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십 미래의 문학 5
스티븐 백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먼저 : 나는 허버트 조지 웰스가 현대 독자들에게 쉬이 먹힐 만한 SF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혹시 "현대 독자"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과감하고 모호하다면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또래의 지인들에게 SF 소설을 곧잘 권해보는 편이지만, 웰스의 소설을 권하면 즐겁게 읽어주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좀처럼 즐겁게 읽질 못했기 때문이다.

 

 SF 팬으로서 의무감을 느끼며 웰스의 책을 억지로 집어들었던 것도 아니다. 내게는 정말이지 그토록 위대하다는 그의 작품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SF는 물론 좋아하고, 19세기 영국 소설도 좋아하고, 웰스의 작품을 토대로 한 이후의 유산들 주로 영화 도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의 화자들이 내뱉는 19세기 영국 지성인스러운 '통찰''경악'의 언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곰팡내는 어쩐지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낭만에 푹 젖은 채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였다면 즐길 수 있었으련만. 냉정하면서도 인간다운 품성을 지닌 이상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면서도 예상에서 조금만 벗어난 사태가 벌어지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충격과 당황에서 우러나온 무분별한 행동을 인간다운 감정의 발현이라며 포장하는가 하면, 섣부른 가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발견에 의기양양해하는 태도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이것이 내 불성실한 독서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웰스를 (한때는 지루하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더없이 좋아하는 H.P. 러브크래프트처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으로서는 웰스 SF의 매력을 말하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스티븐 백스터의 타임십을 열렬히 추천하기란 다소 난처한 일이다. 이 책은 웰스의 타임머신에 대한 속편이다. 그것도 느슨한 속편이 아니라 전편과 딱 달라붙어 있는 속편이다. 이야기는 웰스의 타임머신마지막 장면을 이어받아 시작하며, 주인공 시간여행자는 종종 전편에 등장했던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자세한 설명 없이 환기한다. 관련 사항에 관한 주석도 없다. , 이 책은 웰스의 타임머신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추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떻게든 읽히고 싶다면 타임머신까지 함께 권하며 읽는 순서를 알려줘야 할 판이다. 게다가 속편이란, 특히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이어받아 다른 작가가 쓴 속편이란, 흔히 열등한 복제물 취급을 받는 경향도 있지 않던가? 더구나 타임십한국어판의 분량은 7백 쪽을 넘어간다. 편집이 헐겁지도 않다. 정리하자면고전 명작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기는 하지만 나 자신은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내심 고리타분하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는 19세기 SF를 바탕으로 하여 100년 후에 원작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작가가 쓴 7백 쪽이 넘는 속편을 권한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 책을 추천해야만 한다. 정확히 위와 같은 어려움 탓에 타임십을 꺼리는 잠재 독자가 나 말고 또 있을 게 아닌가. 그런 독자들에게 말하노니, 타임십에는 굳이 타임머신부터 찾아 읽고 사전지식을 쌓은 다음 책장을 펴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른다. 하나의 기술을 토대로 사고를 확장하고 확장하고 확장하고 확장한 끝에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사는 세계와 우주와 존재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바뀌는 고전적 SF의 장대함(감히 SF의 정수라고까지 단정하고 싶어지는)이 전편을 아우르는 거대 서사를 책임진다. 그 아래로는 웰스 이후 100년 동안 쌓인 숱한 SF의 소재며 하위 장르가 무리 없이 섞여들며 디테일을 빼곡하게 채워넣는다. 외계지성체와의 근접조우, 다중 우주, 대체 역사, 스팀펑크, 공룡 SF, 사이버펑크, 핵전쟁 이후의 디스토피아, 아서 C. 클라크 스타일의 종 변화와 우주 확장 등이 여기에 다 있다. 어느 하나 건성으로 다뤄지지 않으면서도 또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매달리다가 전체 흐름을 말아먹는 무리수도 두지 않는다. 그야말로 균형 잡힌 종합선물세트다.

