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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타임 ㅣ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3
프리츠 라이버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시공간 너머의 어딘가, 〈거미들〉과 〈뱀들〉이라고 불리는 무리가 우주의 패권을 놓고 〈변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변화전쟁〉이란 시간 여행을 통해 역사를 바꿈으로써 우위를 점해 나가는 전쟁, 다시 말해 적보다 아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현재'의 근원이 되는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변질시키는 행위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이다. (『빅 타임』의 세계관에서는 시간여행에 따른 평행우주의 형성은 배제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역설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하지만, 이 물음은 작품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거미들〉과 〈뱀들〉은 온갖 시대, 온갖 장소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스카웃하여 그들을 생명선 밖으로 빼낸 다음, 다시 온갖 시대, 온갖 장소로 파견해 전투를 치르도록 한다. 대체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거미들〉과 〈뱀들〉에 속한 이들조차 알지 못하며, 그들은 그저 운명의 장난에 희롱당하듯 시간의 바깥으로 끌려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빅 타임』의 이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세계 속 시공간의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느 〈장소〉를 무대로 펼쳐진다. 싸움에 지친 〈거미들〉 측의 전투원들이 〈허공〉을 건너 도착하면 아름다운 〈유흥업 종사자〉들이 피로를 달래주는, 떠들썩한 술집이자 공연장이며 병원이자 쉼터인 그곳에서…….
여기서 경고 : 시공간 안팎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장대한 스케일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기대하지 말 것. 『빅 타임』의 규모는 그간 우리나라에 소개된 장편 SF 소설 중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등장인물은 한줌, 공간은 하나, 시간도 장면 사이에 긴 생략 없이 거의 한 호흡만으로 끝까지 간다. (시공간 너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는데 시공간의 규모를 따지고 있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다.) 평소 이런 이야기를 두고 무작정 '연극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데에는 난감해 하는 편이지만, 『빅 타임』에 관해서 만큼은 아무래도 "연극적"이라는 수사를 쓰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작가부터가 무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지 않던가. "〈장소〉는 〈허공〉을 청중으로 하는 정식 원형극장 형태였다." 이야기는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소품의 이동을 중심으로 엮여나가며, 가장 극적인 전환은 대체로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인간과 신체 구조가 다른 몇몇 외계 생명체의 움직임을 제외하면 딱히 무대 위에서 구현하기 어려울 법한 '스펙터클'도 없다. (물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인 만큼 연극으로 옮겨도 잃을 것이 없겠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므로 작은 소동극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시기를.
그리고 『빅 타임』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소동극으로서 소임을 다한다. 우선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흡사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단, 뚜렷한 목표를 갖고 내달리는 초인들의 박력이 넘실거리는 『파괴된 사나이』나 『타이거, 타이거』 대신 방향을 잃은 미치광이들로 득시글거리는 코미디 『컴퓨터 커넥션』을 떠올릴 것. 왜 아니겠는가? 멀쩡히 살다가 원인 모를 힘에 의해 시공간 밖으로 내쳐진 다음 온 세상을 떠돌며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영원한 변화를 겪어야만 하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으니. 영국 시인의 시구가 날아다니고, 독일어가 횡행하고, 크레타인이 여신을 찾으며, 이형의 외계인이 촉수를 내뻗는다. 이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난투극을 벌이고, 〈유흥업 종사자〉들과 시시덕거리며, 〈뱀들〉을 향해, 그리고 세계를 향해 분노한다. 거기에 불안정한 외부의 소식이 도착하고, 뜻밖의 무기가 등장하고, 추론과 가설, 연설과 맞연설, 편가르기, 의심, 난투극, 속임수가 난무한다. 갑자기 세계의 의미가 뒤바뀌기도 하고, 시공간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진지하게 다루자면 한없이 진지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프리츠 라이버는 그보다는 똘똘하고 세계에 환상을 품지 않은 〈유흥업 종사자〉 그레타 포제인을 화자로 내세워 모두로부터 살짝 거리를 둔 채 이 난장판의 흐름을 즐기는 편을 택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전 우주가 개그에만 몰두하지도 않고, 『컴퓨터 커넥션』처럼 작가부터 무책임하게 막 나가지도 않는, 적당히 발광하면서도 결국 할 이야기만 깔끔히 맺고 빙긋 웃으며 얌전히 물러나는, 그야말로 한바탕 소동극이다. 살짝 아쉬움이 있다면 대체 이 〈변화전쟁〉이라는 게 다 뭐하자는 짓거리인지 풀이하는 대목이 결말에 이르러 갑작스레 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콸콸 쏟아져버린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빅 타임〉에 휘말린 한 존재의 가설일 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겠다. 설령 그 가설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머나먼 훗날의 일이니(다시 한 번 시공간 너머의 일에 대해 시간 개념을 쓰고 있군), 지금은 그저 쇼나 계속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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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에 관한 첫 감상문인 만큼 잠깐 출판사와 책에 관해서도 언급해두는 편이 좋겠다. 불새 출판사는 자신이 읽고 싶은 SF 소설이 출간되지 않는 사실을 개탄하다 못한 어느 SF 팬이 설립한 출판사다. 