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청소법 -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
마스노 슌묘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담담히 합니다. 이것이 선의 정신입니다.-11쪽

수행승들의 24시간은 오롯이 수행입니다. 청소나 밭일, 비품 관리 등을 비롯하여 절 운영에 관한 잡무를 모두 작무(作務)라고 부르며, 좌선과 같은 수행으로 여깁니다. 그중에서도 청소는 중요한 작무의 하나입니다. 수행승들이 수행하는 절에서는 매일 오전 4시면 하루를 시작합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좌선을 한 다음 아침 근행(勤行, 시간을 정하여 부처님 앞에서 독경하거나 예배하는 일)을 합니다. 그 후 일제히 청소를 하고 나서 아침을 듭니다. -18쪽

집 밖에서 우리는 많든 적든 격식을 차리게 되는데, 말하자면 `임전태세`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누구나 밖에서 몸을 감싸고 있던 갑옷을 벗고 한숨을 돌리겠지요. 공(公)의 얼굴에서 사(私)의 얼굴로 되돌아오는 공간, 그곳이 자신의 집입니다. 절이나 신사에서는 정역(淨域)이라고 합니다. `신불(神佛)이 계신 청정한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신불을 섬기는 자는 고귀한 신불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 장소를 철저히 쓸고 깨끗이 닦아 청결하게 합니다. 소중한 자신과 가족이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청결하고 신성한 장소가 되어야만 합니다.-22쪽

당나라 선승인 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이 말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하루 열심히 일하고 그날의 식사를 한다, 매일 게을리하지 않고 그날의 일에 전념하여 그날 분량의 식사를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루의 일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해나가는 것의 중요함을 백장선사는 설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선의 사고방식은 아주 심플합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그날 분량만큼, 그저 담담히 하면 됩니다. 어질러진 방을 내버려둬도 저절로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더러움이 어느샌가 사라져 깨끗해지는 일도 없습니다. (중략) 날마다 마음을 청소한다는 요량으로 그날 정한 만큼 계속해서 청소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깨끗한 방은 물론 마음까지도 온화하게 키워갈 수 있을 테니까요.-40~41쪽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한다`라는 말은 선에서는 진리를 나타내며, 또한 하나의 이상을 나타냅니다.-51쪽

좌선이 `정(靜)의 수행`이라면 청소는 `동(動)의 수행`입니다. 작무 북소리를 신호로 수행승들이 모두 달려 나와 일제히 청소를 시작합니다. 청소 시간은 온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눈앞의 작업에 집중합니다. 잡담할 틈은 없습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고참이라 불리는 수행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중략) 동의 시간인 청소를 할 때는 모두 기합을 넣어 마음을 닦는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마지막까지 해냅니다. (중략) `귀찮은데`, `싫은데`하는 생각으로 청소를 해서는 결코 마음을 닦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작업 효율도 오르지 않겠지요. 청소를 시작한 이상에는 활기차게 시작해봅니다. 어느덧 마음에는 상쾌한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58~59쪽

쓸기 청소를 할 때는 쓸기 청소를 하는 것에만. 닦기 청소를 할 때는 닦기 청소를 하는 것에만. 그저 그것에만 전념해봅니다.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봅니다. 일상의 걱정이나 불평, 불만은 잠시 곁에 내려둡니다. 그리고 그저 무심히 눈앞의 작업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져 청소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건성으로 청소를 하면 청소는 언제까지나 `고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념무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 그냥 청소가 마음을 닦기 위한 `수행`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러면 저절로 다양한 방법이 생겨납니다. 고승 료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꽃은 무심히 나비를 부르고, 나비는 무심히 꽃을 찾는다." 꽃은 나비를 부르려고 피어 있는 게 아닙니다. 나비도 꽃을 찾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날아다니는 게 아닙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은 그저 그곳에 피고, 나비는 팔랑팔랑 춤추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됩니다. 일부러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매 순간순간 눈앞의 일에 전념합니다. 그것으로 완벽합니다. 고작 청소라 해도 한결같이 손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반드시 있습니다.-60~62쪽

`사용한 다음에 원래의 장소로 돌려놓는 것`을 철저히 하면 물건을 찾느라 고생할 일도 없습니다. 물론 어질러질 일도 없습니다. 말끔히 정리를 했는데 어느샌가 방이 어질러져 있다면, 뭔가를 사용한 다음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놓지 않아서입니다. 외출에서 돌아와 벗은 코트나 재킷을 무심코 의자에 걸쳐두었거나, 장본 것들을 부엌 구석에 그냥 놓아두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나중에 잘 치워야지` 하지만, 그 `나중`이 오기도 전에 다음 작업으로 옮겨가 다른 물건을 사용한 다음 돌려놓지 않은 채 또 다른 장소에 내버려둡니다. 그렇게 되면 방이 점점 어질러집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고 하여 한가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다음 일로 옮겨가면 결국 수습이 힘들어집니다. 여러 일을 병행하는 경우는 모두 어느 정도 목표가 설 때까지 한 가지 일을 한 다음 다른 일로 옮겨 갑니다. 모든 일은 그때마다 하나하나 완결시켜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건을 사용했다면 반드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놓습니다.-64~65쪽

`지족(知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안다, 즉 지금 갖고 있는 물건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 행하는 것이지, 세제나 도구가 해주는 게 아닙니다. 집중해서 하면 강력한 세제도 특별한 도구도 필요 없습니다.-67~68쪽

선(禪)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대로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속에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가능성을 끌어내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을 철저히 재점검해야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지금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요.-72~73쪽

일본의 조계종 창시자인 도원선사는 `타시비아(他是非我)`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남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남이 수행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승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작무에 힘쓰고 좌선을 합니다. 현대인은 어떻게든 머리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가며 정리한 방의 쾌적함을 몸소 느끼면 그 감각이 자신 안에 남습니다. 그때 비로소 청소의 효용이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80~81쪽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나중이나 다음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라는 것이 선의 사고방식입니다.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성심껏 살아갑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때그때 빈틈없이 처리합니다. 이것이 후회하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중략)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때`를 후회 없이 맞으려면 `지금 이 순간`을 온힘을 다해 성심껏 살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90~92쪽

만약 가족이 협조해주기를 바란다면 해결책은 오직 한 가지. 당신 스스로 묵묵히 청소를 하고, 항상 깨끗한 방을 유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에 참배하러 와서, 휴지 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경내나 법당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은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지르고 또 어질러도 담담히 청소를 하여 항상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을 계속 유지하면 `나도 방을 깨끗이 청소해야겠다`라는 의식이 가족 사이에 생겨납니다. `왜 나만 청소를 해야 하나?` 하고 화가 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반복하지만, 청소의 본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을 닦기 위함입니다. 당신이 청소하는 옆에서 가족이 방을 어지르더라도 나를 위해 청소한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 않겠지요.-97쪽

저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법당과 부엌의 덧문을 활짝 열고 본존께 차를 공양합니다. 그리고 걸레질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겨울에는 아직 어둡고 한기로 살을 에는 듯하지만, 몸이 긴장되면서 상쾌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는 경내의 싱그러운 초록이 마음을 윤택하게 합니다. 이 시간은 사계의 변화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시간입니다. 아침 공기는 특히 자연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매일 아침, 바깥 공기를 몸속 가득 들이쉬는 습관을 들이면 그날의 몸 상태나 마음 상태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중략) 방 안에 고인 공기가 바뀌면 당신의 몸도 분명 눈을 뜨게 되겠지요. 그때부터가 청소의 시작입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청소를 하면 아무리 분주한 일상이라 해도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날 하루, 무리하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자연스럽게 처리해나갈 수 있습니다.-105~109쪽

처음에는 누구나 의욕에 넘쳐 목표를 높게 잡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지속할 수 없다면 의미는 없습니다. 높은 목표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의의를 둡니다. 그 대책으로 매일 아침 청소 시간에 타이머를 사용하는 방법도 좋겠지요. 아무튼 매일 아침 청소 습관을 들이는 것이 목적이므로 설정 시간은 몇 분이건 상관없습니다. 그 시간이 5분이라면 5분 동안은 철저히 청소에만 전념합니다. 그러다가 타이머가 울리면 과감히 그만둡니다. 습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100일 후에는 청소를 하지 않으면 찝찝한 기분마저 들게 될 테니까요. 그날을 기대하며 무리하지 않고 청소를 계속해가도록 합니다.-111~112쪽

육류나 생선은 물론이고 쌀이나 채소 등 우리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귀중한 생명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온 음식은 남기지 말고, 식사 전후에는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고 마음을 담아 말합니다. 만약 다 먹지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양을 줄여 먹을 만큼만 먹도록 합니다. 식사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가족이나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부엌은 생명의 근원을 낳는 장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깨끗이 청소를 해야겠지요.-140~141쪽

다음 날에도 계속 같은 파일과 서류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날 일이 끝난 후에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둔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작업이 끝나면 일단 모두 정리합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은 상태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다음 날 아침, 새로운 기분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이 한 번 정리된 상태라 `자, 시작해볼까!` 하는 기운이 솟아 새로운 기분으로 일에 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상을 전날 상태 그대로 둔다면 `어제의 연속`이라는 기분이 들어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다른 하루, 새로운 하루를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아침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책상 위를 깨끗이 닦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볼까요. 그날 하루의 능률이 부쩍 오를 것입니다.-151~152쪽

초목을 잘 관찰한다는 것은 자연과 자신이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평정심을 찾았음을 뜻합니다. 걱정거리나 잡념으로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이서 정원을 바라고보 있어도 그 모습을 충분히 관찰하지 못합니다. 정원에 꽃이 청초한 꽃망울을 터트려도 형형색색의 단풍이 땅을 물들여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167쪽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각각의 물건이 있어야 할 모습을 재점검하여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심플한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공간에서 지내면 저절로 마음이 닦여 순수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존귀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감동을 잊지 않고 고마움을 실감하여 살아갔으면 합니다.-175쪽

청소는 일상 속에서 무념무상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무심히 청소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물론 청소를 한다고 해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청소 시간이 그저 의무나 노동이 되어버리겠지요. 하지만 평소의 걱정거리나 고민을 모두 잊고, 눈앞의 더러움을 없애고 쓰레기를 치우는 데 집중하면 그 시간이 큰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181쪽

차를 마시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윽한 향이나 입에 머금었을 때 확 퍼지는 감미로움을 맛보며 진심으로 `아, 맛있다` 하고 차와 자신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기분 좋은 순간입니다. 차와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과 완전히 하나된` 상태가 진리를 전합니다. 그 상태에 스스로를 두는 것이 선의 수행입니다. `수행` 혹은 `깨달음`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182쪽

누구나 자신의 생활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 xx하면 좋아질 거야`, `새로운 xx가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지금과는 다른 물건이나 사고방식, 생활방식을 손에 넣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에서는 새로운 뭔가를 얻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처분하고 버려가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착이나 연민을 내려놓습니다. 욕심이나 허세에서 자유로워집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립니다. 더러움이나 먼지를 깨끗하게 없앱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내려놓고 집뿐만 아니라 마음도 청소해갑니다. 그렇게 하면 두터운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불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일말의 흐림도 없는 `본래의 자신`입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모두 버리고 심플한 상태가 되었을 때,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본래의 자신을 되찾으면 자유로운 경지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정말 필요한 물건에만 둘러싸여 살아가는 온화한 날들이 시작됩니다.-184~185쪽

아무리 열심히 `마음을 닦자`, `여유를 갖자`고 노력해도 그렇게 간단하게 될 리는 없습니다. 집착이나 욕심은 우리를 칭칭 옭아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행동이나 발언을 제한하거나 얼버무립니다. 선입견에 휩싸여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연연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청소를 하고 환경을 바꾸고 심플한 상태가 되면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변합니다. 그때까지 덮여 있거나 깔려 있던 흐림이 제거되어 마음의 거울이 깨끗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운을 불러들이기 위한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188쪽