 

 『타임머신을 읽을 때는 영 거북스러웠던 시간여행자의 목소리도 여기서는 별 불편 없이 받아들일 만하다. 백스터가 웰스를 무시한 채 함부로 시간여행자의 성격을 바꾸었기 때문은 아니다. 역자 해설에서는 "무엇보다 독자들이 가장 큰 위화감을 느낄 만한 부분은 시간여행자의 성격일 것이다. 웰스가 그려냈던 19세기의 논리적인 전인은 온데간데없고, 나이와 탈모를 고민하며 자존심과 편견에 얽매여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슬픈 딜레탕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그저 관찰자일 뿐이었던 타임머신의 시간여행자""실수투성이이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수정하려 노력"하는 인물로 바뀌었다고 지적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타임머신에서부터 시간여행자는 미래 사회에 대해 성급한 가설을 세우기도 하고, 성격과 외모와 주거 환경을 근거로 엘로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한편, 몰록에게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며 폭력을 행사하고 거기에서 내심 쾌감까지 느끼는 '19세기 영국 지성인'이 아니었던가. 웰스의 문체와 백스터의 문체를 비교할 자료나 역량은 없지만, 적어도 성격을 두고 보면 백스터가 묘사한 시간여행자 역시 (과연 이 작품을 공식 속편으로 인정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웰스의 인물 조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시간여행자가 타임머신을 읽을 때보다 훨씬 견딜 만한 인물이 되었다면, 그것은 타임십이 펼쳐내는 사건의 규모와 과격함이 한결 장대한 덕분이다. 이 작품에서 시간여행자가 맞닥뜨리는 세계의 변화는 정신이 한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관적인 여행 시간도 최소한 타임머신의 수백 배에 달한다. (작가가 정신만 차리고 있다면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수정하고 변화하는 인물로 거듭나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도 19세기 영국인이라는 뿌리를 망각하지는 않으나, 또한 무한한 우주를 본 존재로서 자신이 영원한 이방인임을 이해하고 스스로 미래를 향해 발을 딛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지금 선 자리를 돌아보되 가변적인 세상을 직시한다. 흡사 우주와 변화를 다루는 SF 안에 선 인간의 자리를 대변하는 듯하지 않은지. 그는 인류의 끝을 보고 돌아온 다음에도 시선이 동시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래서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알레고리로만 소모될 위험도 갖추고 있던) 웰스의 시간여행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다. 실로 거인의 어깨를 타고 올라 청출어람을 이룬 속편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숱한 명장면 중에서도 시간여행자와 네보깁펠이 새로운 미래의 인류를 향해 도약하는 장면을 거론하고 싶다. 타임머신 안에 탄 관찰자가 타임머신 밖에서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타임머신에도 있었다. 다만 그때 웰스는 시간의 풍화 작용 속에서 재빨리 인류 문명의 흔적을 지운 다음 자연이나 지구, 인류라는 종의 최종 단계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는 인류 이후 우주와 시간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 인류가 맞이하게 될 세계의 디스토피아적 황량함을 통해 지금의 인류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쪽에 가까웠다. 반면 백스터의 눈은 (100년 동안 쌓인 과학 소설의 전통에 의지하면서) 좀 더 오랫동안 인류 문명의 풍경 변화에 머문다. 도시가 커지고, 융성하고, 확장되고, 원래의 자리는 허물어진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지구 위를 뒤덮고, 우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든다. 아서 C. 클라크의 비전을 받들어 궤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궤도 식민지를 건설하고, 인류가 하늘로 올라가고, 식민지 수가 늘어나고, 지구는 점차 메말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인류는 급기야…….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천천히 쌓일 변화를 타임머신의 빨리감기 기능을 통해 바라보는 이 대목에 이르러, 문득 이것이야말로 나를 SF로 끌어들인 즐거움이었음을 자각했다.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다. 섬세한 감정 묘사가 아니다. 캐릭터의 개성도 아니고 동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도 아니고 도덕적 교훈도 아니다. 오직 전제, 추론, 확장, 객관적 사실의 단계적 나열뿐. 그 사고의 명징함이 발 딛고 사는 세계의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 변화는 단지 추상적인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실체로 다가온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고 관점이 바뀐다. 불현듯, 관점이 달라졌다는 말은 인류가 달라졌다는 의미임을 실감한다. 독자인 나조차 인류 구성원의 하나로서 그 순간만큼은 마치 다른 존재로 변이한 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그렇게, 타임십은 나를 SF를 읽기 시작한 순간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기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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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아노 2017-12-0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쓸까요..
저 같은 글재주, 어휘력이 부족한 사람은, 작품을 보고선 여운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답답하곤 하는데, 남에게 기대더라도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ㅎㅎ;
혹시 다른 멋진 SF 소설 추천해주실만한 게 없을까요..?
현재 별의 계승자와, 유년기의 끝은 가지고 있어요.


oldies 2017-12-08 13:27   좋아요 0 | URL
4년 전에 쓴 글이고 이제는 감상문 안 쓴 지도 꽤 됐는데 댓글이 달려서 부끄럽네요.

