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칠동삼





ꡒ춘칠동삼!ꡓ

오늘도 마트에서 가장 먼저 진열대 앞을 오가며 물건 나르기 바쁜 나는, 바로 옆 사내를 힐끗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춘칠동삼. 이 말은 엄마가 궁할 때마다 끌어다 붙이는 말이다. 나는 엄마가 이 말을 처음 입에 붙이고 다닐 때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저게 무슨 말이야, 하며 궁금해하다가도 그저 시덥지 않은 인생 한탄사려니, 하며 모른 척 돌아서곤 했었다. 엄마는 무슨 말만 나오면 ꡒ그래서 인생은 춘칠동삼인거야!ꡓ혹은 ꡒ에고, 인생은 동칠춘삼이라잖어.ꡓ라며 자신이 지어낸 말을 남이 꾸며낸 말인 냥 떠들어대곤 했다. 엄마가 춘칠동삼! 외칠 때마다 저 말이 저렇게 뿌듯한가 비웃음 치던 자신이 오늘에 와 이 말을 스스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절로 나오는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엄마의 한탄사가 어느새 나한테로 옮겨져 왔는지 땀흘린 이마를 연신 닦아내면서도 춘칠동삼 중얼거리게 된다. 서늘한 가을인데도 움직이는 몸 덕분에 땀이 난다.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빠르게 손을 놀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다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과장의 말 때문에 쉴 틈이 없다.

ꡒ하이고마, 요롱소리 들린다! 만대 그카나?ꡓ

나는 영천여자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 했다. 오늘은 그냥 말이 하기 싫다. 말 없이 일하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에게도 쉴 틈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 귀를 막아 놓은 것 같다.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먼지 뭍은 옥시크린을 닦아내느라 시커메진 장갑에 진한 파우더 자국이 뭍은 채 나왔다.ꡐ이래서 화장하는 거 싫었는데. 땀나고 더워. 짜증나.ꡑ나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놀렸다. 겉으로는 낼 수 없는 불평을 뱃속에 가득 차도록 해댔다. 

박스에 가득 담긴 옥시크린 세 개를 양손에 쥐고 허리를 들어올렸다. 뻣뻣해진 허리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요사스러움으로 걸리적거렸다. 고작해야 6개월 일하다 보니 아픈 곳도 많아지고 삐그덕 거리는 곳도 많아졌다. 이제 이 짓도 끝이다. 실물 나게 닦아댔던 옥시크린도 화장하는 일도 아침마다 지겨운 연설을 듣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춘칠동삼이라더니. 내 인생의 칠 할이 봄처럼 화사할 거라는 엄마 말이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나는 삼일 전의 일을 기억해 냈다. 수습기간 6개월이 얼마 남지 않는 날이었다. 고작해야 삼 일 남은 날, 당연히 재 계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에게 과장은 계약해지란 말을 건넸다. 나는 과장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었다. 과장의 허연 얼굴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을 만큼 괜찮은 모습이었다. 늘 깔끔하고 단정하고 예의 바른 듯한 얼굴은 정직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사는 사람 마냥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그 날도 과장의 얼굴은 단정했다. 사회생활에 회사 생활에 쪄들다 보면 어느덧 얼굴빛은 거무스름하게 변하기 마련인데, 유난히 뽀얗게 보이는 과장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을 비켜 나간 듯 보였다. 그에 반해 나의 낯빛은 거무스름했다. 이제 막 2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의 얼굴에는 온갖 것들이 다 거쳐간 듯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ꡒ이번에는 어찌 해볼 수가 없네요. 회사에서 대대적으로 신규채용을 하기로 해서, 뭐,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에...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유통계 전체가 이번에 신규채용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영업팀에는 큰 이변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객들 반응이 별로 안 좋아요. 더러 항의 전화도 오는 것 같고. 음..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번 달까지 일해주시고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아, 이거, 여러분들이랑 정들었는데 이렇게 되니 아쉽습니다. 그려.ꡓ

과장의 요점은 이러했다. 신규채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 고객의 평가가 좋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 란 것이었다. 하기야 친절과 미소를 앞세워 이웃 같은 언니가 되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우리들인데 친절하지 않다니, 그건 과장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 맞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ꡒ아, 진짜 웃기다아~야. 우리만큼 잘 웃고 친절한 여자들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러냐?ꡓ

나와 같이 계약해지 된 뚱뚱한 여자가 껌을 질겅 씹으며 입술을 비틀거렸다.

