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최태섭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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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책에 대한 반응이 관심을 불러 일으켜 구입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최태섭의 '한국, 남자'가 그런 경우. 소위 '한남'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상황이며,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기실 책의 내용 자체는 새로운 사실을 밝힌 것도 없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글들.


여전히 의아한 건, 이 책에 대해 날선 반응을 보이는 일군의 무리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들을 겨우 이 정도 글에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최태섭의 전작인 '잉여사회'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잉여사회' 리뷰를 먼저 했어야 하는가... 암튼 그런데, 기실 '한국 남자'에 대해 저리도 날선 반응을 보이는 그 부류가 바로 '잉여사회'에서 이야기된, 이 사회 안에서 잉여, 즉 떨거지가 되어버린 자들의 잉여로움에서 발생한, 잉여 아님을 인정받고자 하는 그런 몸부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


'한남'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 '한국, 남자'는 그닥 쓸만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아주 교과서적인 결론으로 끝날 뿐이다. 따라서 오히려 '한남'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답 역시, 최태섭의 전작인 '잉여사회'의 결론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잉여사회'가 제안하던 '새로운 형태의 자유와 욕망'이 뭔지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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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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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을 읽은지도 꽤 됐다. 아니, 거의 한 20년을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들에 손을 대지 않았더랬다. 그래서일까 생각은 건조해지고 마음이 거칠어진 듯하다. 어쨌든 나는 역사를 드라마화한, 그것도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가 얽히고 설킨 그런 류의 대하소설을 즐기는 편이었다.


김두식 교수의 '법률가들'을 집어 든 건 최근의 사법농단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한 국가의 사법시스템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는가? 과거에는 외압에 의한 수동적 자기파괴가 사법부를 어떻게 보면 불쌍하게 여길 여지라도 줬건만, 현재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사법부에서 벌어진 이 희안한 일들은 꼭 그런 것도 아닌지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무엇이 이처럼 오로지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양승태 류의 사법농단을 가능하게 했을까?


여러 원인에 대한 분석들을 살피던 중, 역사적으로 한국 사법부가 거쳐온 과거에 혹여 그 답이 있을까 싶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마침 김두식 교수가 이 책을 출간했다. 그런지라 처음부터 이 책에 기대를 하진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로스쿨 교수가, 사법부에 대해, 그것도 사법부의 인물들에 대해 쓴 책에 대해 재밌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좀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펼친 후, 이건 한 편의 역사대하드라마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 물론 이 책에 나오는 수도 없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알 도리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따지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이름도 기억못할 인물들이 몇 년에 어떤 학업과정을 거치고 몇 년 공부해서 무슨 시험에 합격했으며 해방 이후 몇 년에 판사임용이 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책값이 너무 아까웠으리라.


이 책은 개인이 어떻게 역사라는 파고에 휩쓸리는지,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사법부의 구조가 달리 만들어질 여지는 없었는가? 있었다면 왜 그 가능성을 살리지 못했는가?


한홍구 교수가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반민주적이며 부패한 정권이 어떻게 법률구조를 사유화했는지를 '사법부'라는 책으로 설명한다면, 김두식 교수는 인물들의 개인사가 사건에 휩쓸리면서 구조의 역사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사법부의 한계가 유래한 근원에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내가 법이라는 분야에 어느 정도 발을 담그고 있어서 이런 후덕한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법이나 사법구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독자에게는 인물들의 나열이 너무 복잡하게 여겨지고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점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므로 나는 이 책에 후한 평가를 주는 게 아깝지가 않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법조계에서는 성인으로 대접받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일가에 얽힌 일에서는 직위를 이용해 압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이야기("사법부장의 사돈을 수사한 이홍규" 편, 225쪽 이하), 빨갱이 제조기로 악명 높은 오제도가 자신의 과거를 포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233쪽 이하), 해방직후 일본인 판검사를 배제하고 조선인들로 채우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자들의 임용과 관련해 "일본인명으로는 면직사령이 나고, 조선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이 난" 일들(184쪽)이라던가, 미군정 하에서 영어 잘하면 대우받는 일들이 사법부에서도 속출했던 에피소드들(202쪽)은 한편으로는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허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히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입장과 처신에 따라 파헤쳐 들어간 제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제5부 '법조프락치' 사건은 또 다른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오늘날 사법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흑역사들을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실명에 근거해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하고 있다. 언젠가는 여기 열거된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 


역사적 파고에 휩쓸린 개인이라는 관점이 강조된다면, 개인의 주체성이라든가 저항의 의지라든가 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책은 그러한 운명론으로 관점을 이어가지는 않는다. 누구는 알아서 기고, 누구는 저항하고, 누구는 반성하며, 누구는 더 악독하게 변하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그런 모든 인물과 사건이 누적된 것이 바로 역사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골머리 싸매고 어떤 이론적 결론을 얻기 위해 이 책을 들여다봤다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소설을 읽듯이 책을 훑다보면 흥미진진하기 이를데가 없고, 금방금방 넘어간다. 그런데 아무리 금방금방 넘어갈지라도 사람 이름이 일단 많이 나오면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책의 분량도 적질 않다.(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600페이지 짜리다.)


