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 고백한다. 매스미디어는 강력하다. 나의 구매 의욕을 자극할 정도로.

김탁환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중앙일보에서 토요일마다 발행하는 도서 관련 섹션의 1면에 실린 <나, 황진이> 소개에서였다. 수험생 시절 제법 마음에 들어했던 시가들 중 하나가 황진이의 시조였던지라 일단 눈에 와닿았고 실제로 서점에서 서서 몇 구절 읽어본 바 다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고 안 들고야 어찌되었든 세상을 지배하는 건 예산이기 마련인지라 결국 김탁환 교수의 글과 나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일단락(<나, 황진이>는 일반판과 주석판이 따로 나와있는데 일반판에는 아름다운 수묵화가 실려있고 주석판에는 주옥같은 주석이 실려있다. 일반판의 9500원도 부담스럽거늘 주석판의 15000원이라는 가격까지 생각하면 아무래도 구입이 힘겨워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 후 어느날, 역시 같은 신문, 같은 섹션의 1면에서 다시 김탁환 교수의 글을 보게 되었다(좋은 글 참 빨리도 쓴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지난 4년간 쓴 소설이 13편이란다. 어찌 그것들 모두가 맛깔스런 작품들이겠냐마는 그래도 어쨌든 다작에 재능이 있는 이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점이 매혹적이었으며 그것이 다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더욱 나를 끌었다.

조선시대의 소설이라 함은 민중들과 아녀자들의 것. 다시 말해 '비주류'에 속하는, '주류'들에게는 흔한 '천박한 흥미거리'였으며 그것이 작금의 팬터지며 SF와 같은 장르 문학들이 우리 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한 눈에 반해버린 뒤 얼마 안 있어 녀석은 내 가방을 차지했다(대입원서 쓰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수험생에게 학교에서 달리 할 일이 무어겠는가. 그저 일 년간 바라왔던 것처럼 원없이 책 읽는 일 뿐).

작가는 매설가(소설가) 모독, 백능파, 졸수재, 김만중(그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긴 서포 그 분이다)을 통해 끊임없이 소설에 대해 논한다. 특히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두 걸출한 작품의 대조를 통해 이야기 자체로서의 소설과 목적 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소설이라는, 소설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은 평소 내가 고민해오던 부분 중 하나인지라 독자로서 공감하는 바가 컸다. 주인공 모독은 목적을 가진 소설이라는 개념에 당혹스러워 하나 나는 이야기 자체로서의 소설이라는 개념을 쉽게 인정하기 힘들다는 점은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놓인 시간의 차가 만들어 낸 역전 현상일 터. 그러나 그 의혹의 방향이아 어찌되었든 간에 수백년을 사이에 두고 '소설'을 토대로 저와 내가 엮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법이다.

이야기 자체로서도 이 소설은 크게 흠잡을 곳은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적절한 시간 배치나 잘 짜여진 인물간의 갈등 관계는 부담없이 독자를 이끌어 가고 있고 그 속에서 엮인 추리 소설적 기법도 크게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나 읽는 이를 흥미롭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소설가로서의 서포가 이 소설에서 그려진 모습 그대로의 인물이셨다면 그는 이 이야기의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을 크게 기꺼워하지 않으셨을까.

읽는 중간중간에도 느낀 바이나, 분명 이 글에는 많은 결함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백능파'라는 인물의 소설에 대한 집착이 다소 지나친데가 있어 도리어 소위 요녀(妖女)로서의 행각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나 모독의 남은 생에 대한 뒷처리가 크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 등이 그러한 것이다. 허나 그 단점을 구태여 캐내 작품을 깎아가며 읽을 필요가 있으랴(물론 이러한 태도는 정작 작가인 김탁환 교수에게는 썩 달갑잖은 것이리라. 어쨌든 작자는 자신의 글이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원하는 법이니). 사람이 소설을 만들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소설을 읽는다. 읽는 이와 쓰는 이와 말하는 이가 저마다 연결되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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