ꡒ언니! 혜자언니! 우리 짤렸어. 이번에는 꽤 많어. 과장이 신규채용 어쩌고 하더니 그냥 가라네. 아. 짜증나.ꡓ

ꡒ점드록 일했는데 우짜고. 가들 참말로 엄청시리 불앙타! 가뜨가나 생똥 싸게 했는데 그카나?ꡓ

영천여자는 일을 하다 말고 과장을 만나고 나온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영천여자의 얼굴에는 정 많은 여자의 성격만큼 안쓰러움이 가득 차 보였다.

ꡒ언니! 무슨 말이야. 내가 못 알아듣는 다고 사투리 쓰지 말랬잖아! 여기 온지 5년이 다 되어가면서 아직도 사투리냐. 짜증나. 1년 넘게 일했는데...뭐야, 정말!ꡓ

뚱뚱한 여자는 1년 넘게 이곳에서만 일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 덕에 어린애 둘을 떼어놓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거 못해먹겠다 노래를 불렀지만 이곳을 나가고 나면 가장 아쉬운 사람은 뚱뚱한 여자였다. 이제야 조금씩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고 일주일 전 회식자리에서 가장 크게 웃던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비춰진 세월의 흔적은 까맣게 내려앉은 기미로 촘촘히 짜여져 여자의 살집을 터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만두게 되었다. 뚱뚱한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지라 짜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삼일 전이었지만 그땐 그래도 당장 막막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자들과 장난도 치고 웃기도 하고 꾀도 부리고 했었지만 막상 마지막날이 되니 눈앞이 아득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ꡒ니, 괘안나? ꡓ

나는 영천여자의 얼굴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꼭 엄마처럼 자상한 말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만 보니 오늘 아침만 해도 엄마는 여전히 춘칠동삼이란 말을 외치고 또 외쳤다. 자신이나 아이들이 기술과 능력을 키워서 그 덕을 백 퍼센트 봐야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며 집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재능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자식들 인생을 꽉 막히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에게 가장 좋은 말과 나쁜 말은 춘칠동삼이 되어버릴밖에. 인생의 칠 할은 춘(春)이요, 나머지 삼 할이 동(冬)이란 말로 이것이 가장 잘 지켜지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이 말처럼 되나, 라는 것이 엄마 한탄사의 줄거리였다. 그러니 인생은 춘칠동삼이 되었다가 동칠춘삼이 된다라는 것인데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보니 11시 40분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빠져나간 한산한 시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내일 팔아야 할 수만큼을 체크해 놓고 창고에서 물건만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마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먼지로 매캐한 냄새가 차 있다. 나는 휑하니 바람을 몰고 가 비상구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파우더를 꺼내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라 해도 24살 아가씨였으니 집에 가기 전에 다시 화장을 고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비록 파우더만 한 엉성하기 그지없는 화장이긴 해도 말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 짓을 안 해도 되겠지, 란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물론 다시 이력서를 쓰려면 열심히 발라야 하지만.


처음 이 곳에 취직되었을 때 끗발 날리게 죽여주던 기분이 떠올랐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고스톱 판에 끼어 든 것 마냥 내 양손엔 흑싸리껍질이 놓여 있었다. 한들한들 봄이 다가와 코끝에서 살랑살랑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엉덩이를 흔들더니 기어이 시들시들 가버리고 말았나. 하늘 높이 치켜 든 흑사리껍질은 이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매화와 바꿔들고 6개월을 지냈더니 어느새 싸늘한 추위가 찾아왔다.


