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월드 1 - 마법의 색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테리 프래쳇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허구를 다루고 있는 예술 작품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며, 불행하게도(혹은 다행스럽게도) 예술가 역시 그런 사람들에 속하는 무리이기에, 모든 예술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감상자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만나는 일이며, 아무래도 그걸 즐기자면 다른 세계의 법칙을 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해가 잘 안된다면, 주변에선 온갖 괴상망측한 물고기들이 잘만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헤엄을 못 쳐서 물 먹고 있는 새를 상상해보시라. 아무래도 그 새는 수중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이 펄럭펄럭 노닐던 세계와는 다른 그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건 우리 종족의 여러 가지 다양한 특성 중에서도 제법 내세울만한 것이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인지 그럭저럭 이 문제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세계사라든가 풍속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아마도 프랑스의 독자들만큼이나) 즐겁게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면 스스로가 참으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19세기 프랑스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인이라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 종족의 적응력에 대해서 좀 더 자부심을 가져봐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종족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자끄 데리다 옹의 사상 체계를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체화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좀처럼 그런 적응력에 만족하질 못하고 자꾸 인간 본연의 적응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해체의 본질 아니랴(아니라고? 뭐 어때. 신경 쓰지 마시길. 여러분은 이 글이 『디스크월드 시리즈 1 - 마법의 색』(이하 『마법의 색』)에 관한 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일부 반동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들은 자기네들 스스로도 없다고 믿는 걸 자꾸 만들어내서 선량한 나머지 부류를 혼란에 빠뜨려 인간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용과 기사,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황야의 총잡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꼬나문 사립탐정, 길을 걷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추며 노래 부르는 건달들, 폭포를 거스르며 솟구쳐 올라 기암절벽에 장풍을 갈겨 시를 써 내리는 백의청년, 이런 게 정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다.

 다행히 인간의 다수(로 보이지만 실은 소수)는 이런 거짓말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심원한 통찰력을 갖춤으로써 인간 사회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의해 원활하게(정말?) 돌아가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일부 무지몽매한 이들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이들이 바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 좀 더 고급스럽고 학술적인 용어를 원한다면, 장르 문학 독자들이라 불리는 무리들이다.

 이 히치하이커들이 하는 일이란, 일반적으로 해외 여행 중독증에 걸린 행객들(물론 골프 여행, 도박 여행, 매춘 여행, 이런 거 말고 학기내내 노동력을 착취당한 끝에 벌어들인 돈을 일거에 쏟아붓는 순진무구한 대학생들로 대표되는 배낭 여행객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이 하는 일을 정신적으로, 혹은 다차원 우주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삶의 터전, 혹은 조국을 등지는 일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크게 두 가지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나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던져주는 충격(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킨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세계에 익숙해져서 이방인이자 원주민으로서 그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이들의 확대 재생산 버전인 장르 문학 독자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찾아 헤맨다. 다만 그들이 헤매는 세계는 좀(실은 많이) 더 기괴해 보인다는 게 다를 뿐.

 그리고 여기, 영국의 작가 테리 프래쳇이 1983년 이래 지금까지 스물아홉 권의 책을 통해 안내하고 있는 세계, 디스크월드는 그 수많은 다차원 우주 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혼백이 아스트랄계로 날아가 버릴 수 있으니 집중하시라. 여긴 발 딛고 사는 땅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광활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어딘가, 거대한 거북이가 걸어가고 있다(혹은 헤엄치거나, 기어가거나, 우주유영 하거나. 아무려면 어떤가). 운석에 난타당한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는 이 거북의 등 위엔 코끼리 네 마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코끼리들의 어깨 위에는 커다란 원판 - 디스크가 올려져 있다. 이 디스크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고, 그 위엔 물과 대륙이 얹혀져 있다. 물은, 물론 디스크 가장자리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테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자, 지금까지 사용된 어휘 중 어떤 것도 은유법을 위해 사용된 게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떠올리고 계실 그 우스꽝스러운(그러나 최대한 장엄하게 떠올려주시라!) 모습이 바로 디스크월드의 '기본'이다.

