹는 것을 주제로 한 먹방이 있는가 하면,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먹방, 혼자 먹는 먹방, 여럿이 먹는 먹방, 집에서 먹는 먹방, 음식점 찾아다니는 먹방, 야외에서 먹는 먹방, 생존먹방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음식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다. 유형을 일일이 들이밀기도 벅차다. 손가락 아플 정도니 생략하자.


어쨌거나 이 책도 먹방이라면 먹방이라고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 담뿍 담겼다. 그런데 단지 먹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일정한 유형을 보이고 있다. 각 글의 제목만 봐도 글이 어떻게 쓰일지 대충 감이 올 정도다. 우선 대상이 되는 음식이 있다. 통닭이면 통닭, 냉면이면 냉면. 그리고 그 음식에 대한 어떤 소재가 있다. 예를 들면, "어디론가 떠날 때면, 우동(126쪽)" 이런 식으로 글 제목이 붙어 있다. 내용은 그렇다. 우동이라는 음식이 등장한다. 그 우동에 얽힌 추억 한 자락이 꽂힌다. 그 추억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동 같으면 한국 어디에서 먹은 우동, 일본 어디에서 먹은 우동 등 몇몇 추임새가 끼어든다.


일본 먹방 드라마인 '고독한 미식가'를 보면 그 패턴은 지루할 정도로 뻔하다. 고로는 업무차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팔기 위해서 혹은 약간은 다른 어떤 관계를 풀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주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갑자기 공복감을 느끼고, 음식점을 찾자고 자신에게 명령한 후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어떤 음식점에 필이 꽂히면 거기 들어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메뉴를 정한 후 이를 즐긴다. '고독한 미식가'의 패턴은 이 틀거리에서 한 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틀이 익숙하고 재밌다. 그 틀 안에는 꼭 음식이 나오고 그 음식은 맛있게 보이며 그 음식을 고로는 맛있게 먹는다.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먹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입이 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 뻔하다. 저자가 퍽이나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다보니 그가 각 음식에 대해 느꼈던 서정에 거의 대부분 동화될 지경이다.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 한번쯤은 느껴봤을 서정들, 그 서정들과 결합된 음식들. 그러다보니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낯설지 않고, 읽다보면 나의 옛날이 생각나게 된다. 물론 가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 생각나게 만드는 부분마저 있어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건 뭐 잠깐이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 보면 무슨 '고생배틀'하듯 지가 제일 고생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난 나의 과거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보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생각하는 거 자체가 싫기에 고생배틀 시작되었다싶으면 그냥 거기서 일어서든지 자르든지 하는 식이다. 만일 이 책이 음식에 얽힌 고생담을 통해 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컸는지 아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그냥 안 사고 말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차분하게, 잔잔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과 그에 얽힌 추억을 들려준다.


아, 글 올리다보니 배고파졌다. 얼른 올리고 밥부터 먹어야겠다. 


고로 식으로 하자면 "はらがへった!"라는 자각 후 "みせをさがそ!"라며 요깃거리를 찾아 헤메기 시작할 때의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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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중산층 사회 -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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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난 좀 게으르다. 뭐든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니 꼭 한 발짝씩 늦는다. "세습중산층사회"를 손에 쥔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여직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글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성공작이 될 줄 알았으면 진작 느낌이라도 올려놓을 걸.

하지만 느려서 좋은 것도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른 이들의 글을 보다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라는 걸 알면서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독한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진작 내 생각을 올렸었다면 아마도 그 오독은 치명적으로 내 글읽기의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흠결이 되었겠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자기위안일지 모르겠지만 게을러서 좋은 면도 없진 않은 듯 하다.

때를 넘겨 잊고 있었다가, 프레시안에 올라온 장석준의 서평을 보게 되었다. 책도 읽을만 하고 이 서평도 읽을만 하다.

프레시안: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장석준 칼럼에 대해 좀 언급을 해야겠다. 대체적으로 글의 방향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짚어야할 부분이 있다. 우선 그의 서평 시작부분. "작년부터 한국 사회 불평등 문제를 '세대'라는 틀로 설명하거나 진단하려는 시도가 유행하고 있다."라고 장석준은 글을 시작한다. 그는 그 근거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대 남성'의 지지철회-대열이탈과 조국 사태 이후 각계의 진단을 들고 있다. 아마도 이런 시대적 사조 속에서 세대를 준거로 불평등문제를 거론하는 추세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불평등문제와 세대문제를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왔다. 시기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얼핏 보면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평등의 문제를 세대론과 결부시켜 논의해왔던 한 흐름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왔고, 일부에서는 이를 고착화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정치권이었다.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꽤 오랫동안 정치권에서는 먹고 살만한 기성세대와 죽고 못사는 청년세대를 대립시키면서 자신들이 청년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식으로 지지를 구했다.

