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되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시간이란 그저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야속한 무엇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시작한 2019년도 이제 3주 가량 남았다. 뭔가 들뜨는 맘이 드는 12월을 보내면서 어김없이 올 한 해는 어떻게 지냈으며 앞으로 올 2020년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몇 년째 읽어야지, 혹은 읽다가 만 책 네 권을 다 읽었다. 내용도 모두 좋았지만 끝내 다 읽었다는 게 너무 기뻤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있고, 그 시간 때문에 다시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도 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거리 때문에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더 애틋할 수도 있다. 그게 신화이든 전설이든 소설이든 말이다.

 

 올해도 내년이 어떨지 기대하게 하는 이 책을 읽었다. 2015년부터 읽고 있는데 벌써 2020년이라니...('원더키디'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작년에 2019년 판을 읽었을 때도 놀라웠지만, 2020년은 얼마 전부터 이어진 개인의 신념이 삶을 주도하는 방식이 더 퍼져나갈 거라는 예측이 더 반가웠다. 나 역시 편리함을 위해 소비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한 것인 '비행기 타기'가 북유럽에서는 '플뤼그스캄', '탁쉬크리트'란 이름으로 이미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게 힘이 됐다.

 

그리고 적당히 아는 관계가 주는 편안함 역시 모두가 적당히 원한다는 것도 좋았다. 굳이 그 사람의 속속들이를 알 필요는 없으니까. '오지랖'이라 부르는 것이 과거 농경사회나 집성촌에서야 당연한 것일지 몰라도 도시에서 살 때는 참 불편하다. 내가 어제 반찬으로 문어를 샀다는 걸 온 동네 사람이 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그냥 내가 이 동네 산다는 걸 동네 사람이 아는 건 뭔가 소속감이 들게 한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준 단편집들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 역시 너무나 좋은 이야기이다. 최면술사도 너무나 좋았다. 징구... 징구는 정말 징구다. 찰진 위트와 뼈 때리는 한 방이 내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빛나게 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나는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인형술사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그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작가의 의도를 알지는 못해도 이야기가 주는 감동에 벅차는 건 할 수 있다.)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이디스 워튼... 너무 멋지고 멋지고 멋지다. 사랑한다 작가님들...

 

 '뱀파이어'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닌 사랑을 잃고 괴로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먹이사슬 최상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분명 선악 구도에서 악한 존재로, 혹은 걸어다니는 시체쯤으로 여겨지던 끔찍한 존재가 어느 순간 로맨티시스트로 변신한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도움이 매우 컸을 뿐더러, 과학의 발전 역시 한 몫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귀신이나 흡혈귀 같은 존재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 무서워하지만 믿지 않는다.

 

수키 스택하우스는 미드 '트루 블러드' 때문에 알게 되었다. 매력적인 수키. 그리고 매력적인 면과 끔찍한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너무나 확실하다. '생명은 소중하다.', '다르면 없앤다.' '죽인다'는 표현보다 '없앤다'는 표현이 더 인격을 말살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너무나도 유명하'신 분'이다. 블라드 체페슈를 모델로 한 이 인물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원형 같은 존재다. 이전에 있던 흡혈하는 존재를 하나의 인물처럼 정의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어찌보면 유치할 수도 있지만, 상상할 거리들이 너무 많아 읽을 때마다 즐겁다. 블라드 체페슈가 동방정교회, 이슬람교, 구교, 신교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였듯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역시 신에게 버림 받았다. 미국인인 퀸시가 물리적으로 힘을 행사했다면, 미나는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과연 그 '피'는 미나에게서 사라졌을까?

 

 '다르게 읽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물론 너무나 다르게 읽기는 참 잘 하는데, 이렇게 멋지게 다르게 읽기는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를 느끼게 하는 책은 너무나 좋다.

'지식'이란 권위에 한정없이 비굴해지는 나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도 저 너머의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는 독자이고 싶다. 뭐, 죽을 때까지 읽었는데 못 읽어내면 어쩔 수 없고. 하나라도 배웠다면 그걸로 족하다.

 

올해 다 읽을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있다. 얇은 데 정말 만만치가 않다. 분명 어느 정도 알아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나가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언젠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가 올 것이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블랙홀 안이든, 낙차에 따른 시간차든, 죽음 같은 결혼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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