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온다. 15년 전 관할서 내 학교 교사 자살 사건이 살인 사건이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으니 다시 조사를 하라고. 그리고 그 사건의 범인으로 15년 전 그 학교의 말썽꾸러기였던 기타가 새벽에 끌려온다. 그런데 그는 살인 사건이 아닌 그때 친구 둘과 했던 시험지 훔치기 작전인 루팡 작전을 이야기한다.

15년 전 고등학교 3학년이던 세 명의 학교의 문제아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 카페 루팡에서 전 세계 학생들의 꿈인 기말고사 시험지 훔치기 작전을 짠다. 그 카페 주인 일명 삼억씨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삼억엔 강탈 사건의 용의자와 비슷해서 붙은 별명으로 마지막 공소 시효 날까지 경찰서로 끌려갔었다.

이 세 명의 입을 통해 경찰들은 아무 연관 없을 것 같은 여교사 자살 사건과 루팡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재구성하게 되고 살해된 여고사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 속에 15년 전의 과거와 오늘이라는 현재, 고등학생들의 젊은 청춘의 팔팔한 모습과 경찰서에서의 초조한 취조과정과 경찰들의 지친 모습이 대비되어 두 개의 작품을 따로 또 같이 이어보는 느낌을 준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문제아 세 명은 이제는 만나도 어색한 각자의 다른 길을 걸어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타는 재수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업사원으로 결혼도 하고 딸도 낳고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고 있고 다쓰미는 그 모습 그대로 땅투기꾼으로 살고 있고 다치바나는 노숙자가 되어 있다. 세월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15년 전 그들은 단짝 친구였는데 정말 세월의 흐름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살인범을 찾아내는 것은 경찰의 몫이다. 딱 하루 동안 그들은 취조만으로 알아내야 한다. 그것을 작가는 치밀하고도 감성적으로 잘 구성해서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다. 역시 요코야마 히데오의 인간적인 면은 여전히 드러나면서 때론 그것 때문에 추리소설의 흠이 되었던 부분이 이 작품에서는 긴박함이 결합되어 멋진 추리소설을 탄생시켰다.

다른 작가의 작품처럼 화려함이나 기막힌 반전은 볼 수 없지만 이 작품 속에는 따뜻함이 있다. 우리가 세월을 물 위에 흘려보내듯 잠깐 멈춰 서서 ‘앗, 언제 여기까지 왔지?’하고 놀라게 될 때 ‘아,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는 마비된 무심함을 풀어주는 잔잔한 시선이. 그래서 나쁜 추억은 잊고 좋은 추억만 생각하며 앞으로는 후회를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애를 쓰자고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세상이 사람을 기이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고 어쩌면 원래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야 발견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작품과는 반대로 나는 후자 쪽이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만 앞이든 뒤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도 물살을 막아 재앙을 일으키는 토막이 있다면 다시 그 토막을 밀어내 물살을 다시 흐르게 만드는 토막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돌아가고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등불처럼 꺼지지 않는 것은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과 고마움을 잊지 않은 사람과 아직도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공소시효라는 법률 용어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여러분에게는 살아가면서 공소시효를 연상시킬 무언가는 없었습니까?” 범죄가 아니더라도 살아감 속에, 지치고 찌든 생활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가라앉히고 있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 외면하고 싶은 것들, 달아나고 싶은 것들을. 아니면 무심이라는 것이라도.  봉인은 의식 속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 무관심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니까. 각자의 생각 속에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 후회하게 되는 무엇인가가 남아 시효 만료를 기다렸다가 떠오른다. 그 기간은 누가 정하는 것이고 그때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과연 시효 만료란 존재하는 것일까. 살아있는 동안에 말이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공소시효 자체가 없어지고 기간이 늘어지고 더 많은 것들이 죄처럼 두께를 더해가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작가는 내게 또 하나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어쩌면 시효 만료가 아닐까...

역시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 이 작가의 작품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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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7-09-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것도 샀지요. 추석 잘 보내세요. ^^

물만두 2007-09-24 16:05   좋아요 0 | URL
잘하셨습니다^^
추설 즐겁게 보내세요~

비로그인 2007-09-2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젠장. 당분간 책 못사요. 이거 보구싶은데...

물만두 2007-09-26 11:38   좋아요 0 | URL
전 폭격당했습니다 ㅜ.ㅜ

sokdagi 2007-09-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이 별 다섯 개르 준 작품이라.. 얼렁 사서 봐야겠어요.

물만두 2007-09-27 10:05   좋아요 0 | URL
제 별점은 후하구요^^
이 작가를 워낙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정말 좋아요~

프레이야 2007-09-29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소시효에 대한 생각을 던지는 책인가 봐요..
상처입은 피해자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범죄자를 공소시효라는 제도가
놓아줘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에 대한 생각이 드네요. 영화 '그놈목소리'
처럼요.. ^^

물만두 2007-09-29 11:23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은 그렇게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공소시효 자체를 없애자는 얘기도 있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해지지 않는 우리 마음 속의 빚에 대한 것입니다.
혜경님 읽어보세요. 이 작가는 추리소설에서 많은 인생을 보여줍니다.

프레이야 2007-09-29 12:37   좋아요 0 | URL
앗, 실수^^ 좀 급히 읽었어요. 공소시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차라..
ㅁㅁ 근데 다른 땐 안 그런다우, 특히 만두님 리뷰를..^^

물만두 2007-09-29 13: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괜찮아요~
저는 늘 그러는데요^^;;;
사실 그런 면에서도 생각해보면 더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