수행을 거듭해온 수행승은 행동이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헛됨이 없습니다. 그것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변 환경이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평소의 행동이 세련되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략) 본성 주위에 군살처럼 붙어 있는 번뇌는 우리를 미혹시켜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은 상태`를 만듭니다. 그러면 깜빡하고 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시점에 멍하니 있거나, 툭하면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하여 생활 전체가 흐트러집니다. 절의 규칙적인 생활은 번뇌를 털고 본성을 빛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침 5분 동안 규칙적으로 청소를 해나가면 마음이 안정되어 번뇌에 미혹되는 일이 줄어듭니다.-189~190쪽

내 손에 들어온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점점 버려가면, 또 다른 새로운 물건이 찾아오는 순환이 생겨납니다. 이때 `이만큼 해주었으니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욕심이나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나는 훌륭하다`라는 교만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희사(喜捨)에는 사람을 돕는다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희사를 하면 돈이나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훌륭한 공덕이 쌓이게 됩니다. 물건을 처분할 때도 `희사`의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기쁘게 버리거나 혹은 남에게 양도하거나 재활용 매장에 갖고 갑니다. 이 습관이 몸에 배면 저절로 생활 전체가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물건이 차례차례 찾아오게 됩니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신기한 순환이 아닌가요.-205~206쪽

"했습니다!" 하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아하고 품위 있게 조용히 선행을 베풉니다. 정말 바람직한 사회 공헌의 형태가 아닐까요. 그런 삶의 방식은 저절로 배어나와 주위에도 전해집니다. 음덕을 쌓고 있는 사람은 애써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위에서 먼저 인정하고 존경해줍니다. (중략)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집 앞에서든 쓰레기가 눈에 띄면 줍습니다. 더러워진 곳은 쓱쓱 닦거나 쓸거나 합니다. 그것을 묵묵히 행합니다. 그 장소가 깨끗해지면 당신의 기분도 좋아지겠지요. 그리고 음덕도 쌓입니다. (중략) 남을 위해, 마을을 위해 휴지를 줍거나 청소를 하면 그것을 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해주는` 게 아니라 실은 `받는` 것입니다. 시험 삼아 눈에 띈 휴지를 주워보세요. 기분이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음덕을 쌓는 것의 진정한 공덕은 이런 데 있지 않을까요.-207~209쪽

정성을 들여 환경을 가다듬고 자신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성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아무리 풍부해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무엇 하나 바뀌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완벽히 납득했다고 해도 몸을 통하여 습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손에 넣은 지식과 정보는 `그림의 떡`으로 끝나버립니다. (중략) 뭔가를 깊이 이해하려면 그것을 납득할 때까지 몸에 기억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질릴 만큼 몇 번이나 같은 과제로 계속 몰두하면, 어느 순간 눈을 감고도 그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정말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수행승들의 수행도 매일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좌선을 하고 경을 읊고 청소 등의 작무에 공을 들입니다. 1년 365일, 거의 같은 일과로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발견과 배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신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먼 곳을 보지말고 발 밑을 보세요.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뭔지, 그것을 찾아봅니다.-210~212쪽

기회는 춘풍과도 같습니다. 춘풍은 어디에나 똑같이 불어옵니다. `이 사람은 성격이 나빠서`, `저 사람은 밉상이라서` 하며 취향대로 고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춘풍이 불어올 때, 그것을 재빨리 감지하고 잡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춘풍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평소부터 그때를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춘풍을 잡지 못하는 사람은 춘풍이 불고 나서야 준비를 하려는 사람입니다. 춘풍을 잡는 사람은 봄이 오면 바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요인`을 미리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춘풍이라는 `연(緣)`이 다가왔을 때 재빨리 `인연`을 엮어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한편 준비를 게을리했던 사람은 `요인`을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연이 다가와도 인연을 엮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 연이 다가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227~228쪽

처음 좋은 연을 엮는 것을 `연기(緣起)가 좋다`라고 말합니다. 좋은 연을 엮은 사람은 처음의 연이 다음 연을 불러들입니다. 또한 다음에서 다음으로 좋은 연이 이어져갑니다. 반대로 처음에 나쁜 연을 엮으면 다음도 그 다음도 나쁜 방향으로 연이 엮여갑니다. 날마다 노력하여 첫 요인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예를 들면, 큰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을 때 `아직 준비가 덜 돼서`라고 거절한다면 다시 같은 수준의 의뢰가 들어올 일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언제 어떤 기회가 와도 괜찮게끔 평소부터 좋은 요인을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략) 눈앞의 물건을 바르게 비추는 맑은 마음은 맑은 환경에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매일 해이해지지 않고 청소를 계속해가면 저절로 작은 자연의 변화나 사소한 일에도 감동하게 됩니다.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하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그러한 마음의 여유와 감사의 시간이야말로 매일을 풍요롭게 하고 좋은 연을 엮는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기회를 잡는 힘을 부여해줍니다.-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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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서 신청한 거 들어왔나~ 하고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만 이런 게 떡~!



유후~ *^^* 아이씐나~! 과월호 잡지 받으러 도서관으로 출발~!


같은 인덕원 산하의 은평구립은 1인당 6권까지 되고 잡지 종류도 많던데…,

아쉽긴 하지만 나 혼자 들고 올 걸 생각하면 욕심 부리지 않는 게 좋겠지.


오랜만에 보는 녀석들이라 잠시 찡~해서 고시계와 월간 미술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난 주부니까!!! 그래, 내 본분을 잊어선 안 되지~

남편 몫까지 해서 헬스조선 과월호 네 권 들고 왔다.


요리, 운동법, 건강 관리, 피부 관리에 친환경 살림까지

옆에 두고 참고할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다.

작년 잡지이긴 해도 어차피 이런 건 계절만 맞으면 내용은 대동소이!

다음에 잡지 나눔할 때도 놓치지 말아야지, 후훗~



매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  ‘도서관주간’이라고 각 도서관마다 이런 저런 행사를 한다는데

이 동네 도서관에선 그게 잡지 나눔이었구만.



아직도 힐링 타령이냐, 사서들이 이렇게 트렌드가 늦어서야~ 라며 툴툴대다 자세히 보니

경남 고성도서관에서 출품한 표어라고 그러네;; (긁적)

음 그래, 힐링 좋지 좋아~ 우리 모두 도서관에서 힐링합세!!! (이게 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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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1-4, 어이쿠, 엔젤 트윈스가 역사적인 NC의 첫 승 제물이 되어줄 듯 싶다.

(아놔, 이제 10연패의 한화가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음;; 어쩌라고 이거뜨라!!!)

앞으로 두고두고 비웃음꺼리가 되겠구만.


삼성이나 SK 정도면 까이꺼 첫 승 내줘도 그 팬들이 그걸 굴욕으로 여기진 않을 거다.

다른 팀 팬들도 덜 비웃을 거고!!!

흥, 우린 뭘해도 비웃음의 대상이지.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스윕했으면 했는데;;


본적이 공룡의 땅 경남 고성에 있건만 역시 세컨팀 따윈 의미 없는 게다

혈압 최고치로 상승하는 중 미간 주름을 느끼고는

중계창 화면을 끄고 조카 녀석 사진이 올라오는 블로그에 들어와 힐링하고 있다.



아~ 저 사랑스러운 손가락!!! 뽀얀 살갗, 도톰한 이마~!!!

문디자슥들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고 있어.

후아~~~


다음주 화요일 저녁 6시 반 되기 전에는 경기 승패에 상관없이

절대로, 절대로 프로야구 관련해선 클릭하지 않을 거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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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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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저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들은 우수성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전부터 혜택을 준다. 그들은 우리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높은 산의 공기에 익숙해진다. 그들은 낮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던 우리를 단숨에 그들 고유의 분위기로 끌어들인다. 그 고결한 사유의 세계에서 진리는 베일을 벗고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드러내는 듯하다. 우리가 선지자들을 뒤따르며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결국 같은 인류이고 정신 중의 정신인 보편정신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언제나 예언적인 모든 영감의 원천에는 위고Victor-Marie Hugo의 말처럼 "모든 저자의 저자인 최초이자 최고의 저자, 곧 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말을 내뱉기 위해 그 보편정신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만 한다.-228쪽

그들의 오류는 천박한 오류가 아니라 과잉이다. 그들의 착각에는 시야의 깊이와 예리함이 깃들어 있다. 그들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사람은 분명 멀리까지 갈 수 있고 그들의 큰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진리를 단단히 움켜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용할 수 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들 아래서 사유의 뼈대를 잘 조정하고 단단히 접합하면서 정신을 형성해왔다면, 천재의 오류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를 무분별하게 노출하지 않는다면 그 위험에서 은총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은총으로 새로운 영역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정신이 받은 자극은 그대로 남는다. 우리는 오류에 저항하기 위해 정신을 심화하면서 한층 강해진다. 그런 숭고한 위험을 초래하고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도야하고 더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233쪽

저자들에게서 싸우는 자질이 아니라 진리와 통찰력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렇게 근면하게 수확하고 조정하는 정신, 곧 꿀벌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벌꿀은 여러 종류의 꽃에서 채집한 꿀로 이루어진다. 배제, 요약, 삭제, 편협한 선택의 방법은 정신의 형성에 무한히 해로우며, 그런 방향으로 향하는 정신 안에서 미래에 관해 나쁘게 말하는 결점을 드러낸다. 괴테는 "창조적이지 않은 모든 개인은 취향이 부정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창조적 존재로부터 에너지와 생명을 박탈한다"라고 썼다. 그런 지성은 편협하게 자란다. 보편자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는 대신, 파벌을 만들고 험담이나 하는 정신 수준으로 추락하고 만다.-236~237쪽

우리가 위대한 인물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알게 되면,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서로 동일한 본질적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 나는 그들 모두가 이 진리를 선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그 진리를 놓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거나 추동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지식을 쪼개고 인간 정신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수렴한다. 사원의 기둥들은 각기 별도의 기반 위에 놓여 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기둥들이 지탱하는 아치들은 수렴하며, 많은 쇠시리들에 의해 결합되어 하나의 지붕을 이룬다. 당신의 바람은 그 안전한 지붕을 보는 것이요, 그 아래서 위안을 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악명도, 파벌 간의 충돌도, 논쟁하는 정신도, 지성에 대한 인위적인 자극도 아닌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다.-237~238쪽

설령 진리에 마음을 열고 진리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지라도, 독자는 읽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읽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정신을 형성하기 위해 읽는 것에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사유하기 위해 읽고, 사용하기 위해 재물을 얻고, 살기 위해 먹는다. 나는 언제까지나 읽기만 하는 기계적인 정신활동, 즉 더 이상 진짜 공부가 아닌 지적인 자동성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독자를 비판했다. 그러나 많이 읽는 독자만 수동적인 습관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책은 뜨개질과 같다. 그들의 정신은 일종의 나태에 빠져서 "양치기가 꾸벅꾸벅 졸면서 흐르는 개울을 보듯이" 관념들의 행진을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그럼에도 공부는 생명이고, 생명은 흡수이고, 흡수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양분에 반응하는 것이다. 알맞은 때에 곡물을 수확해 다발로 묶고 빵을 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곡물로 몸을 만드는 것만이 풍성한 수확물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길이다.-239~240쪽

지식의 근원은 책이 아니라 현실과 우리의 사유에 있다. 책은 표지판이다. 표지판보다 먼저 생기는 것은 길이며, 아무도 우리를 위해 진리에 이르는 여행을 대신해줄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저자를 본받을 수도, 저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그것을 다시 표현하도록 정신을 재촉해야 한다. 지식의 요지를 우리 자신의 쓸모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적어도 위대한 책에서 얻는 주된 이득은 여기저기 흩어진 진리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함양하는 것이다.-242~243쪽