자료로도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조만간 저자 직강을 들으러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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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의 삶
브룬힐데 폼젤 지음, 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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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정립한 '악의 평범성(banality)'은, 아이히만이 진짜 평범한 공무원이었을 뿐이었는가라는 여러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민을 주는 화두임이 분명하다. 결국 이러한 진부한 악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은 죄'로 규정하게 되지만, 과연 이 죄는 어떤 단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궁극에 아이히만은 전범재판 이후 사형되었지만, 만일 이 '생각하지 않은 죄'가 법정형을 받을 수 있는 죄가 될 수 있다면 그 형량은 사형일까? 또는 생각하지 않음에 따라 발생한 결과에 비례할 수 있는가?


천수를 다 누렸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106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은 브룬힐데 폼젤은 끝내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가 가장 걱정되었던 소시민이었을 뿐이며,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 직면해, 폼젤의 구술을 듣고 정리한 토레 D. 한젠은 폼젤의 전 생애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외면'이었다.(282쪽) 그리고 그 '외면'이라는 가장 흔하고 진부하며 '평범'한 태도는, 히틀러 치하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민중에 대하여 폼젤이 취했던 그대로 어쩌면 21세기 현재에 우리들의 몸짓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언급하듯이, 특히 난민에 대한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부와 해당 국가의 인민들이 보이는 태도들 속에서.


기실, 책을 읽는 동안, 한젠의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폼젤의 구술은 그냥 어쩌면 일종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 작은 소녀의 성장과 시대적 굴곡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인생역정을 어쩌면 담담하게, 그러나 중요한 시기마다 극적으로 엮어놓은 그런 이야기. 하지만, 폼젤의 구술을 다 듣고 난 후,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광기어린 권력자들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치를 떨게 된다. 반면, 폼젤의 경우처럼 인간은 어디까지 약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 또한 불안감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폼젤의 시대에, 폼젤과 같은 경우였다면, 나는 폼젤이 아니라 숄 남매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다시금 주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어떤 삶이 주체적인 삶일 것인가? 그것이 반드시 주체적인 삶일까? 인간의 나약함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악해지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할 일이다. 생각하지 않은 죄는 저지르기 쉽지만, 이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죄는 없겠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국 주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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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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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직업상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세 부류 있다고 한다. 의사, 목사, 그리고 변호사. 어차피 천국엔 아픈 사람이 없으므로 의사는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지옥을 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천국엔 회개하고 선한 사람들만 있으므로 목사는 죄짓고 회개치 않은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 변호사는? 천국과는 달리 오직 지옥에만 변호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 넘치기 때문에 변호사 역시 지옥엘 가야 한다는데.


실상 이런 류의 농담은 이들 직업군에 대한 오래된 불신에서 비롯한다. 비록 변호사로 대변되지만 법의 집행이나 법적 판단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한 장삼이사의 불만과 의구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런데 이런 불신은 법 다루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초한 바가 크다. 이것 역시 동서고금을 불문한다. 이 책,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는 바로 이러한 사법에 대한 불신의 연원과 그 내막을, 미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설득력있게 드러낸다.


본인이 로스쿨 교수였던 프레드 로델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듯 이 책을 썼다. 기실 비판법학(이 책에서는 번역자는 '법현실주의'로 국한했는데)은 실증주의에 집착한 문헌학 위주의 법해석론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었는데, 프레드 로델의 논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 본인이 1939년에 책을 내면서 서문에 아예 "법률가들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정할 정도였으니...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법현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계도하는 선지자의 위치에 서서, 문헌의 도식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태도에 대해 프레드 로델은 사정없이 비웃음을 날린다. 예를 들면,


"'과연 법관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이 뒤따른다. 극히 보기 드문 정직한 법관이 최근에 이에 답했다. "법관이란 주지사와 잘 아는 법률가다""(57쪽)


비록 미국의 법관선출제도가 한국과는 현격하게 다른 바가 있다고 할지라도, 저 인용문이 말하는, "법관이란 주지사와 잘 아는 법률가다"라는 말을 한국적으로 적용한다면, 작금의 사법농단 사태를 염두에 둘 때, "법관이란 대통령과 잘 아는 법률가다"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을까?


역자가 후기에서 설명하듯,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 이래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뉴딜정책이 보수적 사법부에 의해 빈번히 가로막히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당시까지 보수주의의 중핵이 되는 '자유방임주의'가 법정에서 작돋한 결과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에 대한 비판자들의 분노가 가히 상상을 절하는 수준이었던 듯 하다. 