대표는 따로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번역과 편집과 디자인과 영업을 모두 혼자 하는 가내수공업형 1인 출판사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책이 나오기 전에 이 사실이 미리 알려진 덕분에 SF 팬들의 관심과 응원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출판업이란 잠재 독자들의 관심과 응원만으로 되는 법은 아니라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로서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만 책을 받아 판매하고 있는 형편이다. 네이버 카페와 트위터, 알라딘을 제외하면 딱히 홍보 루트도 없으니, 정말이지 한국 시장에서 SF 팬들의 입소문만으로도 SF 번역서 출판이라는 일이 유지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실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책이 나왔는데…… 아마추어가 혼자 만든 동인지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품질이고, 책으로 먹고사는 출판업자가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우선 책의 판형이나 종이질, 표지 디자인, 활자 배치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이 출판사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어느 지인이 『빅 타임』을 슬쩍 훑어보더니 책이 이렇게도 나오느냐면서 다들 책을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전문 출판업자의 눈에는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쓸데없이 독자의 눈길을 끌고자 난리법석을 떨지 않는 표지도 마음에 들고, 휴대하기 적절한 판형도 마음에 들며, 쓸데없이 양장본으로 가지 않은 것도 기쁘고(애초에 고려 사항이 아니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이 낭비 없이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면서도 가독성을 희생하지 않은 활자 배치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건 누군가의 눈길을 끌고 존재를 뽐내는 데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독자가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인, '읽기 위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표지, 멋지지 않은가.)
문제는 번역…… 이라기보다도 교열이라고 해야겠다. 역자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사 운영 주체인 안태민은 네이버 카페를 통해 자신이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단지 읽고 싶은 책을 한국어로 소개하고 싶은 열망에 찬 아마추어 번역가임을 밝히고 있다. 내 생각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번역이 어디서 면허 따서 하는 일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원문과 대조해보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문장을 보면 결코 대충 말만 통하면 된다며 건성으로 옮기지도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관심법을 지나치게 적용했다는 핀잔을 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경험이 많지 않은 번역가로서 겸손하게 원문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인 탓에 좀 더 재량을 발휘하여 자유롭게 한국어 문장을 구사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영어를 한국어 문장으로 옮길 때는 (원문이 그렇지 않더라도) 문맥에 따라 주어를 생략하거나 지시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을 명확히 밝혀주는 편이 더 적절할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믿음을 밀고 나가지 못한 기색이 엿보인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원문의 의미를 재단하며 첨삭을 가함으로써 작품을 망치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며,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다.
어쨌든, 일단 『빅 타임』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뻑뻑한 문장에 약간 주춤했지만(더구나 도입부는 낯선 세계를 소개하는 대목이라 더욱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슬슬 이게 대체 뭐하는 이야기인지를 파악한 후로는 딱히 번역 때문에 독서를 방해받았던 적은 없음을 밝혀둔다. 이보다 훨씬 인력 많고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낸 책을 읽다가도 도저히 문장을 읽어 넘길 수 없어 독서를 중단했던 적이 있음을 돌이켜 볼 때, 이만하면 적어도 번역이 마음에 걸려 추천하지 못할 책은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번역과 편집과 디자인과 영업을 모두 맡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가 많은 오탈자와 비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석이 빠진 부분도 있으니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첫 출간작 세 권에 해당하는 『달을 판 사나이』, 『정거장』, 『빅 타임』을 구매하신 분들께서는 필히 네이버에 개설된 도서출판 불새 공식 카페(http://cafe.naver.com/firebirdsf)에 가서 정오표를 확인하실 것.
"책으로 먹고사는 출판업자가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라고 말한 부분은 이상과 같은데(그로 인해 별점을 하나 깎았음을 밝혀둔다), 단언컨대 이건 한 사람이 더 열심히 꼼꼼히 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또한 따로 교정자를 모집해서 교정을 부탁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물론 오탈자와 비문은 고칠 수 있겠지만 통상 교정자들이란 문장 자체를 다듬는 데에까지 관여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원문을 대조할 수 있고 한국어를 다루는 데에 능하며 냉정한 편집자가 필요하지 싶은데……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서 제 살 깎아 먹기 식으로 진행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는 책을 두고 속 편하게 '편집자 하나 더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개 독자로서는 일단 그저 이렇듯 책을 사서 읽고 감상문을 쓰고 응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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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니 워낙 출판사를 변호하는 어조라서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불새 출판사 관계자와는 일면식도 없으며 출판업자도 아닌, 그저 좋은 SF를 읽고 싶은(그러나 스스로 출판사를 차릴 엄두는 내지 못하는) 독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