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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평점 :
나에겐 오래된 친구가 있다. 16년 전인 고등학교 1학년, 각반 반장들과 학생회 간부들이 모여 간부여행을 갔다. 진도의 어느 초등학교, 활짝 핀 수국 앞에서 신경숙의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졌다. 1학년은 제2외국어가 일어와 불어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애는 일어반, 나는 불어반이었다. 2학년이 되어서는 제2외국어반에서 또 이과 문과로 나뉘었다. 그 애는 이과, 나는 문과였다. 이런 연유로 친해질 물리적 거리가 하나도 없는데도, 우린 친해졌다. 가장 즐겨하던 것은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기, 같이 있으면 수다 떠느라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딱히 같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앉아서 수다떠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둘이서 산책하면서 수다를 떨다보면 재밌어서 배를 잡고 웃느라 여기서 쭈그려 앉고, 몇 걸음 못가서 또 쭈그려 앉았다.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던 친구도 막상 같이 있으면 자학개그로 유쾌했고, 난 그 애의 그런 예민함이나 감성이 소설가가 되기에 좋은 자질이라고 이야기해줬다.
소설가를 꿈꾸던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 번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고, 몇 년은 글쓰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뭐가 맛있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집에는 별일없냐는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소설 이야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거리는 넘쳐서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하는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 친구가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니 시기는 그런데,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일 때문은 아니었다. 일을 시작할까 말까 고민할 때 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말고 너의 필요로 고민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의 마음과 그 일이 친구의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달라졌다. 점점 그 애와 하는 이야기들이 지겹고, 쓸데없고, 짜증이 나서 듣기가 힘들었다. 그애의 남자 관계, 사람 관계 이야기에 잔소리를 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는 내가 짜증나서 점점 만나는 걸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가 짜증나서 상처주는 심한 말을 점점 하게 되고, 그런 말에 상처 안 받는, 혹은 안 받으려 외면하는 게 또 비겁한 것 같아 마주보기가 싫어졌다.
전화도 문자도 피한 게 2년쯤 된 얼마 전, 또 연락이 왔다. 사람들과 관계맺기에 게으른 내가 이렇게 길게 인연이 이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 여기며 만나기로 했다.
그 사이 친구는 제자리 걸음인듯, 하다가 또 변해있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친구의 “소설 쓰는 사람은…”이라거나 “우리 쪽 일은…” 하며 자신이 속한 분야를 특별하게 말하는 것을 참고 듣지 못하고 “세상 모든 일이 그런 부분이 있지.” “영업에 필요한 정신이지.” “뭐 예술을 한다는 게 그런 큰 특징이 있는 거지.” 하는 식으로 그 친구의 특별함에 대한 이야기를 보편적 이야기로 바꾸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힘들었지만 잘 이겨내고, 이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을 들으며 2년 전에 한 이야기였는데, 그대로라는 식으로 힐난했다. 그러다 곧 내가 뭐하는 짓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지고, 너의 어떤 점이 그러는지 자꾸 짜증나고 거칠게 대꾸하게 된다고 말했다. 난 그냥 너가 좋아서 만날 뿐이라는 그 애에 말에, 다시 화가 나고, 우리 관계가 변했는데 넌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얼마나 너 중심인지, 잘 지내? 라고 물을 때 내가 엉, 잘 지내지, 하고 나면 역시 넌 잘 지내는 구나, 나는 말야…하는 너의 준비자세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잔뜩 늘어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박범신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 친구가 작가 박범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1997년 <흰 소가 끄는 수레>에 매혹되어 그의 작품들을 읽었던 날이 있었다. 당시에는 잘 나가던 인기작가가 절필을 하고 칩거를 하다, 자신을 둘러싼 여러 비난과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글을 썼다는 솔직함이 충격적이고 멋졌다. 그런데 얼마 전 읽은 박범신 소설 <은교>는 소설로도 재미있고, 인물들도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었고, 사랑이야기보다는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며 감동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솔직함들에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어떤 평가나 비판도 다 알고 있다는 느낌.
세상에서 가장 쉽게 상처받고 예민하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새들은 스스로 길을 내고 스스로 길을 지운다.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가도 그 흔적이 남지 않듯이. 톨스토이는 말년에 자신의 작품을 다 불태우고 싶다면서 먼 변방의 간이역에서 죽었는데, 이제 그 마음 알 것 같다. 삶의 족적을 깊이 남기고 싶은 것도 욕망이고 그 흔적을 물새처럼, 아무것도 없이 다 지우고 싶은 것도 욕망이다. 이 저녁, 혼자 앉아서, 내 몸은 왜 새처럼 가볍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나는 무슨 꿈을 좇아 여기 왔을까. 91p
-소설을 보든, 에세이를 보든 작가의 문장에서 여자, 젊음, 명예에 대한 욕망이 읽힌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솔직히 말해준다. 삶의 족적을 깊이 남기고 싶은 욕망에 그 흔적을 물새처럼, 아무것도 없이 다 지우고 싶은 욕망. 작가 박범신에게서 친구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왜 이리 갈팡질팡하는지 원. 올해는 별로 신수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되는 일이 없다. 마음도 천지간을 떠돌 뿐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펴낸 이후엔 소설조차 거의 쓰지 않았다.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근원으로 돌아가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 싶다는 도교적 욕망은 합치되기 어렵다. 그건 다른 길이다. 내가 갈팡질팡하는 것은 그 두 개의 욕망 사이에 내 몸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102 p
-그리고 앞에 계속 친구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내 상태가 그런 것 같다. 친구에게 넌 너한테만 빠져있어, 언젠가 좋은 소설을 쓰겠다고, 지금 쓰지 못하는데 언제? 하며 퍼붓는 이야기들은 사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고 있는 거니, 그저 게으른 거 아니야. 작가의 말처럼 한쪽에서는 치열하게 꿈을 찾는 것을, 한쪽에서는 그냥 하던 일 그나마 나에게 잘 맞는 일 그냥 하면서 편하게 살자는 마음이 부딪치고 있다. 그걸 멋있게 포장하기에 급급했는데, 노작가의 두 개의 욕망 사이에 낀 몸을 보니, 나 역시 꽉 끼어있는 기분이다.