ꡒ엄마, 내 인생 정말로 춘칠동삼인 거 맞아?ꡓ 내 인생의 봄날은 어찌 되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웃을 위한 30분





오전 9시 30분, 단정하게 조끼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기 자리 앞으로 갔다. 머리를 매만지고 조끼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일제히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ꡐ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ꡑ속으로 수 십 번 되 뇌이며 입술을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렸다. 흡사 두꺼비 주둥이 같은 두툼한 것들이 마흔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스무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투박하게 붙어 있었다. 더러 하품하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검은 정장을 입고 직원들의 용모단정을 체크하며 돌아다니는 팀장 덕분에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간을 지겨워했다. 손님들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30분 동안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를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뛰어야만 한다는 것을 수 십 번 들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ꡒ하이고 마, 디게 지업다.ꡓ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영천여자가 귀를 후비며 한 마디 했다. 팀 내의 인기스타답게 툭툭 내뱉는 사투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속속들이 알아서 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영천여자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제히 큭큭거렸다.

ꡒ마할라꼬 웃노! 마안노무자식들..ꡓ

사람들은 영천여자의 말을 시작으로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겨웠던 참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ꡒ졸리다, 그치?ꡓ

ꡒ메친년, 밤에 뭐하고 이제사 졸립다냐~간밤에 근질거렸던 일이 있었구만, 큭큭ꡓ

입에서 나오는 말의 반 이상이 욕으로 되어있다는 서른 살 여자가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ꡒ언니도, 참. 간밤에 뭔 일이 있다고! 있었으면 좋겠다. 허구한 날 12시에 끝나는데 근질거릴 일이 뭐가 생겨..하아흠ꡓ

나는 간밤에 있었을 것만 같았던 일을 상상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고 싶었다. 12시에 끝나 택시 타고 집에 오면 돌아오기가 무섭게 자버리고 마는 요즘 생활이었다.

ꡒ삐가리같은 아들이 꼬대긴다. 쯧, 가아 눈깔 돌아가는기 봐라. 하이고 마, 불앙타!ꡓ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팀장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족쇄가 머리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 두 눈에 깎인 월급명세서가 왔다 갔다 했다. 저 서류철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족쇄였다. 저것에는 팀 전체 인원의 신상명세와 팀장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평가가 적혀있었다. 서류철의 행방을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알 길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원관리팀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저 서류철을 두려워했다. 팀장의 찢어진 두 눈보다 검은 정장보다 무서운 것이 서류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다. 30분 동안 지겹도록 듣는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에 대한 연설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점 시작 30분 전, 폐점 후의 30분은 우리에게 지옥 같은 시간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팀장의 눈과 손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 같았다. 그는 단 한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겉모양을 훑고 또 훑었다. 때로는 치마 입고 온 여자들의 다리를 훑는가 하면, 화장하는 것을 빼먹고 온 여자의 얼굴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했다. 오늘 그는 한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화장 없이 맨 얼굴로 나타난 저 여자가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그가 서류철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마도 용모가 단정하지 않음, 정도가 적혀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그의 손은 진흙길을 달려가는 트럭처럼 출렁거렸다. 저 서류철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엑스표가 되어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팀장은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ꡒ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저런 맨 얼굴로 사람 상대하면 불쾌해 한다는 것도 모릅니까?ꡓ

나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였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하얀 바닥은 비가 오는 하늘처럼 부옇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젖은 고무 타이어 나는 냄새가 내 눈가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뚝뚝 떨어지는 하얀 비를 보았다. 가을비가 두 눈에 달라붙어 떨어 질 줄을 몰랐다. 아마도 스팀으로 물기를 말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서있던 영천 여자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쓰다듬었다. 검붉은 손금이 그려 있는 여자의 손은 꺾인 나뭇잎처럼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의 손이 날카로운 면도칼처럼 사각사각 거린다면 영천여자의 손은 푹신한 솜덩이 같은 살결이 느껴졌다. 친절하고 따스한 여자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듯 꺾인 나뭇잎 같은 영천여자의 손에는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ꡒ괘안타, 니도 깐지게 구루라. 뿔땅굴 나두 참아야지. 우야던둥 전디야지, 아암. 전디야 살지. 그라도 니 노박 애뭇는거 보믄 차마타.ꡓ

영천여자의 말은 섬유질처럼 푸석거리는 내 마음 속에 흡수되었다.

