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5층 6층씩 도는 고급 모텔들이 들어서 모텔 밀집지역을 이루기 전에는
위치도 가장 좋은 곳이어서 언덕 위의 빨간 벽돌집이 멋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때 알프스는 욕실 표시에 알프스장이라고 쓰여진 촌스러운 간판을 붙이고 있었지만,
1년 전 개축 뒤에는 외벽의 빨간 벽돌이 대리석 무늬로 바뀐 것과 함께 간판에서도
욕실 표시와 장 자는 떨어져나갔다.

알프스장은 완전히 새로운 알프스 모텔로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윤은 예전의 알프스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윤은 결혼 전이었고, 남편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그녀를 안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인, 신체 건강한 청년이었다.

남편은 언제든, 어디서든 그녀를 만지고 싶어했다.
거리를 걷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그는 온통 언제 어디서 그녀를 만질 수 있겠는지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으슥한 거리, 구석진 자리, 삼류 동시영화 상영관 그리고 밀폐된 방이 있는 식당..
그는 그녀를 만지기 위해 걷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았다.

그때, 윤은 그의 어디를 그렇게 사랑했던가.
그녀를 만지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 간절한 손길, 소망과 떨림으로 가득 찬 눈빛,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고 애절하게 반복되던 애원...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열렬하게 원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식사비나 영화표 값을 아껴 값싼 여관을 찾아 돌아다녔고,
허겁지겁 일을 치른 뒤에는 한두 시간 만에 그 여관을 되돌아 나오곤 했다.

그 숱한 여관들 중에 알프스장이 있었다.
그곳이 그녀가 지금 일하고 있는 알프스 모텔과 같은 곳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곳의 다른 여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알프스 모텔에 일자리를 정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구를 들어설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그곳이 아닌 예전의 알프스장을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날, 그녀가 알프스 모텔에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던 날,
하필이면 모텔 바깥에서는 인근 주민들의 러브호텔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장실 창문 바깥으로는 모텔 밀집지역으로 들어서는 언덕 아래의 2차선 도로가 보였는데,
그쪽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 깜빡이를 틀었던 차들은 시위대를 발견하곤 재빨리
직진을 해버리곤 했다.

그즈음 인근의  모텔들은 개점 휴업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건물 개축을 하느라 은행 빚을 쏟아붓자마자 곧바로 닥쳐온 그 엄청난 사태는,
다른 모텔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알프스로서는 거의 치명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장이 시위대의 구호 소리를 막기 위해 창문을 딛다 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사랑은 어디서 하라는 거야? 차 안에서 해? 차 없는 놈들은 물레방앗간에서 하고?"
그럴만한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윤은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사장이 기막히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다가온 이후, 그렇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사장은 화가 나서 "이 아줌마가 허파에 구멍이 뚫렸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웃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난데없이 튀어나온 '물레방앗간'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럼 사랑은 어디에서 하라는 거냐니...
사장은 정말,
모텔 알프스의 스무 개 객실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을 사랑이라고 믿는 것일까.

알프스 모텔에서 윤은 매일같이 그녀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흘린 체액들을 닦아내고,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구겨진 휴지를 모아 쓰레기 봉지에 넣고,
욕조에 엉켜 있는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변기 속을 닦는다.

침대 시트는 땀과 체액 그리고 때로는 핏자국들로 더렵혀져 있다.
쓰러진 술병들과 꽁초와 침이 가득한 재떨이, 구멍난 스타킹과 더렵혀진 팬티,
정액이 고인 채로 구겨져 있는 콘돔, 한 짝뿐인 귀고리와 넥타이핀...

윤이 알프스 모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쓰레기뿐이었다.

냄새나는 쓰레기들을 쓰레기봉지에 넣고, 시트를 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마지막으로 라벤더 향의 방향제를 뿌리고 객실의 문을 닫을 때 윤이 느끼는 것은
육체에 대한 환멸이었다.

그리고 그건 윤으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이기도 했다.

윤이 집에 가는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뿐이었다.
다른 청소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틀에 한 번꼴로 귀가를 했지만,
윤은 아예 일주일 내내 집에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윤이 모텔일을 하게 된 것도 실은 집밖의 잠잘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모텔이 있는 동안, 그녀는 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모텔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딴살림이라도 차린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일주일 만에 들렀다가 하룻밤도 자지 않은 채 집을 나서던 날,
윤은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시어머니의 기척을 느꼈다.

