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 서울의 삶을 만들어낸 권력, 자본, 제도, 그리고 욕망들
임동근.김종배 지음 / 반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동근, 김종배의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2015, 반비)은 팟캐스트 '시사통'에서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이다. 책은 '정치지리학'의 관점에서 본 서울이라는 콘셉트로 쓰였다. 통치성이나 행위자연결망이론 같은 말은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통치술'이라는 말은 종종 나온다), 이론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금세 알아볼 것이다. 서울이라는, 권력과 자본과 욕망의 중심지를 대담 형식으로 비교적 쉽게 다루고 이런저런 야사를 종종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재들이 주된 타켓으로 보인다. 수많은 행위자가 상호 작용하며 만들어낸 연결망이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관점으로 읽지 않으면 그냥 야사 모음으로 끝날 위험이 있는데, 그 정도로 깊이가 얕은 책은 아니다(임동근 샘이 박사 논문을 1,000쪽짜리 책으로 준비하고 있다는데... 과연 낼 수 있을까). 


  체비지라던가 그린벨트 지정의 속내라던가 반상회의 기원 같은 이야기는 평소에 잘 몰랐던 것이기 때문에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대단지 사건처럼 도시 봉기가 지배세력에게 주는 충격은 굉장히 커서, 성남시가 만들어지고 잠실이 개발된 것도 그 때문이라는 해석은 신선했다. 대부분의 도시 정책은 봉기를 예방하거나 억제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마셜 버먼이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에 녹아내린다: 근대성의 경험』(한국어판 제목: 『현대성의 경험』)에서 이야기했듯이, 오스만이 설계한 19세기 파리가 인민이 바리케이드를 놓고 봉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한편 주거와 관련된 용어는 생활과 제법 밀접한데도 여전히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 관심이 너무 편향된 것이겠지. 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변천사를 통시적으로 다루는데, 행정가로서는 고건 전 서울시장을 높이 평가하고 현재로 갈수록 시장들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비록 박원순 시장 1기에 한정된 이야기겠지만, 마을만들기 사업을 비롯한 정책 구상의 비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지방자치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엿볼 수 있는데, 신자유주의 추세와 지방자치가 같이 간다는 점과 기초단위로 갈수록 지방 유지에 의한 토호 정치가 되어 간다는 점을 특히 비판하고 있다. 


  비교적 테크노크라트에 우호적인 면도 있다. 정책의 일관성이라는 점에서 자치=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장애로 작동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런 점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책을 기획, 입안하고 실행할 때 막연히 숙의나 합의에 호소할 수만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트로 2033 유니버스 : 지하의 노래 - 상 메트로 2033 유니버스
쉬문 브로첵 지음, 김윤희 옮김 / 제우미디어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한 동안 종말은 냉전 시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미국과 소련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그때, 사람들은 언젠간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해 전 세계가 핵폭발로 불바다가 되리라는 상상을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지하에 벙커를 만들고 식료품을 준비해 머지않을 파국에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자 제3차 대전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또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억압적인 체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여겼고) 더 이상 파국적인 전쟁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배반당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한 동안 유행했던 '역사의 종말' 혹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퍼진 지금, 역사는 갈 곳을 잃은 채 공허한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억압과 폭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국지적인 규모로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것이 또다시 디스토피아임이 밝혀졌을 때, 특히 국가가 통째로 증발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구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이 자신들의 앞에 놓인 '자유로운' 체제가 다시금 자신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쉬문 브로첵의 『메트로 2033 유니버스: 지하의 노래』는 국내에서 잘 알려진 게임 <메트로 2033>과 그 원작인 소설 『메트로 2033』을 기본 골격으로 한 확장 이야기 중 하나다. 이 '확장 이야기'라는 게 흥미로운데, 게임에 확장팩이나 DLC가 있는 것처럼 소설에도 부가 에피소드를 붙이는 것이다. 영문 위키백과를 보면 universe of metro 2033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항목 안의 도서목록을 보면 수십 권의 메트로 2033 확장 소설이 나와 있다. 저자들은 주로 러시아 사람들이고 그들의 소설은 러시아의 주요 도시인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그 등을 주 무대로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이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도시를 무대로 한 소설도 있다(어째선지 한국을 제외하고는 메트로 시리즈는 대부분 동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확장 세계관'에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수십 권의 소설이 나올 정도일까. 그건 지하철만이 우리의 세계가 되리라는 황폐한 세계관이 갖는 매력 때문은 아닐까. 