위대한 정신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에게서 판에 박힌 말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을 얼마나 오용하는 것인가! 그들을 활용해 글을 쓰려 할 때, 그 오용이 얼마나 뻔히 보이겠는가! 그렇게 앵무새처럼 흉내나 낸다면 금세 들통 날 것이고, 머지않아 필자가 보잘것없는 사람임이 드러날 것이다. 창작이야말로 다른 이를 진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넣는다면, 빌려오는 구절이 인용하는 맥락과 동일선상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인용자는 어떤 의미에서 원저자만큼이나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바치는 영광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 경우에 인용구는 사전에서 찾는 단어와 같지만, 정신이 몸을 창조하듯이 인용자는 창조를 하는 것이다. 아퀴나스, 보쉬에, 파스칼이 바로 이렇게 인용했다. 그러니 아주 소박한 과업을 열망하는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와 동일한 정신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243~244쪽

책은 신호, 자극제, 조력자, 기폭제다. 책은 대체물도 아니고 속박하는 사슬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책은 요람이지 무덤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어린 채로 태어나서 늙은 채로 죽는다. 반면 오랜 세월의 유산을 물려받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으로 "늙은 채로 태어나지만 어린 채로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짜 천재들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둔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종속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저항해야 하고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해방해야 한다. (중략) 다른 이의 사유를 되풀이한다면, 공공연히 하든 은밀히 하든 머지않아 지루하다고 판명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네가 읽은 것만을 말한다면 아무도 너를 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따를 모범은 신의 창조적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 천재들은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는 것은 가엾은 일이다. 우리는 변변찮든 위대하든 이 지구에서 비할 바 없고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정신적 실체이기 때문이다.-246~247쪽

우리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너무 많은 기억은 개인의 사유와 주의력에 해롭다고 말한다. 재료가 너무 많으면 정신은 수렁에 빠진다. 정신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는 정신을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과식은 독이다. 박식한 체하지만 정신은 비뚤어지고 무기력한, 흔히 `살아 있는 도서관`이나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다. 우리는 기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기억을 이용하는 것이다. 계획을 구상하거나 실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영혼이 흡수할 수 있는 것, 목표에 기여하는 것, 영감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공부를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에 새겨라. 나머지는 망각하게 놔두어라. 쓸모없어 보이던 많은 것들-실제로도 대부분 쓸모가 없는-이 간혹 유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만에 하나 필요할지 모르니 기억하자고 말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필요하다면 다시 찾을 것이고, 종이에 쉽게 기록해둘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차든 타야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철도 안내책자를 외우지 마라.-252~253쪽

정신과 기억을 정돈하고 나면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게 되고, 겉보기에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계율이 실은 하나임을 알게 된다. 하나의 조직화된 전체에는 쓸모가 없는 것, 혼란스러운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 전체에 기여하든지 아니면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다. 한 대상이 마치 사람처럼 질서 잡힌 위계-그 대상이 들어갈 자리도 없을뿐더러 완성하거나 기여하지도 못하는-에 침입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짐에서 벗어나 질서가 제대로 잡힌 정신은 모든 힘을 공부에 쏟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신은 목표를 향해 곧장 나아갈 것이고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사소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요 목표일 수 있다.-258쪽

창조적 능력은 대체로 기억의 통제된 활동과 지혜에 의존한다. 어떤 길을 가든 본질적인 것을 확실히 파악하면 전망이 열리고, 새로운 자료를 획득함에 따라 이미 습득한 것은 논리적으로 성장한다. 기존 사유는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모든 진리는 다른 진리의 서광이며, 모든 가능성은 실현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경험에서 이득을 얻을 준비를 마친 내적 질서는 땅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이루는 물질은 활기를 띠고 섬유조직은 성장하면서 양분을 흡수한다. 생명체가 발생하고 번성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환경에 대한 적응인 것과 같다.-259쪽

아퀴나스는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첫째, 기억하려는 것을 정돈하라. 둘째, 기억하려는 것에 깊이 몰두하라. 셋째, 기억하려는 것을 자주 생각하라. 넷째, 기억한 것을 회상할 때는 나머지를 떠올리게 해줄 기억 사슬의 한쪽 끝을 잡아라. 아퀴나스는 키케로의 선례를 따라서 지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과 연결하면 기억에 이롭다고 덧붙인다. 감각적인 것은 지성의 적절한 탐구 대상이고 그 자체로 기억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우연히 간접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아퀴나스는 말한다.-261쪽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다음 규칙은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가능한 한 자주 숙고하는 것이다. 앞서 기억하려는 것을 깊이 새기라고 권한 이유는 살아가면서 삶의 흔적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이 점점 흐려지더라도 조각 도구로 선을 거듭해서 새기고 산을 충분히 부어 에칭 작업을 하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동기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유용한 사유를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사실을 반추하도록 추동하는 동기다. 동요하는 정신은 이런 작용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데에도 정념이 없는 평온한 삶이 필수다.-263쪽

요약하자면, 기억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의 질이고, 그다음이 기억의 질서이며, 마지막이 기억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사유할 재료가 모자란 경우는 거의 없다. 부족한 것은 재료를 다룰 사유다. 배움에 있어 지적인 흡수, 질서 정연한 연결, 풍요롭고 질서가 잘 잡힌 정신의 점진적인 통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집의 마당이 아니라 구조이고, 무엇보다 그 집에 거주하는 이의 정신이다. 영감을 드높이고 주의력을 날카롭게 유지하라. 진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열정적으로 탐구하라. 그러면 모자람 없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265쪽

우리는 비교적 적게 읽어야 한다. 그보다 훨씬 적게 기억해야 하며, 어차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일종의 외적 기억이자 몽테뉴가 `종이 기억`이라 부른 노트는 읽는 것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노트는 기억보다 넓은 범위를 담을 수 있고, 기억을 보충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도울 수 있다. (중략) 우리는 기억에 지나친 부담을 지워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쓸모없는 관념을 풍족하게 갖는 것보다 정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선호한다. 공책이나 카드 색인은 그런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269~270쪽

절제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 노트하라.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 일시적인 선입견의 효과, 이따금 화려한 문장 때문에 생기는 열광을 피하기 위해 구절을 곧바로 옮겨 적지 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적어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침착하게 수확물의 가치를 판단한 다음, 질 좋은 곡물만을 헛간에 저장하라. 두 경우 모두, 각자의 필요를 의식하면서 정신노동을 활발히 수행한 뒤에 노트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를 완성하는 것, 스스로 정신을 채우는 것, 앞으로 싸울 전투의 조건과 각자의 신체에 맞는 갑옷을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아주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어떤 이론에서 중요할지라도 그 때문에 옮겨 적을 필요는 없다. 고맙게도 책에는 훌륭한 구절이 많다. 그렇다고 국립도서관의 책 전부를 베낄 텐가? 당신은 멋진 코트가 아니라 당신 몸에 맞는 코트를 구입해야 한다. 당신이 골동품 상점에서 보고 감탄한 가구일지라도 그것의 크기와 양식이 당신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거기에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272~273쪽

나는 읽기만 하지 않고 읽으면서 적는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만난 뒤에는 그 사람의 사유를 적기보다 나의 사유를 적는다. 나의 이상은 우리의 공통된 사유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적으면서도 나의 사유를 적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깊이 흡수하는 것, 꿰뚫어보려 애쓰는 것, 단어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쓰는 동시에 쓰는 것을 내 재산의 일부로 저장한다. (중략) 읽으면서 명확한 관념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아야 한다. 당신의 소명과 인성뿐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직접 활용할지도 고려하라. 그렇게 읽는 데에는 일군의 목표가 있다. 그 일군의 목표는, 알찬 곡물은 남기고 나머지는 빠져나가게 거르는 체와 같다. 주의력을 흩뜨리지 마라. 도중에 꾸물거리지도 마라. 당신의 목표와는 다른 저자의 목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목표만을 안중에 두어라. 설령 다소 불쾌하게, 그리고 언제나 경고로 들릴지라도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지금 이 순간에 수행하는 과제에 더 전념할 수 있도록 눈가리개를 써라.-274~275쪽

우리는 특정한 수집열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빽빽한 공책이나 꽉 들어찬 문서보관함을 갖기를 원한다. 그들은 급하게 빈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다른 사람들이 우표나 엽서를 수집하듯이 구절을 모은다. 이것은 개탄스러운 습관이자 일종의 치기이며, 수집광으로 가는 위험한 습관이다. 질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질서가 우리에게 이바지해야지 우리가 질서에 이바지해서는 안 된다. 고집스럽게 수집과 완성에 몰두하는 것은 정신을 생산에서, 심지어 배움에서 멀어지게 하는 길이다. 분류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오히려 노트를 사용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공부의 쓰임에 종속되어야 한다.-279~280쪽

또 모든 메모지에 번호를 매긴 다음, 비슷한 메모지를 묶은 각각의 범주에 번호를 매기고 알아볼 수 있도록, 모서리나 상단에 꼬리표가 달린 메모지나 찾아보기 카드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까지 준비가 되었다면 그 뒤에 따라야 할 절차는 다음과 같다. 책을 읽을 때든 공부에 관해 사유할 때든 침대에 누워 있을 때든 노트를 할 때는 메모지에 적어라. 가까운 곳에 메모지가 없을 때는 더 작은 종이의 한 면에만 적어서 나중에 메모지에 붙여라. 메모지에 적고 나서는, 앞에서 조언한 대로 한동안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을 제자리에 두어라. 신중하게 선택한 분류법은 각자 자신의 공부에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조언만 해줄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자 이미 가지고 있거나 앞으로 적어야 할 노트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다시 세분하여 목록을 작성하라.-281~282쪽

상세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참고해서 노트를 적거나 찾았다면, 그 계획의 연속적인 표제에 번호를 매겨라. 그러고 나서 각 표제의 내용에 상응하는 메모지에 번호를 매겨라(나중에 다시 활용해야 한다면 연필로 흐리게 써라). 그런 다음, 같은 번호가 매겨진 메모지를 한 묶음으로 모으고 각각의 작은 묶음에 클립을 끼워라. 그 묶음을 분류하고 나면 각 묶음의 내용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쓰는 일만 남는다. 이와 반대로 정해진 계획 없이 그저 일반적인 지침에 따라 저술을 준비해왔다면, 이제 계획을 짜야만 한다. 계획은 자료 그 자체에서 뽑아내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메모지를 전부 꺼내어 하나씩 보면서 각 메모지의 내용을 가능한 한 간략하게 요약해서 종이에 적어라. 그렇게 모든 노트의 내용을 적고나면 활용할 수 있는 관념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관념을 살펴서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거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밝혀라. 주요 관념을 골라낸 다음, 각 관념에 속하는 요점을 정리하라. 혼란스러운 덩어리에서 조금씩 빛이 새어나오고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그다음에는 간략하게 요약한 것을 당신이 얻은 질서에 맞추어 숫자 순서대로 옮겨 적어라.-283~284쪽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더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체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중략) 앞에서 글 쓰는 기술은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해 오랫동안 익혀야 하며, 이것이 점차 정신의 습관이 되고 문체를 이룬다고 말했다. 나의 문체, 나의 펜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영원한 진리에 관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내 존재의 자질, 내면의 성향, 살아 있는 뇌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진화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문체는 글 쓰는 이가 자신을 형성하는 것에 발맞추어 형성된다. 침묵하는 것은 자신의 인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온전히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큰소리로 사유하는 법, 명시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287~289쪽