 전체 세계가 생겨먹은 게 그런데 하물며 세부사항은 어떻겠는가? (1권만 봤을 때) 이 세계의 최강자는 주인공이 끌고 다니는 다리가 무수히 달린 짐짝(제발, 은유가 아니다!)이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은 목표를 놓치기 일쑤인데다, 바빠서 자기 부하인 질병 - 그 이름도 위대하신 '연주창' - 에게 대신 일을 맡기기도 한다. 아아, 게다가, 한국의 팬터지 독자층에게 특히 감명 깊게 다가오겠지만, '투명드래건'도 나온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광고 문구로 쓰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매거진』의 문구를 재인용 하자면,

 "일관되게, 독창적으로 미쳤다."

 상상하기 난해할 정도로 황당하기에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디스크월드의 세계는, 사실 기존 장르 팬터지에 대한 패러디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단지 감옥에 갇힌 '용사'가 "이제 어떻게 될까요?"라는 동료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아, 곧 문이 활짝 열리고 난 신전 경기장 같은 곳으로 끌려 나가 거대 거미 몇 마리 아니면 발이 여덟 개 달린 클라치 정글 출신 노예와 싸울 것이고 그런 다음 제단에서 왕녀나 그 비슷한 여자를 구해서 호위병이든 뭐든 몇 놈 죽일 것이고 그러면 이 여자가 이곳에서 나가는 비밀 통로를 가르쳐줘서 함께 말을 몇 마리 강탈하고 보물을 챙겨 탈출하겠지."라고 대꾸하는 것만 가지고 패러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장르의 보편적인 규범을 놀려먹는 거친 패러디에는 사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그 존재 자체가 이미 패러디이기 때문에!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사람도 잡아먹는 최강의 짐짝, 상상으로 죽였다 살려내는 드래건, 평면 세계,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는 신들, 그 신들의 실수, 그런 모든 캐릭터,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장르 팬터지를 제법 익숙히 읽은 독자들과 만날 때 적극적인 웃음을 유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디스크월드는 그렇게 장르 팬터지의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어떤 부분은 깔아뭉개면서 패러디인 동시에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외 이 작품을 더글라스 아담스의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와 맞먹는 코미디 소설로 만든 데에는 테리 프래쳇이 보여주는(발 빠른 독자들이라면 이미 작년에 나온 테리 프래쳇 · 닐 게이먼의 코믹 팬터지 『멋진 징조들』을 통해 그의 유머 감각을 맛본 바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마법의 색』을 보고 나니 『멋진 징조들』의 유머 감각 상당수는 테리 프래쳇에게서 나왔으리라는 심증이 간다) 영국식 유머 감각과 영미 문화에 대한 패러디의 공헌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면서 판단하시길. 특정 문화권의 유머 감각을 강요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분명한 것은, 그런 유머 감각을 차치하더라도 이 작품은 장르 팬터지로서 극한까지 치닫는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이미 충분히, 장엄하게 웃긴다는 사실이다.

 자, 디스크월드는 이런 곳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세계에 뛰어들어 몸을 풍덩 적시는 방법을 제법 익힌 히치하이커들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이지만, 혹시 적응력이 남달리 강해서 모르도르 쯤이야 집 앞 공터로 보이고 등하교를 라마를 타고 하시는 분들이라면 디스크월드를 찾아보시는 것을 말리지는 않으련다. 머리를 싸매고 그 기괴한 풍경을 그려내고자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아, 끝으로, 그래도 아직까지 순수한 '다차원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질 못해서 여전히 시장경제 원리에 묶여 있는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이거 잘 안 팔리면 나처럼 외국어 못하는 여행객은 스물아홉 번째 권은커녕 당장 세 번째 권(일단 광고 때렸으니 두 번째 권까지는 분명 나올 것이다)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부터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부디, 제발, 당장 사라. 사서보고 돌리고 한 권 더 사라. 난 이 세계에서 보다 오랫동안 노닥거리고 싶다. 읽어보신다면 여러분들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실 터이고(흐음. 이쯤에서 굳이 내게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란 소리를 해야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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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angel 2005-01-0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이리뷰를 쓰고싶은데...........이걸 보니 도저히 쓸 생각이 안드네요...으음...sabbath님께서 중요한 건 대충 써 주셨으니...전 가볍게 감상이라도 써볼까요?

