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수렁 같았다.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자신도, 운전사도, 그리고 어쩌다 운명을 함께하게 된 다른 모든 승객들과 버스까지도
깡그리 그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느낌에 그는 온통 압도당하였다.
절체절명의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운전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전사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혹 착각이었던가?
갈색 보안경 너머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눈빛은 잘 읽을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러나,
돼지털 같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아나 있는, 그 검푸른 빛깔의,
입 언저리에는 분명 음습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허리를 편 그는 아무 말 업이 1번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차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그 운전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객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한 순간일망정,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절체절명의 피를 말리는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참으로 한가하고 태평스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였다.
승객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저 뒷자리에 구겨박힌 채 잠들어 있는 술꾼을 기억해냈다.
그 덩치 큰 사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술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간 승객들이 겪었던 그 끔찍스러운 상황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그는 여전히 기세 좋게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승객들의 귀를 새삼스레 파고들었던가?
그것은 분명 기이한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리고 둘째는, 이거야말로 기적 같은 사실인바,
그처럼 고집스럽게 미친 듯이 내달리던 버스가 어느결에 순한 나귀처럼 얌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승객들 중에는 문득, 그렇다면 악몽을 꾸었던 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단지, 일진이 나빴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랄 같은 버스에 걸려든 게 불운이었다.
삼십 분 앞서 출발한 차를 탔더라면,
혹은 삼십 분 뒤에 출발하는 차를 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무사하며, 머지않아 목적지에 닿을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승객들은 차의 무리 없는 주행 속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긴장과 노여움이 누그러지면서 낯익은 평화 - 저 일상 중에서 종종 경험해왔던- 가
그들의 마음을 푸근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위험한 순간은 더이상 없었다.
버스는 쾌적한 속도로 남은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터미널로 진입한 차가 동체를 한 두 번 가볍게 출렁거리고 나서 점잖게 멎었고
이어 출구가 매끄럽게 열렸을 때, 그랬다, 일부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보여준 그 감사의 표시는,
그러므로 거짓 없는 감정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테면, 저 노부인이 그랬다.
남편보다 한 발 앞서 출구로 나온 그녀는 운전사의 등을 토닥이며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운전사 양반, 정말 수고가 많았수. 얼마나 피곤허우? 정말이지 난 너무너무 감사해!"
그녀의 무사 귀환의 기쁨 때문에 평소의 온화함을 넘어 거의 눈부시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꽤나 지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는데 그 거동하며 뒷모습이
노인 티가 완연하였다.
말이 없기로는 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통로에서부터 열심히 밖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중꾼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가 하면, 저 일병은 좀 색다른 태도였다.
차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는 운전사의 정수리에다 꼬챙이 같은 시선을 박은 채
잠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모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도무지 편하지가 못하였다.
더러는 한두 마디씩 감정이 담긴 말들을 뱉기도 했는데 저 대여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데리고 탔던 젊은 어머니가 말하자면 그런 쪽에 속했다.
"당신은 애들도 없어요/ 운전이라고 해먹고 살려거든 맘뽀부터 곱게 가지라구요!"
말은 순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장 험한 말들을 뱉은 사람은 저 둥뚱한 중년여자였다.
한바탕 걸쭉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면서,
진단서를 떼어 기필코 니놈을 고발하고 말겠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종당에는 저 점퍼 차림의 사내로부터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승강대를 내려갔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그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차 안에 남은
사람은 둘, 아니 셋이었다.
운전사와 등산모의 사내,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내.
등산모의 사내가 운전석을 향해 진작부터 던져두었던 시선을 마침내 거두어들이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로를 거슬러 맨 뒷자리까지 갔고, 거기서 한동안 실랑이를 치른 끝에 아름드리
술푸대처럼 출렁거리는 사내를 떠메다시피 하여 다시 출구 쪽으로 나왔다.
그동안 운전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은 여전히 핸들을 감싸쥐고 고개를 약간 꺾은 채로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는 그 힘겨운 노력 중에도 운전사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비좁은 출구를 간신히 빠져나온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운전사의 얼굴이 비로소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열려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보안경을 벗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이
하나 거기 있었다.
==============================================================================
괴물이나 혈흔이 나오지 않는대도 끝까지 읽다보면 등꼴이 오싹한 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밉지만,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 됐다고 해서 금방 잊어버리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무력함이
더 밉지 않나요?
폭력을 계속 묵인하는 이런 자세들이 참으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입장에 서지도 말고,
묵인하는 입장에도 서지 않는,,
정정당당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됩시다! ^^
끝까지 함께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