좋은 SF 소설은 세상에 지나치게 많고, 요즘은 한국 출판 시장에도 너무 많아서 막연하네요. 그래도 [타임십], [별의 계승자]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로버트 J. 소여의 [공룡과 춤을]은 어떠실지요.

미누아노 2017-12-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를 보니깐, 재밌을것 같네요~@@
추천 정말 감사드려요. 꼭 보도록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계속 리뷰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빅 타임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3
프리츠 라이버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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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공간 너머의 어딘가, 거미들뱀들이라고 불리는 무리가 우주의 패권을 놓고 변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변화전쟁이란 시간 여행을 통해 역사를 바꿈으로써 우위를 점해 나가는 전쟁, 다시 말해 적보다 아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현재'의 근원이 되는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변질시키는 행위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이다. (빅 타임의 세계관에서는 시간여행에 따른 평행우주의 형성은 배제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역설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하지만, 이 물음은 작품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거미들뱀들은 온갖 시대, 온갖 장소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스카웃하여 그들을 생명선 밖으로 빼낸 다음, 다시 온갖 시대, 온갖 장소로 파견해 전투를 치르도록 한다. 대체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거미들뱀들에 속한 이들조차 알지 못하며, 그들은 그저 운명의 장난에 희롱당하듯 시간의 바깥으로 끌려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빅 타임의 이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세계 속 시공간의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느 장소를 무대로 펼쳐진다. 싸움에 지친 거미들측의 전투원들이 허공을 건너 도착하면 아름다운 유흥업 종사자들이 피로를 달래주는, 떠들썩한 술집이자 공연장이며 병원이자 쉼터인 그곳에서…….

 

 여기서 경고 : 시공간 안팎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장대한 스케일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기대하지 말 것. 빅 타임의 규모는 그간 우리나라에 소개된 장편 SF 소설 중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등장인물은 한줌, 공간은 하나, 시간도 장면 사이에 긴 생략 없이 거의 한 호흡만으로 끝까지 간다. (시공간 너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는데 시공간의 규모를 따지고 있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다.) 평소 이런 이야기를 두고 무작정 '연극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데에는 난감해 하는 편이지만, 빅 타임에 관해서 만큼은 아무래도 "연극적"이라는 수사를 쓰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작가부터가 무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지 않던가. "장소허공을 청중으로 하는 정식 원형극장 형태였다." 이야기는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소품의 이동을 중심으로 엮여나가며, 가장 극적인 전환은 대체로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인간과 신체 구조가 다른 몇몇 외계 생명체의 움직임을 제외하면 딱히 무대 위에서 구현하기 어려울 법한 '스펙터클'도 없다. (물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인 만큼 연극으로 옮겨도 잃을 것이 없겠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므로 작은 소동극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시기를.

 

 그리고 빅 타임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소동극으로서 소임을 다한다. 우선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흡사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 뚜렷한 목표를 갖고 내달리는 초인들의 박력이 넘실거리는 파괴된 사나이타이거, 타이거대신 방향을 잃은 미치광이들로 득시글거리는 코미디 컴퓨터 커넥션을 떠올릴 것. 왜 아니겠는가? 멀쩡히 살다가 원인 모를 힘에 의해 시공간 밖으로 내쳐진 다음 온 세상을 떠돌며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영원한 변화를 겪어야만 하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으니. 영국 시인의 시구가 날아다니고, 독일어가 횡행하고, 크레타인이 여신을 찾으며, 이형의 외계인이 촉수를 내뻗는다. 이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난투극을 벌이고, 유흥업 종사자들과 시시덕거리며, 뱀들을 향해, 그리고 세계를 향해 분노한다. 거기에 불안정한 외부의 소식이 도착하고, 뜻밖의 무기가 등장하고, 추론과 가설, 연설과 맞연설, 편가르기, 의심, 난투극, 속임수가 난무한다. 갑자기 세계의 의미가 뒤바뀌기도 하고, 시공간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진지하게 다루자면 한없이 진지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프리츠 라이버는 그보다는 똘똘하고 세계에 환상을 품지 않은 유흥업 종사자그레타 포제인을 화자로 내세워 모두로부터 살짝 거리를 둔 채 이 난장판의 흐름을 즐기는 편을 택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전 우주가 개그에만 몰두하지도 않고, 컴퓨터 커넥션처럼 작가부터 무책임하게 막 나가지도 않는, 적당히 발광하면서도 결국 할 이야기만 깔끔히 맺고 빙긋 웃으며 얌전히 물러나는, 그야말로 한바탕 소동극이다. 살짝 아쉬움이 있다면 대체 이 변화전쟁이라는 게 다 뭐하자는 짓거리인지 풀이하는 대목이 결말에 이르러 갑작스레 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콸콸 쏟아져버린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빅 타임에 휘말린 한 존재의 가설일 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겠다. 설령 그 가설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머나먼 훗날의 일이니(다시 한 번 시공간 너머의 일에 대해 시간 개념을 쓰고 있군), 지금은 그저 쇼나 계속할 밖에.