투명고냥이 2005-01-0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리뷰를 너무 잘 써 주셔서 제 허접한 리뷰를 올리기 무서울 정도네요. ^_^ 하지만 저도 비슷한 이유로(디스크 월드를 떠나기 싫은) 결국은 용기를 냈습니다만. 어쨌든, 이 책도 좀 유명해 져서 29권...까지는 욕심이겠지만 3,4권까지는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을 세계를 파악하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엄밀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인식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런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SF 소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현실적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은 '우리가 사는 태양계'라는 식의 특정 시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에 의해 구축된다. 즉, 이우혁의 『퇴마록』은 행성 지구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 세계는 엄밀한 과학적 논리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배경으로 기능할 뿐이며, 작품의 전개를 지배하는 것은 환상적인 힘과 인물의 주관적 인식틀이므로 SF에서 말하는 '현실적'인 세계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 라마를 바탕으로 하는 아서 C. 클라크의 『라마』는 비록 세계 자체는 허구이지만 그 세계를 파악하는 시선은 정밀한 과학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현실적'이다.

 (물론 여기서 이 이야기가 지극히 제한된 범위의 SF -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소위 하드 SF에 해당하는 작품들에 어울리는 이야기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젤라즈니식 뉴웨이브쯤 나가면 이 SF의 S, 혹은 Science의 의미부터가 상당히 달라지는 듯 한데, 거기까지 포괄해서 이야기를 할만한 자신은 없다. 그리고 실상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SF라는 장르의 의미를 명확히 제시한 뒤 거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특정 작품집의 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평소 몇몇 SF 소설들에서 느꼈던 이 장르의 주목할만한 특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일 뿐이다. 뭐, 변명은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그리고 SF의 힘은 바로 이 '현실성'에서 나온다. 분명히 현실 논리를 딛고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비현실'을 인정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SF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짜릿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물론 다른 종류의 짜릿함도 있지만). SF 장르의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그렇게 극과 극을 과학이라는 다리로 단숨에 이어내는 경계, 틀, 인식의 파괴에 있다는 이야기다(문득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에서 앰버와 혼돈의 궁정을 잇는 검은 길이 떠오르는구나. 그럼 코윈은 SF의 원동력, 과학 그 자체란 말인가. 『앰버 연대기』는 어쩌면 메타SF였을지도).

 여기 이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의 그러한 힘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실로 경이로운 단편집이다. 테드 창의 작업은 극과 극을 이어내는 작업 그 자체다. 「바빌론의 탑」부터 「이해」, 「0으로 나누면」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견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의 틀을 기가 막히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쿼런틴』에서 그렉 이건이 양자역학 관측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 인류의 전우주적 학살이라는 개념을 끌어내는 것과 같은 정도의 과감함!) 붙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다 다루면서 앞으로 이 책을 읽게 될 분들의 즐거움을 저해하고, 동시에 이 엄청난 작품집의 가치를 부족한 글 솜씨로 몽땅 훼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여기 실린 여덟 작품 중 단연 백미(물론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다)라고 할만한 「네 인생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면…

 이 중편의 구조는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와, 이 주인공이 외계 종족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면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두 줄기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제시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또, 주인공이 언어학자로서 헵타포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인류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라는 두 언어의 상이함이 나타나고, 두 언어의 상이함은 이내 각각의 종족이 가진 세계관의 상이함으로 이어진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中

