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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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시간이었다. 연초에 난데없이 심장 스탠트 시술을 하고난 후부터 일년 내내 모든 것이 꼬였다. 


그동안 봐주고 있었던 듯 온갖 병증이 다 나타나기 시작했고, 뭔가 움직이려고만 하면 탈이 났다. 기진해버린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떠난 여행 중에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질 않나, 심지어 힐링을 하라고 친구가 큰 돈 들여 떠나보내준 여행길에서 또 몸에 공사를 해야할 일이 터졌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햄스트링이 찢어져 거의 한 달을 걷지도 못했다. 간만에 등산을 갔다가 옴팡지게 더위를 먹고 그냥 골로 갈 뻔 했고. 특히나 더웠던 8월의 어느 날, 결국 더위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 나를 관찰하던 짝지가 오밤중에 동해에 나를 떨궈준 덕분에 미치기 일보 직전에서 멈출 수 있었다.


육체적 건강만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이후 터져나온 모든 문제가 다 내 탓인 듯 돌아왔다. 병원에 있을 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들이, 정작 퇴원하고 나서보니 아무 일도 해놓은 것이 없었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 그 일이 되지 않았느냐는 닥달이었다. 걱정말고 병구완을 잘 하라던 덕담은 그냥 입바른 소리였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이들이 일의 진척이 없음을 다그쳤다. 낭인으로 떠돌 때는 같이 하자고 다가와 자신들이 뭐라도 대단한 도움을 줄 듯 하던 자들은, 기껏 알량한 감투 하나씩 얻어 걸리고 나더니 거지취급을 한다.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궂긴 대소사가 겹치면서 서로에게 아쉬운 감정을 갖게 되질 않나...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조차, 나는 아직도 2018년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주하게 된다. 나름 젊었던 날 큰 변곡점을 지나면서 다시는 삶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고, 지난 30년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만큼 힘겨운 한 해였다. 도대체 내가 살아갈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정도로.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선배들을 연이어 잃었고, 성실하게 활동했던 활동가 동지들 몇이 또 그렇게 영면했다. 


거의 공항이라고 해야 할만큼 넋이 나갔고, 주변 사람들이 우려할 정도로 정줄을 놓았다. 그러다 여름 한 철 더위가 꺾일 무렵,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공감이 있었다. 마치 내가 겪은 그 심적 상태들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 하였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엔 공통된 것이 있는가보다.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정작 내 아픔의 강도가 높아지고 지연될 수록 차갑게 식어간다. 눈 앞에서는 누구보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지만, 내게 맡겨 놓았던 일들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떠안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혹시 다른 이들이 아플 때 지금 내게 저들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말과 행동은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던 사람에게 폭력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아파서 고생하던 그 누군가는 내 말과 내 행동을 보며 어떤 분노와 회한을 느꼈을까? 역지사지란 이렇게 그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뜨끔하게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큰 병이 훑고 지나간 후 다시 시작되는 생의 시간들을 받아들이면서, 저자인 아서 프랭크는 "내가 좇는 회복의 의미이자 질병이 주는 기회를 나는 '덤으로 얻는 삶'이라고 부른다."라고 정의한다. 그의 투병기를 읽다보면 그가 세계에 대한 온갖 서운함을 넘어서 얻은 이 깨달음이 '덤으로' 얻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아보는 시간을 경유하면서 결국 자신의 삶 자체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통해 사유의 경계를 확장했다.


그래,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면에는 바로 그 아픔으로 인해 새롭게 눈뜨게 되는 세상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을 더욱 사랑해야겠다는, 더불어 내 몸과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은 저자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다만, 속이 좁은 탓으로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은 거두기 힘들 듯하다. 그렇다고 모종의 관계를 일도양단하듯 다 끊어낼 수는 없다.


그래서 한 가지 다짐을 한 게 있다. 


살아온 궤적때문에 주변에는 사회운동을 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켜켜이 쌓여왔던 책임의 한계를 벗어내지 못한 채 병으로, 사고로,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 눈물로 이별을 애도하고, 그러면서 하나같이 "그 뜻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며 그제야 "편히 쉬시라"는 덕담을 한다.


나도 과거엔 그러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말 하지 않을 거다. 뜻을 잇긴 뭔 뜻을 잇고, 편히 쉬라는 덕담은 왜 항상 떠난 후에야 한단 말인가? 떠나간 자들이 떠나기 전에 그 책임을 나눠서 져 주던가, 그가 힘들어 영영 떠나기 전에 좀 편히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저 덕담들은 그저 산 자들의 자기 위로밖에는 되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가 떠나기 전에 그와 함께 책임을 져주거나 그가 쉴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 거라면, 구눈가가 떠난 다음에 내 스스로의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저따위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것이 내 입장에서 '덤으로 얻는 삶'을 살아가는 나름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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