 

* * *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에 관한 첫 감상문인 만큼 잠깐 출판사와 책에 관해서도 언급해두는 편이 좋겠다. 불새 출판사는 자신이 읽고 싶은 SF 소설이 출간되지 않는 사실을 개탄하다 못한 어느 SF 팬이 설립한 출판사다. 대표는 따로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번역과 편집과 디자인과 영업을 모두 혼자 하는 가내수공업형 1인 출판사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책이 나오기 전에 이 사실이 미리 알려진 덕분에 SF 팬들의 관심과 응원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출판업이란 잠재 독자들의 관심과 응원만으로 되는 법은 아니라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로서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만 책을 받아 판매하고 있는 형편이다. 네이버 카페와 트위터, 알라딘을 제외하면 딱히 홍보 루트도 없으니, 정말이지 한국 시장에서 SF 팬들의 입소문만으로도 SF 번역서 출판이라는 일이 유지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실험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책이 나왔는데…… 아마추어가 혼자 만든 동인지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품질이고, 책으로 먹고사는 출판업자가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우선 책의 판형이나 종이질, 표지 디자인, 활자 배치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이 출판사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어느 지인이 빅 타임을 슬쩍 훑어보더니 책이 이렇게도 나오느냐면서 다들 책을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전문 출판업자의 눈에는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쓸데없이 독자의 눈길을 끌고자 난리법석을 떨지 않는 표지도 마음에 들고, 휴대하기 적절한 판형도 마음에 들며, 쓸데없이 양장본으로 가지 않은 것도 기쁘고(애초에 고려 사항이 아니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이 낭비 없이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면서도 가독성을 희생하지 않은 활자 배치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건 누군가의 눈길을 끌고 존재를 뽐내는 데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독자가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인, '읽기 위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표지, 멋지지 않은가.)

 

 문제는 번역…… 이라기보다도 교열이라고 해야겠다. 역자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사 운영 주체인 안태민은 네이버 카페를 통해 자신이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단지 읽고 싶은 책을 한국어로 소개하고 싶은 열망에 찬 아마추어 번역가임을 밝히고 있다. 내 생각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번역이 어디서 면허 따서 하는 일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원문과 대조해보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문장을 보면 결코 대충 말만 통하면 된다며 건성으로 옮기지도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관심법을 지나치게 적용했다는 핀잔을 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경험이 많지 않은 번역가로서 겸손하게 원문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인 탓에 좀 더 재량을 발휘하여 자유롭게 한국어 문장을 구사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영어를 한국어 문장으로 옮길 때는 (원문이 그렇지 않더라도) 문맥에 따라 주어를 생략하거나 지시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을 명확히 밝혀주는 편이 더 적절할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믿음을 밀고 나가지 못한 기색이 엿보인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원문의 의미를 재단하며 첨삭을 가함으로써 작품을 망치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며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다.

