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평점 :
청소년기를 벗어났다고 생각이 들었던 때가 '뉴스'가 재밌다고 느꼈던 때였다. 지루하기만 하고 나하고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의 나열같던 뉴스에 관심이 생기면서 어쩐지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이 시간이 흐르자 뉴스는 '우울증'과 '화병'의 진원지란 생각을 했다. 뉴스를 틀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목소리가 들린다. 인상 쓰게 만드는 소식들과 숨이 턱턱 막히는 대한민국의 현실들을 지켜보는 건 어쩐지 스스로를 핍박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사회가, 교육이 좀 더 건강해지면 이런 현상에서 벗어날까 싶었는데, 상황은 나아진 게 없었으면서도 뉴스나 시사 방송을 스트레스로 접근하지 않게 만드는 통로가 생겼다. 그게 '나는 꼼수다'였다. 사실 나꼼수에서 까발리는 많은 것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것들이어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그걸 전하는 방식이 신선했다.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리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이제는 나꼼수 말고도 많은 시사 방송이 쏟아져 나와서 다 챙겨들을 수도 없을 만큼 바빠졌지만 아직도 그 첫번째 길을 만든 것은 나꼼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 나꼼수 주역의 김어준의 날 언어를 지승호 인터뷰어가 제대로 살려낸 인터뷰집이며 정치 비평 칼럼집이다. '정치'며 '비평'이나 '칼럼'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아주 재밌고, 아주 유익하고, 그리고 아주 짠하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던지...
책은 기승전결을 아주 잘 탔다. 왜 이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출발점을 명시했고, 우리나라 정치 지도를 그려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설명이 필요한 한국판 '좌'와 '우'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었다. 아주 쉽고 명확하게!
우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좌는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지. 그러니 연대가 키워드가 되는 거고, 그 연대를 작동시키는 엔진은 염치가 되는 거지. 인간이 가진 염치. 우의 엔진이 욕망과 공포인 데 반해서. 그렇게 우는 동물의 반응이고, 좌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 -44쪽
이어서 아주 성실한 불법을 자행하고 계시는 가카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진다. 나꼼수 방송으로 이미 한차례 들었지만, 이렇게 글로 읽으니 이해가 더 잘 된다. 3장의 삼성 편도 마찬가지다. 우리사회에서 '재벌'이 얼마나 '반자본주의'적 존재인지를 객관적인 근거를 들어서 설명해준다. 이제는 제발 대기업이 살아야 중소기업도 살고 서민도 산다는, 달팽이가 싱크대 위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리 좀 하지 말자. 이제는 제발, 그만 속자!
마사 스튜어트라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5개월을 복역했어. 내부자 거래로. 그 거래로 번 돈이 큰 것도 아냐. 겨우 2억 원 수준이야. 그 여자 재산이 엄청나다고. 2억은 그 여자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전 세계 최고 갑부 명단에 들어가는 여자니까. 그런데 결국 그 정도 액수 때문에 실형을 살아. 마사 스튜어트의 ‘리빙옴니버스’ 그룹은 오로지 마사 스튜어트 혼자의 힘으로 일궈낸 제국이야. 마사 스튜어트가 곧 그 회사의 이미지 자체야. 그런데 이 여자에게 실형이 선고되는 당일 그 회사 주가가 폭등한다고. 그전에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거든. 그런데 실형이 선고되자마자 주가가 40%나 뛰어요. 위험 요인이 사라진 거니까. 미래에 대한 리스크가 현재의 주가에 반영되는 거잖아. 이 여자에게 선고가 떨어지는 순간 그 리스크가 사라진 거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건희가 감옥 가면 삼성 망한다고 하잖아. 거짓말이야. 이건희가 감옥 가면 이건희가 망하는 거지. -159쪽
정치가 연애라고 하는 김어준 식 어법이 재밌다. 앞서도 좌와 우를 잘 설명해 주었지만, 4장에서 등장하는 연애와의 비유는 그야말로 기똥차다.
진보 정당의 방식은 이런 식이야.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 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딱 꺼내놔. 그리고 입주할 주택의 입지 조건과 구입할 차량의 대출 조건 및 주변 교육 환경의 우수성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 교육 전문 용어를 섞어 진지하게 프레젠테이션하지. 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이라며. 그걸 당한 상대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당신 패션부터 좀 후줄근한 것이 촌스러운 데다, 자료는 열심히 준비는 한 것 같지만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결정적으로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냐며 일어나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 군은 자기 프러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열심히 분석하다가 입지 조건과 대출 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경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내리지. 그렇게 연애 한번 못해봤으면서 꼭 결혼할 거라고 혼자 다짐을 하지. 20년 후에. 아, 슬퍼.