 그리고 주인공이 이 상이함을 인식하고 그 간극을 뛰어넘어 다른 인식 체계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순간, 지금까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는 인류와 외계인의 이야기에 철썩 달라 붙으며, 동시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하여 과학적 엄밀함과 인간 냄새 물씬 풍기는 극적 감동 모두를 휘어잡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주목할 것은 테드 창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대상이 순수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네 인생의 이야기」나 「0으로 나누면」에서 드러나듯 그의 시선은 언어학이며 수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가 하면 「이해」에서처럼 주인공의 인식 범위를 무지막지하게 넓혀가며 우주의 전체 체계를 하나의 미학적으로 완성된 예술로 바라보는 - 사실상 인간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고나 할까 - 폭거를 감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신의 사랑마저도 무소불위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과학적으로 따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이 테드 창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과학적 접근법과 상상력을 세상에 들이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갈 데까지 가는 인간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히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 방법론을 표현해내는 실력에 있어서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장편으로 길게 늘어놓아야 될법한 아이디어를 정밀하게 압축해서 중 · 단편으로 내놓은 결과물을 보자면 그 밀도는 기가 막힐 지경. 사실 그 밀도 때문에 독해 자체가 다소 난해해지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그 몇 십 페이지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를 일단 펼쳐낸 다음에는 오로지 벅찬 감격만 있을 뿐이었다. 아아, 살아있길 정말 잘했어. 앞의 몇 편을 읽었을 때는 '재미는 있는데 아무래도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하기는 무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해야 한다'로 마음을 돌렸다. "누구나 쉽게 잡아들어지지 않는 분야의 책이 있거니와, SF도 장벽이 높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놓치기엔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라는 알라딘 김명남 편집장의 말이 이만큼 절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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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부르의 저주 - 귀족 탐정 다아시 경 1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6
랜달 개릿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랜달 개릿의 '귀족 탐정 다아시 경Lord Darcy' 시리즈는 여러모로 즐거운 작품이다. 대체역사 SF로서의 배경을 깔고, 그 위에 과학적(그렇기에 또한 SF인 걸까?) 마술의 요소를 녹여내 만든 멋진 추리소설이기에 장르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누구나 만족할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 장르적 요소는 단순히 이것저것 갖다 붙인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서로 긴밀히 어우러져 있기에 각각의 장르-SF, 팬터지, 추리-를 더욱 참신한 형태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는 새로운 형태의 SF이자 새로운 형태의 팬터지 소설이며 새로운 형태의 추리 소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욱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러한 '새로움'이 작품 발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역사 SF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전쟁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로 인해 신대륙과 서유럽에 걸친 거대한 영불(英佛)제국이 형성되고, 그 제국은 로마 제국 이상으로 오랫동안 존속되며 유럽 및 신대륙 전역에 평화를 이끌어낸다. 랜달 개릿은 작품 속에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여러차례 반복하여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설정을 충실히 인식시키는 동시에 제국의 이름처럼 영어와 프랑스어를 오가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 작품 전체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아무래도 주인공 다아시 경이 영국 태생인지라 영국적 분위기가 더 진하긴 하지만.)

그러나 역사적 설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술에 대한 설정이다. '귀족 탐정 다아시 경'의 세계에서 마'술'은 그 명칭이 뜻하는 바처럼, 신비로운 불가지의 대상이기 이전에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탐구될 수 있는 '기술'이다. 가톨릭에 의해 통제되며 법칙에 따라 행해지는 마술은 그 설정만으로 팬터지에 익숙한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마술은 흥미로운 설정 정도에 그치지 않고 다아시 경이 겪는 여러 사건들에 깊숙히 개입함으로써 괴사건의 원인이자 해결책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그러나 마술은 직접적으로 '범인은 누구다!'라는 식으로 완벽한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으며 단지 '기술'적 측면으로서 기능함으로써 페어 플레이를 하고 있다.) 이러한 마술의 역할은 다시 추리 소설로서의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로 하여금 기존 추리 소설들의 맥락을 따라가면서도 색다른 형태를 띠도록 한다.

