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기행문
◉여행기간: 2008년 1월 14일~2월 8일
◉일정:델리(2박)-기차1박(12시간)-우다이푸르(3박)-버스1박(16시간)-아그라(2박)-기차1박(13시간)-바라나시(3박)-보드가야(2박)-기차1박(기차2회,지프)-다즐링(3박)-버스1박(14시간)-콜카타(4박)-기내1박
1.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소주병 7병을 가지고 갔었다. 오랜만에 우리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워할 우리 동포를 만나게 되면 함께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그들의 향수병을 달래주리라 생각하면서 가지고 간 술이었다. 우다이푸르의 ‘랄 가트 게스트 하우스’에 함께 묵게 된 젊은 20대 한국인 커플에게 1병을 주는 것 외에는 우리의 소주는 그다지 소용에 닿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있어보이지도 않았는데 문제는 무게였다. 여행 중의 배낭 무게는 무겁건 가볍건 그대로 인생의 짐이기에 무게를 조금이나마 줄일 량으로 하루는 남편은 남은 소주를 모두 털어 넣자고 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과 야외 발코니는 그 자체가 분위기 좋은 카페였고, 인도가 만만한 땅이 아니라는 걸 톡톡히 보여주었던 델리의 온갖 사기꾼들을 떠올리면서 안주를 대신했는데, 여기까지는 좋았다. “인도 여행은 여기서 그만하고 싶다. 돌아가고 싶어.” 소주를 모두 비우고 잠자리에 누운 남편은 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곧바로 잠에 떨어졌는데 나는 이후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청천병력 같은 선언은 “그래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혼자이고 싶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번 일정을 잡으면서 제인 먼저 염두에 둔 곳은 치토르가르였는데 그 동기는 한겨레신문에 실린(2007.12.27일자) 인도사학자 이옥순 교수의 글 때문이었다. 신문에서 오려내어 여권 사본 등과 함께 갖고 다니며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는, 이번 여행의 일정 선정에서 제 1순위를 제공한 그의 글을 그대로 적는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때로 한 토막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수백 년을 떠도는 로하르 부족의 이야기가 그랬다. 인도 서부를 여행하다가 마주치는 ‘영원한 방랑자’인 그들은 뿌리가 강해서 뿌리 없는 삶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약속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로하르 부족의 과거를 담은 치토르가르를 찾은 건 변화가 화두인 세상에 진저리가 나던 무렵이었다.
치토르가르는 평야지대보다 150m 높은 산정에 자리한 톱날 모양의 성벽을 가진 산성도시다. 놀이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듯 차를 타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견고한 일곱 개의 성문을 통과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황량한 치토르가르는 영화로운 과거를 증명하는 많은 유적을 품고 나를 맞았다.
8세기에 세워진 치토르가르는 성이 많은 라자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슬픈 역사를 반복한 메와르 왕국의 수도였다. 메와르의 힌두 왕들은 ‘영웅본색’의 용감한 지도자였으나 우세한 이슬람 침입자들에게 패배했고 그 마지막은 1568년에 왔다. 무굴제국에게 승리를 내준 왕은 도주했다. 그리고 남은 군인과 여인들은 적에게 굴욕을 당하기보다 명예로운 자살을 택했다.
로하르 부족도 치토르가르를 탈환한 뒤에야 돌아오겠다고 왕에게 맹세하고 정처 없이 도시를 떠났다. 그때까지 절대로 영구한 거처를 마련하지 않을 것이며, 동아줄을 써서 우물물을 긷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밤에는 촛불을 밝히지 않고, 침대에서 편히 잠들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왕의 고통과 왕국의 운명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왕은 끝내 치토르가르에 귀환하지 못했다. 그는 인근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죽었다.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약속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로하르 부족은 이후 다섯 가지 서약을 지키며 400년 동안 유랑하였다. 로하르 부족의 서약을 가슴 아프게 여긴 네루 총리는 그들을 설득하여 치토르가르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맹세 때문인지, 유랑생활이 편해서인지 그러나 그들은 곧 유랑생활을 재개하였다.