  세계가 핵전쟁으로 파괴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하철 안으로 대피하고 난 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는 지하철뿐이 되었다. 지하철역은 일종의 도시국가가 되었고 역과 역 사이에는 교류도 있지만 분쟁도 발생해, 급기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어 사실과 전설이 뒤섞인 채 그나마 과거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나돌 뿐인 세계. 이런 황량한 세계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아마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태와 구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외상(트라우마)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후쿠시마 사태 이전까지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발전 사고로 기록되는 체르노빌은, 오늘날에 와서는 일종의 '종말 관광지'로 부각돼 전시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체르노빌을 통해 우리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어렴풋이 엿본다. 불타버린 인형,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녹슨 철골을 드러내는 폐허들. 여기에 구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에 이은 자본주의 국가의 출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기대했지만, '가진 자들의 자유'만이 보장된 세상. 그러니까 이미 파국을 겪은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파괴된 세계의 가장 새로운 버전이 '메트로 2033 유니버스'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러시아 지하철이 핵전쟁에 대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동유럽의 대지를 밟는 이들에게 그보다 더 가까운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하의 노래』는 원래 제목이 '피테르'라고 한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면서 오늘날에도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하기에, 페테르부르그의 약자인 '피테르'를 제목으로 삼은 듯하다. 원서가 두꺼운지 상,하권으로 나누었는데 상권에는 주인공이 메트로의 전쟁에 휘말리고 음모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나오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지상의 폐허를 오가며 쓸 만한 물건을 가져오거나 방사능으로 오염된 돌연변이와 싸우는 '헌터'인 주인공 이반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게 줄 선물을 구하러 버려진 역에 갔다가 곤경을 겪는다. 이반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물을 구해 돌아오지만, 자신의 역에서 발생한 수수께끼의 사고로 인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상권은 주로 메트로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극중 묘사를 보면 볼수록 대체 페테르부르그의 메트로가 얼마나 클지 궁금해졌다. 전형적인 클리셰도 조금씩 보이지만, 이국적인 분위기와 문체, 속도감 있는 전개 덕분에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권에서는 페테르부르그 메트로가 좀 더 상세히 드러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4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 엮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그의 지독한 반(反)헤겔주의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저작이다. 내가 크라카우어의 『역사』를 읽고자 했던 것은 발터 벤야민 그리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어떤 징검다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징검다리는 순순히 두 입장을 절충하거나 연결해 주지 않는다. 크라카우어는 앞서 말한 대로 반헤겔주의자로서 역사의 총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역사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속성을 가진 철학도, 이야기라는 서사적 형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재현하는 예술도, 역사를 자연처럼 다루는 과학도 아니라고 말한다(하지만 서사적 형식과 과학적 탐구라는 영역에 한해서는 역사에서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승인한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역사는 철학이라는 '가장 높은 영역' 혹은 '가장 마지막 영역'에서 한 발짝 물러난 영역, '끝에서 두 번째 세계(the last thing before the last)'다. 그는 이 '끝에서 두 번째 세계'를 '대기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역사는 철학의 추상적 작업을 통해서도 다 포괄할 수 없는 기억과 기록의 잔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려는 철학적 야심은 역사라는 영역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크라카우어는 철학이 역사에 섣불리 발을 붙이려는 제스처를 취하자마자 크게 호통을 치면서 녀석을 발로 걷어차 버리려 한다. 그가 보기에 역사가 진보하거나 진화한다는 믿음은 인류의 최종적 구원을 상정하는 종말론적 역사철학의 반복이고 신학의 세속적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크라카우어는 『역사』를 통해 '역사철학 비판'이라 할 만한 것을 시도한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하지만 크라카우어는 벤야민이 긍정한 신학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 또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기독교적 해석이 역사를 전유하는 것을 방임하지 않는다. 크라카우어가 긍정하는 역사는 결론을 내리길 망설이는 역사, 현실의 그물망에 붙잡혀 타락하기 전의 역사,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많은 기억과 기록의 파편을 일일이 주워담는 역사다. 