칠십 노인네의 미행은 서툴기가 짝이 없어서
집의 대문을 나설 때부터 윤은 이미 그 기척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버스 정거장을 한 정거장이나 지나쳐 걸었고,
알 수 없는 골목길들을 꼬불꼬불 돌았다.

시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고 윤은 점점 그 일이 재미있어졌다.
빠르게 걷다 느리게 걷기를 반복하는 윤의 눈빛이 밤고양이처럼 빛나고,
목덜미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노인네는 악착같이 윤의 뒤를 쫓았다.
윤이 노인네를 향해 벼락같이 돌아선 것은 자신도 알 수 없던
골목길이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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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바라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과 굵은 빗줄기뿐이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으나, 세상은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고 그 어둠을
가르며 마치 하늘이 찢어져 내리는 듯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있는 실내 기온도 뚝 떨어져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팔뚝의 맨살을 더듬었다.

어둠을 가르며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의 소리가 너무 거세,
살이 아픈 느김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벌써 열흘 가까이 이어져오던 폭염을 씻어 내리는 반가운 소나기였지만,
소나기치고는 좀 지나치다 싶은 감이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걷는다기 보다는 떠밀려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승용차들은 와이퍼를 분주하게 움직이며
언덕 아래의 차도로 연신 방향을 틀고 있었다.

비 때문에 승용차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산을 쓴 연인들이나 마찬가지로 마치 거센 물결이 휩쓸려가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폭우가 아니라 세상이 두  조각이 나더라도, 지금 당장은 사랑을 나눠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 난데없는 어둠과 빗속을 헤엄쳐,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을 찾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프런트에 나와 청승맞게 바깥을 내다보던 사장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장이 문밖을 내다보고 있던 한 시간 남짓,
언덕 아래의 2차선 도로로 들어서는 승용차는 열 대도 넘었지만 그중의 한 대도 다시
언덕길을 올라 모텔 알프스의 주차장 입구로 들어선 차는 없었다.

1년 전의 대대적인 개축에도 불구하고 그 1년 사이에 새로 들어선 고급 모텔들로 말미암아,
알프스는 개축 전이나 마찬가지로 그 지역 안에서는 가장 인상적이지 못한 여관이
되어버렸다.

비 내리는 날의 반짝 호황을 기대하듯,
사장은 비가 퍼붓기 시작하자마자 프런트에 나와 주차장 입구를 내다보았지만,
사실 사장은 지금 비어 있는 객실을 더 염려해야 할 형편이었다.

열흘 전, 장마의 마지막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이 한밤중의 폭우가 무지막지하던 날,
난데없이 객실에 비가 새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침대 위에 설치된 간접 조명등을 타고 빗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리다가
나중에는 쏟아붓는듯 했다.

그때 그 객실에 들었던 투숙객들은 중년의 남녀였는데,
그때까지 일을 채 치르지도 못했었던것인지 환불을 요구하는 남자의 얼굴이 사장을
때려 죽일 듯했다.

이튿날 새벽, 비가 무릎까지 들이찬 지하 세탁실에는 새끼 고양이들의 시체가 둥둥 떠 있었다.

폭우 속에 손님들이 환불을 요구하는 소동이 일어나고,
빈 객실에 양동이 세숫대야가 군데군데 놓이고,
남자 직원들이 옥상에 올라가 방수천을 뒤집어씌우며 난리를 피우는 동안
고양이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 구슬픈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새끼를 잃은 어미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고양이 시체를 건져낼 때,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틀에서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엄청난 돈을 들여 대대적인 개축을 한 이후 처음 맞이하는 장마철에 뒤통수를 맞아도
되게 맞은 사장은, 남자 직원들이 고양이 시체를 비닐 봉지에 담아낼 즈음에는 거의
기진맥진해 버린 듯했다.

지하 계단에 멍청히 서서,
직원들이 비켜갈 자리도 내주지 않은 채로 그는 다만 홀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내 집에서 새끼를 내는 놈들도 있는데... 꼭 내 집이어야만 한다는 놈들도 있는데..."