문체가 갖추어야 할 특성을 무한정 나열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 세 단어로 그 모든 특성을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진실, 개성, 간결함이다. 단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진실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문체란 사유의 필연성에 상응하는 문체, 대상들과 긴밀히 닿아있는 문체다. 사유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삶의 행위다. 그 표현은 삶의 깨끗한 단면을 나타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일은 우리가 인위성과 인습성, 베르그송이라면 `기성품`이라 불렀을 만한 것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난다. 자기 존재의 일부분만으로 쓰는 것, 자신의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분열을 내버려두는 것은 발화된 말에 대한 모욕이자 인간 본성의 조화로운 통일성에 대한 모욕이다. (중략) 입말이든 글말이든 말의 덕은 자제와 진실성이다. 자제란 내면에서 말하는 진심을 정신이 경청할 수 있도록 인성을 억누르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장황한 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영감이 드러내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다.-290~291쪽

프랑스의 철학자 라슐리에Jules Lachelier는 이렇게 썼다. "진정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창성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고 스스로 독창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이성에 어울리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들 운명에 따라 특정한 형태를 발견하고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독창성은 진리의 표명이다. 독창성은 독자가 자신의 역량에 따라 받아들일 인상을 약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우리가 금하는 것은 모든 대상을 새롭고 빛나게 하는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진리의 힘에 맞서는 아집이다. 문체의 간결함은 이런 원리들의 결과다. 장식은 사유에 대한 공격이거나 공허함을 숨기기 위한 미봉책이다. 실제 세계에 장식이란 없다. 오직 유기적인 필연성만 있다. 자연에 찬란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찬란함은 그 자체로 유기적이고 마땅히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부구조에 의해 지탱된다.-294~295쪽

문체는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문체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문체를 오용하고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형식에 사로잡히는 사람, 엉터리로 운율을 지어내는 사람, 작가가 아닌 문장가가 되려는 사람이 진리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꼭 필요한 재능을 가진 이는 문체를 완성해야 한다. 완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다. 노련한 대장장이가 철의 달인이 되듯이, 누구나 글쓰기의 달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재미 삼아 금속을 뒤틀어 장식용 곡선을 만드는 대신 창살과 자물쇠, 대문을 만든다. 좋은 문체는 쓸모없는 것을 모조리 배제한다. 문체는 풍요 속의 긴축이다. 문체는 필요한 대목에서는 소비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능숙하게 배열해 절약하며,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진리의 영광을 위해 자원을 아낌없이 쓴다. 문체의 역할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문체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하며, 그럴 때 문체 자체의 영광이 드러난다.-295~296쪽

앞에서 지성만으로 공부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공부에는 한 사람 전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격정, 허영, 야망, 남을 기쁘게 하려는 헛된 바람의 노예여서는 안 된다. (중략) 공부에 특히 해로운 적은 거의 모든 사람의 인성에 내재하는, 아는 체하고 싶은 욕구다. 아는 체란 진실한 사람이라면 모른다고 인정할 대목에서 안다는 듯이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다. 엉터리 문인, 장광설을 쏟아내는 기자, 무지한 의원은 글의 외투로 지식의 곤궁을 숨긴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하는 필자는 매순간 자만심을 드러내고픈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싶어 한다. 우리는 부족한 자신감을 숨기고, 스스로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큰 사람인 체 한다. 우리는 실은 모르면서도 `단언`하고, `선언`하고, `확신`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제 꾀에 넘어가 스스로를 기만한다.-299~301쪽

대중은 전체적으로 보면 당신을 무너뜨릴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독립이라는 덕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대중의 심성은 초등학생의 심성과 같다. 대부분의 집단에서, 그리고 선거에서 대중은 진실이 아닌 관습을 지지한다. 대중은 아첨 듣기를 좋아하고, 다른 무엇보다 평온함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본질적인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그들에게 단호하게 주장해야 한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고독한 사상가는 이런 적절한 힘을 행사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중략) 진정으로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유일한 힘은 가엾은 인류에게 믿음을 주는 인격과 결합한 강한 신념뿐이다. 당신에게 알랑대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실은 아첨꾼을 경멸하고 주인에게는 굴복한다. 당신이 그런 세계에 속해 있다면, 그들은 같은 세계에 있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호의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조용한 경멸은 당신의 타락을 측정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중략) 그런 세계에서 당신은 여론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며, 인류가 어깨 너머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글을 써야 한다.-303~305쪽

생산적인 일은 다른 덕목들도 요구하며, 그 일의 가치에 비례해 요구 수준이 높아진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덕목을 말할 텐데, 이 덕목들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어서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결과가 나오지 않게 한다. 첫째는 착실하게 작업에 매진하는 꾸준함이고, 둘째는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이며, 셋째는 의지가 약해지지 않게 다잡는 끈기다.-306쪽

간헐적으로 공부하면서 때때로 게으름과 무관심의 주문에 사로잡히는 지성인을 누구나 한 명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여기저기 찢긴 직물과 같다. 그들은 그 직물로 귀중한 의복을 만드는 대신 대충 꿰맨 누더기를 만든다. 반대로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지성인으로 지내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다. (중략)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부하는 모습과 휴식을 취한 후 재빨리 과업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 주기를 꾸준히 반복하는 모습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중략) 우리는 `대충 해도 되는 일`이라거나 `정시에 시작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주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는 자투리 시간-진지하게 공부하기에는 마땅치 않은-이야말로 공부를 준비하거나 정리하고, 참고문헌을 확인하고, 노트를 살펴보고, 문서를 분류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한 시간임을 잊어버린다. 진지하게 공부에 몰두할 시간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자투리 시간은 다른 시간만큼이나 유용한데, 이런 부차적인 일들은 공부에 속하고 또 공부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307~309쪽

고양된 순간에는 이런 유혹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발견하고 저술하는 기쁨이 당신을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겨운 시간은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시간 동안 유혹의 힘은 아주 강하다. 때로는 이 작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진정으로 정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은 누구나, 열중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노력을 수포로 돌리겠다고 위협하는 암울한 순간에 대해 한탄한다. 공부에 대한 염증이 오래 지속될 때,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계속하느니 차라리 양배추를 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다는 이유로 당신을 밥벌레라고 부르는 노동자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이런 음울한 정신 상태에 있을 때 공부를 포기할 위험이 얼마나 큰가! (중략) 너무 지쳤다면 기운을 되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부를 멈추어라. 피로에서 회복하는 방법을 예로 들면,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몇 페이지 읽기, 무언가를 큰소리로 낭독하기,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써 신체에 변화를 주어 정신을 환기하기, 맑은 공기 속에서 호흡하며 가볍게 움직이기 등이 있다. 그런 다음에는 공부로 돌아가야 한다.-309~311쪽

꾸준함의 또 다른 효과는, 정신은 물론 신체에도 영향을 미치는 가상의 피곤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산보를 시작해 가파른 언덕을 처음 오를 때는 대개 기력이 없고 숨이 가쁠 것이다. 다리까지 아파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 걸으면 관절이 유연해지고 근육이 풀리고 흉곽이 팽창하면서 활동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피로를 느끼더라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밀고나가면서 몸속 기운을 끄집어내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조금씩 기운이 돌면서 적응해갈 것이고,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첫 단계를 지나가면 의욕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곤경의 원인이 무엇이든 움츠러들지 말고 극기하면서 겪어내야 한다. (중략) 한 번 수고를 하면 서너 번은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1분 동안의 용기가 하루를 견딜 힘을 주고, 고된 공부가 기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당신은 이 끈기에 힘입어 평생에 걸쳐 점점 더 쉽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월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말을 타고, 그림을 그리는 솜씨를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월하게 사유하는 솜씨를 익힌다.-312~313쪽

아미엘은 어느 날 일기에서 이렇게 자문했다. "네가 약한 이유가 무엇이냐? 수없이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환경의 노리개가 되었다. 네가 환경을 강하게 만든 것이지, 환경이 너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끈질기게 몰두하고, 중단했던 공부로 완고하게 되돌아감으로써 우리는 꾸준함을 배울 수 있다. 시작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느끼는 피로감이 사라지고, 싫증나는 순간에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 날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성인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이가 변덕스럽다면 그는 아이와 다를 바 없다.-313~314쪽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일을 포기하고 추수를 그만두는가! 그렇게 포기한 사람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공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처음 치르는 시험은 참가자를 떨어뜨리는 시험이다. 약한 자들은 한 명씩 떨어져 나가고 용맹한 이들은 견딘다. 결국에는 기드온의 전사 삼백 명과 다윗의 용사 삼십 명만 남는다. 견디는 것은 의지로 해내는 것이다. 견디지 않는 사람은 계획만 세울 뿐 의지로 성취하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놓는 사람은 진짜로 잡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 사랑을 그만두는 사람은 결코 사랑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이고, 운명의 일부인 공부는 더더욱 필연적으로 하나다. 참된 지성인은 견디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과업을 떠맡는다. 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진리를 사랑하고, 공부에 자신을 바치며, 조급하게 포기하지 않는다.-318~319쪽

어떤 이들은 약속을 하고, 자신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걸고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이 약속을 지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략)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부류이다. 그들을 닮은 지성인은 자신의 소명을 저버린 사람으로, 사실 지성인이 아니다. (중략) 당신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말한 대로 행하라. 당신 앞에는 양심의 문제가 있다. 당신의 명예를 걸고 그 문제를 해결하라. 끝맺지 못한 모든 일은 당신의 치욕이다. (중략) 우리는 갈수록 포기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체념한 채 무질서와 왜곡된 양심에 굴복하고, 우물쭈물하는 습관을 들인다. 그 결과 존엄을 잃고 마는데, 그것은 개인의 성장에 조금도 이롭지 않다. 옷감의 치수를 열 번 재되 자를 때는 한 번에 잘라라. 시침질을 정성 들여 하고, 꿰맬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당신이 책임지는 한 그 바느질의 결과는 완벽할 것이다. 완결한다는 것은 끝맺는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완벽하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를 강화한다.-322~323쪽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가늠하고 수행하는 공부는 언제나 훌륭하다. 반면 역량을 넘어서 수행하는 공부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앞에서 당신에게 적합한 공부는 유일무이하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서로 공부를 맞바꾸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주어진 공부는 당신만이 잘할 수 있다. 당신의 친구가 하면 잘할 공부를 당신은 형편없이 할 것이다. 신은 모든 이를 흡족해한다. 자신의 과업과 능력을 조화시키는 것, 알고 있을 때만 말하는 것, 사유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사유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지 않는 것, 대상의 본질을 놓치고는 호언장담으로 안다는 듯이 가장하는 위험을 피하는 것, 이 모두는 위대한 지혜다. 자만은 이 지혜에 반발한다. 그러나 자만은 양심의 적인 것처럼 정신의 적이기도 하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공부하면서 압도당하고, 남들의 비웃음을 사고, 중요한 힘을 소진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믿음까지 저버린다. 그는 불꽃처럼 사그라지고 만다.-328~329쪽

지성의 힘이 인간의 주권에 이바지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 외에 인간 조건의 다양한 측면 또한 고려해야 한다. 앞서 사회에서의 생활과 실천적 활동에 관해 말했다. 여기에 자연과 교감하기, 가정 돌보기, 예술 활동, 사적 모임이나 공적 모임 참여, 짧은 시 읽기, 연설 연습, 지적인 취미, 공개 시위를 더하자. (중략) 오로지 공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를 서투르게 한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고, 자신에게 결함이 될 특수한 성향을 몸에 익힌다. 정신은 늘 열려 있어야 하고, 늘 인류 및 세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번 새롭게 날아오를 역량을 지닌 채 공부로 돌아올 수 있다. 앞에서 "어떤 통이 견과로 가득 차더라도 여전히 그 통에 많은 양의 기름을 부을 수 있네"라는 랍비의 말을 인용했다. (중략) 이제는 견과를 전공 공부로 이해하자. 우리는 전공 공부에, 힘들이지 않는 지적 생활, 고상하게 즐기는 여가, 자연, 예술이라는 기름을 더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긴장을 풀어준다. 이 기름은 전공 공부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334~336쪽