  거칠게 말해서 나는 위대한 이데올로기 운동들의 태동기nascent state, 이데올로기가 제도화되기에 앞서 여러 이념들이 우위를 다투던 그 시대에 흥미를 느낀다. 또 나는 승리한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행보를 따랐는가보다는, 그 이데올로기가 출현했을 당시 논쟁사안이 무엇이었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논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으며, 이때 내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가 검토해보지 않았던 그 가능성들이다. (…) 

  어쨌든 나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 시대들이 내게 그런 매력을 발하는 이유는 그 시대들이 프루스트의 마음을 움직였던 나무들의 메시지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미묘한 메시지를 전해주리라는 예감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면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서로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대의들 사이에 숨어 있는 틈새라는 점이다. (22~24쪽) 


  크라카우어가 깊이 관심을 두는 이 '태동기'는 이념이 아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을 때의 찰나를 말한다. 그는 이념들 간의 투쟁이 하나의 이념의 승리로 끝나고 승리한 이념이 제도화된 이후의 세계를 깊이 혐오한다. 어떤 면에서는 순혈주의적으로 보일 정도의 이런 혐오감이, 종교는 세속화를 통해 그 목적을 완수한다는 식의 헤겔주의적·변증법적 논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크라카우어의 반헤겔주의는 오늘날의 후기구조주의에서 드러나는 총체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사소한 것의 자율성을 향한 근본주의적인 옹호와 곧잘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크라카우어가 그토록 반신학적인 입장을 취함에도, 그가 강조하는 이 태동기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 즉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점에서 크라카우어를 손쉽게 '조숙한 후기구조주의자'라는 식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다만 그가 강조하는 유토피아는 크라카우어가 죽은 해인 1966년에 미셸 푸코가 라디오 채널에서 언급한 '헤테로토피아'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크라카우어는 카프카가 『돈키호테』의 산초 판사를 자유인이라 정의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 정의에는 유토피아적인 데가 있다고 쓴다. "이 정의는 틈새의 유토피아―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땅―를 가리킨다(235쪽)"]. 


  역사를 바라보는 크라카우어의 관점에는 반역사철학만 깔려 있지 않다. 크라카우어는 직선적·선형적 역사관에 반발하면서 '덩어리진 시간'을, 각기 다른 장르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역사(경제사, 정치사, 예술사…)가 통합적 역사인 통사와 완전히 결합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통사/거시사의 연대기적 시간과 미시사의 덩어리진 시간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 또한 힘주어 말한다(그는 벤야민의 '경험적 역사' vs. '메시아의 시간'을 세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크라카우어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사진과 영화를 이해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현실과 카메라-현실은 현실을 극도로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역사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려는 '리얼리즘 경향'과, 현실을 나름의 서사에 따라 해석하고 번역하려는 '조형 경향' 사이를 왕래한다. 리얼리즘 경향과 조형 경향 사이의 긴장이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학과 카메라 매체 간에 존재하는 근본적 유비는, 역사가와 사진가 모두 선입견에 기대 기록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과 조형될 원료를 완전히 소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학과 카메라 매체 사이에는 특유의 소재에 있어서도 근본적 유비가 존재한다. 사진과 영화가 "미학의 기본원칙"을 인정한다고 할 때, 카메라가 잡는 피사체는 대개 과학의 대상인 추상적 자연이 아니며, 그런 피사체가 놓여 있는 세계는 질서정연한 코스모스를 암시하는 세계가 아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은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라 땅과 나무와 하늘과 거리와 철도……"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카메라-현실'―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의 렌즈가 열리는 그런 현실―은 생활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유의 현실의 구성요소는 무생물들, 얼굴들, 군중들, 관계를 맺기도 하고 고통당하기도 하고 소망을 간직하기도 하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현실의 큰 테마는 삶,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 삶이다. (73쪽) 


