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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명예의 조각들 ㅣ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1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마침내 출간된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몸살과 더위에 한꺼번에 신음하며 새벽 내내 땀과 열에 전 채로 읽었다. 그래선지 처음 100페이지 동안은 짝짜꿍 연애질하는 아랄이나 코델리아보다도 파괴총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두바우어의 심정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랄과 코델리아도 육체적으로 지쳐가니까 몰입이 더 커졌고.
하여간에 책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남녀 주인공을 만나게 하더니, 다짜고짜 둘을 생존 하이킹으로 밀어 넣는다.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얼른 사랑에나 빠져버렷!" 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존 투쟁을 빙자한 데이트 다음에는 가벼운 전투와 상황 설명이 이어지고, 다시 로맨스의 기운을 피워올리나 싶더니 뜻밖의 전투, 그리고 가차 없이 페이드 아웃-페이드 인, 바로 또 느닷없이 (별로 머리 쓸 것 없는) 전술 묘사, (15세 관람가를 지키는) 고문 장면…… 하이고야 숨 가빠라. 그래, 이런 시리즈였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즉각 떠오르는, '우주를 배경으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모험 활극'의 이미지에 더없이 충실한 정진정명 오락물의 자세. 댄 시먼스의 웅장함도, 이언 M. 뱅크스의 세밀함도 없이, 그냥 시종일관 캐릭터 톡톡 튀잖아! 애들 하는 짓이 재밌잖아! 이런 이야기 듣고 싶잖아! 라고 밀고 나간다. 그래서 예전에 행복한책읽기에서 소개했을 때는 S!f를 원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볼멘소리도 들었더랬지. 나야 뭐, 그렇게까지 순수한 SF 독자가 아닌지라 그냥 만족이다. 딱히 SF로서라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늘 천대받곤 하는 모험 소설 ─ 알렉상드르 뒤마나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같은 ─ 의 맥락 안에서 즐겁게 읽었고, 앞으로도 즐겁게 따라갈 참이다.
그 시원시원한 모험 소설다운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게, 아무리 아랄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베타인 코델리아가 정치적 모략이 횡행하는 군주제 전사 우대 국가 바라야에 가서 살겠다고 마음먹기가 과연 그렇게 쉬울까, 그 정도로 강렬한 애정을 이 작가가 설득력 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야기꾼의 소설인지라 그걸 플롯으로 해결해버리더라. 두 연인의 심리를 세밀히 다뤄나가는 대신, 두 사람이 여러 번 물리적인 이별을 겪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코델리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지긋지긋한 고난에 처하도록 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웃기게도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정의 밀도가 높아지는 대목도 아랄-코델리아의 관계 묘사가 아니라 코델리아가 집에 돌아가 핍박당하는 부분이다. 이것도 정신병원 배경 공포 스릴러에 툭하면 나오는 기본 논리에 의존하고 있지만 ─ "난 안 미쳤어!" "네네, 일단 진정하시고……" "안 미쳤다니까!" "지금 환자분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요. 먼저 광증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봅시다." ─ 읽는 사람 돌아버리게 하는 데에 여전히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별다른 야심 품지 않고 효율적인 길을 찾아 쓱쓱 써내려간 기분이 난다.
표지에 관해서 말들이 많은데, 난 예나 지금이나 불만 없다.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서 우주를 배경으로 날아다니는 장중한 우주선 그림만 넣으라는 법도 없고, 까놓고 말해서 이 시리즈가 그렇게 막 무게 잡는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보자면 라이트 노벨 표지여도 할 말 없을 만한데 말이지. 그나저나 실제 책을 쥐어보니, 뭐랄까…… 그 표지 디자인을 포함해서 '이 책은 골수 SF 독자들만 읽으라고 만든 책이 전혀 아님'이라는 분위기가 확 풍긴다. 이거 말하려니까 아무래도 웃기지만, 표지 질감부터가 그렇다. 낭창낭창 휘는 종이 때문인지 가볍게 썼으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하는 기분이 있다. 게다가 맨 앞의 보르코시건 가문 사람들 소개나 (어째 좀 성의 없는) 등장인물 소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졸드가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까지, 모두 'SF 모른다고 해서 해치지 않아요. 함께 읽어요.' 하고 생긋생긋 웃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건 SF 안 내 본 출판사들이 SF를 내면서도 '우리가 내는 건 흔해 빠진 공상과학소설이 아님'이라고 무게 잡는 거랑은 다르다. 그냥 정말로 더 넓은 독자를 보고 있다는 인상. 실제로 작품 성격도 그러니만큼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계속 확신을 갖고 다양한 독자들에게 많이 팔아서 전권을 끝까지 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