 

 어쨌든, 일단 빅 타임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뻑뻑한 문장에 약간 주춤했지만(더구나 도입부는 낯선 세계를 소개하는 대목이라 더욱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슬슬 이게 대체 뭐하는 이야기인지를 파악한 후로는 딱히 번역 때문에 독서를 방해받았던 적은 없음을 밝혀둔다. 이보다 훨씬 인력 많고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낸 책을 읽다가도 도저히 문장을 읽어 넘길 수 없어 독서를 중단했던 적이 있음을 돌이켜 볼 때, 이만하면 적어도 번역이 마음에 걸려 추천하지 못할 책은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번역과 편집과 디자인과 영업을 모두 맡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가 많은 오탈자와 비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석이 빠진 부분도 있으니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첫 출간작 세 권에 해당하는 달을 판 사나이, 정거장, 빅 타임을 구매하신 분들께서는 필히 네이버에 개설된 도서출판 불새 공식 카페(http://cafe.naver.com/firebirdsf)에 가서 정오표를 확인하실 것.

 

 "책으로 먹고사는 출판업자가 만든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라고 말한 부분은 이상과 같은데(그로 인해 별점을 하나 깎았음을 밝혀둔다), 단언컨대 이건 한 사람이 더 열심히 꼼꼼히 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또한 따로 교정자를 모집해서 교정을 부탁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물론 오탈자와 비문은 고칠 수 있겠지만 통상 교정자들이란 문장 자체를 다듬는 데에까지 관여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원문을 대조할 수 있고 한국어를 다루는 데에 능하며 냉정한 편집자가 필요하지 싶은데……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서 제 살 깎아 먹기 식으로 진행했기에 나올 수 있었다는 책을 두고 속 편하게 '편집자 하나 더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개 독자로서는 일단 그저 이렇듯 책을 사서 읽고 감상문을 쓰고 응원하는 수밖에.

 

* * *

 

 쓰고 보니 워낙 출판사를 변호하는 어조라서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불새 출판사 관계자와는 일면식도 없으며 출판업자도 아닌, 그저 좋은 SF를 읽고 싶은(그러나 스스로 출판사를 차릴 엄두는 내지 못하는) 독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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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 도일을 읽는 밤 -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
마이클 더다 지음, 김용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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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오해를 방지하도록 하자.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이라는 한국어판 부제나 "The Whole Art of Storytelling"이라는 영문판 부제가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셜록 홈즈 소설에 나타난 아서 코난 도일의 글쓰기 방식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책이 아니다. 코난 도일이 어떤 유형의 문장을 즐겨 쓰고 어떤 방식으로 플롯을 구축했는지에 관한 세밀한 탐구는 여기 들어있지 않다.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나 오슨 스콧 카드의 『당신도 해리 포터를 쓸 수 있다: 판타지와 SF 창작을 위한 모든 것』과 같은 책을 기대했다면 기대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어판 부제가 굳이 "셜록 홈즈로 보는"이라는 군더더기 표현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이 홈즈 시리즈에 할애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홈즈 시리즈에 관한 책이 아니라 코난 도일에 관한 책이다. 홈즈 시리즈에 관한 철두철미한 분석이나 비평, 감상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며, 홈즈 시리즈 외에도 코난 도일이 남긴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많은 저작들이 적지 않은 지면을 들여 거론된다. 따라서 이것이 또 하나의 '셜록 홈즈 연구서'이기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반대로 자신이 홈즈 시리즈의 내용을 샅샅이 기억할 정도의 열렬한 팬은 아니라고 해서 이 책 읽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독자들에게까지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관한 책이란 말인가? 이 책은 독자로서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자라기 이전, 아직 책장을 펴지도 않은 책이 인터넷의 과잉 정보에 의해 타락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향한 예감에 전율하며 책장을 넘기고, 그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비슷한 기분을 느끼도록 이끌어 줄 또 다른 책을 찾아 나서는 모험에 마음껏 정신을 내맡길 수 있었던 시절의 기쁨과 흥분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이 책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러한 기쁨과 흥분이 고색창연한 늙다리 독자의 옛 회고담 속에 파묻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허구의 이야기가 주는 쾌락에 정신 못 차리고 살아본 적이 있는 독자, 나이가 들어 이제는 놓쳐버린 그 쾌락을 종종 그리워하는 독자,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런 독자이기만 하다면,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 마이클 더다는 처음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통해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와 만났던 순간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독서 편력을 차근차근 소개한다. 이 대목에서는 홈즈의 매력에 관해서도 물론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홈즈 시리즈와 더불어 소개되는 다른 작품들이 결코 곁다리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중요하겠다. 홈즈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로잡았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홈즈 시리즈의 명성 때문에 부당하게 가려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빼어난 코난 도일의 저작을 소개하는 더다의 목소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짠! 이런 건 몰랐지!'하며 들이미는 소년의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공정하기까지 하다. 그는 팬심에 눈이 멀어 몇몇 작품들이 지닌 단점을 모른 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점에 얽매여 장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내가 읽은 최고의 공포 소설 중 하나인 「하늘의 공포」가 거론되어 특히 기뻤다. 이 멋진 소설은 행복한책읽기에서 출간한 코난 도일 선집 『마라코트 심해』에 수록돼 있는데, 안타깝게도 어찌나 안 팔렸는지 아직도 절판되지 않고 인터넷 서점에서 쉬이 구할 수 있다. 공포 소설 애호가들, 특히 H. P. 러브크래프트 팬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부분만으로도 청소년을 위한 훌륭한 독서 목록을 마련할 수 있다. ① 그 목록이 우리나라의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는 점, ② 그 목록에 수록된 작품 상당수가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모쪼록 이 책을 읽은 출판업자 중 누군가가 나서주길 바랄 따름이다. 셜록 홈즈 중복 출간할 에너지로 다른 책 좀 내주세요.
 