오전 10시, 건물 전체에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서 아랫배에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는 커다란 문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오십시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운 목소리가 건물 전체를 가득 매었다. 우산을 든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90도까지 숙여진 허리 위로 묵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또각또각,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수 십 개의 신발들이 지나갔다. 오늘 하루, 우리가 봐야만 할 신발들이 얼마나 많을지 속으로 가늠해보자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거 따져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뭐. 우리들은 무거운 허리만큼 체념이 빨라서 금방 일어나곤 했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



오전 8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검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끗발 날리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 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회색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검은 색 같은 빗줄기가 무섭게 내려치고 있었다.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머리를 쳐대던 빗줄기가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머리에 묻은 빗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걱정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선크림을 살짝 찍어 발랐다. 거추장스런 얼굴은 오늘도 여전히 텁텁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빗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이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왔다갔다하고 있다. 이제 막 이웃을 위한 30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힘 센 여자





ꡒ여기 하나 더.ꡓ 

여자는 맞은편 테이블을 닦고 있던 종업원에게 다 마신 소주병을 흔들며 말했다. 식당 벽에 걸린 둥근 벽시계 바늘은 밤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가냘픈 여자아이 하나가 주방 출입문 근처에 있는 냉장고의 유리문을 열고 소주를 한 병 꺼내 그녀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ꡒ더 필요하신 거라도.ꡓ  

ꡒ아니.ꡓ 

새 소주를 건네 받은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 뒤 병 뚜껑을 테이블에 있는 재떨이에 던졌다. 사각 유리로 된 재떨이에 미쳐 들어가지 못한 뚜껑은 바닥에 떨어졌다. 종업원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뚜껑을 집었다. 짧은 반바지에 훤히 드러난 하얀 허벅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떠들다 말고 일제히 그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업원의 긴 다리에 머물고 있는 여자들의 시선에서 시기와 짜증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ꡒ그래, 저런 년들이란 말이지. 쟤처럼, 잘빠진 것들 있잖아.ꡓ

ꡒ저런 년들? 저렇게 삐쩍 꼴아 가지고는 무슨 일을 한다고!ꡓ

여자들은 여전히 종업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여자들의 수다를 들었는지 어땠는지 종업원은 말없이 맞은편 테이블로 돌아가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한잔을 죽 들이키고 다시 채웠다. 시간이 지나 식기 시작하는 순대 국에서 돼지 혓바닥 하나를 찾아 내 새우젓에 살짝 찍어 입에 넣고 씹으며 두꺼운 통 유리로 된 벽을 통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ꡒ이 딴 거 못 먹는 년들도 있더라.ꡓ

자신의 국밥 그릇에서 두툼하게 썰어진 순대를 찾아낸 한 여자가 깍두기 국물이 묻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ꡒ왜, 그때 알지? 점심 때 식당에서 순대 국이 나오니까 그 년이 못 먹는다고 난리 치는데.  그런 난리도 없었어. 나이도 젊은 년이 얼른 일해서 돈 모을 생각은 안하고, 놀기 위해 마  트 다니는 것인지...ꡓ

ꡒ그래도 걔 예쁘잖아. 팀장이랑 조장이 좋아서 껌뻑 죽더라.ꡓ

여자들은 술을 마시다 말고 일제히 한숨을 내 쉬었다. 주말이 아닌데도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시는 이유는 나름대로 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결혼한 여자들 아니던가. 그런 여자들 다섯이 벌써 소주 네 병을 마시고 있었다. 여자들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술 마시는 내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ꡒ예쁜 게 좋은가, 뭐 좋기도 하겠지. 쳐다보면 즐겁잖아ꡓ

ꡒ언니, 그게 뭐가 좋아. 우리 하는 일이 얼굴 갖고 하는 일인가. 힘이 있어야지! 삐쩍 마른   년들은 힘없어서 매일 우리가 일 더 많이 하잖아. 팔뚝 힘 좋아서 물건 정리만 잘하면 됐   지. 거기에 잘 빠진 여자가 왜 필요한데!ꡓ

ꡒ그케 말이다. 미라야, 기억나재? 가가 일 하다 말고 후네낀다 카니 팀장이 눈이 벌개 가지   고설랑은......쯧. 그 가스나 얍삽하게 구는 거이 모르고 말이다. 마알라꼬 그케 사는지.ꡓ

영천에서 인천으로 온 지 4년밖에 안 되었다는 한 여자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 일 덕에 화가 나 있던 참이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자는 눈웃음도 칠 줄 알아야 하고, 사내 놈 가슴팍에 앵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ꡒ맞아. 언니. 아까 진짜 팀장 그 자식 장난 아니더라고. 그 년이 힘들다고 그러면서 눈웃음   살살 치니까 껄걸 웃더라고. 기가 막혀서. 힘도 없는 년이 뭐 할라고 이런 일을 하는 건지.   그렇게 약하면 아예 집 안에 가만히 있던가.ꡓ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 팔뚝을 들여다보았다.

