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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평점 :
오늘날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물리학 관련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관심이 있기에 이런저런 과학책들―물론 주로 비전공자들을 위한 교양서들―을 자주 읽는 편인데, 훌륭한 저자들의 쉬운 설명이 많은 덕에 대부분의 경우 그 세부적 내용은 알 수 없더라도 대략의 그림들, 그러니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이를 탐구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연구가 진행되는지, 현재 어디까지 밝혀져 있고 앞으로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독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과 관련된 책에서는 이 기대가 무너진다. 마치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은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라며 접근을 거부하는 견고한 성과 같다.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물리학 책을 읽는 것은 ‘어디 두고 보자’라는 일종의 ‘오기’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얽힘의 시대>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두꺼운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수많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이해불가능’과 나의 ‘이해불가능’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들의 이해불가능이란 실험에 의한 관찰과 이론의 불일치, 복잡하고 엄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른 결과가 실험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실험 결과를 해석해서 내놓은 이론이 이전의 다른 이론과 모순된다거나 하는 높은 수준의 사고 후에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예를 들어 “사건에 대한 수학적 기술과 그 사건 자체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285)와 같은―이지만, 나야 그저 ‘도대체 뭐라는 거야’의 수준일 테니. 왜 이렇게 어려울까?
무엇보다 양자역학의 어려움은 이 책에서도 계속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이전의 고전물리학과는 달리 시각적 모델링이 어렵다는 점이다. 스핀입자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실제로 존재하긴 하지만 시각화는 불가능했다.”(86)는 진술이나,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대한 부분에서 나오는 “이번에도 그것은 모형, 설명 또는 이미지가 아니라 금지, 엄격한 규칙, 그리고 불가해성과 함께 등장했다.”(126)는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양자역학을 구성하는 이론들에는 초보적인 수준의 물리학 교과서에 보여주는 ‘공의 궤적’이나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라는 단순한 그래프와 모형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양자역학이 등장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논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은 하이젠베르크에게 영감을 준 아인슈타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라네.”(152)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적 관점 중 하나는, 그것이 대략적으로 귀납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가설연역적 방법이나 패러다임 이론과 같이 이론 의존적 과학에 대한 설명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과학이란 관찰된 개별적 사실들을 통합하는 일반적 이론, 관찰된 개개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론의 탐구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즉 관찰과 이론은 별개의 것이고 이론은 관찰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란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명쾌함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저런 모습이 나타는 건, 결국 이렇기 때문이야.’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이런 식의 명쾌함이 무너져버린다. “물리학은 초기의 모습에서 많이 바뀌었다. 그때는 현상의 설명을 통해 이 세상의 물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수학적인 것이 본질로 간주된다. 진리는 공식 속에 있다는 분위기다.”(313) 관찰 자체가 현상에 대한 개입이라면 우리가 탐구해야 할 현상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사고방식, 혹은 인식체계를 극단적으로 수정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결국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물리학은 극도로 추상화된 영역을 다루고 있고 상식적이지 않은 인식체계를 요구하고 있기에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가진 과학자들은 직관적으로 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어도 다른 이들에게 이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얽힘의 시대>는 한 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벌어진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독자로서 우리는 이 책에서 재구성된 대화의 참관인이 되어 양자역학이 걸어온 어려움을 바로 옆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과학적 배경을 가진 뛰어난 과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나와 같은 일반인이야!’ 라는 위안도 준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생생한 대화의 재구성을 통해 독자들이 과학자들의 대화에 직접 참여 혹은 참관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어려움을 우리의 어려움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책의 후반부를 이론물리학자들이 아닌 실험물리학자들에 할애함으로써 실질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또한 그 점이 바로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대화 형식의 구성이 논란의 생생함을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하나의 이론이나 실험 등을 차근차근 따져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저자는 대화의 사이에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긴 하지만, 설명이 대화의 진행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즉 대화를 쫓아가기엔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춘 후 다시 읽는다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저자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이력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물리학과를 졸업―아마도 학부인 듯싶다―한 후 8년 반 동안 염소 농장에서 젖 짜기와 치즈 만드는 일을 하며 자료를 수집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전문 학자로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연구한 결과가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낮에는 안경알을 깎고 밤에는 철학을 공부했던 스피노자처럼 일상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저자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새삼 다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