 하지만 어느덧 독서삼매경이라는 표현과는 멀어져 버린 나이의 독자들에게 더 감명 깊을 만한 부분은 이 책의 후반부다. 많은 독자가 그러하듯 더다 역시 나이가 들면서 홈즈 시리즈를 애들이나 읽는 책으로 여기고 멀리하며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접어든다. 바로 이때, 거꾸로 홈즈 시리즈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홈즈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바라보았을 때 오히려 도처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홈즈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이 대목은 감동을 넘어서 질투를 유발할 정도다. 어린 시절의 열정과 애정이 한때의 열광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 전체로 확장되는 기쁨을 누리다니.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더다만이 특별한 경우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들로 더욱 넓혀진다. 더다는 홈즈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나 패스티쉬 작품들을 경유하여 마침내 "베이커 가 특공대"라는 이름의 비공식 단체에 도착한다. 베이커 가 특공대는 어린 시절 홈즈의 세례를 받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더욱 커다란 세상을 무대로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줄 준비가 된 정신 나간 작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의 자세한 활동 사항을 미리 폭로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장성한 어제의 용사들이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열의를 품은 채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더욱 사랑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살아남은 덕후들의 연대라고나 할까.
 
 결국 더다는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 책 앞에서 불태운 그런 열정이 세월 속에서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대하고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걸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정력 운운하며 요약한다면 흔한 자기계발서의 내용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책이 담은 이야기 앞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책장을 넘기고 게걸스럽게 다른 책을 찾아 헤매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러한 기분을 과거형으로 말하게 된 사람에게라면, 『코난 도일을 읽는 밤-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은 작게는 위로가, 크게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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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명예의 조각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1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마침내 출간된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몸살과 더위에 한꺼번에 신음하며 새벽 내내 땀과 열에 전 채로 읽었다. 그래선지 처음 100페이지 동안은 짝짜꿍 연애질하는 아랄이나 코델리아보다도 파괴총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두바우어의 심정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랄과 코델리아도 육체적으로 지쳐가니까 몰입이 더 커졌고.

 

 하여간에 책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남녀 주인공을 만나게 하더니, 다짜고짜 둘을 생존 하이킹으로 밀어 넣는다.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얼른 사랑에나 빠져버렷!" 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존 투쟁을 빙자한 데이트 다음에는 가벼운 전투와 상황 설명이 이어지고, 다시 로맨스의 기운을 피워올리나 싶더니 뜻밖의 전투, 그리고 가차 없이 페이드 아웃-페이드 인, 바로 또 느닷없이 (별로 머리 쓸 것 없는) 전술 묘사, (15세 관람가를 지키는) 고문 장면…… 하이고야 숨 가빠라. 그래, 이런 시리즈였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즉각 떠오르는, '우주를 배경으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모험 활극'의 이미지에 더없이 충실한 정진정명 오락물의 자세. 댄 시먼스의 웅장함도, 이언 M. 뱅크스의 세밀함도 없이, 그냥 시종일관 캐릭터 톡톡 튀잖아! 애들 하는 짓이 재밌잖아! 이런 이야기 듣고 싶잖아! 라고 밀고 나간다. 그래서 예전에 행복한책읽기에서 소개했을 때는 S!f를 원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볼멘소리도 들었더랬지. 나야 뭐, 그렇게까지 순수한 SF 독자가 아닌지라 그냥 만족이다. 딱히 SF로서라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늘 천대받곤 하는 모험 소설 알렉상드르 뒤마나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같은 의 맥락 안에서 즐겁게 읽었고, 앞으로도 즐겁게 따라갈 참이다.