ꡒ나도 왕년엔 전지현 저리가라였어. 얼마나 날씬했는데! 개미허리였지. 남편이랑 연애할 때   말이야. 그 인간이 내 허리 감싸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데.ꡓ

ꡒ뭐? 너가? 정말?ꡓ

ꡒ설마, 언니 결혼한 지 십 오 년이라며. 십 오 년 동안 몸무게가 곱절이나 불칸디?ꡓ

소주잔을 부딪치는 여자들 중 가장 몸집이 큰 여자가 말을 하자 다들 웃기 시작했다.

ꡒ이것들이! 결혼한 지 십 오 년 동안 내가 곱게만 있었겠냐? 애새끼를 둘이나 퍼질러 놨    지.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돈도 버는 둥 마는 둥 해서 마누라 일 시키지, 거 뭐냐. 시   댁이란 곳은 말이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뭐 며느리를 지들 봉으로 생각해요. 아주    그냥! 내가 정말 그 인간이랑 십 년 넘게 살면서 는 거라고는 이 살들이랑 욕밖에 없다.ꡓ

순대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하는 여자는 자신의 팔뚝을 높이 쳐들었다. 노란색 셔츠의 소매 사이로 여자의 늘어진 살과 다듬지 못한 겨드랑이 털이 보였다.

ꡒ내 니 맘 다 안다. 니만 고로콤 살았간디. 내도 마, 말 마라. 영천에서 이 십 년 가까이 살   다가 다 망해불꼬, 인천으로 와 가, 여적지 불알에 요롱소리 나게 산다 안카나.ꡓ

여자들은 소주잔에 영천언니의 말을 담가 들었다. 얼큰한 순대 국과 소주 몇 잔에 여자들 인생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는 것이 다 그러해도, 여자들 팔자야 다 똑같다 해도, 돈 없는 여자들 팔자란 길가에 널린 개똥만도 못한 것 아니었는가. 열심히 모아도 모자란  것이 돈인데, 하물며 돈 없고 못 배운 여자들이 어디 가서 대접받고 산다는 소리는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ꡒ그런데, 언니. 아까 마트에서 팀장새끼 정말 한 대 패주고 싶더라. 젊은 놈이 꼴에 사내라   고 어깨에 힘 주는 것 보니까, 정말 속이 뒤집혔어. 에휴. 우리가 말이야. 몇 년씩 마트에서   물건만 나르다보니까 이 놈이 우릴 우습게 보나 봐. 사내라면 정말 지긋지긋해.ꡓ

ꡒ대가빠리 소똥도 안비끼진 것들이 붙어설랑, 눈 꼴 시리다.ꡓ

영천여자의 심드렁한 대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평생 살아도 울다가 웃는 일이 전부라고 했다. 울 일이 생기면 웃는 일이 생기는 것이 인생사라고는 하지만 사는 일이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들 인생이었다. 가녀린 팔뚝 안에서 애들 키우고, 시집살이 하다보니 인생의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힘 하나 의지해서 자식들 키워냈음에도 여전히 모자라고 모자란 것이 사랑인지라 다들 마트로 몰려나왔다. 어떻게든 버는 사람 하나라도 더 늘어야 한다는 것이 여자들의 공통 된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노상 움직이는 덕분에 알이 벤 팔뚝을 주무르다가도 집에 있을 애들 생각에 뒤돌아 웃을 수 있는 여자들이었다.

ꡒ에휴, 벌써 12시다......ꡓ

여자들은 일제히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집에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지만 아무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살다가 하루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몸집이 큰 여자가 빈 소주병을 들고 팔뚝을 들어 올렸다.

ꡒ여기 하나 더.ꡓ

그녀의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에 놀란 듯 여자 종업원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느다란 팔뚝을 가진 종업원이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껄떡한 눈을 한 채 잔을 들었다. 힘깨나 써 보이지만 서글픈 팔뚝들이 서로 부딪쳐 왔다.