내가 염두에 두는 지성인은 전공 공부를 철저히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보충하는 넓고 다양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의 정신은 일과를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나 똑같다. 그는 신 앞에서나 동료 앞에서나 하녀 앞에서나 한결같다. 그는 관념과 감정의 세계를 책과 논문에만 적어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보이고 삶의 길잡이로 삼는다. 근본에 이르면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다. 정신력은 구획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근면한 탐구의 목표인 `비밀의 정원`과 `포도주 저장고`로 통하는 수많은 문이다. 사유와 활동, 현실과 그 반영은 모두 신의 자식이다. 철학, 예술, 여행, 살림살이, 재정, 시, 테니스는 서로 연합할 수 있으며 화합하지 못할 때만 상충한다. 매 순간 필요한 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과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음악회에서 만물은 하나의 화음을 빚어낸다.-340~341쪽

지성인이 하는 모든 일에 체력을 소진하는 집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성인의 과업 가운데는 사전작업과 부수적인 작업, 사유와 저술에 수반되는 활동도 있다. 책을 고르는 일, 문서를 정리하는 일, 메모를 모으는 일, 원고를 분류하는 일, 여백에 삽입지를 붙이는 일, 논거를 바로잡는 일, 공부와 책을 정돈하는 일 등은 모두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 자체로 공부는 아니다. 계획을 잘 세우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할 때만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숙고할 가치가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아주 피곤하지는 않은 이런 과업들을 상당수 끝마칠 수 있다. 이렇게 과업을 수행하면서 두뇌가 짊어져야 할 부담에 따라 과업들을 배치하는 계획에는 이중의 장점이 있다. 첫째로 과로를 막을 수 있고, 둘째로 원래 상태를 회복해서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가 휴식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면 휴식 스스로 그 공간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때에 휴식은 주의 산만, 졸음,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불가피한 일의 형태로 드러난다.-345~346쪽

아퀴나스는 정신의 진정한 휴식은 기쁨이자 즐거움을 느끼는 어떤 활동이라고 말한다. 놀이, 허물없는 대화, 교우관계, 가정생활, 즐거운 독서, 자연과의 교감, 이해하기 쉬운 예술 감상, 힘들지 않은 육체노동, 마을 산책, 너무 엄격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연극 관람, 적절한 운동. 이 모두가 휴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역시 과함은 금물이다. 산만한 휴식은 시간을 잡아먹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부하는 삶의 추진력도 떨어뜨린다. 이 추진력은 최대로 유지하면서 피로는 최소로 줄이는 조화로운 순환을 발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지나치게 오래 공부하면 기진맥진하고, 지나치게 금방 멈추면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오래 쉬면 기존의 추진력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짧게 쉬면 힘을 회복할 수 없다. 당신 자신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공부와 휴식을 배분하라. 이 단서를 달고 말하자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주 짧게 쉬는 편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347쪽

높은 곳을 갈망하고 멀리까지 가기를 바라는 모든 청년에게 나는 인간 본성의 현실 안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적당한 여가를 챙기고, 체력을 소진하지 말고, 평온한 상태에서 정신적 기쁨을 느끼며 공부하고, 자유롭게 지내라. 필요하다면 노력하는 동안 당신 자신을 꾀어서, 나중에 어떤 즐거운 위안을 주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며 에너지를 회복하기 전까지 그 약속만으로도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배려하라. 아퀴나스는 절대 장난치지 않는 사람, 농담을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뢰한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웃의 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도 온종일 철저히 음울한 사람으로 지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348쪽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공부는 짜증과 병, 죄와 대적한다. 공부는 인생의 고뇌와 신체의 유약함을 완화하는 높은 곳으로 우리를 끌어올린다. 공부가 고무하는 의지와 공부가 제시하는 에너지의 방향은 걱정을 줄여주는 진통제이자 우리를 끔찍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잡이다. (중략) 공부할 때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안과 침울함에 맞서 어떤 치료제를 써야 하느냐고 자문해보면 답은 오직 하나, 공부다. 공부하다가 낙담했을 때 용기를 얻기 위해 어디에서 자극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공부다. 나의 노력에 적대적인 사람들과 나의 성공을 질시하는 사람들에 저항할 방법은 무엇일까? 공부다. 공부는 치료제이자 위안이다. 공부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게 해준다. 공부의 동반자인 침묵과, 공부의 영감인 기도를 공부에 더하라. 신이 허락한다면 정다운 교우관계 안에서 쉬어라. 그러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350~351쪽

게으름이 괜히 모든 악덕의 어머니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은 낙담과 시련의 어머니이기도 하며, 적어도 그것들에 기여한다. 공부에서 생겨나는 승리감은 그런 우울감과 싸운다.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공부에 힘을 쏟으면 노를 저으면서 노래하는 뱃사공의 기백 같은 것이 생겨나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 진리 또한 우리를 지킨다. 진리는 우리를 안정시키고 강화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는 진리와 사귀면서 우리 자신의 결점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결점에 대해서까지 위로받는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보상이며, 진리를 표명하는 것은 반박당하던 날들에 대한 고결한 복수다.-351~352쪽

비판받을 때 그는 무엇으로 적절히 응수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답은 방금 말한 바와 같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비난과 관련해 지금 내가 아는 답은 딱 하나, 다시 나의 공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퀴나스 역시 공격을 받았을 때 -아퀴나스는 사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생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비판을 받았다- 자신의 입장을 굳건히 하고 자신의 교리를 규정하고 분명히 밝히려 노력했고, 그런 다음에는 침묵했다고 한다. 그 `시칠리아의 벙어리 소`는 어린이십자군의 몸짓과 함성 때문에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잘못을 바로잡고 침묵을 지키라는 것은 위대한 격언이다. 이 격언을 실천한 사람들은 언제나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자신을 무너뜨리려던 힘을 오히려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추진력으로 삼았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로 집을 지었다.-352~353쪽

자신의 저술을 변호하거나 그 가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것은 유치한 시도다. 가치는 스스로 변호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계가 개입하는 법은 없다. 진리는 존재한다. 참된 저술은 진리의 존재와 힘을 공유한다. 저술 때문에 호들갑을 떨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신에게 해롭다. 침묵하고, 신 앞에서 겸손하고,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잘못을 바로잡아라. 그런 뒤에는 세찬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처럼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글 한 편을 변호하느라 시간과 힘을 쏟을 바에야 다른 글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당신의 평온이 흔하디흔한 성공보다 가치가 높다. 독일의 철학자 카이절링Hermann Keyserling은 이렇게 썼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거나 듣는다. 그는 대상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거나,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353~354쪽

비난이 당신을 향할 때는 털을 곤두세우는 동물처럼 내적이나 외적으로 대항하는 대신, 그 비난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관찰하라. 그 비판이 옳고 당신이 틀렸으면 진리에 저항할 작정인가? 설령 그 비판이 적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담대하게 당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나아가 신이 당신의 소명에 부과한 그 적의를 숭고한 목표를 위해 활용하라. 악 자체도 신의 수중에 있고, 심술궂은 비판은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라서 대부분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판에서 이득을 얻었다면, 나머지는 당신을 평가하고 적절한 때가 오면 당신을 공정하게 심판할 신에게 맡겨두어라. 그런 뒤에는 귀를 닫아라.-354쪽

앞에서 지적인 삶은 영웅적 행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영웅적 행위에 아무런 대가도 따르지 않기를 바라는가? 세상사의 가치는 그것에 들인 노력에 정확히 비례한다. 성공은 나중에, 아마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신의 칭찬으로, 그리고 당신의 양심을 자신들의 선지자로 삼을 신의 신하들의 칭찬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신과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 또한 눈에 띄는 결함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을 인정할 것이다. 지성인들도 서로 치사한 짓을 자주 저지르고 때로는 극악한 짓까지 저지른다. 그러나 설령 지성인들이 공공연히 인정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인 등급 분류에 따라 진짜 가치는 매겨지기 마련이다.-355쪽

공부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공부를 경시하는 것과 공부의 아름다움을 지독한 이기주의의 추함으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죄악 가운데 하나다. 고결한 사람들은 영예롭게 살아가면서 열매 맺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부하는 것은 열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 자체를 위해서다. 정연하게 공부하는 그들의 삶은 순결하고 올곧고 용맹하며, 신의 삶과 합일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망해도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소망도 그렇다. 뿌리가 강한 신앙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다가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씨를 뿌렸으나 수확하지 못하더라도, 수영하다가 파도에 떠밀려 계속 해변으로 되돌아오더라도, 걸어가다가 무한한 지평선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 믿고 소망하는 사람은 이런 일들로 실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들은 오히려 행복이다. 공부의 즐거움을 위해, 사랑하는 이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자기 소명의 즐거움을 위해 공부할 때 사랑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356~357쪽

지성인은 금욕을 선택하지만, 내세우며 자랑하게 되는 재산보다 오히려 금욕이 그를 더 풍요롭게 해준다. 그는 세상을 잃지만, 정신으로 세상을 얻는다. 그는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루가의 복음서] 22장 30절). 그에게 현실은 곧 이상이다. 그 이상이 다른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의 흠결을 아름다움으로 감싼다. 정신 안에서 매사에 초연하고 대체로 가난한 지성인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모든 것을 통해 성장한다. 포기했던 것을 은밀한 방식으로 숭고하게 되찾기 때문이다. 그가 내적 활동에 온전히 몰두해 있다면, 누가 봐도 자는 것처럼 보이는 그 상태에서 마음속으로 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359~360쪽

적절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공부에 전심을 다할 때, 탐구를 잘하고 독서를 잘하고 노트를 잘할 때, 소명을 위해 무의식과 밤을 이용할 때, 그럴 때 그가 준비하는 공부는 햇빛 아래 놓인 씨 또는 산모가 괴로워하며 낳는 아기와 같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요한의 복음서] 16장 21절). 공부의 보상은 공부의 결실을 맺는 것이고, 보상은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360쪽

너무나 많은 사람을 허무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화의 슬픈 효과를 참된 지성인이 모면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평생을 젊게 산다. 누군가는 그가 진리의 영원한 젊음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참된 지성인은 대체로 일찍 성숙하며, 영원이 그를 거두어들일 때까지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무르익은 모습을 유지한다. 이런 놀라운 영속적 특성은 성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성神聖과 지성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리는 곧 정신의 신성이다. 진리는 그 신성을 보존한다. 마찬가지로 신성은 삶의 진리이며,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위해 진리를 확고히 다진다. 성장하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덕도 없다. 마찬가지로 성장과 결실, 기쁨이라는 결과를 낳지 못하는 지성도 없다. `알다(savant)`의 어원은 `현명하다`(sage)로, 사유와 행위 모두를 규율하는 `지혜`(sagesse)의 어원과 동일하다.-360~361쪽

모든 사람 안에는 동일한 정신이 있다. 신이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숨 쉬기 때문이다. 얼마나 용기가 있느냐를 빼면 사람마다 다른 것이라곤 뇌 구조-이것을 이루는 요소들은 어느 정도는 자유롭고 활동적이고, 또 어느 정도는 구속받는다-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과 저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많은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빛은 우리가 넓히려 노력하는 틈 사이로 새어나올 수 있다. 일단 나오기만 하면, 빛은 스스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강화한다. (중략) 우리 편에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능력 차이를 줄일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만큼이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참된 지성인은 성과 없음과 쓸모없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무는 씨앗을 품는 나무인 것으로 족하다. 때로는 결실을 늦게 거두겠지만,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거둘 것이다. 정신은 답례를 한다. 일련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동경하는 높이까지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높이만큼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목표다.-363~364쪽