 

 그 시원시원한 모험 소설다운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게, 아무리 아랄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베타인 코델리아가 정치적 모략이 횡행하는 군주제 전사 우대 국가 바라야에 가서 살겠다고 마음먹기가 과연 그렇게 쉬울까, 그 정도로 강렬한 애정을 이 작가가 설득력 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야기꾼의 소설인지라 그걸 플롯으로 해결해버리더라. 두 연인의 심리를 세밀히 다뤄나가는 대신, 두 사람이 여러 번 물리적인 이별을 겪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코델리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지긋지긋한 고난에 처하도록 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웃기게도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정의 밀도가 높아지는 대목도 아랄-코델리아의 관계 묘사가 아니라 코델리아가 집에 돌아가 핍박당하는 부분이다. 이것도 정신병원 배경 공포 스릴러에 툭하면 나오는 기본 논리에 의존하고 있지만 "난 안 미쳤어!" "네네, 일단 진정하시고……" "안 미쳤다니까!" "지금 환자분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요. 먼저 광증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봅시다." 읽는 사람 돌아버리게 하는 데에 여전히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별다른 야심 품지 않고 효율적인 길을 찾아 쓱쓱 써내려간 기분이 난다.

 

 표지에 관해서 말들이 많은데, 난 예나 지금이나 불만 없다.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서 우주를 배경으로 날아다니는 장중한 우주선 그림만 넣으라는 법도 없고, 까놓고 말해서 이 시리즈가 그렇게 막 무게 잡는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보자면 라이트 노벨 표지여도 할 말 없을 만한데 말이지. 그나저나 실제 책을 쥐어보니, 뭐랄까…… 그 표지 디자인을 포함해서 '이 책은 골수 SF 독자들만 읽으라고 만든 책이 전혀 아님'이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이거 말하려니까 아무래도 웃기지만, 표지 질감부터가 그렇다. 낭창낭창 휘는 종이 때문인지 가볍게 썼으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하는 기분이 있다. 게다가 맨 앞의 보르코시건 가문 사람들 소개나 (어째 좀 성의 없는) 등장인물 소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졸드가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까지, 모두 'SF 모른다고 해서 해치지 않아요. 함께 읽어요.' 하고 생긋생긋 웃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건 SF 안 내 본 출판사들이 SF를 내면서도 '우리가 내는 건 흔해 빠진 공상과학소설이 아님'이라고 무게 잡는 거랑은 다르다. 그냥 정말로 더 넓은 독자를 보고 있다는 인상. 실제로 작품 성격도 그러니만큼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계속 확신을 갖고 다양한 독자들에게 많이 팔아서 전권을 끝까지 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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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밟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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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랫동안 미야베 미유키를 멀리했다. 갑자기 그의 소설이 싫어져 거부했던 건 아니다. 다만 북스피어를 필두로 여러 출판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야베의 작품을 따라잡기가 힘에 부쳤을 뿐이다. 한때는 모든 작품을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정도로 좋아했건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말로 전작이 나올 기세로 신간이 쏟아지자 오히려 지갑이 다물어졌다. 더구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마도 이름 없는 독이후가 아닌가 싶은데 제자리걸음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좀처럼 기복이 없는 작가였고, 어느 하나 재미있게 읽지 않은 작품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런 꾸준함이 독으로 돌아와 어느덧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작가'라는 인상이 생겨버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인생이 느긋하고 여유로워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은 뭐든 다 읽을 만한 시간과 돈이 있었더라면 계속 읽었을 테지만, 그렇게까지 안락한 인생도 아니었다. 결국 괴이였는지 흔들리는 바위였는지를 끝으로 신간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그게 2008년에 나온 책들이었으니까, 어느덧 5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5년만에 신간 그림자밟기를 통해 다시 만난 미야베가 무언가 새로운 기쁨을 주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다. 북스피어의 대표인 마포 김 사장은 권말에 덧붙인 애정 어린 글을 통해 미야베 에도물의 변화에 관해 말해주고 있지만, 그의 글을 그만큼 가까이에서 꾸준히 따라오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을 검토할 만한 경험이 없다. 나는 다만 기억 속의 미야베를 돌이켜 보며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따름이다.