본업이 대장장이인 로하르들은 농기구를 고치고 막노동을 하며 지금도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러 도시의 변두리에 천막을 치고 잠시 거주하는 그들은 이동이 어려운 우기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쉬운 한 장소에서 지낸다.
방금 전의 약속도 깨는 세상에서 4세기 동안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는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옛날의 그 땅이 아니라고 가지 못하는 그들의 고향을 두 번이나 찾은 이방의 나는 무상한 세상에서 항상 그대로인 것이 그리울 때마다 그들을 떠올린다.
치토르가르의 성채는 비장미를 가진 남성적인 모습이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덜 매혹적이지만 로하르 부족의 일편단심이 향하는 웅장한 치토르가르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엄숙함을 일러주며 오늘도 너른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사람은 시간을 기다리지만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로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접근해오는 릭샤왈라와 흥정한 끝에 터덜거리는 릭샤를 타고 도착한 치토르가르. 40대 중반의 이슬람 신자인 릭샤왈라는 관광지의 인도인답게 참 끈질지고 적극적이고 계산에 민첩하다. 얼마를 더 주면 자신의 훌륭한 영어로 가이드를 하겠노라고 자처하고 나서지만, 웬만한 설명은 가이북이면 충분하고 델리에서 당할 뻔 했던 사기꾼 때문에 한마디로 거절해버린다.
이옥순 교수의 설명처럼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곳은 아니지만 ‘승리의 탑’이니 ‘명예의 탑’이니 무슨 궁전이니 그럭저럭 볼만하고 허물어져가는 잔해마저도 카메라에 담는다면 멋진 사진이 나올만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하거나 광고 사진을 찍어도 멋지겠다’ 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들었다. 지난여름에 갔었던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오녀산성이 잠시 떠올랐다. 해발 약 820m 높이에 있는 곳으로 동명성왕의 호기로운 기세가 느껴지던 곳이었다. 물론 규모가 다르지만 높은 산정에 자리 잡아 한 왕국을 이루고 천하를 호령했던 그 용감무쌍하고 기세등등하던 영웅호걸들을 잠시 떠올려본다.
얼마 후 분명 처음 흥정할 때 치토르가르 지도를 보여주며 전체를 모두 아우르는 코스를 간다고 해놓고는 몇 군데 유적지만 둘러보고 다른 말을 한다. 다시 얼마를 주면 저 안쪽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로 안내하겠다고 하는데, 시시콜콜 따지기도 피곤하고 여기까지 와서 대강 보는 것도 그렇고, 결국 마지못해 그러자고 해놓고 따라가자니 속에서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그런데 인적이 거의 없는 외길을 느린 속도로 가며 주변의 들판과 나지막한 언덕과 옛 저수지를 하나씩 천천히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나 매정하게 물리쳤건만 릭샤왈라 아저씨는 우리의 표정을 보아 가며 틈틈이 간단한 설명도 잊지 않는데 어느 순간, 진짜는 이런 외진 곳일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드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뚝 솟은 이곳 성채 절벽 아래로 펼쳐진 넓은 평야가 저 멀리 산 까지 닿아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게 바로 이거구나. 눈치 빠른 릭샤왈라 아저씨의 설명으로는 이 들판이 옛날에는 전쟁터였다고 하는데,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아련함으로 눈물이 핑 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평야를 보고 목이 메이다니, 이옥순 교수의 애절한 위의 글이 아니어도, 치토르가르의 비극적인 역사를 몰랐다 해도 분명 솟아오를 눈물이었으리라.
돌아오는 길. 치토르가르 버스 정거장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처음에 흥정한 금액 외에 좀 더 많은 돈을 우리의 릭샤왈라에게 주자는 남편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다. 가이드 하겠다고 제시했던 액수 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애쓰던 우리의 릭샤왈라는 나중에 만난 어떤 릭샤왈라 보다도 더 친절하고 정직했다는 것을 여행이 끝날 무렵에야 알 수 있었으니 적어도 후회할 일은 남기지 않은 셈이 되었다.
