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단언컨데, 난 '정의의 편'이라기 보다는 내 편할 때만 정의를 찾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상이라는 건 의외로 정의와 불의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불편을 느낀다든가 내 스스로가 혐오스럽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그런 내가 '아, 그래도 난 역시 정의를 좋아하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소설을 읽을 때다. 내가 "이런" 소설이라고 하는 건... 뭐랄까 선과 악이 불분명해서 더더욱 현실스러운 소설이랄까. 예를 들면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이라든지 강도는 약하지만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랄지. 어쩌다보니 다 일본소설만 예로 들게 되었지만 요컨대 (내가 생각하기에)악인이 악인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게 나는, 진절머리가 나게 싫다.

 

세상에는 언론 플레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알려지지 않은 채 지나가는 진실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어도 책을 읽으며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역시 기분이 나쁘다.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면 이렇게 푸념하고 싶은... <모방범>은 그런 책이었다.

 

역시나 이름치 답게 난 한권만으로 다른 책 2권이 될 <모방범> 시리즈 3권 내내 얘가 누구지... 하며 감으로 주인공을 구분하는 미련한 짓을 해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아리마 요시오' 할아버지와 단순히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서 기억한 신이치는 언제든 구별해 낼 수 있었으니 대충 그정도면 합격점을 줘도 되지 않을까...

 

이야기는 방대한 양 답게 복잡하다. 희생자들의 이야기, 범인의 이야기, 그 범인을 잡으려는 사람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 이 세상이 범인과 희생자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항변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사건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듬 조각케이크처럼 조심스럽고 아름답게(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이) 답고 있다.

 

1권의 초반에서는 야금야금 희생자 가족과 발견자, 경찰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도대체 범인이 누구야! 라고 부르짖었지만 후반에는 딱 봐도 이 자식...하는 말이 절로 나올 범인이 등장한다. 이런 멍청이라니,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2권, 3권을 읽으면서 차라리 그 멍청이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력적인 악당을 좋아한다. 오지랖 넓고 이리저리 치이는 천사표 주인공보다는 쿨하게 자기 이유를 관철하는 매력적인 악당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지만 (주위에 주는 피해는 제쳐두고;) 핵심은 악당의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만 쏟아졌던 '감정이입'이 악당쪽에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감정이입이라기 보다는 불운한 과거에 대한 동정-쪽에 가깝지만. 하지만 그건 이야기 구성 안에서 악당이 자기 이야기를 펼쳐보일 무대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뤼팽은 괴도지만 그 엉뚱하고 기발한 변신능력이며 가끔 나오는 유모, 그의 취미 등을 종합해야 그를 '매력적인 괴도'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모방범>은 그런 무대가 없다. 덕분에 나는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가슴을 쳐야 했던 거고. 2권까지 범인은 이름도 없이 별명으로만 등장한다. 그의 이유없는 악의, 단순한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 덕택에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진정한 이유를 펼쳐보일 무대를 박탈당한다. 아니 뭐 그놈이 한 일이 있으니까 기회를 준다해도 뭐라고 거짓말을 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니 사실 힐끗힐끗 드러난 과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감정이입'할 자신이 없다. 거기에 감정이입하게 되면 내 인간성은 끝이다, 라는 확신이 들어서일까.

 

따지고 보면 전체적으로 내가 답답했던 이유는 <악인> 때와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언론의 섣부른 판단과 보도에 '진실'을 아는 내가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거다. 물론 현실에서야 내가 '진실'을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주어지는 정보를 순순히 읽고 보지만 그 이면에 실은 그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절절한 경고- 내지는 고발을 읽는 셈이다.

 

난 정의를 옹호한다기 보다 법을 선호하는 편이고(물론 악법도 법이다, 라고 단언할 자신은 없지만) 오손도손 살아가는 집안의 평화를 좋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행복을 태연히 지켜보는 범인의 심정을 이해도 못하겠거니와 언론의 자유, 알 권리를 외치면서도 결국은 '흥미'위주, '화제'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언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렇게 당장은 분개해도 이 책의 여운이 사라질 때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TV를 볼 내 자신이다, 슬프게도.