 

 기억 속의 미야베는 늘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작가였다. 언성을 높이거나 호들갑 떨 줄을 몰랐고, 좀 더 몰아쳐도 되지 않을까 싶은 부분에서도 먼저 사건의 난처한 정황과 인물의 어지러운 마음을 헤아려두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간의 인상처럼 마냥 친절하거나 상냥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못마땅한 일을 보면 '그래요? 그럼 별수 없지요.' 하면서 물러나는 대신 '그러면 못써요.'라며 따끔하게 꾸지람하는 쪽에 가까웠다. 요컨대 이쪽이 본문을 다하고 거리낌이 없으면 대하기 편할 테지만, 이쪽에서 캥기는 게 있으면 마주하기 두려울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치 작가와 직접 친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쓰고 있는데, 일단은 서술자가 캐릭터와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다는 이야기지만, 아마 실제 품성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림자밟기의 미야베는 그런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도 외모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두고 농담으로 흡혈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필치를 유지하는 작가라면 흡혈작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미야베는 어린 시절에도 나이가 어리고 체구가 작으며 지식이 지금만 못했을 뿐, 성격은 지금과 별다를 게 없고 딱 봐도 영특함이 우러나오는, 예컨대 바쿠치간에 나오는 오미요 같은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그림자밟기는 미야베가 기왕에 써왔던 에도 배경 단편집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요괴나 민간 전승이 등장하는 괴담을 다루고 있다. 물론 귀신이 불쑥 튀어나와 내 다리 내놓으라고 하는 식의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저마다 사연이 있고, 달래주고 싶은 아픔이 있으며, 고통을 알고, 두려움을 품은 사람과 요괴의 이야기라는 점은 말해 봐야 입만 아플테지. 신령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여 요괴의 아픔을 덜어주는 이야기, 신령의 도움으로 요괴를 물리치는 이야기, 인간이 요괴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 요괴가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 등, 이 분야에서 익숙한 구도를 하나씩 짚어주는데, 어느 하나 빠지는 작품도 없어서 실로 모범적인 괴담집이라 할 만하다.

 

 단편집 감상문이 종종 그러하듯 한 편 한 편 일일이 감상을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다만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이라면 여섯 편의 단편 모두 '안 되는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되도록 해결하고자 노력해 볼 테고, 거기에서 인정이라는 것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인정만으로는 안 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이미 늦어버린 것,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 피할 수 없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 있다. 물론 이것도 이전의 미야베 소설에서 종종 느꼈던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 이 문제를 가장 대놓고 다룬 작품은 역시 이름 없는 독이 아닐까?) 그림자밟기에서는 유독 그러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내밀어 보여준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작가가 전보다 비관적이라거나 염세적으로 변했다고 할 생각은 없고, 다만 '좀 더 균형을 잘 맞출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해결과 만족, 기쁨 안에 늘 잊어버릴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으니 감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울림이 크고 시야를 넓혀주는 기분이다. 과연, 이런 걸 할 수 있으니까 늘 믿음직한 작가가 되는 거겠지.

 

 끝으로, 다섯 번째 단편 반바 빙의만은 따로 떼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은 정말로 무섭다. 나 어린 시절 유행했던 공포체험 쉿!유의, 작정하고 펀치 라인을 날리는 괴담집이라면 또 모를까, 공포 '소설'을 읽다가 이만한 무서움을 느낀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열대야처럼 끈적끈적 불쾌하게 달라붙으며 스멀스멀 밀려오는 미지의 공포라든가, 인간 사회에서 우러나는 아픔과 고통에서 우러나는 공포라든가 하는 거창한 '문학적' 포장 필요 없이, 진짜로 그냥 그 광경이 자꾸만 생각나서 잘 때 불을 못 끄게 하는, 어린 시절에는 참으로 익숙했던 그 무서움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분위기로만 먹고 들어가면서 충격 효과로 일관하는 소설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밀도나 성찰은 다른 단편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할 거 다 하면서도 무대 장치와 시선, 인물의 성격과 어조를 통해 그와 같은 무서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건 어떤 면에서는 화차이유같은 대작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걸 해낸 작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림자밟기는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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