  벤야민에게 사진과 영화(특히 몽타주)가 구체적 역사를 정지시키고 꿈의 세계를 폭파하는 폭탄,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체화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라면, 크라카우어에게 사진과 영화는 구체적 역사 그 자체다. 크라카우어와 벤야민 모두 역사의 파편에 관심을 기울이고 유토피아적인 '좁은 문'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아도르노와 크라카우어 사이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멀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토록 지독한 반역사철학자 크라카우어를 역사유물론을 신학이라는 난쟁이를 통해 갱신하고자 한 벤야민이나 '부정변증법'을 시도하는 아도르노과 같은 노선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통상적인 '역사철학자'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재원들과 친교를 나눴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묶이는 것은 몹시 싫어했던 이 '국외자'의 저작에서 역사유물론을 성급하게 끄집어내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이 파편 같은 저작(『역사』는 크라카우어가 남긴 유고를 편집한 것이며, 그가 죽고 3년 뒤에 출간되었다)이 '잃어버린 대의들의 전통을 수립하고' '이제껏 이름이 없었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자 한'(236쪽) 세속적 시도라는 점을 상기하는 걸로 충분할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키르케고르의 말을 호기롭게 인용한다. "그 세상이 뭐가 됐든 나는 순수함을 지킬 테다, 이 세상을 위해 나의 순수함을 바꾸지는 않을 테다." (236쪽)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저자의 메모에서) 


  이 세상의 도그마들 사이에 숨어 있는 '진짜the genuine'에 주목함으로써 잃어버린 대의들의 전통을 수립하기. 이제껏 이름이 없었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 


……그러나 독창적 인간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하지 않고, 그 세상이 뭐가 됐든 나는 순수함을 지킬 테다, 이 세상을 위해 나의 순수함을 바꾸지는 않을 테다, 라고 한다. 그의 말이 들린 순간, 전 존재에 변화가 생긴다. 마치 동화에서 마법에 걸렸던 성문이 백 년 만에 열리고 만물이 소생하듯, 전 존재가 눈을 뜬다. 한편으로, 천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바야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호기심을 안고 둘러본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빈둥빈둥 손가락을 물어뜯던 검은 악령들이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며 "이건 우리 거야"라고 한다…….


(관련어: 진짜)

카프카가 인용한 키르케고르의 말

(Brod, Franz Kafka, 1963, 180쪽 이하)

(236쪽)