 

뭐 그런 답답함을 뒤로 하고, 이 <모방범>은 과연 극찬받은 평가가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뒤가 궁금해서 두꺼운 두께도 상관않게 되는, 그런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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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초 살인 사건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세계는 독특하다. 온다 리쿠를 잘 알고 작품도 잘 아시는 분들에 비하면 나야 겨우 입문자에 불과하지만, 겨울날 따뜻한 집에서 현관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듯이 그 세계의 입구에만 서있어도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장르도 내용도 다르지만 작품에는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다.

 

온유하게 흘러가는 일상과 그 밑에 숨겨진 이면. 그 미묘함이 자아내는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는 현실의 전혀 다른 면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이야기의 부산물일 것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환타지와 전혀 무관한 내용일지라도 독특한 긴장감 덕분에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더더욱 오싹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런 점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이 1001초 살인사건의 제목은 '일본의 환상 소설가 이나가키 다루호의 1001초 이야기를 패러디했다고 뒷표지에 친절하게 쓰여 있다. 그 밖에도 수록된 단편의 간단한 정보를 뒷표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외우거나 뭔가를 연결하는데 영 재주가 없는 나는 분명 책을 읽기 전 뒷표지를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목과 정보를 매치시킬 수 없어 그냥 열심히 읽고 소화시켜야만 했다. 분명히 알고 읽으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아쉬운 일이다. (물론 모르고 봐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단편소설집이라 총 14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제일 처음 수록된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엄청난 미소녀인) 리세는 나오지 않지만 그 작품의 뒷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더군다나 실질적 리세의 파트너인 '천사같은 외모의' 요한이 나왔으니! 작품이 좀 더 길지 않은게 애석할 뿐이다. 시원섭섭하게 한 단편을 끝내고 났지만 아직 이야기는 13편이나 남아 있다.

 

기대되기도 하고 얼른 읽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나를 갈등하게 하는 부분이다. 더 읽을 거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기쁘지만, 얼른 이 책을 다 읽어 끝을 보고 싶기도 하고. 책을 읽을 때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늘 책을 그만 읽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단편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 이번에는 수월하게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들수 있었다. 장편인 경우에는 애매하게 끝이 나면 수업 시간에 안절부절 책 표지만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하니까. 덧붙여 말하자면 장편 중에서도 몇 권으로 나뉜 책은 정말이지 학업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런 의미에서 새 학기에 단편집을 집어든 건 정말이지 괜찮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온다 리쿠의 책. 온다 리쿠의 책은 펼치는 순간 이세계다. 긴장감과 미묘한 분위기가 독자를 끌어들여 책 속의 세계를 부유하게 만든다. 책을 덮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 질 정도로. 그게 바로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내 일상에서 탈피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가체험의 세계. 그게 비록 새학기의 시끄러운 강의실일지라도, 책을 펴드는 순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한 긴장감의 세계. 그게 바로 온다 리쿠의 세계고 매력이다. 그런 '세계'가 14개나 펼쳐지는 별천지의 책, 1001초 살인사건이었다.

 

-선입견이라는 거 참 알 수 없다니까요. 맘대로 그럴듯한 논리를 세워 버리니까 무서운 거구나 싶어요. (68)

 

-어렸을 때 쓰기 연습을 하면서 같은 글자를 몇 번씩 쓰다 보면 점점 글자가 이상하게 보이고 나중에 가선 글자가 읽히지 않게 되고 그랬는데요. (69)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한테 시키는 건 좋지 않아. 자기가 솔선해서 안 하면 아무도 안 따라오는 법이란다. 그쯤은 다들 알 법도 한데 말이야. (181)

 

-그녀는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자기 얼굴을 마법의 거울에 비춰 보지는 않았나. 거울은 그녀의 현실 속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나. 아니면 그녀의 눈에는 이미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어떤 불행을 짊어지고 있었을까. 어떤 충족되지 못한 갈망을 품고 있었을까. 백설 공주를 죽이는 데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188)

 