한편 21세기 한국의 사법농단을 보자면, 이 농단세력들이 가진 생각의 핵심은 1930년대 미국 법관들과는 사뭇 다른 듯 보인다. 한국의 인민이 가지고 있는 사법부에 대한 분노 또한 1930년대 미국과 다를 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분노가 가르키는 방향이 다른 것이다. 1930년대 미국의 보수적 법관들은 자유방임이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사수하고자 하는 철학적 원칙이라도 있었겠지만, 21세기 한국의 사법농단 세력들은 오로지 개인적 안위를 일선에 올려놓은 외에 어떠한 철학적 원칙이라도 있었는가?


그러다보니, 물경 80년 전에 프레드 로델이 제시한 충격요법이 아주 그럴싸하게 설득력을 갖게 된다. 프레드 로델은 법률시스템 자체를 붕괴시켜버리자고 주장한다. 법률이라는 고답적인 형식을 해체하고, 제도적 용어용례를 아주 편하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으로 바꾸고, 당연히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법을 알게 되니 법률가가 필요없고, 법률가가 필요 없으니 사법부도 필요 없고...


물론 어떻게 되든 '법'적 역할을 하는 규범은 있어야 하며, '사법적 판단'에 버금가는 판결구조는 있어야 한다. 다만 그것을 지금과 같이 정형적인 사법구조가 아닌 보다 열린 구조로 전환할 가능성에 대해 프레드 로델은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있는 거다. 이 책의 11장은 제목 자체가 아예 "단언컨대, 법을 버리자"이다.


이게 홧김에 내지르는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제안이라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1957년에 책을 다시 내면서, 프레드 로델은 39년에 했던 주장을 전혀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다. 재판이 나온지 57년만에 한글 번역판으로 내 손에 쥐어진 지금, 프레드 로델의 주장을 나 역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 아이디어가 전혀 빛바래 보이진 않는 것은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 않기 땝문이리라.(이 책은 원래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1985년에 번역을 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역자 후기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주술가가 되어버린 법률가들과, 주술로 변질된 법을 보는 건 저자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듯 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제출되 아이디어, 즉 법을 폐하라는 그 발상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 생명력을 가져야 할 상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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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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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노동권과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구설에 오르내리는 한홍구 교수지만, 그가 쓴 '사법부'는 이래 저래 한국의 현재 사법부가 처한 불안한 지위를 역사적으로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주로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의하여 어떻게 좌우되었는지를 사건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부당한 권력의 요구에 저항하는 개별 판사들의 소신과 용기, 그러한 개인들의 도전이 구조적으로 부서져 나가는 고통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특히 사회적으로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루어진 조작간첩사건들의 내막을 보게 되면, 사람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키는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반민주 정권의 폭력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러나 악의 본진이었던 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살면서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누구보다 영달을 누리고 있고, 이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그럼으로써, 죄의 몫은 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른 자가 오히려 죄 없는 자들을 향해 깨끗하게 살 것을 호통치는 희한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한홍구는 책의 말미에서 주목할만한 경향을 확인하면서, 과거와 달라진 현실을 우려한다. 즉, "1970, 1980년대와 비교해 외압이 가해지는 방식이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은밀한 공작정치를 통해 압력이 가해졌다면 이제는 노골적이고 원색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다(396쪽)."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방안에 대해 한홍구는 "법관 개개인이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으면 지켜낼 방도가 없다"라고 한계를 긋는다는 것이다. 결국 구조의 왜곡을 혁파하는 건 개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게 되는데, 이것은 현재 확인되고 있는 사법농단사태를 염두에 두면 도대체 답이 되질 않는 처방이다.


결국 사법부의 오랜 왜곡을 극복할 방법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하여 선출된 권력에 대한 그것 이상의 감시와 민주적 견제가 이루어지는 것밖에는 없지 않는가? 한홍구가 본 책에 스록된 일련의 글들을 언론지상에 낼 때, 그 특집의 제목이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였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말은 전두환 정권 초기 퇴임한 이영섭 대법원장의 퇴임사에서 나온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영섭 전 대법원장은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법농단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따위 사법부에게 법적 정의의 저울질을 맡기고 있었는가라는 '회한과 오욕'의 심정이지 않을까. 왜 여전히 부끄러움은 인민의 몫이며, 그저 자기 자리에서 사는데 바빴던 인민들이 회한과 오욕으로 점철된 감정을 느껴야만 하나?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이 책은 특정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특히 유용하겠다. 앞으로도 자료로서 많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된다. 언론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낸 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조금은 난삽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일목요연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를 따질 일이 아니라면 그런 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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