불평등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문제라는 걸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배척당하기까지 했다. 철지난 이념논쟁을 재론하는 구좌파 취급을 받으면서 말이다. 특히 소위 386과 그 이후 세대 간의 대결구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정치적 선명성을 부각받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계급문제를 거론한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아 취급을 당했다. 이게 우파들만이 그런 게 아니고 소위 좌파들조차도 그러했다. 우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과 친연한 사례로는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이 있겠다. 좌파쪽에서는 특정한 네이밍을 하지 않았으나 N포 세대 문제 등의 문제가 결국 세대 간 격차로 인한 것인냥 포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었다.

그런데 이 지난한 과정이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는 계급문제를 희석시키거나 부차적 문제로 전락시켜왔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촛불 정국에서도 그렇고 그 이후 문재인 정권의 행보에 대해서도 그렇고 좌파는 좌파다운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민중의 뜻 운운하면서 시류에 휩쓸리기 바빴다. 그러다가 조국 사태가 터진 후 겨우 계급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등장할 뻔했지만 이게 또다시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장석준은 칼럼의 모두에 작년부터 불평등을 세대라는 틀로 설명하려는 측과 그에 대응하여 계급 또는 계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봇물처럼 터진 논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런 관점은 그동안의 경과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아닌 말로 내가 이 블로그를 비롯해 온갖 도처에다가 세대론은 결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게 물경 20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 했지만 시대에 뒤처진 낙오자들의 신세한탄정도로 치부되었고.

책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부분으로 제3장과 제6장을 들고싶다. 총론적 평가와 결론부분 및 그 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장석준의 칼럼을 비롯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으며 대부분 나도 그들의 의견과 다르지 않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 제3장과 제6장은 내 경험과 비교해도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에 좀 더 살펴본다. 물론 개인적 경험이 자의적 사고를 넘어 객관성을 확보하긴 어렵겠지만, 어차피 이 책에 나온 이야기를 부연하는 수준에 불과하니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보고.

제3장은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 또는 대학이라고 들어갔지만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노동시장에서도 부수화되거나 심지어 노동시장에 대한 접근조차 제한된다.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되는 거다. 여기엔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는 학력의 세습문제, 지방의 낙후와 소외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지방'은 돈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늘날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도 이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앞에 세대가 어쨌길래? 그래서 연결되는 게 제6장이다. 제6장에서는 현재의 '청년세대'와 구분되는 '장년세대', 즉 현재의 '청년세대'의 아버지뻘이 되는 60년대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세대에서 역시 대학을 간 자와 못 간자, 서울에 있는 자와 지방에 있는 자의 격차가 있었고, 그 격차 또한 그 이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날 '청년세대'의 문제와 어떤 부분이 다른가?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이렇게 내놓고 있다.

"A씨와 B씨의 차이는 결국 1980년대에 '대학 진학이 가능했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갈렸다. 당시에도 대학 진학을 지원할 수 있는지는 그들 부모의 경제력, 즉 계층이 결정하는 문제였다. ... 1960년대생의 노동 생애에서는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집단에 속하지 않을 경우, '역전'의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185쪽.

내가 다닌 공고에는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이 수두룩빽빽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들 대부분은 어디 내놔도 머리 나쁘다는 소릴 들을 애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고를 들어왔고 공장으로 흩어졌다. 왜? 가난하니까. 어느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 6식구가 월세를 살면서 그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제대로 잠을 못자 퀭한 눈빛만 남기며 온 가족의 몸이 망가져가던 집구석의 친구놈이 다른 친구놈 집이 있는 판자촌 고개를 올라가면서 야이 판잣집 사는 놈아~!라고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가난했던 놈들이었기에 대학 따위는 꿈도 못 꾸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제 중년이 넘어가는 그들은 인문계고등학교 나와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들어간 다른 친구들이 대기업 정년을 코앞에 두면서 연금을 이야기하고 자식들을 유학보낸 뒷바라지 이야기하는 동안 어떻게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걱정한다. 다들 60년대 생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그나마 가방끈을 좀 길게 늘인 편인데, 나 역시도 늦게 진학을 했더니만 진도 따라가기 벅차고 등록금 대느라 정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돈나올만한 구멍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 또래들은 이미 졸업을 한 뒤이고, 이것들이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는 그것이 운동권 네트워크든 사업상의 네트워크든 간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는데,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도 이게 이어져서 정치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학교 따라 사람이 갈리고, 운동계열에 따라 계파가 모이는데 나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었다. 그럴 정도니 대학문턱도 가보지 못한 이 세대 일원들에게 '386'이라는 말은 그냥 대학간 놈들끼리 어울리자는 말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고 노회찬 의원이 '386세대'가 아닌 '306세대'의 문제를 거론했던 일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그 또래에서 '8'자가 빠진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그냥 그림자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림자일 뿐인 그들의 역할은 그들의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인가?