-불확실한 세월. 연속되었을 세월. 그 세월 속에 파묻히고 가라앉아 사라져 버린 것은 대체 얼마나 될까. 아니, 오히려 사라져 버린 것이 대부분이고, 남은 것이 조금뿐인지 모른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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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
수잔 캔들 지음, 이문희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추리 소설 작가 중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다들 어떻게 대답할까? 책 읽는 범위가 의외로 좁아 다른 사람이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는지는 오랫동안 내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내가 읽는 책의 카테고리나 작가가 상당히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한 후 슬슬 다른 사람의 독서습관이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궁금해진 건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리뷰를 쓴 책만 봐도 극명히 드러나는 내 독서 취향은 추리 소설이 50% 소설이 30%, 동화와 만화책이 각각 10% 가량일거다. (물론 만화책을 소설보다 실컷 읽고 있지만 시리즈물을 하나로 쳤을 때) 그만큼 추리 소설을 읽는 비중이 큰데도 내 '독서 역사 : 추리 소설 편'은 그저 코난 도일 - 모리스 르블랑 - 애거서 크리스티 로 나뉠 뿐이다. 중간중간 다른 작가들의 추리 소설을 읽지만 작가 이름으로 찾아가며 읽은 작가는 저 세 작가 뿐이니까.

 

어릴 적 엄마가 제일 처음으로 사준 전집이 홈즈 / 뤼팽 전집 이었던 관계로 내가 제일 처음으로 접한 추리 소설은 당연히 홈즈와 뤼팽 시리즈였다. 전집은 어쩐지 1권부터 읽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차근차근 읽었던 기억이 선명한 그 전집은 시리즈의 앞 부분은 뤼팽이고 뒷 부분은 홈즈였다. 뤼팽의 괴도지만 은근한 남자다움과 인간다움에 감정이 끌렸다면 홈즈의 날카로운 추리와 완벽함은 슬슬 발달하려는 내 이성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결국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초등학교까지만 해도 홈즈와 뤼팽에 홀딱 반해 있었던 내 추리 소설 정신계에 큰 변화가 왔다. 중학생이 되고나서 견문(?) 넓히고자 홈즈와 뤼팽의 뒤를 이을 추리 소설 시리즈를 찾다보니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추천해 주었다. 그 당시엔 (지금은 검정 책등으로 나오고 있는) 해문 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 문고판처럼 작(지만 가볍지는 않)게 나와 있었는데 총 80권이나 되는 길고 긴 전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책 수집의 시작이었던 것도 같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산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은 확실히 그 노력의 보상이 되었다.

 

신선한 발상과 트릭, 거기에 뤼팽의 인간미 넘치는 매력이 빛나는 뤼팽 시리즈, 정교한 트릭과 홈즈의 신들린 추리력, 왓슨의 어딘가 어리숙하지만 따뜻한 성품이 매력적인 홈즈 시리즈와 달리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는 주인공이 여러 명(미스 마플, 에르큘 포와르, 부부탐정 등)인데다 어딘가 로맨스 소설적인 분위기의 설명, 다양한 배경 등등 견문 넓히기에는 최적의 추리 소설이었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분명 남들은 전혀 관심없을 내 추리 소설 변동기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에서 애거서 크리스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소설 같이 드라마틱한 삶의 부분을 안고 살았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위해 http://ko.wikipedia.org/wiki/%EC%95%A0%EA%B1%B0%EC%84%9C_%ED%81%AC%EB%A6%AC%EC%8A%A4%ED%8B%B0)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은 아직도 '진실'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라고 해도 총 80권의 책들을 읽어내려가기 바빴던 나는 정작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생애나 실종사건, 기억상실증에는 그리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서 남을 이해한다는 '간접 경험'이 잘 살아있다. '작가'로서만 생각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인간'으로서의 감정, 상황, 결단을 다시 한 번 (그것이 반드시 진실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살펴보는 계기가 됐달까.

