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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어디에서 어떤 근무를 했던지 간에 자신의 군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전역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당대에 대한 규정은 우리가 몸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자신의 살고 있는 시대가 전환의 시기, 위기의 시기, 혁명의 시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넘쳐났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유동하는 근대란 무엇인가? 번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14)라고 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 세계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 아마 거의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16) 마르크스에 의하면 견고했던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녹여버리는, 혹은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동력을 얻는다. 마치 액체처럼 고정되지 않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자본주의적 양식이 우리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고 바우만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동하는 근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먼저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적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를 보면 알 수 있듯,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물건을 샀는지, 즉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경쟁적으로 전시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는 것이다. 실로 전시라는 말이 적절한데, 이 모습이 마치 쇼핑몰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제원을 지칭하던 스펙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용되는 현실을 보면 쉬이 동감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상품으로써 전시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프라이버시의 소멸이다. 프라이버시란 인권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사회 이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었다.”(74)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전시하는 모습, 즉 자신의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에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노출함으로써 근대 이후 프라이버시가 가지고 있던 의미는 희석된다. 혹은 오히려 볼거리로 전락한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접속 가능성과 끊임없는 이용 가능성”(81)의 상태에 놓아둔다.

 

이처럼 타인에게 보여지고 이용되길 바라는 삶은 우리를 유행에 민감하게 만들고, 새로운 상품을 계속 소비하게 만들고, 기업과 병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준에 자신을 맞춰가게 만든다. 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강제적 과정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시장은 노동의 유연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해야만 한다. 소비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즉 소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마저도 소비시장에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제공해야만 하는 사회”(325~326)라는 악순환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이다. 결국 바우만의 진단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의 삶, 상품이자 볼거리인 삶이 바로 우리 현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결국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소비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소비 능력의 차이는 자연스레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예란 테르보른의 말을 빌려 이러한 물질과 자원의 불평등생명 유지에서의 불평등, 더 나아가 실존적인 불평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는 도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지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상황, 또 인간의 일반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간들이 매일 동료 인간들에게 가하는 그 해악에 대해서까지도 습관적인 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193), 즉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 가치들이 점차 침식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점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잃는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31) 이처럼 이 책에 실린 마흔네 통의 편지를 통해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현대 사회의 양상은 대단히 우울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마지막 편지에서 바우만은 카뮈를 인용하며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389)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 새로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싸워나가길 요구하는 것이다. 편지의 제목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이다. 주목할 것은 나의 반항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나의 반항이 단지 나의 존재만을 보증해 준다면, 이 저항은 그저 무수히 많은 개별적 존재의 자기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된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단순한 자기 확인은 자폐적 위안이나 과시일 뿐이다. 나의 저항이 타인과 연대로 확장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저항은 의미를 획득하고 마침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만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사회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 저항하고 벗어나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 결국 고독을 위해 연대하라. 이 조언이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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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10-3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nunc 2012-10-31 12: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