이 책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불평등이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3장과 제6장을 같이 놓고 보자. 이 '세습'의 기원과 과정과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안들이 있다. 저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게, 이미 그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지난 수십년 간 꾸준히 해왔다. 나도 그렇고 프레시안에 서평 올린 장석준도 그렇고. 그러니 대안에 관한 이야기는 책과 장석준의 서평을 다시 들여다보면 되겠다. 아니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안 바뀌는 건가?

조국 사태를 통해 왜 이 대안들이 현실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었다. 조국도 그랬고, 이 땅의 정의를 독식하고 있는 저 '86'들이 그랬듯, 저들도 언젠가는 계급과 평등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안주하면서 그 계급 안에서의 평등을 구가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동류세대 전체를 대표한다. 마치 그 세대 전체가 그들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를 유발하면서 말이다. 진작에 깨졌어야 할 구조가 그 구조를 깨겠다고 나섰던 자들에 의하여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걸 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저들 86만이 아니라 저들과 똑같은 양태를 보이고 있는 자들, 소수의 특권층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표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국익'과 등치시키는 자들의 카르텔을 부술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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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블로그 제목부터 '구라'가 들어있을 정도로, 나는 '구라'라는 장르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매우 오래 전에, 구라의 종류를 3종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의의와 내용 및 장단점에 대해 설명한 바도 있다. 통상 구라는 뻥구라, 생구라, 개구라로 크게 나뉘는 바, 나는 특히 상식적 가치를 가진 구라로서 뻥구라를 으뜸으로 치고, 소설적 가치를 가진 구라로서 생구라의 의미를 인정한다. 반면 요즘 유행하는 소위 '가짜뉴스'와 같은 비중으로서 '개구라'를 취급하며, 개구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난을 쏟아 붓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나름 구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 내지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구라를 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은근한 존경의 염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비록 나의 지향이 뻥구라라고는 하나 구라계의 일원으로 말석에도 자리하기가 어려운 천학비재한 자로서 저들 구라의 천재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기라성 같은 구라의 대가들을 일일이 언급하기는 어렵고, 다만 최근 들어 이 자의 구라는 매우 진지한 구라이면서도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 구라쟁이는 지젝이었다. 한 십 년 이상을 지젝의 지젝거림을 들여다보고 있다보니, 이젠 지젝이 뭘 말할지 대충 안 봐도 감이 잡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막장 드라마류가 으레 그렇듯, 보다 보면 다음 대사까지 정확하게 예측이 되는 그런 수준이라고나 할까. 좀 더 부연하자면, 지젝의 문제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언술에 녹아 있는 일종의 선동이 날이 갈수록 그저 장삿속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가장 위험한 구라를 가장 안전한 위치에서 지젝거리는 것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다만.


언젠가 접했던 구라 중에 뻥구라와 생구라의 경계를 묘하게 왔다갔다 하던 자는 '총 균 쇠'를 썼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였다. '총 균 쇠'는 대담하게 거시적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저서였다. 미시사가 유행처럼 번져갔고, 그 미시사를 연결하는 것에 아주 빡이 치던 시절에 만난 게 바로 '총 균 쇠'였다. 수많은 "00의 역사"를 꿰어맞춰서 통합적인 전체 역사로 "명징하게 직조"하는 건 어차피 내 수준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한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보았더랬다. 하지만 그의 구라는 끝내 이것이 뻥구라인지 생구라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도처에 구멍이 있었고, 과거에 헤겔이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주제에 위도에 따른 인종적 특성까지 꿰뚫었다는 개구라를 들었던 느낌의 재현이랄까.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역사를 거시적/통시적으로 보게 해주는 즐거움을 준 책이었다.


그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추천사를 썼다는 책을 이제야 들여다 보았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연말에 딴짓 하지 말고 책을 한 번 제대로 읽어보자고 마음 먹었던 때에 눈에 먼저 들어온 게 이 사피엔스였고, 그래서 샀다. 아, 사실 이 책을 처음 들여다보게 된 건 지난번에 호치민에 갔을 때였다. 친구 집에 이 책이 있었고, 그걸 몇 페이지 정도 들여다보았는데 그만 일정때문에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귀국했다. 아무튼 그런 전차로 구매를 했는데 연말연초에 딴 짓 하느라고 책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가파도에서 이틀을 보내게 되었고, 조건이 맞아 이 책을 완독하게 되었다.