현대 소설에서 추리 소설 '기법'을 활용하는 작품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마법 탐정 다아시 경'은 추리 소설 기법을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완벽한 추리 소설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내 경우 이 책을 95년에 시공사에 출간된 <다아시 경의 모험> 버전을 통해서 이미 읽은 바 있었기에 이번 <셰르부르의 저주>에 포함된 중단편들의 트릭은 대강 알고 있는 상태였고, 그랬기에 오히려 이 작품이 추리 소설로서 갖추고 있는 독자에게의 공정성(독자에게도 추리의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작품 속의 사건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추리 소설로서 지켜야 할 일종의 불문율)을 지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모든 단서를 제공해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완벽하게 사건의 전말을 알아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추리 소설의 규칙-독자는 작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을 충실히 지켜내고 있다.(^^;;;)

이번에 새로 번역된 '전쟁 마술'은 특히 그 읽는 즐거움이 더했는데, 앞으로 행복한책읽기 출판사에서는 이번 <셰르부르의 저주>를 필두로 해서 랜달 개릿의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를 모두 완역하겠다고 하니 앞으로 계속해서 기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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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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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이미 장르 구분이 필요없는 시대에 발을 들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액션, 코미디, 스릴러, 고어, '공상'과학 등의 장르 요소가 잔뜩 섞인 그 영화를 한 요소만 떼어서 '이것은 어떤 장르의 영화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 영화의 다른 모든 요소는 무너지게 될테니까. 재스퍼 포드의 <제인 에어 납치사건>은 바로 그런 장르 혼합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대체역사SF라고만 알고 읽기 시작했던 이 작품은 팬터지, SF, 형사물 등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복합소설이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크림전쟁이 백 년 이상 지속되는 가운데 문학 작품에 미쳐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1985년의 영국에서, 문학 관련 범죄를 담당하는 수사관 서즈데이 넥스트Thursday Next는 희대의 악당 아케론 하데스를 쫓는다. 죄목은 찰스 디킨스의 『마틴 처즐윗』 원본 절도. 뭐, 거기까지는 좋다. 고서를 박물관에서 귀히 보관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게 사라졌으면 절도범을 쫓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절도범이 원본 속의 인물을 꺼내다 죽여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본들의 내용이 바뀌었다면 슬슬 곤란해진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인 에어>의 원본 속에서 주인공 제인 에어가 납치돼서 <제인 에어>의 뒷부분이 몽땅 지워졌다면(<제인 에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므로 주인공이 사라지면 끝이다.)?

이와 같은 재스퍼 포드의 발랄한 상상은 매력적인 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와, 역시 그 매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여러 조연들, 그들이 보여주는 유쾌한 유머 감각, 그리고 그 줄거리 만큼이나 황당한 세계관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잘 짜여진 이야기로 완성된다. 상상 속에서만 붕붕 떠 다니는 허황된 소리일 것 같다고? 설마. <제인 에어 납치사건>은 현실을 유쾌하게 비틀어 허구를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행복한 소설읽기를 가르쳐준다. 허구에서 기쁨을 느끼고 낄낄거리며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아무 곳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 아낌없이 추천하련다.

송경아 씨의 번역은 원어의 느낌을 살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며, 그 결과도 만족스럽다.(특히 141개에 달하는 주석은 책을 읽어나가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나처럼 무지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참, p.77 l.1의 SO-4는 SO-14의 오타, pilgrim 님께서도 리뷰에서 언급하신 바 있는 p.473 l.15의 '세번째 이야기'는 '삼 층'의 오역이니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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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 고백한다. 매스미디어는 강력하다. 나의 구매 의욕을 자극할 정도로.