 

쎄쎄는 크리스티타운이라는 테마도시의 이벤트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아마추어 추리소설 작가다. 사랑하는 애인과는 결혼을 결정해야 하고 출판하고자 한 크리스티 자서전은 편집자의 은근한 협박에 유보되고 있지만 크리스티타운의 첫 개장날 개최될 추리 연극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쎄쎄에게 난데없이 '미스 마플'역의 배우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미스 마플' 역에 도전하는 쎄쎄. 그걸로 그 날의 모든 불행한 사건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일단, 스토리를 얘기하기 전에 주인공 이름이 '쎄쎄'라 처음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외국에서 이탈리아 인사 '챠오'를 쓰듯 중국어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역시나 이름치에 빛나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추리소설로도 애정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불행히도 아마추어 추리소설 작가 쎄쎄는 회색 뇌세포의 에르큘 포와르만큼 사건을 원활하게 풀어나가진 못하지만 그의 회색 뇌세포를 커버할 수 있는 주변 인물(특히 내가 좋아하는 도트 부인)와의 관계를 재치있고 스릴있게 그려나가 결국엔 올바른 '진실'조각을 찾아낸다. 거기다 현재 애인과의 애정 전선, 어쩔수 없이 마주한 전 남편과 그의 약혼녀 사이의 감정 소모, 알던 사람이 죽었다는 상실감이 뒤섞여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상황을 만든다.

 

그래도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맛'은 수잔 캔들이 사실에 입각해 재구성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사건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감정과 쎄쎄의 내적상황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이 이야기는 쎄쎄가 증거가 아니라 사람의, 자신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되는 다른 일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쓰고, 믿은 그 말. 사랑 덕분에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기쁘다.

 

추리소설에 애정소설은 언제나 최고의 궁합인 듯 하다. 사랑과 돈은 추리소설 최고의 동기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재미있고 읽기 쉬운, 추리소설이었다. 이런 책이라면 추리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읽기 쉬울 것 같으니 오랜만에 동생에게 추리소설을 권해봐야겠다.


-책을 덮었다. 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현실에서의 도피였지 현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책을 폈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야 했다. (98)

 

-사람들이란 언제나 우리를 시험하려 든다. 과연 우리를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135)

 

-난 '나의 가장 행복한 주말'이란 코너의 중독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큰 이유는 사람의 행복한 주말이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똑같다는 게 신기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174)

 

-범죄는 무섭도록 계시적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행위는 정신을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그 사람이 숨을 쉬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오직 그만의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일은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260)

 

-해가 지도록 그곳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내가 잊어버리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난 스스로 기억상실증에 빠진 거였구나.
애거서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290)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되는 다른 일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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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성 살인사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또다시 '살인사건'으로 끝나는 제목의 책을 골라봤다. 사실 일본 추리소설은 심리적인 면이 강조되는 작품이 많은 듯 해서 오래전부터 외국 추리소설에 익숙해져있는 나로서는 스트레스를 풀려다 머리 아플정도로 몰입하게 된달까. 결코 일본 추리소설이 싫은 건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스트레스 풀기'에 알맞은 추리소설 류는 아닌 듯 해서 의식적으로 일본 추리소설은 피해왔지만 모처럼만의 도서관 나들이에 추리소설만을 빌리려니 냉큼 '절규성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책을 한아름 들고 책장 앞에서 고민하기를 수 분, 어차피 고민할 거 그냥 빌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작고, 척 보기에도 우울한 분위기의 표지를 다른 책 위에 올렸다.

 

들고 다니기 쉽게 작은 책이라 당장 펴들었는데 생각 외로 가벼운(단순히 단편이라 그렇게 느낀 것 같지만) 이야기인데다 단편의 제목이 하나같이 ooo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 후기를 살펴보니 평소에는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을 피해오던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잡지청탁으로 처음 ~살인사건이란 제목을 달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리즈물로 쓴 단편을 모아 만든 작품이 바로 이 '절규성 살인사건'이라고 한다.

