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도일을 읽는 밤 -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
마이클 더다 지음, 김용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먼저 오해를 방지하도록 하자.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이라는 한국어판 부제나 "The Whole Art of Storytelling"이라는 영문판 부제가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셜록 홈즈 소설에 나타난 아서 코난 도일의 글쓰기 방식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책이 아니다. 코난 도일이 어떤 유형의 문장을 즐겨 쓰고 어떤 방식으로 플롯을 구축했는지에 관한 세밀한 탐구는 여기 들어있지 않다.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나 오슨 스콧 카드의 『당신도 해리 포터를 쓸 수 있다: 판타지와 SF 창작을 위한 모든 것』과 같은 책을 기대했다면 기대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어판 부제가 굳이 "셜록 홈즈로 보는"이라는 군더더기 표현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이 홈즈 시리즈에 할애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홈즈 시리즈에 관한 책이 아니라 코난 도일에 관한 책이다. 홈즈 시리즈에 관한 철두철미한 분석이나 비평, 감상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며, 홈즈 시리즈 외에도 코난 도일이 남긴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많은 저작들이 적지 않은 지면을 들여 거론된다. 따라서 이것이 또 하나의 '셜록 홈즈 연구서'이기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반대로 자신이 홈즈 시리즈의 내용을 샅샅이 기억할 정도의 열렬한 팬은 아니라고 해서 이 책 읽기를 주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독자들에게까지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관한 책이란 말인가? 이 책은 독자로서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자라기 이전, 아직 책장을 펴지도 않은 책이 인터넷의 과잉 정보에 의해 타락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향한 예감에 전율하며 책장을 넘기고, 그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비슷한 기분을 느끼도록 이끌어 줄 또 다른 책을 찾아 나서는 모험에 마음껏 정신을 내맡길 수 있었던 시절의 기쁨과 흥분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이 책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러한 기쁨과 흥분이 고색창연한 늙다리 독자의 옛 회고담 속에 파묻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허구의 이야기가 주는 쾌락에 정신 못 차리고 살아본 적이 있는 독자, 나이가 들어 이제는 놓쳐버린 그 쾌락을 종종 그리워하는 독자,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런 독자이기만 하다면,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 마이클 더다는 처음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통해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와 만났던 순간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독서 편력을 차근차근 소개한다. 이 대목에서는 홈즈의 매력에 관해서도 물론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홈즈 시리즈와 더불어 소개되는 다른 작품들이 결코 곁다리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중요하겠다. 홈즈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로잡았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홈즈 시리즈의 명성 때문에 부당하게 가려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빼어난 코난 도일의 저작을 소개하는 더다의 목소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짠! 이런 건 몰랐지!'하며 들이미는 소년의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공정하기까지 하다. 그는 팬심에 눈이 멀어 몇몇 작품들이 지닌 단점을 모른 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점에 얽매여 장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내가 읽은 최고의 공포 소설 중 하나인 「하늘의 공포」가 거론되어 특히 기뻤다. 이 멋진 소설은 행복한책읽기에서 출간한 코난 도일 선집 『마라코트 심해』에 수록돼 있는데, 안타깝게도 어찌나 안 팔렸는지 아직도 절판되지 않고 인터넷 서점에서 쉬이 구할 수 있다. 공포 소설 애호가들, 특히 H. P. 러브크래프트 팬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부분만으로도 청소년을 위한 훌륭한 독서 목록을 마련할 수 있다. ① 그 목록이 우리나라의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는 점, ② 그 목록에 수록된 작품 상당수가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모쪼록 이 책을 읽은 출판업자 중 누군가가 나서주길 바랄 따름이다. 셜록 홈즈 중복 출간할 에너지로 다른 책 좀 내주세요.
 
 하지만 어느덧 독서삼매경이라는 표현과는 멀어져 버린 나이의 독자들에게 더 감명 깊을 만한 부분은 이 책의 후반부다. 많은 독자가 그러하듯 더다 역시 나이가 들면서 홈즈 시리즈를 애들이나 읽는 책으로 여기고 멀리하며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접어든다. 바로 이때, 거꾸로 홈즈 시리즈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홈즈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바라보았을 때 오히려 도처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홈즈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이 대목은 감동을 넘어서 질투를 유발할 정도다. 어린 시절의 열정과 애정이 한때의 열광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 전체로 확장되는 기쁨을 누리다니.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더다만이 특별한 경우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들로 더욱 넓혀진다. 더다는 홈즈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나 패스티쉬 작품들을 경유하여 마침내 "베이커 가 특공대"라는 이름의 비공식 단체에 도착한다. 베이커 가 특공대는 어린 시절 홈즈의 세례를 받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더욱 커다란 세상을 무대로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줄 준비가 된 정신 나간 작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의 자세한 활동 사항을 미리 폭로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장성한 어제의 용사들이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열의를 품은 채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더욱 사랑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살아남은 덕후들의 연대라고나 할까.
 
 결국 더다는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 책 앞에서 불태운 그런 열정이 세월 속에서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대하고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걸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정력 운운하며 요약한다면 흔한 자기계발서의 내용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책이 담은 이야기 앞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책장을 넘기고 게걸스럽게 다른 책을 찾아 헤매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러한 기분을 과거형으로 말하게 된 사람에게라면, 『코난 도일을 읽는 밤-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은 작게는 위로가, 크게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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