2011.12.17
원고를 쓰지 않으니 뭘 하든 삶이 텅 빈 것 같다. 손이 말굽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39년여, 이리저리해서, 50권 이상 썼으니 손가락이라고 해도 그 습관과 지향을 잊었을 리 없다.
불운했던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까지 갈 수 없다.” 107 p
-습관과 지향...몸에 새겨진 습관과 지향...
오래 함께 살면 아내가 어머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지금처럼 잠 깨고 잠시 동안도 그럴 때이다. 아, 아내는 어떻게 수십 년이나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단순노동을 견디며 가족들 명줄을 이어주었을까. 아내의 그것에 비해, 내가 쓴 소설들, 사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쨌든 좋아서 평생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 세상에서 아내를 만나면, 내가 평생 밥을 하고 아내 보곤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해야겠다. (다음 세상에서도 아내와 살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113 p
-내가 박범신 에세이를 읽고 있다고 하니 누군가가 그런다. 작가가 그렇게 여자를 좋아한다고. 응, 그럴 것 같아. 책에 나와. 아내, 가족에 대한 의무가 얼마나 자기를 억누르는지. 그게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지만, 본능으로는 싫고, 떠돌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 부분을 찍어 보낸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다음 세상에서 아내를 만나면, 내가 평생 밥을 하고 아내 보곤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해야겠다.’니. 그러나 뒤에 괄호를 보면 빵 터진다.
그러나 난 요새 오래 산 부부를 보면, 여자들의 희생으로 부부 관계가 유지되긴 하지만, 그 부인들에게도 숨겨진 재미, 행복이 있을거라 여겨진다.
일방적이면 관계가 이어지지 않으니까. 작가도 가족 안에서의 그런 일방성을 힘들어하지만, 그래서 더 일방적이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집필 중의 작가는 그러므로 때로 짐승처럼 울부짖고 때로 폭포처럼 투신하고 때로 바람처럼 솟구친다. 가끔 물같이 고요하게 나부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갈림길과 단애와 함정들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과 같은 이런 모습으로 다시 쓰고 싶다. 나는 여전히 ‘청년작가’다운 기개로 늙어가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날 시퍼런 ‘현역작가’로 살고 싶은 꿈. 120 p
-박범신 작가 앞에 붙는 청년작가. ‘은교’를 읽고 나서도 그랬지만, 작가의 젊음에 대한 갈망은 크다. 그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 그냥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있어도 반짝반짝한 젊음을 보면서 눈부셔한 나를 생각하니, 젊다는 건 상대적이지만 그 갈망을 조금은 알겠다.
나는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으로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경우도, 젊을 때에 비해 환경은 놀랍게 개선됐으나, 행복지수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행복감을 연출하는 제스처가 늘어났을 뿐이다. ‘탄생 이전에서부터 부여받은 슬픔과 결핍감’이 언제나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자면, ‘행복하지 않게 태어난 케이스’일 것이다. 261 p
-이 부분을 읽고 친구에 대한 마음이 풀어졌다. 어쩌면 그 친구도 행복하지 않게 태어난 케이스일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불행할 게 없어 보이는데,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 같지만 따지고 들어가 보면 자신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항상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어쩌면 친구와 비슷한 마음 계열을 가진 작가가 솔직하게 말해주니, 마음이 풀린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가? 나는 나를, 내 상황을 행복, 불행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만족 정도의 마음이다. 지금이 최선인가? 최선까지는 아니지만, 최선으로 가는 길목쯤? 이라는 핑계. 그리고 행복, 불행이라는 단어가 참 싫다. 착하다는 말처럼.
돌아보면 아버지라는 핑계,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핑계, 어디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핑계로 늘 ‘차선의 선택’을 따라온 인생을 살았다고 느낀다. 나의 회한은 대부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말하고 싶다. 한 시기가 끝나면 한 시기가 시작된다고. 인생이란 새로운 시간의 입체적 설계라고. 지금은 ‘바르도’의 시간이라고.
이제, 평생 찾아 헤매던, ‘최선의 길’을 선택해, 생의 비의로 들어가는 큰 문을 만나고 싶다. 그것이 비록 ‘수직상승도’라고 불리는 최후의 그것일지라도. 142 p
-아, 작가도 ‘최선의 길’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니, 난 이 부분을 한 시기가 끝나면 다른 한 시기가 시작한다는 것,으로만 기억했는데, 최선의 길이라고 표현했다니.
작가에게서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예민하고, 눈물 많고, 사랑 많은 그러면서 더없이 솔직한 작가 박범신.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나랑 참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덮을 때는 아니다.
작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고향 논산에서 보낸 일기를 통해 그의 인생을, 그리고 나를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음, 책 리뷰치고는 너무 길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