 

각 단편들의 제목은 흑조정 살인사건, 호중암 살인사건, 월궁전 살인사건 등 작품 안에 나오는(즉 대부분 배경이 되는) 장소의 이름을 딴 살인사건으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이다보니 장소의 이름도 독특한 뜻이 있어서 작품 속의 숨은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절규성 살인사건>은 총 6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범죄사회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대학친구이자 조수로 일하고 있는 추리소설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이다. 추리소설작가라고 해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야기에 재치를 더해주는 화자 역할으로 홈즈와 왓슨으로 치자면 충실한 왓슨 역할이다. 어딘가 초연한 성격인 히무라 히데오와 달리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성실하고 의욕 넘치지만 그만큼 추리실력만큼은 뒤쳐지는 어리숙함을 매력으로 뽐낸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일본판 홈즈와 왓슨같은 충실한 콤비의 짧은 단편이지만 확실히 일본 추리소설다운 '뒷맛 씁쓸함'이 은연중에 뿜어져 나온다. 특히나 마지막 작품이자 표제작은 '절규성 살인사건'은 작품 중 길이도 제일 길지만 제일 뒷맛이 씁쓸하기도 하다. 추리소설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으니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절묘하고 매우 현실적이며 그래서 더 씁쓸한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끔씩 드러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사고방식에 (추리소설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웃으며 공감할 수 있었다. 왓슨이 철저히 홈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좀 더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편이다. '통조림' 상태의 작가라는 건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실제하는 모양이다. 사실 내가 제일 공감한 건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유명하지만 사실상 일상 대화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 이솝우화에 대해 나랑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다니 소소하지만 기뻤다.

 

아무래도 화자가 추리소설 작가다 보니 추리소설에 대해 '읽는' 관점이 아니라 '쓰는' 관점에서 말해주고 있어서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리소설을 다시 생각해보는 독특한 기회가 되었다. 그런 말들을 읽어도 고정관념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왜 추리소설 작가가 이렇게 추리를 못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지만 말이다.

 

아리스가와-히무라 콤비의 추리에 흠뻑 만족하며, 오늘은 이만 추리소설을 접어야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완전히 텅 빌 수는 없는 것이라, 그 빈 머릿속에도 여러 가지 사념의 조각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10)

 

-추리소설로 사람들을 속이는 테크닉은 마술과 달리 전혀 실용적이지 않아. 작가만 알고 있는 답을 맞춰 보라고 하면서 일부러 독자가 알아채기 힘든 힌트를 이곳저곳에 뿌려 놓고 혼란에 빠뜨리기만 하면 되니까. (21)

 

-그것은 이 안에 있습니까? 그것은 입는 것입니까? 그런 질문을 스무 번 하기 전에 출제가 생각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맞추는 게임 말이다. 질문의 답을 모으면 모을수록 정답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국면의 초조함과, 정답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이 게임의 참맛이며, 그 맛은 추리소설의 수수께끼 풀이와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1)

 

-뭐가 '마음의 어둠'이란 건지. 그런 알맹이 없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무언가를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전쟁, 빈곤, 질병, 그런 '커다란 이야기'를 소설의 주제로 사용하기 어려워진 요즘, '마음의 어둠'이란 것을 사랑하는 작가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웃기지도 않지. 그런 표현을 사용하면 자신이 좀 똑똑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음의 어둠, 마음의 어둠, 마음의 어둠. 얼마나 알기 쉬운 표현인가. 이렇게 읊다 보면 모든 사고를 정지시킬 수 있다. '활기찬 인생',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은행이나 보험광고에 필적하는 저질 표현이다. 모두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마음의 어둠을 노래한다. 그 백 코러스는 트라우마, 트라우마, 트라우마.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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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거미 클럽 동서 미스터리 북스 92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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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을 집어들면 제일 먼저 머리글을 읽고 다음으로는 후기를 읽는다. 상상력 넘치는 소설도 좋지만 그 작가나 작품을 번역한 역자의 머리글이나 후기는 더더욱 재밌다. 굳이 따지자면 메인 요리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이랄까. 과연 어떤 소설일지 기대하고 작가와 역자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그 두근거림이란!

 

소설 속에 숨어있는 작가가 전면으로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에 작가의 재기넘치는 면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더더욱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흑거미 클럽>은 정말이지 서비스가 풍성한 책이다!

