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님께

 가을산님이 ‘당연하지 않은가!’ 댓글을 써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가을산님의 글을 보고 갑자기 떠오르는 몇가지 장면과 단어가 있었습니다.


 우선 이단異端. 이단은 다를 이에 끝 단자로 주로 종교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꼭 나쁜 뜻이 아니라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이 너무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단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이렇게 합니다. 숲에 나무가 있고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 이 나무, 저 나무의 파란 잎사귀가 뒤섞여 있습니다. 한 잎사귀가 바로 옆에 있는 잎사귀를 보고 가까이 있으니 같은 나무에서 나온 잎사귀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뭇가지를 쫓아 가보니 옆 나무에서 나온 잎사귀였습니다. 오히려 저 멀리 있던 잎사귀가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온 잎사귀였습니다.


 가을산님 또 다른 댓글에서 “상황을 보는 출발은 같은 것인데, 결론의 차이는.... 아마 우리의 ‘선택’의 영역 아닐까 합니다.”라고 글을 남기셨습니다. 어쩌면 출발도 같고, 결론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방법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행정수도 이전에 같이 반대하지만 생각은 다른 것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아마 가을산님과 저의 차이는 <도덕의 정치>에서 이야기했던 보수와 진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은 진보, 저는 보수. 이 책을 안 읽으신 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바꾸면 어머니의 원리에 무게를 둔 가을산님과 아버지 원리에 무게를 둔 저 마립간.


 말을 꺼낸 기회에 저의 정치 성향을 돌아보면 보수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녹색당을 지지하더라도. 학생 때는 온건 좌파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올해 있었던 총선 때에 알라디너 소개해 주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자신의 정책이 어느 정당과 가까운지를 평가해 주었는데, 저의 경우는 어떤 정책 사항은 민주 노동당이 일등으로 나왔습니다. 제 스스로가 놀랐습니다. 저에게 이런 진보적인 면이 있다니. 다른 정책 사항에 관해서는 자유민주연합이 일등으로 나왔습니다. 당시에 당을 이끌던 분이 너무 기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여 싫었고 그 분을 정치인으로도 그 당을 정당으로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나머지 분야에도 일등인 점수를 보인 당이 다 다르고, 총점으로 보니 네 당이 높이 거의 같고 민주 노동당이 매우 낮았습니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깔깔 웃으면서 민주 노동당은 '오직 자기 당만이 진보이고, 열린 우리당과 새천년 민주당이 어떻게 진보냐'하고 주장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정책 사안 별로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에 관한 책을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주로 자연과학의 책을 읽었지만 대학에서 전공과목의 깊이가 깊어지면, 과학은 교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인문 서적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저의 직관에 의해 과학 학설이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몇 가지 과학 학설은 엔트로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Relativity theory’,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Incompleteness theorems', 수리 철학에서의 상대주의 출현 등이 해당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며 엔트로피가 연상되고 <슬픈 열대>라는 책은 문화의 상대주의를 읽으면서 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연상되고, 자유와 평등의 상보성을 보면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가,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가 연상됩니다.


 제가 세상의 불완전을 이야기했을 때 갈대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대님 맞죠. 댓글의 정확한 문구를 찾기가 힘드네요.) 저는 완전한 세상을 원하지만 이유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보성을 염두하고 제시한 세상을 사는 법에 대해서는 sweatmagic님이 답변을 주셨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은.... 세상 사는데 있지요.’라고 하셨습니다.


 불완전한 목표와 확신이 없는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을 놓고 싶지 않은데, 진리와 도덕입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는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상이 너무 어려워 제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깊이가 얕아 충분하지 않거나. 어쩌면 알라딘 서재에서 저한테 적당한 대답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 대한 비평은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저의 페이퍼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다.’라는 글을 읽고 연보라빛 우주님은 저에게 편견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연히 편견이 있지요. 제가 무엇을 근거로 평균적인 가치관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정확히 평균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평균에서 1 만큼의 표준편차standard deviation(SD)를 벗어나는 것이 2 SD 만큼 벗어난 것 보다 낫다고 이야기 할 수 도 없지요.


 저의 서재는 재미가 별로 없어 일일 방문객이 10명 정도 (이번 주는 방문객이 꽤 많으시네요.) 그 중 댓글을 남겨주시는 분은 그 중에서도 일부분입니다. 제 글을 읽고 반대 의견도 많을 것 같은데.... 가을산님은 소신있는 의견을 남겨 주셨고 저는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의 댓글을 읽고 떠오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호강호에서 일형산파 유정풍과 마교장로 곡양의 우정입니다. (가을산님이 정파, 나는 사파?) 무협에서 나오는 정파와 사파의 도저히 우정을 나눌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눈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주고 받은 것입니다. 주자학내에서 사상적 조류를 달리 했던 두 사람은 나이와 직책을 뛰어 넘는 교류였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글을 쓰면서도 많이 쑥스럽네요. 학문의 깊이가 너무 다르므로. 친분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가을산님이 저의 이야기에 동의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가을산님은 퇴계, 저는 고봉?) 지나가는 이야기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참 좋은 책이죠. 읽으면서 헷갈리고, 읽고나서 내용을 금방 잊어버렸지만. 또 다른 장면은 매트릭스 1편에 나왔던 네오와 모피어스의 무술대결이 생각납니다. 그 때 느부갓네살호의 승무원들은 네오를 응원했지만 알라딘에서는 가을산님이 응원을 받을 듯 합니다. (가을산님은 모피어스, 저는 네오?)


 이 글은 가을산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에 앞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글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따로 페이퍼를 쓰겠습니다. 가을산님 놀라운 직관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환원주의자라... 저의 사고는 종합적이기 보다는 분석적입니다. 즉 환원주의적 가치관이 많이 바탕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카오스와 창발성이라는 과학의 발견 후 종합적 사고와 균형을 이룰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제 글에 가능하면 환원적 사고 흐름을 배제하려 했건만, 가을산님에게 들켜 버렸네요.


창 밖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참 좋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2004.  8. 27.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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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8-2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을산 2004-08-2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마립간님 같은 사고를 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하더라도 그것을 소신있게 글이나 말로 표현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속으로야 어떻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겉으로는 '진보적인' 가면을 쓴 사람이 더 많은 현실 속에서, 특히 인터넷 상에서는 '보수'라 하는 사람보다는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더 높기 때문에 마립간님의 글은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님의 편지대로, 서로 다름에 있어 서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지인도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환원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의 균형...'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마냐 2004-08-28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의 댓글과 편지...정말 '즐감'했고, 꼭꼭 씹고 있슴다.

마태우스 2004-08-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끼리의 서신왕래군요^^ 잘 읽었습니다. 두번째 편지도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