모든 개인은 유일무이하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의 결실 또한 유일무이하다. 유일무이한 것은 언제나 귀중하고 언제나 필요하다. 우리가 신을 저버리지 않으면 신의 성과는 일정 부분 우리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 성과는 우리의 열등함을 위로해주고, 우리가 무언가를 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과 마주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발산하고, 당신 자신에게 충실하고, 마지막까지 그 충실함을 유지한다면, 분명 당신의 공부-신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공부 그리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신의 영광에 합당한 공부-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많은 이들의 공부와 삶이 당신의 공부와 삶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공부와 삶이 나에게는 최선이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364~365쪽

지적인 일을 하고 싶은가? 당신 안에 고요한 공간을 만들고, 회상하는 습관을 들이고, 세상의 이해에 초연하고 절제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시작하라. 그러면 공부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일을 하는 이에게는 은총이나 다름없는 상태, 곧 욕망과 아집에 시달리지 않는 영혼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렇지 않고는 가치 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리라. (중략) 이러한 조건을 고려한다면, 소명을 받은 사람은 경박함과 무책임함, 공부를 겁내는 마음, 물질적 야망, 자만심과 감각적 욕망, 갈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흔들리는 의지와 인내심, 기꺼이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 적의와 표독스러운 감정, 참된 것에 이르는 길을 막고 참된 것의 승리를 방해하는 기존의 척도를 용인하려는 태도, 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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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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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티양주는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언제나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침과 저녁에는 때에 맞는 활동을 하고, 열정을 가지고 집중해서 탐구하라고 요구하며, 읽기와 기억하기, 노트하기, 글쓰기와 관련해서도 세세하게 지시한다. 간단히 말해 저자는 공부를 위해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규율할 것을 요구한다. 더구나 이런 요구를 할 때 저자의 어조는 `이렇게 하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권고조보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명령조에 훨씬 가깝다.-13쪽

어떤 공부를 해내는 데에 비범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균 정도의 자질만 있어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에너지와 그 에너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에 달려 있다. 정성을 들이며 착실히 일하는 노동자처럼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 노동자가 어딘가에 도달하는 동안 독창적인 천재는 대개 쓰라린 낙오자로 남는다. // 방금 말한 것은 누구에게나 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특히 스스로를 정신 노동에 바친다는 이유로 삶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각자의 소명으로 성별聖別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이 소명을 수행할 수 없는 처지라면, 적은 시간에 집중해서 수행해야 한다. 지적인 일을 하는 이의 특별한 금욕주의와 영웅적 덕목이 그들 일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이 두 가지 자기 봉헌에 동의한다면 나는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신의 이름으로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30~31쪽

가장 소중한 것은 의지, 깊게 뿌리박은 의지다. 누군가가 되고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의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유한 이상을 지향하는 그 누군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지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언제나 부차적이다. 어디에나 책이 있지만 그중 필요한 책은 소수다. 사회와 자극은 자신의 고독한 정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것은 그 정신 안에 있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열정적으로 사유하는 이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강의에 관해서 말하자면, 운 좋게 강의라는 도움을 받는다 해도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강의를 충실히 받아들이지 않거나 잘못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대중에 관해 말하자면, 때로는 대중이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신을 방해하고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거리에서 몇 푼 주우려다가는 자신을 망치고 말 것이다. 이런 것들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열정적인 고독이다. 그 고독 안에서는 하나의 씨앗이 백 개의 낱알을 맺고, 충만한 태양빛이 모든 땅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33쪽

이 언어를 이해하고 정신의 영웅들로부터 은밀히 부름을 받지만 필요한 수단이 없음을 두려워하는 이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하루에 두 시간을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가? 그 두 시간을 온전히 열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신의 왕국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되어 이 책이 바라는 대로 성배를 들이켜 그 강렬하고 씁쓸한 맛을 음미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자신감을 가져라. 아니,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을 해야 할 경우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혼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고도 밥벌이를 할 수 있다. 당신이 혼자라면 더욱더 고귀한 목적에 전념할 것이 요구될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어떤 소명을 따랐다. 나는 많은 이들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매일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제한된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라. 갈증을 씻어주는 동시에 다시 목마르게 하는 샘에 매일매일을 쏟아부어라.-34쪽

교구민에게 헌신하는 시골 성직자, 공부에서 손을 떼고 위급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소명을 받들어 가문을 돕기 위해 인문학에 등 돌린 젊은이는 재능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과 동일한 존재인 참된 것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다르게 행동했다면, 살아있는 진리를 모순에 빠뜨림으로써 덕목뿐 아니라 진리까지 간접적으로 더럽히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지식을 탐하여 가장 엄격한 의무마저 망설임 없이 저버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딜레탕트다. 그들은 의무로 해야 하는 공부를 그만두고 자신의 선호에 맞는 다른 공부를 하는데, 이 또한 재능을 잃는 일이다. 능력을 넘어서는 목표를 잡아서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 가상의 역량을 얻기 위해 실제 역량을 낭비하는 사람도 딜레탕트에 지나지 않는다. 아퀴나스가 공부에 관해 제시한 16가지 조언 중 2가지는 이런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너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을 구하지 마라." "곧장 바다로 뛰어들지 말고 먼저 개울에 몸을 적셔라." 평정을 찾도록 도와주어 덕목뿐 아니라 앎에도 기여하는 귀중한 조언이다.-54~55쪽

소명을 굳건히 다지고 능력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공부에 쏟으려면, 내면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더해 외적 생활, 즉 삶의 뼈대와 의무, 교제, 환경을 정돈해야 한다. 다른 어떤 낱말보다 한 낱말을 유념해야 한다. 반드시 삶을 `단순화`해야 한다. 당신 앞에는 험난한 여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떠나지 마라. 짐의 양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규칙을 정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것은 착각이다. 외적 환경이 동일하다면 단순화하려는 마음속의 바람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외부에 있기 때문에 제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영혼에서는 몰아낼 수 있다.-73~74쪽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 연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는 방문, 이웃과의 형식적인 교제, 아주 많은 이들이 남몰래 질색하는 인위적 삶의 온갖 복잡한 의식들은 공부하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사교활동은 공부에 치명적이다. 과시욕과 방탕한 정신은 사유를 파멸시키는 적이다. 누군가 천재를 떠올릴 때 만찬에 참석한 천재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 시간과 사유, 자원, 역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과의 그물에 뒤엉키지 마라. 관습을 고분고분 따라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안내자가 되어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지성인의 신념은 그가 달성하려는 목표와 일치해야 한다. // 소명은 집중을 뜻한다. 지성인은 성별된 존재이므로 헛된 일을 하느라 자신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팔리시Bernard Palissy가 가구마저 땔감으로 쓴 것처럼, 지성인은 모든 자원을 영감의 불꽃을 지피는 데에 써야 한다. 공부와 공부를 돕는 환경 이외에 사소한 일을 하느라 돈과 집중력을 낭비하기보다는 장서를 모으고 유익한 여행이나 평온한 휴가를 준비하고 영감을 되살리는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74~75쪽

자신을 온전히 공부에, 그리고 공부를 고무하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 가정생활을 단념한 이들은 그 희생으로 얻은 자유에 감사하면서 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들은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교인을 생각할 것이고, 라코르데르Jean Baptiste Lacordaire가 미소를 머금고 친구 오자낭Antoine-Frederic Ozanam에 관해 했던 다음 말을 자신에게 되풀이할 것이다. "오자낭이 물리치지 못환 단 하나의 유혹이 바로 결혼이었지." 그러나 공부하는 이는 결혼생활이라는 구속에 얽매어 있더라도 그 구속에서 힘과 영감 그리고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를 이끌어낼 수 있고 이끌어내야만 한다.-78~79쪽

그러므로 말을 천천히 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장소에는 천천히 가라. 말을 많이 하면 물이 쏟아지듯이 정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온화하게 대함으로써 당신에게 이로운 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에 자주 방문할 권리를 얻어라. 그렇지만 지나친 친밀함은 우리를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그들과도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삼가라. 정신을 헛되이 사로잡는 소식을 좇지 마라. 도덕 혹은 앎과 전혀 관련이 없는 세상의 언행 때문에 분주히 움직이지 마라. 시간을 잡아먹고, 정신을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채우는 쓸데없는 외출을 삼가라. 이런 것들이 신성한 일, 즉 고요한 묵상의 조건이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신성한 행복이라 할 수 있는 장엄한 비밀에 접근할 수 있다. 오직 이런 생활양식으로만 정중한 자세로 진리를 마주할 수 있다.-81~82쪽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켐피스Thoma a Kempis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은 만나고 나면 항상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이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면, 더 왜소한 인간이 되지 않더라도 자아가 더 왜소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군중에 섞일 경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전에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다수의 이질적인 자아에 짓눌려 자기인식을 잃어버린다. (중략) 위생학자들은 신체를 위해 세 가지 - 목욕, 공기욕, 몸 안의 노폐물 배출 - 를 추천한다. 운동선수가 그에게는 삶 자체인 내적 운동으로 근육을 느끼고 경기를 준비하듯이 정신의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인성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여기에 고요로 씻어내는 영혼의 목욕을 덧붙이고 싶다.-85~86쪽

홀로 공부하려면 아주 강하게 단련된 영혼이 필요하다. 자기 혼자서 지성인 공동체가 되는 것, 홀로 자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 다수의 자극이나 불가피한 필요에서나 솟아날 법한 힘을 초라하고 고립된 개인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드문 영웅적 자질인가! 열정적으로 시작하더라도 이내 어려움이 닥치고, 게으름이라는 악마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속삭인다. 목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점점 흐릿해진다. 노력의 열매는 너무 멀리 있거나 맛이 아주 고약할 것만 같다. 우리의 멍한 감각은 쉽게 현혹된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고 전례를 따르고 생각을 주고받는 것은 분명 이 우울한 기분을 떨치는 데에 놀라울 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의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은, 원대한 목표를 끈기 있게 추구하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소수만이 가진 상상력과 변하지 않는 덕목을 대신해줄 것이다. 우정은 산파술이다. 우정은 우리의 가장 풍부하고 싶은 자질을 이끌어낸다. 우정은 꿈의 날개를 펼치고, 숨겨진 사유를 드러내 보인다. 우정은 판단을 감독하고, 새로운 생각을 시험하고, 열의를 지탱하고, 열정에 불을 지핀다.-91~92쪽

어떤 경우든 설령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더라도, 정신 안에서 참된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 모임을 찾아라. 육체는 혼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반면 정신은 혼자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한 장소에 함께 있거나 어떤 이름표가 붙은 집단에 함께 속한다고 해서 만장일치를 이루고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다른 이들도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노동하고, 각자가 다른 이들도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자리에서 공부에 집중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과업은 완수되고, 삶과 행위의 원칙은 우리를 인도하는 정신이 된다.-92~93쪽

프랑스의 철학자 비랑Maine de Biran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시간을 최고로 활용하는 유일한 방법이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고요하게 정신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 위치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마땅히 제 역할을 수행할 때마다 우리는 삶을 선용하는 것이다." 당신도 공부가 당신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지적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 진정한 자아를 성취하는 일에 우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라. 당신의 인격적 완성에 그 일이 필요하다면, 상이한 요구들은 그 자체로 균형을 맞출 것이다. 선한 것은 참된 것의 형제다. 선한 것은 자기 형제를 도울 것이다.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한다면 관조하고픈 마음이 생길 것이다. 성 베르나르에 따르면, 관조는 신을 위해 신을 남겨두는 것이다.-95쪽