더 슬픈 건 뭐냐. 욕심 많고 잇속 빠른 보수 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진보 군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 와서는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꾸고 총천연색 컬러로 인쇄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국민 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은 읽어주지 않아. 휘리릭 페이지만 넘기면서 대신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엄청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버리네.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나올 때에야 국민 양은 알게 되지, 그 장미는 플라스틱이고 그 밥값은 자기가 내는 거였다는 걸. -222쪽
우리가 인간다운 '염치'를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이야기이지만, 진보가 여전히 '죄의식' 마케팅으로 접근하는 것은 늘 힘들었다. 당신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알지만, 바른말 말고도 더 큰 감동과 매력으로 제발 국민을 설득해 주었으면 하는 거다. 국민이 플라스틱 장미에 더 이상 속지 않을 만큼 말이다. 이 대목에서 김어준은 여러 정치인들을 브리핑 하듯이 언급해 주었는데, 길지 않은 지면에서 대한민국 현대사가 응축적으로 설명되었다. 특히 삼당합당 이후의 비극적인 정치사가 조금은 시원하게 설명되어 반가웠다.
인터뷰어 지승호는 인터뷰이로부터 늘 필요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번에도 어김 없이 자연스러운 귀결이 이루어졌는데, 날 것을 잘 살려내면서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 장점이 탁월했다. 재기발랄한 김어준은 '말빨'로도 언제나 최고였는데 이런 표현들은 대체 어디서 나올까 싶을 만큼 재밌었다.
그래서 조갑제가 이명박을 싫어하는 거야. 자존심 있는 우파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폼이거든. 비장미가 거기서 나오거든. 그런데 이명박은 압도적인 수준의 동물적 천박함을 발산하고 있으니까. 인류가 쌓아온 정신적인 성과물 자체가 흔적도 없는 거지. 난 그래서 이명박이야말로 순결하다고 봐. 뇌에 구김살이 없어. 뇌가 완전 청순한 거야. 그래서 이명박에게 중요한 건 이념이 아니라 이권인 거지. 오로지. 그래서 내가 만날 그러잖아. 이명박은 국가를 수익 모델로 삼는다고. -54쪽
가카의 주장은 그냥 김경준이 다 알아서, 자기는 모르는 사이, 다스로부터 투자를 받아 왔다는 거야. 정말이지 팔만대장경으로 빨래하는 소리지. -88쪽
정리하면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배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거지. 그 출발점이자 정점에 에버랜드가 있는 거고. 죽이지. 이런 걸 순환출자라고 해. 이렇게 해서 겨우 61억만 가지고 몇백 조 자산 가치라는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거지. 6만 원으로 타워팰리스를 산 셈이지. 세금은 16,000원만 내고. 워런 버핏 따위는 코흘리개지. 우리 이재용 님이야말로 세계 투자계의 옥황상제야. 141쪽
그런 소리를 한 사람들은 민족주의라는 단어 자체에 스스로 포박된 거지. 그 현상을 설명할 어휘로 그걸 채택하는 순간, 그 단어의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거야. 단어가 뭐가 중요해. 그 본질이 중요하지. 그런 원형질에 해당하는 원시적 감정조차 스스로 즐기지 못하고 불편해서 경계부터 하는 건 강박에 다름 아니지. 그 원시적 감정을 논리로 걸러내는 건 비인간적인 거지, 진보가 아니라고. 인간이 없는 진보가 어떻게 진보야. 그건 냉정한 지성이 아니라 강박적 논리라고. 진보도 강박이 되면 진상 되는 거라고. -212쪽
총선과 대선을 연이어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은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 간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일이 아주 피곤했다면, 앞으로의 삶도 참으로 막막하다면, 우리 스트레스의 근원이 정치라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면, 부디 많은 사람들이 현명한 투표를 해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런 현명한 선택에 이 책이 즐거운 도우미가 되었으면 한다.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히 어떤 울림과 잔영을 남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쫄지 마!'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그 짧은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같이 느껴보자.
부시에게 학을 뗀 미국인들이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만든 것처럼. 그게 그런 거다. 다음 시대엔 또 다음 시대의 자질이 호출될 거다. 하지만 오바마가 천국을 도래시키진 못했듯, 노무현으로 천국이 오지 않았듯, 문재인으로도 천국은 오지 않는다니까. 맞다. 인간 세계에 천국은 없다. 하지만 노무현이 없었다면 이명박이 얼마나 나쁜지 몰랐다. 노무현으로 인해 되돌아갈 지점을 알게 된 것처럼, 문재인은 또 다른 기준이 된다. 역사는 그런 거다. 그런 기준을 가져보느냐, 못 가져보느냐. 이때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 이명박을 버텨낸 우리에게는 문재인 정도를 가질 권리가 있다. 이명박을 겪어낸 우리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 그건 너무도 슬픈 일이다. 좌우를 떠나, 우리 모두에게, 너무 슬픈 일이다.
해보자.
쫄지 말자.
가능, 하다. -328쪽
덧글)
165쪽에 나오는 '비토'는 무슨 뜻일까? 성토? 비판?(뒤에 또 나온다.)
203쪽 통독 이후 독일 >>통일 이후 독일
208쪽 75여 개국 >> 70여 개국이나 80여 개국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문장이 어색하다.
표지, 정말 근사하게 잘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