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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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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플라톤의 <국가>가 출판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읽기 쉬운 <국가>를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에 레퍼런스로 자리잡고 있는 박종현 선생의 <국가정체>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박종현 선생의 번역은 꼼꼼하고 치밀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쉽게 나아가기 힘들다.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읽고 곱씹어야 뜻이 파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기에 서양 사상의 최고 고전이라는 추천에 휩쓸려 <국가>를 읽으려 시도하다, 난해한 문장이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곤 포기해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랬던 사람들에게 이제 훌륭한 대안이 주어졌다. 이전에 국가를 읽고 포기했던 사람들이 이 책을 다시 보게 된다면, 이전과 달리 술술 읽히는, 난해하게 들렸던 플라톤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두세 번 정도 읽었지만 매번 힘든 경험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책은 1997년 초판이기에 2005년 개정판은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은 막힘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비교해 보자. 479c에 있는 의견(doxa)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박종현: ‘존재하지 않음에 있어서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 ‘비존재보다도 더 어두운 것이 없을 것이요, ‘존재함’(있음, : einai)에 있어서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 실재보다도 더 밝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일세.

 

천병희: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둡고 비현실적일 수 없으며, 실재하는 것보다 더 밝고 현실적일 수 없으니 말일세.

 

박종현 선생 쪽이 원문에 더 충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의미 파악이나 가독성에 있어서 천병희 선생 쪽이 훨씬 낫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책 전체가 이런 식의 차이를 보인다.

 

2.

그러나 당연히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 이 책에서는 가독성을 얻기 위해서 철학적 엄밀함을 다소 포기한다. 예를 들어 335d의 한 구절을 비교해 보자.

 

천병희: 올바른 사람들이 정의에 의해 사람들을 불의하게 만들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착한 사람들이 미덕에 의해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 수 있을까?

 

박종현: 올바른 사람이 올바름에 의해 사람들을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겠소? 요컨대, 훌륭한 사람이 [사람의] ‘훌륭함’(:aretē)에 의해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정의/올바름, 착한/훌륭한, 미덕/훌륭함 등의 차이가 보이고,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훨씬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각 개념들이 가진 풍부한 의미가 많은 부분 소실될 수밖에 없다. ‘aretē’를 단지 미덕이라고 하지 않고 훌륭함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박종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retē는 이 책에서도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인데, 오래도록 흔히 ’(virtue, vertu, Tugend)으로 번역되어 왔다. 모든 사물에는 그 종류 나름으로 훌륭한 상태’, 좋은(agathos=good) 상태가 있게 마련이다. 이는 대개 그 종류 나름의 기능’(ergon) 또는 구실’, 특유의 기능’(oikeion ergon)과 관련되어 있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의 생존 기능 또는 그것의 존립 이유나 존립 조건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상관 없이, 그것들의 휼륭한 상태는 있게 마련이다. 가령 우리가 좋은 눈이라 말할 때, 이는 눈의 기능과 관련해서 하는 말이요, 개나 말의 경우에서처럼 그것들의 생존 조건이나 인간에 대한 그것들의 유용성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그 훌륭한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위적인 산물은 그것들의 유용성 및 기능과 관련된 훌륭한 상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칼이라든가 좋은 낫이라 말함은 그 때문이다. 이런 훌륭한 상태’(훌륭함: goodness, excellence)aretē라 한다. 다만 사람의 덕목과 관련된 경우에는 이른 이라 해도 무난하나, 논의의 보편성을 고려하여 훌륭함이라는 번역어를 택했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많은 경우에 ‘[사람의] 훌륭함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1, 36)

 

비슷하게 정의올바름으로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도 1권 주22에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박종현 선생의 번역은 특정 개념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살려내기 위해 어쩔 수 없지만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데아를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507b의 한 구절을 비교해 보자.

 

천병희: 우리는 다수의 선한 것과 다수의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는 데 그 점에서는 그 밖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논의에서도 그렇게 구분하고 있네.

 

박종현: 우리는 많은 것(polla)을 아름답’(아름다운 것들 이다’)고 하며, 많은 것을 좋’(좋은 것들 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각각의 것(x)()’(einai)라고 말하고 또한 표현상 구별하네.

 

박종현 선생이 다소 복잡하지만 저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어 ‘einai’가 가지는 두 용법, 즉 존재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을 엄밀히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두 용법의 구분에 대해서는 5권 주57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두 책은 가독성을 위해 엄밀함을 다소 포기한 책과 엄밀함을 위해 가독성을 다소 포기한 책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3.

이러한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이 플라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저술들이 2천 년 넘는 오랜 세월을 겪고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심오하고 체계적인 사상 덕분이겠지만, 이런 사상을 극적인 상황 설정, 등장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소크라테스의 인간미 넘치는 아이러니 등으로 독자들에게 재미있고 생동감 있게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스의 최고 산문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7)

 

천병희 선생은 플라톤을 무엇보다 뛰어난 산문작가로 대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진행에 독자가 얼마나 빠져들 수 있는가일 테고, 이 점에 있어서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는 별다른 주저함 없이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체와 훌륭한 인간상에 대한 논변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반면 박종현 선생은 플라톤을 철학자로 대한다. 그가 제시하는 논변 하나하나와 개념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져볼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이 결국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건 과연 말이 되는지, 왜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지 등등. 그러니까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보길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책 중 어느 책을 고를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국가>를 읽으려고 하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쉽게 말해 교양 수준에서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을, 전공 수준에서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물론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손에 쥐었다가 막힌 사람이라면, 먼저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을 읽은 후 다시 시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두 책은 함께 소장하기에 좋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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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4-2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해놓으니까 좋은데요...
가끔은 미로 같은 말놀이 속에서 헤매다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는데
천병희 선생의 역은 보다 명료하게 뜻을 전달되어서 좋았어요.

암튼!
파트장님,,,[건축을 위한 철학]은 읽고 있는중이에요..30일까지 리뷰 올릴게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nunc 2013-04-26 03:23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읽기 쉬웠다는 점에서 이번 번역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리뷰 연장은 담당자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좋은 리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