김탁환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중앙일보에서 토요일마다 발행하는 도서 관련 섹션의 1면에 실린 <나, 황진이> 소개에서였다. 수험생 시절 제법 마음에 들어했던 시가들 중 하나가 황진이의 시조였던지라 일단 눈에 와닿았고 실제로 서점에서 서서 몇 구절 읽어본 바 다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고 안 들고야 어찌되었든 세상을 지배하는 건 예산이기 마련인지라 결국 김탁환 교수의 글과 나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일단락(<나, 황진이>는 일반판과 주석판이 따로 나와있는데 일반판에는 아름다운 수묵화가 실려있고 주석판에는 주옥같은 주석이 실려있다. 일반판의 9500원도 부담스럽거늘 주석판의 15000원이라는 가격까지 생각하면 아무래도 구입이 힘겨워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 후 어느날, 역시 같은 신문, 같은 섹션의 1면에서 다시 김탁환 교수의 글을 보게 되었다(좋은 글 참 빨리도 쓴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지난 4년간 쓴 소설이 13편이란다. 어찌 그것들 모두가 맛깔스런 작품들이겠냐마는 그래도 어쨌든 다작에 재능이 있는 이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점이 매혹적이었으며 그것이 다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더욱 나를 끌었다.

조선시대의 소설이라 함은 민중들과 아녀자들의 것. 다시 말해 '비주류'에 속하는, '주류'들에게는 흔한 '천박한 흥미거리'였으며 그것이 작금의 팬터지며 SF와 같은 장르 문학들이 우리 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한 눈에 반해버린 뒤 얼마 안 있어 녀석은 내 가방을 차지했다(대입원서 쓰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수험생에게 학교에서 달리 할 일이 무어겠는가. 그저 일 년간 바라왔던 것처럼 원없이 책 읽는 일 뿐).

작가는 매설가(소설가) 모독, 백능파, 졸수재, 김만중(그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긴 서포 그 분이다)을 통해 끊임없이 소설에 대해 논한다. 특히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두 걸출한 작품의 대조를 통해 이야기 자체로서의 소설과 목적 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소설이라는, 소설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은 평소 내가 고민해오던 부분 중 하나인지라 독자로서 공감하는 바가 컸다. 주인공 모독은 목적을 가진 소설이라는 개념에 당혹스러워 하나 나는 이야기 자체로서의 소설이라는 개념을 쉽게 인정하기 힘들다는 점은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놓인 시간의 차가 만들어 낸 역전 현상일 터. 그러나 그 의혹의 방향이아 어찌되었든 간에 수백년을 사이에 두고 '소설'을 토대로 저와 내가 엮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법이다.

이야기 자체로서도 이 소설은 크게 흠잡을 곳은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적절한 시간 배치나 잘 짜여진 인물간의 갈등 관계는 부담없이 독자를 이끌어 가고 있고 그 속에서 엮인 추리 소설적 기법도 크게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나 읽는 이를 흥미롭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소설가로서의 서포가 이 소설에서 그려진 모습 그대로의 인물이셨다면 그는 이 이야기의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을 크게 기꺼워하지 않으셨을까.

읽는 중간중간에도 느낀 바이나, 분명 이 글에는 많은 결함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백능파'라는 인물의 소설에 대한 집착이 다소 지나친데가 있어 도리어 소위 요녀(妖女)로서의 행각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나 모독의 남은 생에 대한 뒷처리가 크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 등이 그러한 것이다. 허나 그 단점을 구태여 캐내 작품을 깎아가며 읽을 필요가 있으랴(물론 이러한 태도는 정작 작가인 김탁환 교수에게는 썩 달갑잖은 것이리라. 어쨌든 작자는 자신의 글이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원하는 법이니). 사람이 소설을 만들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소설을 읽는다. 읽는 이와 쓰는 이와 말하는 이가 저마다 연결되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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