사장의 목소리가 어찌나 처량맞던지,
젊은 직원들은 늙은 사장이 혹시 그 고양이 새끼들을 땅에 묻어주라고 하지나 않을까
잠시 멈칫거리기까지 했지만, 사장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알프스가 문을 닫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싶었다.
사장은 건물 개축 등으로 인해 엄청난 은행 빚을 끌어 썼으나,
알프스의 경영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만 있었다.

알프스를 살리기 위한 사장의 안간힘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는 툭하면 새로운 경영 아이디어를 내놓곤 했는데,
그건 냉장고에 무료 음료수를 더 많이 넣어둔다든가,
좀더 획기적인 비디오들을 구비해 놓는다든가,
콘돔을 무료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여성 전용 세척기를 설치한다든가 하는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객실마다 비싼 생화를 꽂아놓는 것에까지 이르렀다.

청소원들을 닦달하는 정도도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은 직접 객실을 돌아다니며 빈 객실의 청소 상태를 점검하곤 했는데,
욕조나 변기에 물기가 남아 있는가를 알아보기위해 손바닥으로 직접 변기를
문질러보는가 하면 시트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했다.

청소원들은 죽을 맛이었다.

평일에는 그래도 견딜만 했으나 인근의 다른 모텔들에는 더 이상 빈 객실이 없어서,
알프스까지 하루에 몇 회전씩을 돌아야 하는 주말 같은 경우,
휴지통을 비우고 시트를 갈고 욕실을 세제로 닦은 뒤 다시 마른걸레질을 해야 하는
객실 청소는 거의 전쟁처럼 치러졌다.

사장은 그런 운 좋은 날의 손님들을 모두 단골로 묶어놓겠다는 듯이 청소원들을
몰아치고 또 몰아쳤으나 스무 개의 객실이 절반 정도라도 차는 날은,
한 달을 통틀어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모텔 알프스는 신도시의 외곽에 위치했다.

예전에는 논과 밭뿐이던 벌판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그 아파트촌 주변으로 카페와 나이트클럽들이 들어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우후죽순격으로 러브호텔들이 들어섰다.

모텔 알프스는 그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여관이었다.
다른 러브호텔들이 들어서기도 전, 카페와 나이트클럽들이 들어서기도 전,
신도시가 완전히 채 조성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 2편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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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수렁 같았다.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자신도, 운전사도, 그리고 어쩌다 운명을 함께하게 된 다른 모든 승객들과 버스까지도
깡그리 그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느낌에 그는 온통 압도당하였다.

절체절명의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운전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전사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혹 착각이었던가?

갈색 보안경 너머에 음험하게 숨어 있는 눈빛은 잘 읽을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러나,
돼지털 같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아나 있는, 그 검푸른 빛깔의,
입 언저리에는 분명 음습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허리를 편 그는 아무 말 업이 1번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차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그 운전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승객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한 순간일망정,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절체절명의 피를 말리는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참으로 한가하고 태평스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였다.

승객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저 뒷자리에 구겨박힌 채 잠들어 있는 술꾼을 기억해냈다.
그 덩치 큰 사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술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간 승객들이 겪었던 그 끔찍스러운 상황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그는 여전히 기세 좋게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승객들의 귀를 새삼스레 파고들었던가?
그것은 분명 기이한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는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리고 둘째는, 이거야말로 기적 같은 사실인바,
그처럼 고집스럽게 미친 듯이 내달리던 버스가 어느결에 순한 나귀처럼 얌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승객들 중에는 문득, 그렇다면 악몽을 꾸었던 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단지, 일진이 나빴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랄 같은 버스에 걸려든 게 불운이었다.

