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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엊그제 신문들은 한 경제연구원의 설문조사결과를 빌려 가계부채가 올해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전했다. 작년 말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총액은 900조원을 넘어섰으며, 매년 50조원 이상씩 증가하는 추세로 볼 때 적어도 2013년에는 10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1000조원이면 우리나라의 한해 GDP에 맞먹는 수준이며 단순 계산으로 국민 1인당 2000만원씩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아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날 전 세계의 금융가들이 늘린 부채의 규모는 지구촌 국가들의 GDP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크다.”(29) 사람들은 자신들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부채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기원전 35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5000여 년의 시간 동안, 유럽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흩어져 있는 부채의 역사를 샅샅이 검토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 저자는 부채의 역사가 곧 경제의 역사이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다 나은 전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저자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상업경제(혹은 시장경제)가 역사적 필연은 아니며, 이러한 경제체제는 2009년 금융위기와 같이 전지구적으로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이 인간경제라고 이름붙인 상업경제 이전의 원초적 경제 형태로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저자는 현재 상식처럼 퍼져있는 경제학의 기본적 전제가 허구임을 지적한다. 맨 처음 물물교환으로 상품 간의 거래가 시작되었고,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덜고자 화폐가 발명되었으며, 이는 종국에 현재와 같은 신용거래를 낳게 되었다는 기존의 통념이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실제 역사는 그 순서가 정반대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시장의 이미지란 환상에 불과하며, 시장이란 군수품 조달과 같은 정부의 특정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 역시 전쟁이나 약탈, 노예무역과 같은 폭력적 상황과 맞물려 탄생했음을 지적한다.

 

신용시스템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평화를 누리는 시기나 신뢰의 네트워크(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든, 상인조합이나 신앙공동체 같은 초국가적 조직이든 불문) 사이에 통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전쟁과 약탈이 특징인 시기에는 신용시스템이 귀금속으로 대체된다. 게다가 시대를 불문하고 약탈적인 대출이 지속되다 보면 부채위기가 나타나게 된다.”(383)

 

특히 돈의 등장은 심각한 가치의 전도를 가져온다. 우리가 흔히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라고 불평할 때의 바로 그 의미, 즉 인간을 위한 수단이 오히려 목적이 되어버려 인간이 돈에 종속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돈은 도덕적 명령이 될 잠재력을 늘 갖고 있다. 그런 성격을 지닌 돈이 확장되도록 내버려둬 봐라. 그러면 돈은 금방 매우 단호한 도덕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인간관계조차도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하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566~567)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마저도 돈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심지어 그 가치에 따라 거래되는 노예제의 등장이다. 이는 인권의식이 대단히 발달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임금노동과 노예제도 사이에는 이상한 유사성이 있고 또 있어 왔다. () 노예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원칙적으로 비인간적인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팔려나갔든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빌려준 처지든, 소유주가 바뀌는 순간,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명령을 이해할 수 있고 지시받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619~620)

 

더 큰 문제는 2009년의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체제가 파국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당한 비중의 인구가 실제로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 특히 신용시스템들을 마치 영원히 이 땅에 존재할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629~630)라고 주장한다. 이는 부동산 불패를 외치며 집값은 언제나 뛰기 마련이라 여기고 투기에 열을 올려왔던 이들이 부동산 버블을 불러왔고, 이제 그 버블이 언제 꺼질까라는 두려움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 하에서 이러한 파국은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인간경제로의 회복을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경제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경제 돈이 물건을 구입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사회적 통화의 역할을 하는 경제”(283)를 의미한다. 즉 돈이 지금과 같은 가치의 척도로서 등가물을 표시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임을 상징하는 경제를 말한다. 그러한 경제 하에선 노예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경제적 속박을 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동등한 인간들 사이의 상호부조가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이와 같은 인간경제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에스키모의 사례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141)

 

저자는 실제로 인간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경제가 주요한 경제형태였음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관련 분야를 전공하는 이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겠지만, 거꾸로 나와 같은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읽기엔 분량이나 내용의 구성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부채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빚이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 성경에 나오는 희년 정신과 같은 대규모 부채탕감 계획이 전혀 허황된 일이 아님을, 나아가 얼마든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면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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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1-2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관점이 선명해 보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자본주의 발명은 100년이 조금 넘었지요. 그렇다면 인류역사를 놓고 볼 때 아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죠.
그래서 희망해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그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구 곳곳에 자본주의의 악의 꽃은 만발했다가 이제 지려하나 봐요,
온갖 악취와 병폐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도!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조금 더 가까워질 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nunc 2012-01-27 00:15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한 250년쯤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있어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겠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