쿰발가르는 메와르 왕조에 있어서 치토르가르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15세기에 세워진 요새로 해발 1,100m고지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비상시에 왕들이 이곳으로 후퇴하던 곳으로 무굴황제 악바르의 연합군조차도 그 방어벽을 뚫고도 겨우 이틀간 겨우 버티었다는 곳이다. 다음 날, 예약한 대절 택시를 타고 쿰발가르라는 곳으로 향했다. 전 날 다녀온 치토르가르의 여운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여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역시나 쿰발가르는 말 그대로 철통 요새였다. 해발 1,100고지 위, 둘레 36km 이르는 성벽. 그러면 뭐하나. 결국 1568년 패망한 메와르왕조는 마침내 치토르가르를 떠나 우다이푸르로 천도한다.
그런데 쿰발가르의 성채에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딸아이의 걸음이 자꾸 뒤쳐진다. 힘들어하는 딸아이의 호소를 꾀병으로 생각한 남편이 한마디 한다. 잠시 기분이 상한 아이를 다독이며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간을 10여 분 남겨놓고 짜이를 한 잔 마신 후 다시 라낙푸르를 향해 출발한다.
라낙푸르는 자인교 사원이다. 15세기 메와르 왕조 시대에 지어진 대리석 사원으로 사원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1,444개의 기둥과 기둥에 새겨진 각기 다른 다채로운 문양으로 무척이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사원이지만 겉모양을 보아서는 그 호화로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숲 속에 파묻혀있고 하늘을 뒤덮다시피 한 까마귀까지 더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사원의 이런 모양새는 외적 형태보다는 내면의 풍부한 생명의 중요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남인도의 스라바나벨라골라의 자인교 성지와는 또 다른 자인교의 모습이다. 몇 개의 유명한 자인교 사원이 더 있다는 데 인연이 닿으면 자인교에 대해 집중 탐구를 해보리라.
그런데 이렇게 멋진 사원을 단 5분 만에 보고 나와야했다. 딸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택시에서 쉬게 하고는 남편과 겨우 번갈아가며 보고 나와야했기 때문이다. 다시 우다이푸르까지 돌아오는 60여km는 좌불안석, 열이 펄펄 오르는 딸아이를 보니 여행은 무슨 여행. 여행 준비에 들떠 지내던 지난 몇 개월의 어리석음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된다. 다행히 네 자녀를 두었다는 55세의 친절한 택시 기사 아저씨의 배려로 우다이푸르의 한 소아과에서 의사의 진찰과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라고 묵묵히 순서를 양보해 준 현지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딸아이는 그 후로 이틀을 꼬박 앓은 후에 회복할 수 있었고 우리 내외는 딸아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우다이푸르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대신했다.
인도 여행은 처음인 남편이 겪은 인도의 각종 부조리와 모순과 더러움과 차별로 마음이 상한 남편은 결국 여행 중도 포기 선언을 하고(취중이었지만), 특별한 원인 없이 사흘을 앓았던 딸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 만 으로도 내가 그간 가꾸고 지켜온 나의 왕국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기 보다는 여행이 잠시 흔들렸었다. 한 왕국의 눈부신 번영과 영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건재하고 있는 견고한 성채도 결국은 역사 속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가 되어버리듯 우리 가족의 여행도 결국엔 우리만의 옛 이야기가 되어 사진으로만 몇 장 남게 되겠지. 그나저나 집에 두고 온 베고니아 화분이 걱정스럽다. 물을 좋아하는 베고니아는 얼마 전 끈이 풀어진 강아지의 습격을 받고 이제 겨우 서너 장의 이파리로 안쓰럽게 재기하는 중이었는데 차라리 누구한테 맡길 걸 그랬나. 커다란 공중 정원 같은 치토르가르와 아무도 근접 못할 견고한 쿰발가르를 버려야만 했던 메와르의 슬픈 이야기에 겹쳐 집에 홀로 남은 베고니아가 자꾸 마음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