P.S. 크라카우어가 부르는 '역사' 혹은 '역사학'을 '인류학'이나 '민속학/민속지학'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경험연구, 그중에서도 참여관찰과 심층면접 등 질적 방법론(qualitative methode)을 연구 방법론으로 배운 내게 그가 말하는 역사, 파편화된 시간들의 덩어리는 꽤 익숙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었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이 남긴 「파사젠베르크」 유고 혹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개론서 같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여기서 벅 모스는 탐정이 되어 발터 벤야민의 유고를 그의 생애와 함께 살펴본다. 그녀에게 탐정이라는 비유를 불쑥 들이대는 것은, 파사젠베르크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일생일대의 기획, 말 그대로 그가 온 생애를 건 지적 도박은 결코 한데 모아지지 못했다. 「파사젠베르크」는 자본주의 세계의 잿더미를 표상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본인이 직접 문서고를 뒤져 얻어낸 오래된 신문 기사, 광고 문구, 소설에서 끄집어낸 인용문 따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산만하다. 하지만 그런 산만함이야말로 그가 의도하는 바다. 벤야민은 '지금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파편에 숨은 유토피아적 순간이자 악몽 같은 순간을 함께 바라볼 때, 꿈의 세계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시간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벅 모스는 벤야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절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친구 게르숌 숄렘이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것처럼 벤야민을 카발라 이론과 메시아주의의 사도로 규정하는 관점이 한쪽에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벤야민과 브레히트 사이의 교류라던가 벤야민이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이라는 개념을 결코 놓지 않은 점을 들어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있다(오늘날의 상황과 빗대자면, 아감벤 같은 이들이 강조하는 대로 바울-마르키온-벤야민-타우베스라는 신학자의 계열이 한쪽에 있을 것이고, 바디우와 지젝처럼 바울-사도들-자코뱅-볼셰비키라는 혁명가의 계열이 한쪽에 있을 것이다. 논외로, 짐멜-벤야민-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미학자/사회학자의 계열과 벤야민-플루서-키틀러/매클루언이라는 식의 매체이론가의 계열이 또한 있을 것이다). 이때 벅 모스는 형이상학자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얼핏 상충하는 그림은 사실 하나임을 강조한다. 거칠게 말해서 벤야민은 형이상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다. 더 나아가자면 벤야민은 형이상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이고, 그 반대 역시 성립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비판은 항상 신학을 경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저 악명 높은 『자본』 1권의 서두에서 강조한 것처럼,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상품은 사실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가득차 있다. 벤야민은 우리를 둘러싼 상품의 세계는 사실 꿈의 세계라는 걸 간파하고, 그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을 경유해야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 테제)」에서, 신학을 무적의 체스 기계 안에 들어가 기계를 돌리는 난쟁이에 빗댄다. 이 체스 기계의 이름은 역사유물론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신학이 역사유물론의 정체라던가 동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정반대로 말한다. 역사유물론이 이 왜소하고 못생긴 신학을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와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다고. 


  다시 벅 모스의 추리로 돌아오자면, 그녀는 벤야민의 모든 작업이 「파사젠베르크」를 구심점으로 돌아간다고 해석한다. 벤야민의 세속적인 실패가 담긴 『독일 비극의 기원(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부터, 『일방통행로』도, 「초현실주의」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도, 「신학적-정치적 단편」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도, 그리고, 그리고…. 이때 「파사젠베르크」가 이들의 핵심을 응축한 다이제스트라거나 여기서 언급한 글들이 「파사젠베르크」를 부분적으로 반영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벅 모스는 「파사젠베르크」가 1만 2000개의 철제 조각과 250만 개의 리벳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철제 몽타주, 에펠탑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과거의 이미지에 캡션을 넣음으로써, 즉 몽타주를 만듦으로써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자 했다(오늘날에는 인터넷을 하는 대중이 몽타주를 만든다.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티벳여우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벤야민이 추구한 변증법적 이미지다.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라는, 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사진과 영화를 두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영화가 세계를 부술 망치가 되리라 믿었던 씨네필의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이제 그런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만일 것이다(한편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가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직관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몹시도 손사래쳤다). 


  언젠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최선의 체제이자 최악의 체제임을 동시에 사고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몽타주가 TV 예능의 지배적인 논리에 전유되는 것과 함께 혁명적 분출의 가능성 또한 간직하고 있음을 아는 것 또한 변증법이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때문에 벅 모스는 책의 말미에 '남아 있는 이미지'를 삽입해 벤야민 식 몽타주를 실험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처럼 "지금 벤야민을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글이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관심이 여전히 이 시대의 정치적 관심이기 때문"이다(옮긴이가 한 번 더 인용한 이 문장이 본문에 분명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추.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읽고 난 뒤, 그를 두고 '마르크스 이후로 상품의 세계로 내려간 작가' 운운한 것은 역시나 호들갑이었다. 사소한 사물의 세계로 내려간 두 작가를 빼놓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와 발터 벤야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막막함이 떠오른다. 문장은 독자를 덥고 습하고 갑갑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그래야만 그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듯이. 나는 아룬다티 로이의 문장에 반해버렸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