ꡒ아이고 돈도 기러분데...언제 한번 돈 안짜치게 살아보꼬ꡓ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04년 4월부터 1년 넘게 유통 비정규 노동자로 일했었다. 그 때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쓴 짧은 글들이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의 내 모습을 결정짓고, 앞으로의 나의 꿈을 결정짓게 만들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며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본다.

-----------------------------------------------------------------------------------------------------------------------------------------------

 

 

 

반풍수 여자들이 모인 곳.

    

                                                         


그녀야말로 우리 엄마다. 저기 저 쪽, 흉물스런 모양새로 굴러다니는 카트를 끌고 내게로 다가오는 저 아줌마, 딱 들어맞는 모양새에 제멋대로 생겨버린 주름까지. 게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움직이며 목 장갑 낀 손으로 재빠르게 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 친숙해서 저절로 얼굴을 찡그려지게 만들 곤 한다. 오늘도 역시 내가 입은 것과 같은 유니폼을 걸치고 목 장갑 낀 두 손을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다. 저 여자, 누구더라? 한 달에 한 번 염색을 하지 않으면 좁은 틈 비집고 올라와 무식하게 자라는 흰머리하며, 이 곳 저 곳 안 아픈 곳 없지만 어디 가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낼 배짱 없음하며, 집에 있을 애들 생각에 폐점 시간 전 떨이 행사에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주책하며, 꼭 반풍수(半風水)다.

이 곳, 시장은 시장이되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 할인점에는 내 엄마 같은 여자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 아줌마들이지만 죽었다 깨나도 사모님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하는 여편네들 천지이다. 그녀들은 40대를 넘긴 나이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도 남들과는 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된 이유인지 이 곳, 할인점에서는 먹혀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기 일쑤이다.

그러니까 바로 어제, 내 엄마를 닮은 저 아줌마의 일이었다.


폐점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얼른 이 곳을 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재빠르게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던 여자는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렸다. 십분만 늦어도 폐점 전의 떨이는 끝나고 마는데, 목  장갑 낀 손을 오늘따라 더욱 빠르게 놀리며 연신 동동거렸다. 바닥에 쌓여진 울트라 옥시크 린이 진열대로 옮겨지면서 그래, 오늘은 고등어조림이다, 라는 생각까지 여자의 머릿속은 오로지 가야겠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참으로 별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젊은 사내놈의 욕질을 안 듣게 생겼다. 이제 딱 이십분만 더 열심히 하자, 설마 그 사이에 뭔 일이 있을까 했지만 그녀는 고등어가 급했기에 개어 오르려는 다른 생각을 뭉개버리고 울트라 옥시크린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옥시크린을 들고 재빠르게 움직이는데 진열대 옆 골목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대 여섯 살의 사내아이가 카트 꼭지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그래, 왠지 찜찜하더라니. 그 생각도 잠시뿐 여자는 이럴 수 있나 싶은 실망감으로 부글거리는 속과는 반대로 아이의 얼굴을 들어 올려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 꼬마야, 괜찮니? 울지 말고, 자 아줌마가 미안.

뭐가 미안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입에 배인 습관성 말이 또 여지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를 어쩌나, 삼십분만 있으면 퇴근인데. 아니 󰡐30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빠르게 움직이면 10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침 평소에 일만 시키던 젊은 사내놈은 보이지 않고 사고자 하는 고등어는 이미 몇 개의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었기에 지체 없이 물건만 받아 나올 참이었다. 그런데 꼬마는 어느 곳에선가 달리고 있다가 하필이면 여자가 정리하고 있던 진열대에 다가와서 부딪쳐 울고 있는 것이다.

- 무슨 일입니까.

제기랄. 지금까지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젊은 사내가 아이의 울음소리에 맞춰 신용불량자 대하듯이 뱉어낸다. 게다가 머리에 선글라스를 꽂은 제 어미가 나타나 울고 있는 애 손을 잡으며 여자에게 길길이 날뛰고 있다. 