 

자칭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친절하게도 독자들의 예상질문을 뽑아 길고 재미난 머리글을 써주었으며 심지어는 단편마다 꼬리글을 달아 단편의 헛헛함을 아낌없이 채워주었다. (내가 단편을 '헛헛'하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난 단편도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빨리 끝나는 게 가끔은 아쉽다.)

이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SF계의 거물이닌가? 하며 의심스럽게 집어든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내가 복잡하게 여기는 SF라도 볼 수 밖에 없겠다. SF계와 추리계를 넘나드는 작가라니 너무 천재적인 거 아닐까. 재능이 부럽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재능도 재능이지만 관심사가 정말이지 광범위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잘 떠드는 회원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지식들을 살펴보다가. 옛말에 한 우물만 파라고 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를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현대는 역시 정보화 사회구나, 하고 쓸데없는 감탄사를 내뱉어 보았다. 나로서는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분명 자신이 좋아서 하고 있겠지 싶어서 또 한 번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

 

어김없이 학교생활에 쫓기다보니 저절로 추리소설(그것도 자극적인 제목)에 손이가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장들 사이를 걸어가다 군데군데 숨어있는 추리소설을 한아름 집어들어 뒤뚱뒤뚱 대출대로 걸어가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책가방이 묵직할 수록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행복해진다.

 

<흑거미 클럽>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골드 디거(돈을 노리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 살인사건 같은건가~ 하며 집어들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작가에 잠깐 살펴보니 여자라곤 전혀 나오지 않는(!) 독특한 추리소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같이 매달 (대부분) 같은 멤버가 모여 사건을 실어나르고 어느 한 사람이 그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간다-는게 표면적인 구성이지만, 이 <흑거미 클럽>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꼬리말 뿐만이 아니라)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서는 미스 마플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온통 미스 마플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이 <흑거미 클럽>은 회원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묘미는 사실 헨리(그 모든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급사)가 사건을 해결하기 전 회원들 사이에 오가는 온갖 추리와 설명, 주장들이다. 온갖 전문직업군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 그런지 셰익스피어에 성경에 수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등 다양한 주제와 더 다양한 해석이 책 속을 날아다닌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추리에 할애되는 시간보다 회원들의 추리(라고 주장하는 전문지식들)에 할애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은 각각 관점이나 지식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언뜻 비춰주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난 어쩐지 헨리에게 정이 안 간다. 도대체 왜 일까-하고 혼자 고민해 봐도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너무나도 정직한' 헨리가 무의식중에 꺼림칙한 것 같다. 하늘에 맹세할 필요도 없이 난 항상 정직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서. 항상 정직하고 저렇게 척척 추리를 해내다니 잘난척쟁이 홈즈보다 더 완벽주의다. 요새는 인간적인 캐릭터가 각광받는 시대라고! 하고 소리쳐주고 싶지만 후기를 읽어보니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당연히) 헨리를 엄청 좋아하는 듯 하다... 할 수 없이 회원들에게 못다한 내 정을 쏟을 수 밖에...

 

나 역시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안락의자 탐정(한 군데에서 사건을 듣고 해결하는 탐정)파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라 이 너무 똑똑하고 사이좋은 회원들이 다시 모여 손님을 초대하고 (정직한)헨리의 시중을 받고 음식을 먹으며 고급 지식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은 문외한이시니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거라곤 소설에서 읽은 것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연달아 생각을 해내어 어떤 사건이든지 반드시 척척 풀어낸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래봬도 탐정 축에 끼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남겨진 오직 하나의 방법이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37)

 

-샌드 씨는 거짓말이란 자기방어 본능이나 또는 사회적 관습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방어 본능이나 사회적 관습을 모두 덮어놓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 나쁘다고 한다면, 우리 대신 진짜에게 거짓말을 시켜야 하니까요. (86)

 

-누구에게나 극적인 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때가 있으니까. 모두들 별에게 소원을 빌고 싶어하지.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싶어하며 여자로부터 덮어놓고 환영받고 싶어하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해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그런 것을 믿으려는 부분이 있다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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