말을 절제하면 끊임없이 묵상할 수 있고 현명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말만 하고 때에 맞는 감정이나 유용한 생각을 표현한 후에는 침묵해야 한다. 이렇게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이들의 횃불을 밝히다가 당신의 횃불을 꺼뜨리는 대신 남에게 무언가를 주면서도 당신 자신을 간직하는 비법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말에 무게를 싣는 방법이다. 말하는 사람이 말 저변의 침묵을 인지할 때, 서두르거나 경박하게 흥분하지 않고 말 이면의 보물 - 알맞을 때에만 조금씩 드러나는 - 을 감추면서도 넌지시 암시할 때, 그 말은 무겁다. 침묵은 말 이면에 숨겨진 중요한 내용이다.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는 정신이 가치 있는 정신이다.-98~99쪽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계획을 세우고 일정한 시간 동안 그 계획을 꾸준히 추구하라. 계획을 추구할 때는 들뜨지 않으면서도 결과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보여야 하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머리를 식히려고 톱질로 잘라내는 통나무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스스로 하지 않는 활동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며, 그런 활동에서는 진정한 휴식이나 교훈, 훈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 아직 없다면, 가치가 있기에 당신에게 영감을 줄 대의를 찾아라. 그것은 계몽과 갱생, 보존, 진보에 이바지하는 운동일 수도 있고, 공공선을 위한 연맹일 수도 있고, 권리 보호와 사회활동을 위한 단체일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참여자에게 그의 인생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의 자아 전부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 영감이 당신에게 훗날 다시 영감에 이바지할 휴직을 허락할 때, 심지어 휴직을 강요할 때 그런 일에 당신을 바쳐라. 그러고 나서 영감으로 돌아오면, 세상의 보물뿐 아니라 위험과 오물, 울퉁불퉁한 길까지 시험하고 돌아온 당신은 영감이 열어젖힌 천국을 훨씬 더 사랑스럽게 느낄 것이다.-105~106쪽

지성인은 어느 때고 지성인이라야 한다. 지성인에게 권하는 고독은 고독한 장소라기보다는 고독한 묵상이다. 고독은 사태에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초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아지경으로 고차적인 것에 몰두하고, 경솔한 언동, 종잡을 수 없는 관념, 변덕, 난잡한 공상을 피함으로써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 고독의 관건이다. 언제까지고 자신의 공부에 머무르는 것, 왁자지껄한 내면, 애걸복걸하는 욕망, 의기양양한 자만심, 오감을 사로잡는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에 대한 상념 등에 흠뻑 빠져드는 것, 과연 이런 것이 고독일까? 거짓 평화가 있듯이 거짓 고독도 있다. 오히려 밖으로 나가 의무나 지혜에 따라 활동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영혼을 우울하고 약하게 만드는 대신 영혼에 양분과 활기를 주는 더 고차적인 고독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독의 순수함`이라 부른 것은 어디서나 유지될 수 있다. 고독의 순수함을 파괴하는 것은 고독의 쉼터까지 더럽힐 것이다. (중략) 당신이 내적 영감과 신중함 그리고 스스로를 기꺼이 헌신하는 사랑을 간직한다면, 진리인 신이 당신과 함께한다면, 당신은 우주 한가운데서도 혼자일 수 있다.-108~109쪽

어디에나 진리가 있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의문을 서로 맞닿아 있는 일군의 의문과 함께 공부해야 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전공에 기여해야 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논제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해야 한다. 우주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화가는 어디에서나 형태와 색, 움직임과 표현을 본다. 건축가는 덩어리들의 균형을 맞춘다. 음악가는 리듬과 소리를 감지한다. 시인은 은유의 대상을 발견한다. 사상가는 활동에 담긴 관념을 본다. 나는 지금 어떤 좁은 특수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의 문제다. 모든 것을 철저히 추구할 수는 없다. 두루 관찰하기 위해 한쪽 눈을 열어두되 나머지 주의력은 특정한 탐구 과정에 쏟아야 하며, 뉴턴처럼 "언제나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나중에 내놓을 탐구의 요소들을 모아야 한다. 정신 한켠에서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비결이다. 인간의 정신은 반추동물인 젖소와 같다. 젖소는 목초지 전체를 누비고 다니면서 먼 곳을 응시하고 느릿느릿 되새김질하고 여기서는 덤불을, 저기서는 잔가지를 물어뜯으며 우유를 만들고 야윈 몸을 살찌운다.-122~123쪽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의 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보통사람들이 간과하는 것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게 가장 소박한 일은 가장 고결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에게 의례적인 방문은 탐구를 위한 좋은 기회다. 그에게 산책은 발견하러 떠나는 여행이다. 그가 조용히 듣는 것과 대답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진리와 나누는 대화다. 그가 어디에 있든 그의 내적 우주는 스스로를 다른 무엇과, 이를테면 자신의 생명을 신의 생명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움직임을 만물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비교한다. 그리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좁은 공간에서 나올 때, 그는 진리를 뒤에 남겨두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을 활짝 열어서 세상의 장대한 활동이 발산하는 진리를 자신에게 불러들인다.-127쪽

우리는 밤의 밭에 공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잠에 빠져들면서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와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거나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관념을 마음에 떠올려라. 수면을 늦출 어떤 노력도 하지 마라. 반대로 우주가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평온하게 쉬어라. 결정론은 자유의지의 노예이며, 의지는 우리가 자는 동안 자신의 맷돌을 돌린다. 우리는 잠시 노력을 멈출 수 있다. 그동안 우주는 공전을 하고, 그렇게 공전하면서 우리가 고장 낼지도 모르는 정교한 기계를 우리 뇌 안에서 작동시킨다.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자연은 감시를 늦추지 않는다. 신도 끊임없이 감시한다. 우리는 이튿날 일어나서 자연과 신이 일궈놓은 열매를 조금 수확할 것이다.-133쪽

지성인에게는 마무리와 시작을 위한 저녁 기도 - 이번에는 비유적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 가 필요하다. 우리가 전제하는 연속적인 공부의 완결은 종착점인 동시에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열기 위해서만 닫는다. 저녁은 생의 나날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와 같은 시간이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당장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저녁에 고유한 방식으로 의식적인 노고의 시간을 연결하는 밤을 준비해야 하고,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139쪽

저녁에는 조용히 규칙적인 활동에 몰두해야 한다. 저녁에는 본성이 성향을 드러내도록 내버려두고, 주도적 행동을 습관으로 대체하고, 격렬한 활동 대신 단순하고 익숙한 일과를 따르는 것, 요컨대 밤 동안의 금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기꺼이 활동을 멈추는 것이 지혜롭다. 이렇듯 덜 활동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에서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가족은 그 지혜를 나눌 것이고, 조용히 대화하면서 영혼을 단결시키고, 낮 동안 받은 인상과 이튿날 계획을 교환할 것이다. 가족의 견해와 목표는 단단해질 것이고, 저무는 하루는 위안을 얻을 것이며, 조화로운 분위기가 가정을 감쌀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저녁은 가치 있는 축일 전야가 될 것이다. 사람은 흔히 오래전 어머니의 자궁에 있었을 때의 자세로 잔다. 그것은 상징이다. 휴식은 우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휴식은 단련이다. 단련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로 물러나면서 진행된다. (중략) 단련은 평화롭게 집중함으로써 안식처를 찾고 인간 정신의 활력을 쇄신하는 것에 가깝다. 단련은 기도와 침묵과 수면을 통해 행복하게 긴장을 늦춤으로써 유기적 삶과 성스러운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140~141쪽

어떻게 결정을 내리든 주의해서 시간을 확보해야 하고, 확보한 시간을 완전히 사용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그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거나 간섭받지 않도록 사전에 위험을 알아채야 한다. 그 시간이 충만하길 바란다면 쓸데없는 준비를 하지 말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 사전에 마치고, 무엇을 하고 싶고 얼마나 하고 싶은지 의식하고, 자료와 메모, 책을 챙기고, 사소한 일로 공부를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시간을 공부를 위해 떼어두고 정말로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정해진 시간에 단숨에 일어나고, 아침식사를 가볍게 하고, 쓸데없는 대화와 무익한 초대를 피하고, 꼭 필요한 서신 왕래만 하고 신문은 보지 마라. 공부하는 삶을 위한 일반적인 안전책으로 제시한 이 규칙들은 무엇보다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에 적용된다.-143~144쪽

모든 것이 정돈되었다면 곧바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은 공부에 열중하면서 앎을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주의력과 노력은 흔들리거나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반쪽짜리 공부를 삼가라. 책상에는 오래 앉아 있지만 잡생각이나 하고 있지 마라. 공부하는 시간의 가치를 높이려면 차라리 그 시간을 줄여서라도 집중해서 사용하는 편이 나으며, 그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마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력을 다하고, 계속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하라. 반쪽짜리 공부와 반쪽짜리 휴식은 공부를 위해서도 휴식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144쪽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충분하다. 그는 시간을 늘리지는 못하지만 시간의 가치를 높일 수는 있다. 무엇보다 그는 시간을 갉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금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는 두께가 있다. 잘 주조되고 결이 깨끗한 순금 메달은 얇게 펴낸 금박보다 가치가 높다. 많은 이들이 겉모습 또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의도에 쉽게 현혹되며, 이러쿵저러쿵 떠들기에 바빠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다. (중략) 공부하는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는 것뿐 아니라 방해받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시간을 완벽하게 지켜야 공부에 열중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아무리 철저하게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 외부의 요구는 그게 무엇이든 내면의 힘을 갉아먹으며, 어쩌면 귀중한 발견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 에머슨의 말처럼 "반쪽짜리 신들이 가면 진짜 신들이 온다."-146~147쪽

어떤 갈래의 앎이든 동떨어져 경작된 앎은 그 자체로 불충분하거니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위험을 야기한다. 수학은 비현실적인 엄격함에 익숙해질 것을 요구해 판단력을 왜곡한다. 물리학과 화학은 그 복잡성에 집착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앗아간다. 생리학은 유물론으로, 천문학은 모호한 추측으로 이끈다. 지질학은 당신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사냥개로 바꾸어놓는다. 문학은 허울을 좇게 하고, 철학은 허영을 부채질한다. 신학은 거짓 숭고함과 고압적인 자만으로 이끈다. 당신은 반드시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나아가면서 한 정신으로 다른 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경작지를 망치지 않으려면 여러 작물을 교배해야 한다. 이렇게 일정한 지점까지 비교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전공 공부에 착수할 시간을 늦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한 주제가 다른 주제를 밝혀줄 것이므로 당신은 너무 많은 짐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주제를 더 쉽게 배울 것이다. 정신을 넓혀감에 따라 당신은 더 쉽게 배우고 더 쉽게 짐을 덜어낼 것이다.-156~157쪽