- 이보세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카트를 세워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애가 다쳤잖아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낙진처럼 무겁고 끈끈하게 매끄러운 할인점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여자는 솟구쳐 올라오는 화기를 참으며ꡐ참는 일이 뭐 별 일인가, 늘 하는 일인걸ꡑ새김질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박씨 아줌마. 죄송하다고 사과드리세요. 아이가 다쳤으니 당연히 사과 드려야지요.

- 과장님......저기......

- 사과, 드리세요.

젊은 사내는 날카로운 양복 깃을 매만지면 말했다. 누울 자리보고 발 뻗으라 했던가. 조금 전만 해도 별 탈이 없었고, 또 대개 이런 경우 진열대 바로 앞에 세워 놓은 카트를 보지 못한 아이의 어미나 미처 아이를 발견 못한 자신이나 똑같은 처지일 테다. 그저 서로서로 좋게 넘어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저 어미는 도통 그런 기미가 안보이니 내 펑퍼짐한 엉덩짝조차 반도 못 디밀게 생겼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미소까지 지으며 막내 동생뻘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에게ꡐ과장님ꡑ이라고 존칭해야 하는 것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여자 애한테 우습게 보일 거라는 생각에 여자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끝에서부터 열이 솟구쳐 부아를 내지르려는데 뭔가 여자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이 있었다. 어쭙잖은 자신의 배움으로 이리저리 가리는 여자의 풍수쟁이 기질이었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어찌 되었건 저 아이와 여자는 손님 아니던가. 나는 죽었다 깨나도 머리 위에 선글라스 꽂을 처지는 못 되지 않느냐. 게다가 여기서 짤리면 갈 곳도 없다. 머리속 재판관의 타박에 여자는 방귀를 끼기 위해 한 쪽 엉덩짝을 들었다가 푸쉬식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뱉고 팔랑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여자는 무슨 말이든지ꡐ손님, 감사합니다.ꡑ혹은ꡐ손님, 죄송합니다.ꡑ로 응수하는 그 어떠한 엿 같은 상황에도 임무에 충실한 젊은 사내놈이 밉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손님들의 항의에 시달렸으면 아예 대놓고 빚쟁이 인 듯 한 얼굴을 할까. 그래, 순순히 사과하자. 됫글을 가지고 말글로 써먹으려는 내가 우스운 것 아닌가. 마음 속의 재판관이 양심이라고 어디 양심 한번 비틀어보자 싶었다.

- 손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순순히 말하긴 했지만 여자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아이의 어미 마냥 선글라스를 갖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는데, 뒤돌아서ꡐ되먹지 못한 여편네 같으니ꡑ씹어대며 가버리는 젊은 사내놈 덕에 나무의 우듬지 끝에 매달려 있는 듯 했다. 그랬는데. 나도 내 새끼 손 잡고 매끈한 할인점 바닥에서 우아한 왈츠를 추고 싶었는데 결국 여자는 반(反)풍수였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지? 여자는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명(名)풍수여서 가만히 있어도 고관백작이 드나드는 우아한 자리이든지, 차라리 반(反)풍수라서 아니면 아닌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짤리면 고등어 한 마리가 날아가는 판국에 어줍잖은 풍수쟁이 기질에 말 그대로 묏자리 망치는 꼴이 되어 버릴 뻔 했던 것이다. 여자도 알고 있었다. 결국 따져 보면 집안 망친 것은 나 아니었던가. 나무의 우듬지 끝에 매달린 참새처럼 살고자 했는데 나무줄기를 꺾어 버린 아줌마가 되었으니. 떼 내도 자꾸만 들러붙는 거머리 같은 자신의 신세는 거무스름한 여자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기미로 내려앉았다.

언감생심,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꾼다는 것이, 젠장.


유난히 내 엄마 같은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이 곳. 울트라 옥시크린을 손에 들도 진열대만 바라보는 아줌마의 유니폼이 수의(囚衣)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사람이 거의 빠져나간 할인점이 뜨내기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여인숙처럼 느껴진 탓 일 테고,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뒤집어져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화투장 뒤집듯 세상을 점치려 드는 나의 눈이 저기 어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른 무언가를 향해 재수패를 떼었다. 눅눅하게 달라붙는 흑싸리 껍질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고 매화 다섯 끗을 집어 들었다.


어디, 끗발 한번 날려 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