삼십 분 앞서 출발한 차를 탔더라면,
혹은 삼십 분 뒤에 출발하는 차를 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무사하며, 머지않아 목적지에 닿을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승객들은 차의 무리 없는 주행 속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긴장과 노여움이 누그러지면서 낯익은 평화 - 저 일상 중에서 종종 경험해왔던- 가
그들의 마음을 푸근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위험한 순간은 더이상 없었다.
버스는 쾌적한 속도로 남은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터미널로 진입한 차가 동체를 한 두 번 가볍게 출렁거리고 나서 점잖게 멎었고
이어 출구가 매끄럽게 열렸을 때, 그랬다, 일부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보여준 그 감사의 표시는,
그러므로 거짓 없는 감정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테면, 저 노부인이 그랬다.
남편보다 한 발 앞서 출구로 나온 그녀는 운전사의 등을 토닥이며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운전사 양반, 정말 수고가 많았수. 얼마나 피곤허우? 정말이지 난 너무너무 감사해!"
그녀의 무사 귀환의 기쁨 때문에 평소의 온화함을 넘어 거의 눈부시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꽤나 지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는데 그 거동하며 뒷모습이
노인 티가 완연하였다.

말이 없기로는 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통로에서부터 열심히 밖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중꾼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가 하면, 저 일병은 좀 색다른 태도였다.
차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는 운전사의 정수리에다 꼬챙이 같은 시선을 박은 채
잠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모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도무지 편하지가 못하였다.

더러는 한두 마디씩 감정이 담긴 말들을 뱉기도 했는데 저 대여섯 살짜리
계집아이를 데리고 탔던 젊은 어머니가 말하자면 그런 쪽에 속했다.

"당신은 애들도 없어요/ 운전이라고 해먹고 살려거든 맘뽀부터 곱게 가지라구요!"
말은 순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장 험한 말들을 뱉은 사람은 저 둥뚱한 중년여자였다.
한바탕 걸쭉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면서,
진단서를 떼어 기필코 니놈을 고발하고 말겠노라고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종당에는 저 점퍼 차림의 사내로부터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승강대를 내려갔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그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차 안에 남은
사람은 둘, 아니 셋이었다.

운전사와 등산모의 사내,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내.
등산모의 사내가 운전석을 향해 진작부터 던져두었던 시선을 마침내 거두어들이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로를 거슬러 맨 뒷자리까지 갔고, 거기서 한동안 실랑이를 치른 끝에 아름드리
술푸대처럼 출렁거리는 사내를 떠메다시피 하여 다시 출구 쪽으로 나왔다.
그동안 운전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은 여전히 핸들을 감싸쥐고 고개를 약간 꺾은 채로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는 그 힘겨운 노력 중에도 운전사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비좁은 출구를 간신히 빠져나온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운전사의 얼굴이 비로소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열려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보안경을 벗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이
하나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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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나 혈흔이 나오지 않는대도 끝까지 읽다보면 등꼴이 오싹한 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밉지만,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 됐다고 해서 금방 잊어버리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무력함이
더 밉지 않나요?

폭력을 계속 묵인하는 이런 자세들이 참으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입장에 서지도 말고,
묵인하는 입장에도 서지 않는,,
정정당당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됩시다! ^^

끝까지 함께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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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한번 읽을 필요도 없다 * 괴테>



세번 째 <라트라비아타> 공연을 봤다.
금요일 밤 7시 30분,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때의 긴장감과 더불어,, 오페라 서곡이 연주 되기 전에 오케스트라의 악기 조정 소리는 나에게 같은 느낌의 전율을 준다.

공연은 아주 훌륭했다.
그리스 출신의 소프라노는 벨칸토 창법을 구사하며 비올레타를 열연했고,
일본 출신의 테너는 맑은 음색을 자랑하며 알프레도를 받쳐줬고,
한국 출신의 바리톤은 중후함을 풍기며 제르몽을 노래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감정이입을 제대로 하면서 노래를 듣고, 극을 봤다.
때론 알프레도의 마음에, 때론 비올렛타의 입장에, 때론 제르몽에 심사에 동조하면서..


고전 (古典)이란, 이렇게 나를 키우는 것 같다.

첫번째에선 베르디를..
두번째에선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를..
세번째에선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면서 말이다.





작 곡 : 쥬세페 베르디 (Verdi)
작 품 명 : 라트라비아타 (La traviata)
곡 명 : 그녀 떠나면 삶의 기쁨은 없으리 (Lunge da lei.. De' miei bollenti spiriti)
가 수 : 지아코모 아라갈 (Giacomo Aragall)
지 휘 : 로린마젤 (Lorin Maazel)
연주시간 : 3분 4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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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충동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승객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녀의, 분노 때문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뚱어리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벼랑 끝 상황 속에서도 버스는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계기반의 속도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임을 족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운전사는 얼마든지 더 밟아댈 기세였다.