앞에서 한동안은 다양한 길을 따라가면서 그 길들이 어디서 만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학문이라는 땅을 여러 방향으로 걸어보는 것은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그곳에 이르러 한가운데를 파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 명백한 제한은 공간 전체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구멍의 바닥은 하늘 전체를 드러낼 것이다. 나머지를 어렴풋이 아는 사람이 어떤 한 가지를 속속들이 알게 되면, 깊이 파고드는 탐구에 힘입어 나머지를 이해하는 수준도 크게 높아진다. 모든 심연은 서로 닮았고, 모든 토대는 서로 통한다. (중략) 모두의 삶에는 그만의 고유한 공부가 있다. 그는 용감하게 그 공부에 전념해야 하고,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지정된 공부는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당신의 목표가 세련된 사람, 우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전문화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고유한 기능을 가진 사람, 무언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새롭게 전문화해야 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어떤 한 가지를 해내기 위해서다.-174~175쪽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정해진 순간에 필연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중략) 모든 것이 흥미롭다. 모든 것이 유용할지 모른다. 모든 것이 고결한 정신을 끌어당기고 유혹한다. 그러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신과 신체가 제약을 가한다. 진리와 일종의 주종 관계를 맺고 순종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처럼, 좋든 싫든 우리는 시간과 지혜가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감수해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당신의 과업을 가늠하라. 몇 번의 실험을 거친 뒤에는, 경직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마음을 다잡고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여라. 독서와 어느 정도의 글쓰기를 통해 지식의 여러 영역을 둘러본 초기 공부의 이점을 유지하되, 당신의 전공에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쏟아라. 반쪽짜리 정보를 가진 사람은 사태의 절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어중간하게 아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자 결심한 것을 아는 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곁눈질만 하라. 다른 이들의 소명을 대신하려다가 당신 자신의 소명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176~177쪽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양의 지식에 도달하는 것으로 쉽게 만족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이내 지식을 채우려는 공복감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나 무언가를 결여한다는 것과 무한한 발견의 영역에서 우리에게는 `여기서 멈추자`라고 말할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과시하거나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공부하는 것이라면 약간의 지식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눈가리개로 자신의 어마어마한 무지를 다른 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감춘다. 그러나 진정한 소명은 그렇게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소명을 가진 이는 모든 성취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여긴다. 진리에 헌신하는 인간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탐구하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면서 살아간다.-183~184쪽

한꺼번에 몇 가지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그렇게 할 필요도 있다. (중략) 그렇더라도 각각의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그 과제들을 재개할 때도 집중하라. 한 과제를 수행할 차례가 되면, 다른 과제는 옆으로 제쳐두고 일종의 칸막이를 친 채로 지금 눈앞에 있는 과제에 집중해야 하며, 그 과제를 끝내기 전까지는 다른 과제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이것 조금 했다가 저것 조금 하는 것은 전혀 이롭지 않다. 자꾸 머뭇거리고 이번에는 이 길을 갔다가 다음번에는 저 길을 가는 여행자는 이내 용기를 잃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반면 한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 새로운 기운으로 계속 시작하고 적절한 순간, 즉 활동의 첫 단계를 마쳤을 때에 쉬는 것은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는 방법인 동시에 정신을 기운차게 유지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방법이다. 참된 탐구자는 상충할 수도 있는 여러 과제에 몰두하면서도, 어떤 장애물을 넘기 위한 두 가지 절실한 노력 사이에서 늘 정신을 평온하고 고결하게 유지해야 한다.-187~188쪽

나는 앞에서 집중의 목표가 탐구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집중하는 것과 넓게 보는 것은 심장의 수축과 이완처럼 하나의 동일한 움직임이다. 내가 말하는 집중이란 한 점으로 주의력을 모으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넓게 보는 것이란 그 점이 방대한 전체의 중심이라고 의식하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은 모든 것의 중심인데, 무한한 구 안에서는 파스칼의 말처럼 "모든 점이 중심이고, 어떤 점도 원주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포괄적인 종합에 도달하기 위해 세부를 통합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면, 세부에서 너무 오래 꾸물거리다가 통합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는 성향도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성향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첫째 성향은 학문의 목표에 상응하고, 둘째 성향은 우리의 약점에 상응한다. 더 깊이 꿰뚫어보기 위해 대상을 분리하되, 그런 뒤에는 대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통합해야 한다.-200쪽

해야 할 공부가 방대하기 때문에 절대적 의미에서는 많이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한정된 전문 영역에서조차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도서관과 우리의 정신을 가득 채우는 저술들과 비교하면, 우리가 읽는 것은 매우 적다. 허겁지겁 읽는 것, 자제하지 못하는 습관, 정신을 해치는 과도한 마음의 양식,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쉽고 익숙한 다른 이들의 사유에 안주하는 게으름은 금해야 할 것들이다. 많은 이들이 귀중한 지적 자질이라며 자랑하는, 읽기에 대한 갈망은 실은 결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갈망은 다른 결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정신을 독점하고, 끊임없이 정신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확실한 대립을 정신 안에 만들고, 정신의 힘을 고갈시킨다. 우리는 지적으로 읽어야지 결코 격정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건강과 현명한 소비 규칙에 따라 그날 먹을거리를 미리 정한 주부가 시장에 갈 때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 시장에 있을 때 주부의 마음은 저녁에 영화관에 있을 때의 마음과는 다르다. 시장에서 주부는 즐거움과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가정의 살림과 안녕을 생각한다.-212~213쪽

지나치게 읽는 정신은 양분을 공급받기는커녕 오히려 둔해지며, 서서히 성찰하고 집중하는 힘을 잃어버려 결국에는 산출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정신은 내면을 향해 점점 더 외향적이 되고, 밀물 썰물처럼 흐르는 관념과 내면의 이미지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것들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무절제한 기쁨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그 기쁨은 지성의 기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 혹은 단어·문단·장·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실려가는 것만을 허락한다. 끊임없는 진동이 쇠를 마모시키듯이, 끊임없는 시각적 자극은 정신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원인이 된다. 대단한 독서가가 자신의 눈과 뇌를 혹사한다면, 그가 진정한 공부를 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만성적인 두통을 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지혜롭게 공부하는 이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명석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과 유용하게 쓰일 것만을 정신에 간직하고, 뇌를 신중하게 관리하며 뇌에 아무것이나 쑤셔 넣지 않는다.-213~214쪽

사람들은 세상물정에 밝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성인 역시 세상물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 전문 영역에서 저술되는 것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러나 시류에 휩쓸려 공부 역량을 소진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떄로 시류는 당신을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막는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스스로 노를 저어야 한다. 시류는 당신이 도달하려는 지점까지 당신을 데려다주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이미 걸어간 길을 따르지 말고 당신 자신의 길을 가라. 견실하거나 진지하지 못한 읽을거리와는 원칙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일부 문학의 걸작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이따금 휴식 삼아 소설을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소설 대다수는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기는커녕 정신을 어지럽히고, 사유를 불안과 혼란에 빠뜨린다. 또한 끊임없이 쏟아지는 뉴스의 습격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켜라. (중략) 뉴스를 읽으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소비하지 마라. 진지하게 공부하는 이는 주간지나 격주간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외에는 평소에 귀를 열어두고 주목할만한 기사가 실리거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일간지를 읽어야 한다.-214~215쪽

당신의 책을 선택하라. 흥미를 끄는 광고나 자극적인 제목을 믿지 마라. 성실하고 정통한 조언자를 곁에 두어라. 곧장 수원水源으로 가서 갈증을 풀어라. 일급 사상가들을 사귀어라. 혼자 힘으로 읽는 것이 늘 쉽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탄할 만한 것에는 진심으로 경탄하되 헤프게 경탄하지는 마라. 형편없이 쓰인 책, 사유가 빈곤한 책에는 등을 돌려라. 주요 관념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책만 읽어라. 이런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책은 서로 되풀이하고, 서로 내용을 희석하고, 서로 반박한다. 그런데 희석하고 반박하는 것도 일종의 반복이다. 검토해보면 사유에서 새로운 발견은 드물다는 것을 알 수있다. 축적되어 있는 오래된 관념 혹은 영원한 관념이야말로 최상의 관념이다. 인류의 지성과 진정으로 교감하려면 좀스럽거나 언쟁을 일삼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최상의 관념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217쪽

다시 니콜의 말을 인용하면, "책은 인간의 작품이며, 인간의 타락은 그의 행위 대부분을 오염시킨다. 인간의 타락은 무지와 현세욕으로 이루어지며, 거의 모든 책은 이 두 가지 결점을 어느 정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책을 걸러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을 신뢰해야 하고, 신의 자식인 우리 자신의 좋은 면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찾는 본능과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이 안전장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의 가치는 어느 정도 당신 자신의 가치, 당신이 그 책에서 끌어내는 것의 가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라이프니츠는 무엇이든 이용했다. 아퀴나스는 동시대 이단자와 이교도에게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유를 받아들였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그에게 해롭지 않았다. 지적인 사람은 어디에서나 지성을 발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벽에나 자신의 편협하고 무기력한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최선을 다해서 무엇을 읽을지 고르되, 훌륭하고, 폭넓고, 진리에 대응하고, 신중하고, 진취적인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노력하라. 이런 특성들은 당신 자신의 특성이기도 하다.-218~219쪽

(근본적 읽기)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고 거의 모든 것을 배워나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진취적으로 읽을 때가 아니다. 초기 단계에서 교양을 두루 배우고 있거나, 새로운 갈래의 공부와 지금껏 간과되어온 문제를 과제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이 목표를 위해 저자들을 비판하기보다 믿어야 하며, 독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저자를 이용하기보다 저자의 사유를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너무 일찍 행동에 나서면 습득에 방해가 된다. 처음에는 유순하게 읽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되풀이하며 "너는 네 스승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퀴나스는 이 말을 실천했고, 그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220~221쪽

(정보 습득 위한 읽기) 자신을 도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다른 책에 의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정신 자세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역으로 정신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에 책에서 정보를 얻으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보를 찾아서 이용하길 원하는 사람은 순수한 수용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참고하는 책은 그의 하인이 된다. 어느 정도의 유순함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그 유순함은 저자보다는 진리를 향해야 한다. 유순한 독자는 저자의 결론을 논박하지 않을 만큼 저자를 신뢰하면서도, 논의의 모든 단계를 노예처럼 따르지는 않는다. 이런 태도는 극히 중요하다. 공부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책을 참고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떄문이다. 또 단순히 책을 참고하듯이 공부하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머무르는 것이고, 자신의 주제로 안내하는 저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신을 도야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222~223쪽

고양적 읽기에 관해 말하자면, 일반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각자의 경험에 근거해 책을 선택해야 한다. 이미 당신에게 도움을 준 것은 십중팔구 다시 도움을 줄 것이다. 길게 보면 한 책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매번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데, 습관이 들수록 그 영향을 빠르게 받아들이게 되고, 통찰력이 깊어질수록 그 영향에 익숙해진다. 책의 한 페이지는 관념과 감정의 연합이 상기시키는 정신의 상태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저자와 영감을 주는 대목이 있으면 지적 정신적 침체기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 좋아하는 책들을 곁에 두고 언제든 필요할 때 거기에서 기운을 얻어라. 몇 년 동안 정신이 시들해질 때마다 보쉬에의 콩데Louis Conde에 대한 <추도사(Oraisons Funebres)>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기운을 되찾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각자 자신을 성찰해서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하고, 아픈 영혼을 위한 약을 곁에 두고 효능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거듭 먹어야 한다.-223~224쪽

특정한 종류의 읽기는 휴식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읽기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읽은 후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묵상에 오히려 해가 되고,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나는 고된 일을 마친 후에 독일의 철학자 첼러Eduard Zeller의 <희랍 철학사 개요(Grundriss der Geschichte der Griechischen Philosophie)>를 읽은 사람을 알고 있다. 그것은 휴식이었지만 충분한 휴식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양념을 잔뜩 친 이야기나 공상적인 이야기를 읽어서 정신의 장면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또 어떤 이들은 공부할 의욕을 떨어뜨리고 정신을 해치는 가벼운 읽을거리에 탐닉한다. 그런 것은 모두 해롭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다른 물건처럼 도구적 역할만 하는 책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지 마라. (중략) 저마다 취향이 있기 마련이고, 휴식을 위한 읽기에서는 취향이 가장 중요하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단 한 가지만이 진짜 휴식을 준다. 바로 기쁨이다. 지루한 무언가에서 휴식을 찾으려는 것은 착각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당신을 너무 들뜨게 하지 않는 것,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해롭지 않은 것을 읽어라.-224~225쪽

지성의 창공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천재들의 이름을 때때로 떠올리는 것은 정신의 귀족들이 남긴 기록을 훑어보는 것이다. 이 자긍심은 걸출한 아버지나 위대한 조상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효과가 있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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