책 읽는 속도가 과거와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거의 세 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그런데도 이 책은 2박 3일만에 완독을 했다. 사실 한 번 읽고 그 책을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기에, 더구나 본문만 56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한 번 완독했다고 하여 소화한다는 건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글이 중학교 졸업 수준의 지식수준과 이해도를 가지고 있으면 충분할 정도로 쉽고 평이하게 씌여진데다가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곳곳에서 적절하게 튀어나와주는 특유의 유머가 읽기를 수월하게 해주었기에 제법 속도감 있게 글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을 보면 유인원 중 하나였던 사피엔스가 어느날 갑자기 한 소리를 듣고 개안을 하게 되어(인지혁명) 다른 영장류와 달리 지구의 적자로 거듭나더니, 또 어느 순간 제 입 속에 들어갈 먹거리들을 될 때까지 기다리고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제 손에서 자라게 만들게 되었고(농업혁명), 그러더니 느닷없이 먹거리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제 꼴리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더니(과학혁명), 이제는 아예 신과 맞다이를 뜨면서 영생불사의 우주적 사변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길가메슈 프로젝트)는 논지로 이어진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지식에 따를 때 여기저기 구멍이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소거하거나 왜소화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점이 현재까지 내 기준으로 볼 때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처럼 뻥구라와 생구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사피엔스는 뻥구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된다.


나는 최소한 그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피엔스의 마지막 즈음에 결론처럼 제시되는 질문이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궁극의 질문,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유발 하라리가 사회주의자이거나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데올로기를 내쳐버리지 못한 채 자본주의 전복을 욕망하는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한시도 놓을 수 없는 질문이 바로 저것 아니었던가? 그것을 평등이라고 하든 생산수단의 사회화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간에,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원하는 존재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은가? 물론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그 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마치 배추도사 무도사가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놓은 장구한 역사, 아니 우주사(빅뱅부터 시작하여 태양계의 구성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니)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저 질문에 다시금 천착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게 되는 거다.


그러다보니, 사피엔스는 그저 역사의 전개과정을 나열하고 있는 듯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결국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에 대한 회의와 지금의 역동적 활동들이 이후에는 행복을 가져오게 될 것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인류가 공통의 환상을 어떤 실체와 같은 수준에서 공유함으로써 사회가 형성되고, 그 사회가 장구한 세월동안 온갖 투쟁과 환난을 경험하면서 과거와 단절하거나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면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 존재하는 인류가 결국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섬찟하게 해부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인류가 아직까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가치 하나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사법체계는 공통의 법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53쪽.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60쪽.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 66쪽.


"석기시대는 목기시대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쓰던 도구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74쪽.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135쪽.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163쪽.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66쪽.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167쪽.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237쪽.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266쪽.


"모든 것이 변환 가능할 때 ...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267쪽.


"신뢰는 인간이나 공동체, 혹은 신성한 가치가 아니라 돈 그 자체 그리고 돈을 뒷받침하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투자된다." 268쪽.


"문화의 다양성과 영토의 탕력성은 제국의 독특한 특징일 뿐 아니라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만드는 요소" 273쪽. 


"영국인들은 인도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경제적 통합에 극히 중요한 철도망을 건설했다." 292쪽.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 298쪽.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데 뛰어난 문화다." 344쪽.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357쪽.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404쪽.


"누가 이 물건들을 구매할 것인가? ...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490쪽.


"고층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수위에게 주어야 할 급여액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이들이 국가에 저항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509쪽.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516쪽.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 바람 없는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겼던 닐 암스트롱은 3만 년 전 쇼베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530쪽.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535쪽.


"과학의 첫 단계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536쪽.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 ...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560쪽.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580쪽.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585쪽.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589쪽.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섭렵하면서 "명징하게 직조해낸", 유발 하라리는 그래도 인간의 진보와 발전에 대하여 낙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장에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고 바뀌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간극을 넓혀보면 그래도 과거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는가?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쟁의 위협에서 인류는 드디어 해방될 가능성을 타진하는 단계까지 왔지 않는가? 물론 이런 구조를 들이대면서 유발 하라리가 그러니 지금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먼 미래에는 지금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임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듯이, 당장 내게 닥친 고통과 분노는 역사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역사를 다루다보니 유발 하라리가 전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546쪽 중간에 살짝 두 나라의 이름을 함께 올린 정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뻑하면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뚝배기가 깨져가는 친구를 봐야하는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이 과연 스스로를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여길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사피엔스는 일단은 역사적 상식의 집대성 정도로 여기는 것이 맞겠고.


이러다보니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무엇일지가 궁금해지는 거다. 결국 유발 하라리의 다음 책들을 들여다보게 되고. 다른 시리즈물들도 분량이 상당하던데, 이걸 언제 다 읽어보게 될지 기약이 없다. 다시 가파도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아, 여담이지만, 내가 구매한 책은 파본이다. 417쪽부터 432쪽까지가 없다. 대신 433쪽부터 448쪽까지가 두 번 연속된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것인데 이거 제대로 제본된 걸 받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모르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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