가랑비가 이제는 제법 굵은 빗줄기로 변하여 앞 유리창을 두들겼고,
곧게 뻗어나간 아스팔트 위로 물보라가 허옇게 피었다.
다른 차들은 눈에 뜨지 않았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세찬 빗소리만 그득하게 차올랐다.
예의 점퍼 차림의 사내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기어들었다.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아주머니,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노신사가 그녀를 달랬다.
"그렇게 서 있는 게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보세요. 점점 더 무섭게 달리고 있쟎아요" 노부인의 말이었다.
그녀의 저 온화하던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버렸고,
목소리도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노파의 것이었다.

"우리 말을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에요. 저 사람,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걸요?
  아마 거의 틀림없이~ 첨부터 우릴 떼죽음시키기로 작정을 한 거라구요!
  오, 하느님 아버지!"

노부인은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쿨쩍거렸다.
노신사가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운전석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통로 바닥 위로 무참하게 나동그라졌다.
버스에 또 한번 급제동이 걸린 때문이었다.

무거운 푸대자루처럼,
비좁은 공간에 메다꽂힌 탓에 여자는 사지를 버둥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이 좋았다고 해도 뼈 한두 군데는 상했을 법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거들고 나서자 그녀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몹시 상한 게 틀림없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울분과 고통과 수치심 때문에 종당에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예의 일병이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모자를 벗어 통로 바닥에다 팽개치며 벌떡 일어섰고,
그러자 4번 좌석의 등산모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힌 것도 그때였다.

"우리 냉정합시다!" 등산모의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말하였다.
"흥분은 절대 금물입니다. 잘못하면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승객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을 움켜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승객들은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자는 하나님도 악마도 아니었다.
저 운전석을 차지한 채 이쪽으로 뒤통수만 보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내,
차를 타면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승객들은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새삼스레 그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없었다.
하나의 견고한 벽처럼,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댄 채로 무심히 앉아 있는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앞자리에 계신 분들은 가급적 뒷좌석으로 옮겨 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통로에 선 채 등산모가 말하였다.
"중간 이후가 그래도 안전할 듯싶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속도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느 자리인들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앞자리 승객들이 치명적일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되었다.

맨 먼저 움직인 사람은 1번 좌석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재빨리, 점퍼 입은 사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세번째 줄에 있던 노부부는 서너 줄 더 뒤쪽으로 옮겨가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앉았다.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몇사람이 더 자리를 바꾸었고,
2번 좌석의 일병은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결국 맨 뒷자리,
저 술푸대처럼 처박힌 채 잠들어 있는 사내 곁으로 옮겨갔다.
몹시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이었다.

창 밖 어둠 속에서는 굵어진 빗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멀리서 이따금씩 떠오르곤 하던 마을의 불빛들마저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그것을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버스는 어둡고 습기찬 공간을 꿰뚫으며 계속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였다.
바퀴소리와 엔진 소리가 활주로를 막 이륙한 미행기처럼 한결 날렵하고 매끄럽게 어우러졌고,
그럴수록 파멸의 공포감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더 커졌다.

끔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토막난 신음과
여자들의 짓눌린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등산모의 사내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좌우의 빈자리들을 지나 운전석 곁에까지 다가선 다음,
왼손으로는 운전석 뒤의 쇠기둥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낮춘 다음 차분하게 계기반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사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지근거리였다.

속도계의 엄청난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조수이기나 하듯 운전사와 똑같은 투로 전방에다
눈길을 박은 채 다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전조등 불빛은 이제 두 개의 거창한 물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저 앞 어둠 속으로부터 물보라가 한 가득 끓어 넘치고 있는 고속도로가
마치 머리도 꼬리도 보이지 않는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금비늘들을 털며 곧추 일어서고 또 일어서곤 하는 것을 그는 보고 있었다.


====================================== 7편 (최종회)에 이어집니다..=============


이제 곧 그 최후의 모습들을 읽을 수 있겠네요.
새봄을 맞이 하는 이즈음..
나는 누군가에게 의미 없는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나..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하는 시간들을 가지시길 바래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럴리 없겠으나,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의미 없는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면,
조용하면서도 인간적이게 반성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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